뉴스
저는 오래전부터 음악을 공부하고,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오로지 음악에 관한 지식만을 가르쳐왔습니다. 지금은 평범한 주부이자 아이들의 엄마로 살고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과 함께 북한에 가게 됐습니다. 호기심으로 떠난 여행이었지만, 저는 처음으로 우리 민족의 비극적 운명과 민족애를 느꼈습니다. 동시에 통일에 대한 염원이 생기게 됐습니다. 2011년 10월 이후 지난 4월에 열흘 동안, 그리고 5월에는 3주 동안 나진·선봉을 비롯한 북한 전역을 여행했습니다. - 기자말
원산이 가까워질수록 자동차가 마차로 변하는 듯하다. '이랴, 이랴' 소리가 절로 나온다. 내 엉덩이가 적어도 30cm쯤 공중으로 마구 뛰어오른다. 포장도로지만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다. 설경이가 애처로운 눈빛으로 당황해 했다. 나는 "말 타고 신나게 달리는 기분이 이렇겠구나"라는 빈말로 넘겨 버렸다.
한 시간쯤 달렸을까. 원산시가 가까워지고 있는 듯했다.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엄마와 손잡고 걸어가는 아이의 모습이 마냥 천진스럽다. 엄마는 한 손으로 뭔가를 머리에 이고 한 손으로 아이의 손을 꼭 잡고 있다. 그리고 등에는 따스한 밥을 해줄 모양인지 나무를 한 짐 등에 지고 부지런히 걸어간다.
어린아이는 쫄랑쫄랑 뛰듯 마냥 신나서 쫓아간다. 엄마 걸음이 급해 보이는 걸 보니 집에서 기다리는 아가가 더 있는 모양이다. 나도 엄마니 그 엄마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한 할머니가 구부정한 허리로 열심히 걸어 간다. 머리에 손도 안 잡은 채 보따리를 이고, 양 손에는 두 개의 꾸러미를 들었다. 그리고 등에는 국방색 개나리 봇짐을 메고 열심히 걸어가고 있었다. 아마도 예쁜 손주들에게 주려고 뭔가 잔뜩 이고 가나 보다.
갑자기 돌아가신 나의 외할머니 생각에 눈물이 핑 돈다. 나의 외할아버지께서는 당시 포항에 지역구를 둔 여당의 3선 중진 국회의원이었지만, 나의 외할머니는 인사차 찾아오는 지역 공무원들이 집안 하인으로 착각할 정도로 기운 옷에 컴컴한 새벽부터 해질녘까지 열심히 일하시던 분이었다. 외할머니가 우리집에 올 때면, 항상 뭔가 버거워 보이는 짐보따리를 이고 왔다. 바로 저 할머니처럼.
북한의 휴대전화 사업, 이럴 줄 몰랐네
앞에서 남편과 리만룡 안내원의 목소리가 들린다. 둘 다 경제학을 전공한 사람들이라서 그런지 말이 잘 통하는 모양이다. 세상 경제를 논하고 있다. 게다가 마냥 심각하게 앞으로 남한, 북한 그리고 미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도 모색하고 있다. 우리의 운전기사 당원 아저씨는 그 열띤 토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안전 운행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내 옆에서는 설경이가 속삭이며 전화하고 있다. 남자친구와 전화하는 것이 분명하다. 얼굴에 띈 미소와 나긋나긋 한 목소리가 이를 증명한다. 핸드폰 성능이 좋은 모양이다. 저렇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데도 다 들리는걸 보니... 열띤 토론을 하던 리만룡 안내원도 알아 차렸는지 뒤를 돌아보며 설경이에게 말했다.
"목소리가 바뀐 것을 보니 남자 친구인 게지? 좋을 때다."
남편은 한술 더 뜬다. "내년에 결혼한 후에도 저 목소리로 전화 받을지 궁금해서 다시 와 봐야겠다"고 했다. 설경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남자친구와의 전화 통화에 휴대전화 속으로 들어갈 지경이다. 북한에서 목격하리라 상상하지 못한 광경이다.
북한에 와서 놀란 것 중 하나가 바로 휴대전화다. 북한에 오기 전에는 언론을 통해 평양에서도 휴대전화를 쓴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특수한 계층에 있는 극소수의 사람들만 가지고 있지 이렇게까지 일반화돼 있는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두 안내원은 물론 운전기사 모두 휴대전화를 갖고 있다. 2011년 10월 현재 가입자가 80만 명 정도인데, 연말께 100만 명을 넘을 것이라고 한다. 북한 인구가 2000만 명이 조금 넘으니 가구당 식구를 너댓으로 계산하면 대충 다섯 가구당 한 대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리만룡 안내원의 말로는 이집트의 오라스콤이란 회사가 휴대전화 사업을 맡아서 추진하고 있는데, 아주 빠른 속도로 가입자가 늘고 있단다. 그러자 남편이 곧바로 "이동통신 기술은 남한이 최고인데, 다른 나라 회사가 북한에 들어와 사업을 하고 있다니 안타깝다"고 말한다.
리만룡 안내원 또한 "네, 맞습네다. 북남이 서로 장단점을 보완해 협력하면 좋을 텐데..."라며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우리가 남한 출신이라서 그랬는지 두 대통령에 대해 깍듯한 예의를 갖춰 이야기한다.
남자친구와의 통화를 마친 설경이의 말에 따르면 2011년 여름 북한에 엄청난 홍수가 있었으며 특히 곡창지대인 황해도에 피해가 막심했다고 한다. 국제적십자 대표단이 실태조사를 하고 있는데 통역을 위해 남자친구가 대표단과 함께 황해도 사리원에 가 있다고 한다.
당시 서울에도 우면산이 무너져 인명피해가 나고 북한에도 홍수가 났는데, 북한이 국제지원을 많이 받기 위해 피해를 과장한다는 뉴스가 떠올랐다. 설경이의 얘기를 들으니 내가 미국에서 뉴스를 보고 생각했던 것 보다 피해가 훨씬 더 큰 것으로 느껴졌다.
문득 '남북이 이제는 서로를 헐뜯는 비방은 하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의 아픔을 다독이며 통일로 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북한 여행 이틀만에 하게 되다니... 소위 '꼴통 보수'라고 불리던 내 자신이 믿겨지지 않는다.
북한 아이들의 슬픈 인사 "헬로, 헬로"
원산 시내로 들어온 모양이다. 오는 길에 뜨문뜨문 지나쳤던 사람들이 이제는 많이 보인다. 내 눈에는 어디를 보나 같은 사람들처럼 보인다. 아마 비슷한 색상의 옷들과 비슷한 스타일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그런 것 같다.
원산시가 대도시 중 하나라고 하나 내 첫 인상은 어린시절 아버지를 따라가 본 충청도의 어느 조그마한 도시 같은 느낌이었다.
한 광장을 지나니 이곳에서도 초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학생들이 보인다. 앞으로 다가올 노동당 창당 기념일에 할 매스게임 연습에 한창이다. 제법 쌀쌀한 날씨인데 얇은 스타킹들을 입고 추운 줄 모르고 열심히 연습한다. 얼굴에는 장난꾸러기 아이들의 모습이 역력히 보인다. 조를 짜서 교대로 연습하는 것 같다. 쉬고 있는 아이들은 마치 소풍을 나온 것마냥 보따리를 열어놓고 친구들과 모여 도시락을 먹으면서 신나게 재잘거린다. 아침에 도시락을 싸며 아이가 맛있게 먹을 생각에 기뻐했을 엄마의 미소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우리가 탄 자동차가 지나가니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손을 흔든다. 우리가 외국에서 온 손님임을 알고 반겨주는 듯했다. 우리의 얼굴은 분명히 자기네들 부모와 같은 생김새일 텐데 연신 "헬로, 헬로"라는 소리가 차창 너머로 들려온다. 깜짝 놀랐다. 어린 초등학교 학생들이 영어를 하다니...
설경이 얘기로는 북한에서도 초등학교 3학년부터 영어를 배운다고 한다. 믿겨지지 않았다. '철천지 원쑤 미제국주의자 놈들'의 말을 초등학교 때부터 배우다니.
스쳐 지나가는 우리 모습에서 그 어린아이들은 이질감을 느끼나 보다. 하기야 60년 세월 동안 멀디 먼 거리서 살던 사람들이 왔으니 우리를 낯설게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선조들을 모시고 있으며, 같은 역사를 공유한 우리인데 왜 이렇게 서로 멀어져만 간 것일까.
"헬로"라는 소리에 비탄의 눈물이 찔끔한다. 아마 우리가 타고 있는 차에 쓰여진 'Korea International Travel Company'(조선국제려행사)라는 영어를 보고 그랬겠지...
인민군을 보다 문득 아들 생각이 나다
차는 달리고 달려 조선국제려행사에서 직접 운영한다는 해산물 식당에 도착했다. 그곳의 식당 책임자로 보이는 한 아저씨가 "기다리고 있었다"며 반갑게 맞아줬다.
식당 안에는 유럽관광객 한 팀이 식사를 하고 있었으며, 우리를 위한 오찬이 차려져 있었다. 남편이 시원한 맥주를 곁들여 감자전을 한 점 입에 넣더니 탄성을 지른다. 어릴 적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의 어머니께서 만들어준 감자전과 맛이 똑같다며 말이다.
남편은 "그 친구의 부모님들은 함경도가 고향인데 한국전쟁 때 남쪽으로 피난 온 분들"이라고 설명했다. 그러자 리만룡 안내원은 "지금은 행정구역상 강원도로 바뀌었지만, 여기가 예전의 함경남도"라고 답했다. 남편은 감자전만 세 접시를 비우고 나머지 음식은 제대로 손도 대지 못했다.
조개구이, 그리고 북한에서는 별미 중 하나라는 음식이 나왔다. '팔팔하게 살아서 아가미를 움직이는 가물치회'가 바로 그것. 나는 낚시광인 남편이 수시로 샌디에이고 앞바다에서, 때로는 멕시코 청정해역에서 잡은 활어회에 입맛이 망가져 있던 터라 먹는 시늉만 하며 인사치레를 했다. 그러나, 된장을 풀고 고춧가루를 넣어 끓인 가물치 매운탕은 정말 일품이었다.
다시 자동차에 오르기 전, 소화도 시킬 겸 식당 바로 앞에 있는 부둣가를 거닐기로 했다. 한가로이 낚시들을 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한 아빠가 아들에게 낚시 미끼를 끼워주면서 낚시하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아이는 집중해서 아빠가 하라는 대로 열심히 따라한다. 흐뭇하고 보기좋은 장면이다.
내가 평소에 생각하던 북한사람들의 모습이 아니었다. 무엇이 이토록 당연한 부자의 모습을 보며 당황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을까. 내 머릿속은 마치 판단 오류 바이러스의 감염으로 정신이 혼미해져가고 있는 느낌이다.
자동차는 또 다시 남쪽을 향해 묵묵히 달린다. 몇천 번은 노래로 불렀을 <그리운 금강산>을 향해서 말이다. 차창 밖으로 내다보이는 동해 바다는 마치 그림으로 그려놓은 것처럼 아무 말이 없다. 너무 조용하고 잔잔해 숨도 크게 쉴 수 없을 정도. 모래사장은 붓으로 물감을 칠해 놓은 것처럼 깨끗하고 가지런하다. 모든 풍경이 그림 같다.
저 아름다운 그림에 심술 궂은 아이가 서투른 솜씨로 장난친 듯 바닷가 도로를 따라 쭉 쳐 놓은 철조망이 그림을 망쳐 놓았다. 원망스럽다. 그림처럼 평온한 풍경에 저 철조망이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착잡한 심경에 마음이 터질 것 같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운전기사 아저씨는 잠시 쉬어간다고 한다.
바닷가로 들어갈 수 있게 철조망이 쳐 있지 않은 곳도 있었다. 아름다운 그림속으로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그림이 이내 살아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파도소리, 모래 밟는 소리, 사람들의 탄성 소리, 바닷새 지나가며 우는 소리... 모든 소리가 생동감 있다. 정말 아름답다. 내가 살아 숨 쉬고 있음에 감사했다. 철조망 너머 가까이 들어와 보니 이렇게 좋은 것을... 터질 것 같았던 마음이 조금은 후련해졌다. 그러나 여전히 내 마음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이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자동차는 슬프디 아름다운 동해를 끼고 금강산으로 다시 향한다. '통천'이라는 이정표가 보이자 리만룡 안내원이 "이곳이 고인이 된 현대 정주영 회장의 고향"이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고인께서 생전에 금강산에 관심을 두셨구나, 산수가 수려한 곳에서 태어나셨네'라고 생각했다.
어느새 어둑어둑한 시간이 됐고, 군인 아저씨가 지키는 검문소가 나왔다. 금강산에 거의 다 온 것 같았다. 검문소의 군인 아저씨는 텔레비전에서 보던 로봇 같은 살벌한 얼굴이 아니었다. 늘 봐왔던 숫기 없는 얼굴, 바로 우리 아들의 모습이었다. 늠름한 척, 씩씩한 척하지만, 내 눈에는 그저 대학교 근처 아파트로, 기숙사로 나가 있는 보고픈 내 아들들의 모습이었다. 이내 나의 마음은 저 아들의 부모가 됐다. 얼마나 보고 싶고 걱정이 될까. 가슴이 찡해온다.
"남조선 관광객들이 붐비던 시절이 꿈만 같습니다"
아린 가슴을 움켜안고 쓸쓸한 어둠 속을 10분 정도 달렸을까. 호텔 불빛이 보인다. 마음에도 조금씩 빛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몇 년 전 서울에 사는 엄마가 이모들과 함께 금강산 구경 가신다고 했을 때도 내겐 그저 노래 속에서만 존재하는 금강산일 뿐이었다. 노랫말이 현실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서서히 피부로 느끼고 있다.
호텔에 도착하니 말끔하게 정복을 차려입은 훤칠한 아저씨가 자동차 문을 열어주며 반갑게 맞는다. 그런데 말씨가 내가 기억하는 강원도 억양과 비슷하다. 아! 그렇구나. 남한이 지척이구나. 순간 설악산의 한 호텔로 착각할 지경이었다. 내 젊은 시절 친구들과 단풍구경 가자며, 가을바다 보자며 몇날 며칠 계획짜고 부모님께 허락을 받기 위해 단체로 의기 투합해 집집을 찾아 다니던 그 때 생각이 난다. 그 추억의 장소가 이곳에서 약 1시간 정도만 더 가면 된다니.
호텔은 나무랄 데 없이 깨끗히 정돈돼 있었다. 이 호텔이 현대 아산에서 리모델링한 호텔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서울의 어느 호텔에 온 것처럼 친근하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샹들리에, 멋진 꽃장식들, 그리고 남한 스타일의 안내문들... 마치 순간 이동이라도 한 듯했다.
말쑥하게 꾸며져 있는 호텔 안은 너무 한산해 화려한 불빛이 쓸쓸해 보인다. 체크인을 하려고 기다리는 사이 몇십 명의 중국 관광객들이 들어왔다. 호텔이 생기를 띠는가 싶더니 이곳저곳에서 사진만 찍고 우르르 나가 버렸다. 잠은 다른 곳에서 자는가 보다. 다시 호텔은 침묵 속에 빠졌다.
우리의 짐을 들어줬던 아저씨가 말했다.
"원래는 남조선 관광객들을 위한 호텔이었는데, 관광이 두절돼 쓸쓸하게 텅 비어 있다가 바로 얼마 전부터 약간의 외국 관광객들을 투숙시키고 있습니다. 예전 남조선 관광객들이 붐비던 그 시절이 꿈만 같습니다. 너무나 그립습니다."
진심 어린 눈빛 속에서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하는 간절한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호텔 방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속에서 나는 흥분과 감회 속에 들떠 있었을 많은 사람들의 체취를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우리 두 부부를 싣고 올라가는, 정성들여 치장한 이 엘리베이터는 마치 관객 없는 무대 위의 무희처럼 느껴져 측은한 마음이 든다.
방 안은 세련되면서도 말끔하다. 텔레비전도, 냉장고도, 욕실의 액세서리들도... 모두 친숙한 남한 제품들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말할 수 없는 슬픔으로 어우러진다. 언제쯤이면 이 쓸쓸한 어우러짐이 완벽한 조화를 이뤄 한반도 전역에 메아리칠 수 있을까. 마음속 어렴풋한 소망이 절실함으로 내 심장 속에 파고든다.
![]() | |
▲ 논 그리고 길가의 핀 코스모스. 논 끝에 희미하게 동해가 보인다. | |
ⓒ 신은미 |
원산이 가까워질수록 자동차가 마차로 변하는 듯하다. '이랴, 이랴' 소리가 절로 나온다. 내 엉덩이가 적어도 30cm쯤 공중으로 마구 뛰어오른다. 포장도로지만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다. 설경이가 애처로운 눈빛으로 당황해 했다. 나는 "말 타고 신나게 달리는 기분이 이렇겠구나"라는 빈말로 넘겨 버렸다.
한 시간쯤 달렸을까. 원산시가 가까워지고 있는 듯했다.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엄마와 손잡고 걸어가는 아이의 모습이 마냥 천진스럽다. 엄마는 한 손으로 뭔가를 머리에 이고 한 손으로 아이의 손을 꼭 잡고 있다. 그리고 등에는 따스한 밥을 해줄 모양인지 나무를 한 짐 등에 지고 부지런히 걸어간다.
어린아이는 쫄랑쫄랑 뛰듯 마냥 신나서 쫓아간다. 엄마 걸음이 급해 보이는 걸 보니 집에서 기다리는 아가가 더 있는 모양이다. 나도 엄마니 그 엄마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한 할머니가 구부정한 허리로 열심히 걸어 간다. 머리에 손도 안 잡은 채 보따리를 이고, 양 손에는 두 개의 꾸러미를 들었다. 그리고 등에는 국방색 개나리 봇짐을 메고 열심히 걸어가고 있었다. 아마도 예쁜 손주들에게 주려고 뭔가 잔뜩 이고 가나 보다.
갑자기 돌아가신 나의 외할머니 생각에 눈물이 핑 돈다. 나의 외할아버지께서는 당시 포항에 지역구를 둔 여당의 3선 중진 국회의원이었지만, 나의 외할머니는 인사차 찾아오는 지역 공무원들이 집안 하인으로 착각할 정도로 기운 옷에 컴컴한 새벽부터 해질녘까지 열심히 일하시던 분이었다. 외할머니가 우리집에 올 때면, 항상 뭔가 버거워 보이는 짐보따리를 이고 왔다. 바로 저 할머니처럼.
북한의 휴대전화 사업, 이럴 줄 몰랐네
![]() | |
▲ 전화통화를 하며 걸어가는 여성 | |
ⓒ 신은미 |
앞에서 남편과 리만룡 안내원의 목소리가 들린다. 둘 다 경제학을 전공한 사람들이라서 그런지 말이 잘 통하는 모양이다. 세상 경제를 논하고 있다. 게다가 마냥 심각하게 앞으로 남한, 북한 그리고 미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도 모색하고 있다. 우리의 운전기사 당원 아저씨는 그 열띤 토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안전 운행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내 옆에서는 설경이가 속삭이며 전화하고 있다. 남자친구와 전화하는 것이 분명하다. 얼굴에 띈 미소와 나긋나긋 한 목소리가 이를 증명한다. 핸드폰 성능이 좋은 모양이다. 저렇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데도 다 들리는걸 보니... 열띤 토론을 하던 리만룡 안내원도 알아 차렸는지 뒤를 돌아보며 설경이에게 말했다.
"목소리가 바뀐 것을 보니 남자 친구인 게지? 좋을 때다."
남편은 한술 더 뜬다. "내년에 결혼한 후에도 저 목소리로 전화 받을지 궁금해서 다시 와 봐야겠다"고 했다. 설경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남자친구와의 전화 통화에 휴대전화 속으로 들어갈 지경이다. 북한에서 목격하리라 상상하지 못한 광경이다.
북한에 와서 놀란 것 중 하나가 바로 휴대전화다. 북한에 오기 전에는 언론을 통해 평양에서도 휴대전화를 쓴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특수한 계층에 있는 극소수의 사람들만 가지고 있지 이렇게까지 일반화돼 있는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두 안내원은 물론 운전기사 모두 휴대전화를 갖고 있다. 2011년 10월 현재 가입자가 80만 명 정도인데, 연말께 100만 명을 넘을 것이라고 한다. 북한 인구가 2000만 명이 조금 넘으니 가구당 식구를 너댓으로 계산하면 대충 다섯 가구당 한 대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리만룡 안내원의 말로는 이집트의 오라스콤이란 회사가 휴대전화 사업을 맡아서 추진하고 있는데, 아주 빠른 속도로 가입자가 늘고 있단다. 그러자 남편이 곧바로 "이동통신 기술은 남한이 최고인데, 다른 나라 회사가 북한에 들어와 사업을 하고 있다니 안타깝다"고 말한다.
리만룡 안내원 또한 "네, 맞습네다. 북남이 서로 장단점을 보완해 협력하면 좋을 텐데..."라며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우리가 남한 출신이라서 그랬는지 두 대통령에 대해 깍듯한 예의를 갖춰 이야기한다.
남자친구와의 통화를 마친 설경이의 말에 따르면 2011년 여름 북한에 엄청난 홍수가 있었으며 특히 곡창지대인 황해도에 피해가 막심했다고 한다. 국제적십자 대표단이 실태조사를 하고 있는데 통역을 위해 남자친구가 대표단과 함께 황해도 사리원에 가 있다고 한다.
당시 서울에도 우면산이 무너져 인명피해가 나고 북한에도 홍수가 났는데, 북한이 국제지원을 많이 받기 위해 피해를 과장한다는 뉴스가 떠올랐다. 설경이의 얘기를 들으니 내가 미국에서 뉴스를 보고 생각했던 것 보다 피해가 훨씬 더 큰 것으로 느껴졌다.
문득 '남북이 이제는 서로를 헐뜯는 비방은 하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의 아픔을 다독이며 통일로 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북한 여행 이틀만에 하게 되다니... 소위 '꼴통 보수'라고 불리던 내 자신이 믿겨지지 않는다.
북한 아이들의 슬픈 인사 "헬로, 헬로"
![]() | |
▲ 지나가는 우리 차를 보며 손을 흔드는 원산의 초등학생들 | |
ⓒ 신은미 |
원산 시내로 들어온 모양이다. 오는 길에 뜨문뜨문 지나쳤던 사람들이 이제는 많이 보인다. 내 눈에는 어디를 보나 같은 사람들처럼 보인다. 아마 비슷한 색상의 옷들과 비슷한 스타일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그런 것 같다.
원산시가 대도시 중 하나라고 하나 내 첫 인상은 어린시절 아버지를 따라가 본 충청도의 어느 조그마한 도시 같은 느낌이었다.
한 광장을 지나니 이곳에서도 초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학생들이 보인다. 앞으로 다가올 노동당 창당 기념일에 할 매스게임 연습에 한창이다. 제법 쌀쌀한 날씨인데 얇은 스타킹들을 입고 추운 줄 모르고 열심히 연습한다. 얼굴에는 장난꾸러기 아이들의 모습이 역력히 보인다. 조를 짜서 교대로 연습하는 것 같다. 쉬고 있는 아이들은 마치 소풍을 나온 것마냥 보따리를 열어놓고 친구들과 모여 도시락을 먹으면서 신나게 재잘거린다. 아침에 도시락을 싸며 아이가 맛있게 먹을 생각에 기뻐했을 엄마의 미소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우리가 탄 자동차가 지나가니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손을 흔든다. 우리가 외국에서 온 손님임을 알고 반겨주는 듯했다. 우리의 얼굴은 분명히 자기네들 부모와 같은 생김새일 텐데 연신 "헬로, 헬로"라는 소리가 차창 너머로 들려온다. 깜짝 놀랐다. 어린 초등학교 학생들이 영어를 하다니...
설경이 얘기로는 북한에서도 초등학교 3학년부터 영어를 배운다고 한다. 믿겨지지 않았다. '철천지 원쑤 미제국주의자 놈들'의 말을 초등학교 때부터 배우다니.
스쳐 지나가는 우리 모습에서 그 어린아이들은 이질감을 느끼나 보다. 하기야 60년 세월 동안 멀디 먼 거리서 살던 사람들이 왔으니 우리를 낯설게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선조들을 모시고 있으며, 같은 역사를 공유한 우리인데 왜 이렇게 서로 멀어져만 간 것일까.
"헬로"라는 소리에 비탄의 눈물이 찔끔한다. 아마 우리가 타고 있는 차에 쓰여진 'Korea International Travel Company'(조선국제려행사)라는 영어를 보고 그랬겠지...
인민군을 보다 문득 아들 생각이 나다
![]() | |
▲ 원산의 해산물 식당 | |
ⓒ 신은미 |
차는 달리고 달려 조선국제려행사에서 직접 운영한다는 해산물 식당에 도착했다. 그곳의 식당 책임자로 보이는 한 아저씨가 "기다리고 있었다"며 반갑게 맞아줬다.
식당 안에는 유럽관광객 한 팀이 식사를 하고 있었으며, 우리를 위한 오찬이 차려져 있었다. 남편이 시원한 맥주를 곁들여 감자전을 한 점 입에 넣더니 탄성을 지른다. 어릴 적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의 어머니께서 만들어준 감자전과 맛이 똑같다며 말이다.
남편은 "그 친구의 부모님들은 함경도가 고향인데 한국전쟁 때 남쪽으로 피난 온 분들"이라고 설명했다. 그러자 리만룡 안내원은 "지금은 행정구역상 강원도로 바뀌었지만, 여기가 예전의 함경남도"라고 답했다. 남편은 감자전만 세 접시를 비우고 나머지 음식은 제대로 손도 대지 못했다.
조개구이, 그리고 북한에서는 별미 중 하나라는 음식이 나왔다. '팔팔하게 살아서 아가미를 움직이는 가물치회'가 바로 그것. 나는 낚시광인 남편이 수시로 샌디에이고 앞바다에서, 때로는 멕시코 청정해역에서 잡은 활어회에 입맛이 망가져 있던 터라 먹는 시늉만 하며 인사치레를 했다. 그러나, 된장을 풀고 고춧가루를 넣어 끓인 가물치 매운탕은 정말 일품이었다.
![]() | |
▲ 낚시를 하고 있는 원산 사람들 | |
ⓒ 신은미 |
다시 자동차에 오르기 전, 소화도 시킬 겸 식당 바로 앞에 있는 부둣가를 거닐기로 했다. 한가로이 낚시들을 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한 아빠가 아들에게 낚시 미끼를 끼워주면서 낚시하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아이는 집중해서 아빠가 하라는 대로 열심히 따라한다. 흐뭇하고 보기좋은 장면이다.
내가 평소에 생각하던 북한사람들의 모습이 아니었다. 무엇이 이토록 당연한 부자의 모습을 보며 당황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을까. 내 머릿속은 마치 판단 오류 바이러스의 감염으로 정신이 혼미해져가고 있는 느낌이다.
자동차는 또 다시 남쪽을 향해 묵묵히 달린다. 몇천 번은 노래로 불렀을 <그리운 금강산>을 향해서 말이다. 차창 밖으로 내다보이는 동해 바다는 마치 그림으로 그려놓은 것처럼 아무 말이 없다. 너무 조용하고 잔잔해 숨도 크게 쉴 수 없을 정도. 모래사장은 붓으로 물감을 칠해 놓은 것처럼 깨끗하고 가지런하다. 모든 풍경이 그림 같다.
저 아름다운 그림에 심술 궂은 아이가 서투른 솜씨로 장난친 듯 바닷가 도로를 따라 쭉 쳐 놓은 철조망이 그림을 망쳐 놓았다. 원망스럽다. 그림처럼 평온한 풍경에 저 철조망이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착잡한 심경에 마음이 터질 것 같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운전기사 아저씨는 잠시 쉬어간다고 한다.
![]() | |
▲ 그림 같은 동해안 | |
ⓒ 신은미 |
바닷가로 들어갈 수 있게 철조망이 쳐 있지 않은 곳도 있었다. 아름다운 그림속으로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그림이 이내 살아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파도소리, 모래 밟는 소리, 사람들의 탄성 소리, 바닷새 지나가며 우는 소리... 모든 소리가 생동감 있다. 정말 아름답다. 내가 살아 숨 쉬고 있음에 감사했다. 철조망 너머 가까이 들어와 보니 이렇게 좋은 것을... 터질 것 같았던 마음이 조금은 후련해졌다. 그러나 여전히 내 마음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이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자동차는 슬프디 아름다운 동해를 끼고 금강산으로 다시 향한다. '통천'이라는 이정표가 보이자 리만룡 안내원이 "이곳이 고인이 된 현대 정주영 회장의 고향"이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고인께서 생전에 금강산에 관심을 두셨구나, 산수가 수려한 곳에서 태어나셨네'라고 생각했다.
어느새 어둑어둑한 시간이 됐고, 군인 아저씨가 지키는 검문소가 나왔다. 금강산에 거의 다 온 것 같았다. 검문소의 군인 아저씨는 텔레비전에서 보던 로봇 같은 살벌한 얼굴이 아니었다. 늘 봐왔던 숫기 없는 얼굴, 바로 우리 아들의 모습이었다. 늠름한 척, 씩씩한 척하지만, 내 눈에는 그저 대학교 근처 아파트로, 기숙사로 나가 있는 보고픈 내 아들들의 모습이었다. 이내 나의 마음은 저 아들의 부모가 됐다. 얼마나 보고 싶고 걱정이 될까. 가슴이 찡해온다.
"남조선 관광객들이 붐비던 시절이 꿈만 같습니다"
![]() | |
▲ 다시 문을 연 금강산 호텔 | |
ⓒ 신은미 |
아린 가슴을 움켜안고 쓸쓸한 어둠 속을 10분 정도 달렸을까. 호텔 불빛이 보인다. 마음에도 조금씩 빛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몇 년 전 서울에 사는 엄마가 이모들과 함께 금강산 구경 가신다고 했을 때도 내겐 그저 노래 속에서만 존재하는 금강산일 뿐이었다. 노랫말이 현실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서서히 피부로 느끼고 있다.
호텔에 도착하니 말끔하게 정복을 차려입은 훤칠한 아저씨가 자동차 문을 열어주며 반갑게 맞는다. 그런데 말씨가 내가 기억하는 강원도 억양과 비슷하다. 아! 그렇구나. 남한이 지척이구나. 순간 설악산의 한 호텔로 착각할 지경이었다. 내 젊은 시절 친구들과 단풍구경 가자며, 가을바다 보자며 몇날 며칠 계획짜고 부모님께 허락을 받기 위해 단체로 의기 투합해 집집을 찾아 다니던 그 때 생각이 난다. 그 추억의 장소가 이곳에서 약 1시간 정도만 더 가면 된다니.
호텔은 나무랄 데 없이 깨끗히 정돈돼 있었다. 이 호텔이 현대 아산에서 리모델링한 호텔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서울의 어느 호텔에 온 것처럼 친근하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샹들리에, 멋진 꽃장식들, 그리고 남한 스타일의 안내문들... 마치 순간 이동이라도 한 듯했다.
말쑥하게 꾸며져 있는 호텔 안은 너무 한산해 화려한 불빛이 쓸쓸해 보인다. 체크인을 하려고 기다리는 사이 몇십 명의 중국 관광객들이 들어왔다. 호텔이 생기를 띠는가 싶더니 이곳저곳에서 사진만 찍고 우르르 나가 버렸다. 잠은 다른 곳에서 자는가 보다. 다시 호텔은 침묵 속에 빠졌다.
우리의 짐을 들어줬던 아저씨가 말했다.
"원래는 남조선 관광객들을 위한 호텔이었는데, 관광이 두절돼 쓸쓸하게 텅 비어 있다가 바로 얼마 전부터 약간의 외국 관광객들을 투숙시키고 있습니다. 예전 남조선 관광객들이 붐비던 그 시절이 꿈만 같습니다. 너무나 그립습니다."
진심 어린 눈빛 속에서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하는 간절한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호텔 방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속에서 나는 흥분과 감회 속에 들떠 있었을 많은 사람들의 체취를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우리 두 부부를 싣고 올라가는, 정성들여 치장한 이 엘리베이터는 마치 관객 없는 무대 위의 무희처럼 느껴져 측은한 마음이 든다.
방 안은 세련되면서도 말끔하다. 텔레비전도, 냉장고도, 욕실의 액세서리들도... 모두 친숙한 남한 제품들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말할 수 없는 슬픔으로 어우러진다. 언제쯤이면 이 쓸쓸한 어우러짐이 완벽한 조화를 이뤄 한반도 전역에 메아리칠 수 있을까. 마음속 어렴풋한 소망이 절실함으로 내 심장 속에 파고든다.
헉! 큰일났다, 남편이 '탈북자' 얘길 꺼냈다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⑤] 금강산 아가씨들 "사진 찍읍시다"
12.06.25 20:53
최종 업데이트 12.06.29 18:33저는 오래전부터 음악을 공부하고,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오로지 음악에 관한 지식만을 가르쳐왔습니다. 지금은 평범한 주부이자 아이들의 엄마로 살고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과 함께 북한에 가게 됐습니다. 호기심으로 떠난 여행이었지만, 저는 처음으로 우리 민족의 비극적 운명과 민족애를 느꼈습니다. 동시에 통일에 대한 염원이 생기게 됐습니다. 2011년 10월 이후 지난 4월에 열흘 동안, 그리고 5월에는 3주 동안 나진·선봉을 비롯한 북한 전역을 여행했습니다. - 기자말
아침은 내 마음의 어두운 커튼을 활짝 걷어줬다. 발코니 문을 여니 코를 톡 쏘는 신선한 내음이 마음속을 훤히 밝혀 준다. 오늘은 드디어 노래로만 만났던 금강산에 가는 날이다.
남편과 나는 들뜬 마음으로 서둘러 준비를 하고 아침식사를 하러 갔다. 식당은 큰 연회를 치르고도 남을 정도로 시원하고 널찍하게 잘 꾸며져 있었다. 그 큰 식당 안에는 우리 부부와 유럽 관광팀 몇 명만이 있었다. 우리 몇 사람끼리만 식사하기에 어색할 정도로 식당은 크고 화려하다. 단정한 용모의 종업원들이 환한 미소로 우리를 반기며 음식을 가져다준다.
호텔 로비로 내려오니 만룡 안내원과 설경이가 산뜻한 옷차림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잠만 따로 자고 만났을 뿐인데 이산가족을 만난 것처럼 반갑고 기쁘다. 바깥에서는 늘 그랬듯이 리인덕 운전사 당원 아저씨가 자동차를 닦고 있다. 말도 별로 없이 수줍은 표정으로 우리를 반겨 준다. 웃는 얼굴에는 건실함과 진실됨이 묻어난다.
산보다 아름다운 금강산 소녀
금강산 가는 길에 우리에게 안내를 맡아줄 해설원을 데리러 갔다. 빨간 점퍼를 입은 앳된 소녀가 기다리고 있었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막내 딸아이 정도로 보였는데, 스무 살이 넘었단다. 볼이 발그스름하며 눈이 초롱초롱했다. 마치 동화책에 나오는 착한 주인공을 연상케 하는 예쁜 소녀의 이름은 전은심이었다.
수줍음을 많이 타서 설명을 잘 못할 줄 알았는데, 자동차에 타자마자 차분한 목소리로 금강산에 대해 줄줄 설명을 시작한다. 아름다운 금강산에 대한 자부심이 조용하지만 또박또박 느껴졌다. 금강산의 아름다운 모습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동그란 두 눈을 힘줘 뜨고 설명을 듣는 내내 소녀의 자부심이 전해진다.
내 입가에 왠지 모를 흐뭇한 미소가 피어난다. 금강산의 모습보다도 내게는 이 소녀의 모습이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금강산의 수려한 절경 속에 빠져 이 순간만은 어떠한 원망도 미움도 슬픔도 아쉬움도 아무 생각도 나질 않는다. 그저 자연의 초연함과 아름다움에 겸손해질 뿐이다.
북한에서 <타이타닉>을 봤다고?
마음은 훨훨 날아오르고 싶으나 나이가 잘 따라주지 않는가 보다. 금강산에 들어가는데, 힘들어하는 기색이 우리 두 부부 얼굴에서 나타난 모양이다. 설경이는 팔짱을 끼며 부축해주고, 금강산 해설원 소녀는 남편을 부축한다. 오랜만에 팔짱을 껴 본다. 다정함이 느껴진다.
설경이와 나는 금강산을 내려오는 내내 팔짱을 낀 채로 많은 얘기를 나눴다. 남자친구와의 결혼 준비 이야기, 그리고 우리 아이들 이야기와 설경이네 부모님 이야기... 그중에서도 영어가 전공이었던 설경이가 대학수업 시간에 본 영화 <타이타닉> 이야기는 우리 둘 모두를 영화 속에 다시 한 번 흠뻑 빠져들게 했다. 덕분에 힘들 새 없이 하산했다.
산을 거의 다 내려왔을 무렵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니, 가만 있어봐... 여기가 북한인데, 이 아이가 <타이타닉>을 봤다고?' 내가 깜짝 놀라 "그 영화를 어디서 봤다고? 수업시간에 봤다고?"라고 묻자 설경이가 답했다.
"네. 영어시간에 그 영화를 교재로 썼습네다. 그런 영화는 극장에서 상영하지 않습네다."
그렇다. 설경이와 사람 사는 이야기를 하며 하산하는 동안 나는 여기가 북한이라는 것과 설경이가 북한사람이라는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설경이와 <타이타닉> 영화 얘기를 하면서도 산을 거의 다 내려와서야 '이 아이가 어떻게 그 영화를 볼 수 있었단 말인가'라고 의아해하며 제정신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금강산의 아름다움보다, 지금 내 눈은 남편을 부축하며 함께 걸어가던 현지 해설원의 모습, 그리고 내 머릿속은 방금 설경이와의 나눴던 정담으로만 가득 차 있었다.
남쪽의 산들과 마찬가지로 산 밑에는 시원한 음료수들과 고소한 지짐이가 갈증과 허기진 배를 채우고 가라고 유혹한다. 우리는 점심식사를 '목란관'이라는 식당에서 할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 고소한 냄새를 그냥 지나치기에는 아쉬움이 남을 것 같았다. 그래서 전식이라고 위로하면서 먹고 가도 되겠다는 정당성을 마련했다. 산행 후 맛본 대동강 맥주와 녹두 지짐이는 잊을 수 없는 맛이었다.
순식간에 달려든 아가씨들... "사진 찍읍시다"
아쉬운 배를 움켜쥐고, 목란관에 닿으니 오색 금강산 나물들이 한 상 차려져 있다. 이곳에서 먹은 산도라지와 고사리, 그리고 녹두묵은 두고두고 잊을 수 없을 것만 같다. 특히 산도라지의 향 내음은 금강산을 온통 품은 맛으로 기억될 것이다.
금강산의 내음에 취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내려오려고 할 때, 어디선가 유니폼을 차려입은 발랄한 아가씨 세 명이 문을 박차고 뛰어나왔다. '목란관 기념품 상점'이라고 쓰인 작은 건물에서 말이다. 그들은 다름 아닌 기념품 가게 아가씨들이었다.
그들은 너무 반가워하면서 같이 사진을 찍자고 자신들의 카메라를 들이민다. 순간 '이들이 무슨 일로 우리에게 이러는 걸까?'라며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북한사람들이 우리에게 먼저 다가와 사진 찍자고 할 것이라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순간 당황해 내 마음의 방패막이로 반사시켜 버린 그들의 마음을 다시 살펴봤다. 다시 보니 반가움과 기쁜 마음으로 사진을 찍고자 하는 게 보였다. 우리가 금강산의 호텔에 처음 도착했을 때 차문을 열어주던 아저씨가 떠올랐다. 남한의 관광객들을 진심으로 그리워 하던 그 아저씨 말이다.
사진을 찍자마자 세 사람이 카메라에 고개를 들이대며 잘 나왔는지 들여다본다. 마치 오랫동안 기다리던 사람을 만난 것처럼... 활짝 열린 가슴으로 나 또한 기쁘게 사진을 찍었다. 한 아가씨가 잠시 숨겨놨던 내 '당혹감'을 눈치챘는지 "남조선에서 오셨나요?"라고 말을 붙인다. 설경이가 "미국에서 오신 동포이십네다"라고 답하니 그 아가씨가 말을 잇는다.
'너희는 절대 서로 총을 겨누지 말거라'
"그렇습니까. 반갑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요즘은 남조선 관광객들이 전혀 오지를 않습니다. 오랜만에 우리 동포들을 보니 너무 반가워서... 전에는 남조선 동포들이 수도 없이 왔는데, 그때는 곧 통일될 줄 알았어요. 얼마나 흥분했는지..."
북한의 주민들이 정말로 '민족 통일'을 갈망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솔직히 나는 북한에 오기 전까지 통일이라는 것에 관심은커녕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그들의 말투며 행동거지가 우리 남한의 발랄한 젊은 딸들을 보는 것 같아서 한층 더 친근한 마음이 든다. 여러 장의 사진을 이런저런 포즈를 취하며 찍는 게 그저 젊은 우리 아이들 같다. 아가씨들은 "같이 사진을 찍어줘서 고맙다"고 연신 인사를 한다. "우리도 너무 좋았다"며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는 내 등이 슬펐다. 뒤돌아보니 계속해서 세 아가씨가 "또 오십시오"라며 손을 흔든다. "그러겠노라"는 지킬 수 없는 말로 답을 대신했다. 하염없이 손만 흔들었다. 그러고 보니 기념품 가게에는 들어가 보지도 못했다.
자동차로 돌아오는 길에 소풍을 즐기는 여러 명의 가족들을 발견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아빠와 엄마 앞에서 노래와 춤을 추며 아이들이 재롱을 부린다. 보기 좋고 행복한 모습이다. 오래 간직하고 싶은 귀중한 모습이라 얼른 같이 사진을 찍자고 했더니 애기 아빠가 선뜻 응해준다. 남편과 내가 아이들을 무릎 위에 앉히고 포즈를 취하며 마음속으로 아이들에게 속삭였다.
'남북의 사랑스런 아이들아. 너희들은 절대로 서로 총을 겨누지 마라. 손에 손을 잡고, 눈을 마주치며 행복의 노래를 아름답게 부르거라.'
금강산에서 내려와 우리는 근처에 있는 삼일포라는 호수에 들렀다. 금강산 해설원 소녀는 삼일포에 얽힌 역사적 사연들을 우리에게 사뭇 진지한 모습으로 열심히 설명한다. 사실 나는 삼일포에 얽힌 역사적 설명보다 곧 헤어질 것을 생각하며 금강산 소녀의 사진만 열심히 사진기에 담았다. 차분하고도 정겨운 그 목소리와 선한 눈빛을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느덧 금강산의 예쁜 소녀와 작별할 시간이 다가왔다. 몇 시간 동안의 만남이 이리도 가슴 깊이 새겨졌을 줄이야... 우리 부부는 자동차에서 내리는 소녀를 꼭 안아줬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작별의 인사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애써 미소 지었지만, 가슴 속은 이미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자동차가 모습을 감출 때까지 소녀는 손을 흔든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던 내 마음속의 금강산이 선명한 색상의 사진이 돼 머릿속 사진첩에 간직됐다. 그 사진 속에는 헤어지며 손등으로 눈물을 닦던 예쁜 소녀의 모습이 담겨 있다. 가슴이 또 미어져 온다. 어째 이 여행은 눈물의 연속이다.
'전마선'을 마주하다
오른쪽으로 동해바다를 끼고 자동차가 산길을 따라 위로 올라가니 작은 목선들이 정박하고 있는 포구가 보였다. 노려 보듯 포구를 바라보던 남편이 갑자기 설경이에게 물었다.
"저 배들이 혹시 '전마선'이라고 부르는 배들인가?"
"네, 맞습네다."
"아... 아주 작구나. 아... 저걸 타고..."
"저걸 타 보시고 싶습네까?"
"아니, 아니, 그게 아니고... 가끔 이곳 동포들이 저 작은 배를 타고 남으로 내려와. 우리가 여기 오기 바로 전에도 저 전마선을 타고 한 열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함경도 어진가를 떠나 남으로 가려고 했는데, 파도에 떠밀렸다지. 그 사람들은 일본 앞바다에서 구조됐는데... 지금 일본에 있는지 아니면 남으로 갔는지 뉴스를 못 봐서 모르겠네."
남편이 탈북자 이야기를 꺼내자 나는 서서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천진난만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속이 없다고 해야 할지... 사실 남편은 마음에 있는 말을 서슴지 않고 마구 하는 사람이었다. 우리가 북한에 가기 전에 시어머님께서 했던 말씀이 떠올랐다.
"얘야. 아범 입조심 단단히 시켜라. 괜히 가서 변이라도 당하지 않게. 아이고, 나는 불안해서 못 견디겠네... 아니, 갈 데가 없어서 북한으로 관광을 가?"
아니나 다를까 드디어 남편이 본격적으로 탈북자 이야기를 설경이에게 계속한다.
"남으로 온 북한 동포들을 탈북자라고 부르는데, 지금 남쪽에 약 2만 명 이상이 살고 있대."
"그 사람들은 남에서 잘 살고 있습네까?"
"우리는 미국서 살고 있으니까 잘 몰라. 주로 인터넷에서 그 사람들의 소식을 듣는 정도인데, 한 사람당 미국 돈으로 한 2만 달러 정도의 정착 지원금을 받는 것 같아. 일부는 그 돈으로 잘 정착해 살기도 하고, 일부는 갑자기 돈이 좀 생기니까 흥청망청 써 버리고 고생하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야. 그중 몇몇 사람들은 '이럴 줄 알았으면 괜히 왔다'고 후회하는 사람도 있고... 또 극소수지만 제3국으로 떠나는 사람들도 있대. 그럴 거면 무엇하러 고생하며 내려갔는지."
"아무리 돈을 준다고 해도 그렇지 고향만 하겠습네까?"
설경이는 전혀 놀라지 않고 차분한 반응을 보여 조금은 안심이 됐다. 남편이 그저 이 정도에서 멈췄으면 하고 있는데... 남편은 이야기를 멈추지 않는다.
북한식 '사교육'에는 돈이 들지 않는다
"지금 남쪽은 경제적으로 잘살고 있거든.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에서 시골에 가도 집에 차 한 대씩은 다 갖고 있어. 대중교통이 세계에서 제일 잘 발달돼 있는데도 말이야. 그래도 사는 것이 쉽지 만은 않아. 아파트, 자동차 등 매달 나가는 돈이 많아. 또 학비도 많이 들어. 특히 학교 공부 외에 따로 공부를 더 시키는데, 그걸 '과외' 또는 '사교육'이라고 불러. 거기에 돈이 많이 들어가. 우리 민족은 교육이라면 껌뻑하잖아."
"여기서도 학교 공부 외에 더 공부를 하기도 하지만, 돈을 주고 하는 경우는 없습네다. 주위에 아는 사람에게 부탁하는데 고저 때 되면 선물하는 정도입네다."
"하여간 탈북자들이 살기에 쉽지 만은 않을 거야. 특히 사회주의 생활방식에 젖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할 거야. 남에서는 모든 걸 자기가 혼자 감당해야 하니까. 게다가 탈북자들이 북에서 받은 교육이라든가 경력이라든가 이 모든 것들이 남에서는 인정 받지 못하거든. 그러니까 많은 탈북자들이 자기 전공분야를 살리지 못하고 막노동을 하는 것 같아. 물론 북에서 교육을 높게까지 받은 탈북자들이 많지는 않다고 하던 걸."
"그런데, '막노동'이란 무슨 일을 하는겁네까?"
"응. 소위 3D 업종이라는 것인데... 설경이도 영어를 잘 하니까 금세 이해할 거야. Difficult(힘들고), Dirty(더럽고), Dangerous(위험하고)의 첫 영어 글자를 따서 3D 업종이라고 부르는데, 말 그대로 고생은 있는 대로 하고 돈은 적게 받는 일을 막노동이라고 불러. 예를 들어 청소일, 공사장이나 공장에서 하는 힘든 일, 고기잡이 배 타고 하는 일..."
"저는 리해가 잘 되질 않습네다. 여기서는 무슨 일이든 보상도 다 비슷하고, 또 힘들고 위험한 로동을 하는 인민들은 오히려 존경을 받으니까 말입네다. 많은 영화나 노래들이 그들을 위해 만든 것들입네다. 물론 여기도 가능하면 편한 일을 하려고 하는 경향은 있습네다. 무슨 일을 하든 보상에 차이가 없으니까.
치과의사였던 우리 어머니와 제가 조선려행사에서 처음 받았던 월급이 거의 차이가 없었습네다.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외국 관광객 안내원일도, 뭐 이 일이 편해서 하는 것은 아니고 고저 제가 외국어를 좋아하다 보니까 하게 됐는데 보상은 다른 일과 별로 차이가 없습네다. 게다가 광부들이나 어부, 공장의 로동자들, 이런 일꾼들을 위해서 만든 노래나 영화는 수도 없이 많지만 우리 외국 관광객 안내원들을 위해 만든 예술작품은 하나도 없습네다. 우리도 나름대로 조국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봉사하고 있는데 말입네다."
설경이가 웃어가며 자기들의 노고에 대한 노래나 영화는 없다고 불평한다. 설경이의 의문은 계속 이어졌다.
"남조선에서는 2만 달러로 뭘 할 수 있는지..."
"선생님, 탈북자들이 2만 달러나 받는다고 하는데 그 많은 돈을 갖고 있으면서 어떻게 남조선에서 사는 것이 쉽지 않은지 리해가 안 됩네다. 그거면 여기 북조선에서 일생을 살 수 있습네다. 2만 달러나 갖고도 살기 힘들다면 대체 얼마가 있어야 살 수 있습네까? 남조선에서는 2만 달러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정말 궁금합네다."
"글쎄, 상대적인 거라서 물가를 비교해야 하는데, 나는 이곳의 물가를 전혀 모르니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 하여간 남에서 저소득층 수준으로 산다고 할 경우 2년 정도는 살 수가 있는데... 문제는 집이라든가 가재도구라든가 하는 것을 모두 본인이 마련해야 하니 그 돈 갖고는 생활이 어려울 수 밖에 없지.
게다가 물가가 비싸. 그런데 좋은 직장은 구하기가 힘들고... 좋은 직장을 얻지 못하면 아까 얘기한 막노동을 할 수밖에 없는데, 일은 힘들고 보수는 적어. 그러다보니 '괜히 왔다'고 후회하는 사람들이 생기는 거겠지. 소수지만 사업을 해서 돈을 많이 번 사람도 있대."
"어쨌든 전마선을 타고 남으로 가는 경우는 극히 드물 겁네다. 탈북자라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인데, 사실 조선과 중국의 국경지역은 비교적 자유롭게 왔다갔다 했었습네다. 조그만 장사를 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 고난의 행군 시절 식량을 구하기 위해 간 사람들도 있었고. 또 중국에 살다가 다시 조선에 와서 살기도 하고 그랬었습네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우린 탈남자들이네"
설경이의 말을 들으면서 두 가지 사실에 놀라웠다. 나는 설경이가 탈북자에 대해서 거의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설경이는 이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었으며 그래서 남편이 탈북자에 대해서 열심히 얘기를 할 때도 차분히 들으며 의연히 대응했던 것이다. 또 하나는 탈북자들을 소위 '배신자들'이라든가 아니면 애국심이 없는 형편없는 인간들이라고 폄하할 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설경이는 그들을 단순히 경제적인 이유로 국경을 넘나드는 사람들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남편이 설경이에게 물었다.
"허가를 받지 않고 국경을 넘어도 괜찮은 건가?"
"아닙네다. 선생님. 허가없이 국경을 넘는 것은 공화국의 법을 위반하는 일입네다."
"그러다가 잡히면 어떻게 되지?"
"저도 잘은 모르겠는데 처음일 경우 대부분이 경고 정도를 받을 겁네다."
"응, 그래? 밖에 알려지기로는 탈북하다 잡히면 수용소로 끌려가거나 심하면 사형까지 시킨다고 알려져 있거든."
"그건 순전히 공화국에 악의를 품고 하는 악선전입네다. 10번 이상이나 단속에 걸린 사람들도 있습네다. 우리는 오히려 처벌이 너무 가벼워 그렇다고들 말합네다. 형벌이 무섭다면 어떻게 여러 번이나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습네까?"
설사 형벌이 무겁다고 해도 우리에게 그렇다고 얘기하지는 않겠지만, 어느 정도 수긍할 수는 있었다. 일전에 여러 번 탈북을 시도한 끝에 남으로 들어온 한 탈북자의 수기를 인터넷에서 읽은 적이 있다. 당시 나도 그 사람이 '어떻게 여러 번 잡혔다가 풀려 나왔다가 하면서 남으로 올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이 생긴 적이 있었다. 어쨌든 남쪽에 많은 탈북자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니 이곳의 삶이 어려운 것만은 틀림없을 것이다.
앞 자리에서 남편과 설경이의 대화를 아무 말 없이 듣고 있던 리만룡 안내원이 고개를 돌려 남편에게 물었다.
"그런데 선생님, 경제적으로 잘사는 남조선에 어째서 그렇게 자살률이 높습네까?"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네."
남편이 머뭇거리며 답했다. 나도 똑같은 의문이 들었다. 잠시 조용하다 싶더니 남편이 또 한마디 한다.
"여보,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남한을 떠나 미국에 살고 있는 우리는 그러면 '탈남자'들이네. 안 그래? 말이야 바른 말이지."
우리 차는 원산을 경유해 평양으로 돌아가기 위해 산길로 들어섰다.
아침은 내 마음의 어두운 커튼을 활짝 걷어줬다. 발코니 문을 여니 코를 톡 쏘는 신선한 내음이 마음속을 훤히 밝혀 준다. 오늘은 드디어 노래로만 만났던 금강산에 가는 날이다.
남편과 나는 들뜬 마음으로 서둘러 준비를 하고 아침식사를 하러 갔다. 식당은 큰 연회를 치르고도 남을 정도로 시원하고 널찍하게 잘 꾸며져 있었다. 그 큰 식당 안에는 우리 부부와 유럽 관광팀 몇 명만이 있었다. 우리 몇 사람끼리만 식사하기에 어색할 정도로 식당은 크고 화려하다. 단정한 용모의 종업원들이 환한 미소로 우리를 반기며 음식을 가져다준다.
호텔 로비로 내려오니 만룡 안내원과 설경이가 산뜻한 옷차림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잠만 따로 자고 만났을 뿐인데 이산가족을 만난 것처럼 반갑고 기쁘다. 바깥에서는 늘 그랬듯이 리인덕 운전사 당원 아저씨가 자동차를 닦고 있다. 말도 별로 없이 수줍은 표정으로 우리를 반겨 준다. 웃는 얼굴에는 건실함과 진실됨이 묻어난다.
산보다 아름다운 금강산 소녀
![]() | |
▲ 설경이와 팔장을 끼고 많은 얘기를 나누며 하산하면서. | |
ⓒ 신은미 |
금강산 가는 길에 우리에게 안내를 맡아줄 해설원을 데리러 갔다. 빨간 점퍼를 입은 앳된 소녀가 기다리고 있었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막내 딸아이 정도로 보였는데, 스무 살이 넘었단다. 볼이 발그스름하며 눈이 초롱초롱했다. 마치 동화책에 나오는 착한 주인공을 연상케 하는 예쁜 소녀의 이름은 전은심이었다.
수줍음을 많이 타서 설명을 잘 못할 줄 알았는데, 자동차에 타자마자 차분한 목소리로 금강산에 대해 줄줄 설명을 시작한다. 아름다운 금강산에 대한 자부심이 조용하지만 또박또박 느껴졌다. 금강산의 아름다운 모습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동그란 두 눈을 힘줘 뜨고 설명을 듣는 내내 소녀의 자부심이 전해진다.
내 입가에 왠지 모를 흐뭇한 미소가 피어난다. 금강산의 모습보다도 내게는 이 소녀의 모습이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금강산의 수려한 절경 속에 빠져 이 순간만은 어떠한 원망도 미움도 슬픔도 아쉬움도 아무 생각도 나질 않는다. 그저 자연의 초연함과 아름다움에 겸손해질 뿐이다.
북한에서 <타이타닉>을 봤다고?
![]() | |
▲ 금강산 계곡에서. 왼쪽 부터 남편, 금강산 해설원 전은심, 필자, 여성 안내원 설경이, 남성 안내원 리만룡. | |
ⓒ 신은미 |
마음은 훨훨 날아오르고 싶으나 나이가 잘 따라주지 않는가 보다. 금강산에 들어가는데, 힘들어하는 기색이 우리 두 부부 얼굴에서 나타난 모양이다. 설경이는 팔짱을 끼며 부축해주고, 금강산 해설원 소녀는 남편을 부축한다. 오랜만에 팔짱을 껴 본다. 다정함이 느껴진다.
설경이와 나는 금강산을 내려오는 내내 팔짱을 낀 채로 많은 얘기를 나눴다. 남자친구와의 결혼 준비 이야기, 그리고 우리 아이들 이야기와 설경이네 부모님 이야기... 그중에서도 영어가 전공이었던 설경이가 대학수업 시간에 본 영화 <타이타닉> 이야기는 우리 둘 모두를 영화 속에 다시 한 번 흠뻑 빠져들게 했다. 덕분에 힘들 새 없이 하산했다.
산을 거의 다 내려왔을 무렵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니, 가만 있어봐... 여기가 북한인데, 이 아이가 <타이타닉>을 봤다고?' 내가 깜짝 놀라 "그 영화를 어디서 봤다고? 수업시간에 봤다고?"라고 묻자 설경이가 답했다.
"네. 영어시간에 그 영화를 교재로 썼습네다. 그런 영화는 극장에서 상영하지 않습네다."
그렇다. 설경이와 사람 사는 이야기를 하며 하산하는 동안 나는 여기가 북한이라는 것과 설경이가 북한사람이라는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설경이와 <타이타닉> 영화 얘기를 하면서도 산을 거의 다 내려와서야 '이 아이가 어떻게 그 영화를 볼 수 있었단 말인가'라고 의아해하며 제정신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금강산의 아름다움보다, 지금 내 눈은 남편을 부축하며 함께 걸어가던 현지 해설원의 모습, 그리고 내 머릿속은 방금 설경이와의 나눴던 정담으로만 가득 차 있었다.
남쪽의 산들과 마찬가지로 산 밑에는 시원한 음료수들과 고소한 지짐이가 갈증과 허기진 배를 채우고 가라고 유혹한다. 우리는 점심식사를 '목란관'이라는 식당에서 할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 고소한 냄새를 그냥 지나치기에는 아쉬움이 남을 것 같았다. 그래서 전식이라고 위로하면서 먹고 가도 되겠다는 정당성을 마련했다. 산행 후 맛본 대동강 맥주와 녹두 지짐이는 잊을 수 없는 맛이었다.
순식간에 달려든 아가씨들... "사진 찍읍시다"
![]() | |
▲ 목란관 식당 앞에서. 식사도 하기 전에 남편은 이미 대동강 맥주에 취해 있었다. | |
ⓒ 신은미 |
아쉬운 배를 움켜쥐고, 목란관에 닿으니 오색 금강산 나물들이 한 상 차려져 있다. 이곳에서 먹은 산도라지와 고사리, 그리고 녹두묵은 두고두고 잊을 수 없을 것만 같다. 특히 산도라지의 향 내음은 금강산을 온통 품은 맛으로 기억될 것이다.
금강산의 내음에 취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내려오려고 할 때, 어디선가 유니폼을 차려입은 발랄한 아가씨 세 명이 문을 박차고 뛰어나왔다. '목란관 기념품 상점'이라고 쓰인 작은 건물에서 말이다. 그들은 다름 아닌 기념품 가게 아가씨들이었다.
그들은 너무 반가워하면서 같이 사진을 찍자고 자신들의 카메라를 들이민다. 순간 '이들이 무슨 일로 우리에게 이러는 걸까?'라며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북한사람들이 우리에게 먼저 다가와 사진 찍자고 할 것이라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순간 당황해 내 마음의 방패막이로 반사시켜 버린 그들의 마음을 다시 살펴봤다. 다시 보니 반가움과 기쁜 마음으로 사진을 찍고자 하는 게 보였다. 우리가 금강산의 호텔에 처음 도착했을 때 차문을 열어주던 아저씨가 떠올랐다. 남한의 관광객들을 진심으로 그리워 하던 그 아저씨 말이다.
사진을 찍자마자 세 사람이 카메라에 고개를 들이대며 잘 나왔는지 들여다본다. 마치 오랫동안 기다리던 사람을 만난 것처럼... 활짝 열린 가슴으로 나 또한 기쁘게 사진을 찍었다. 한 아가씨가 잠시 숨겨놨던 내 '당혹감'을 눈치챘는지 "남조선에서 오셨나요?"라고 말을 붙인다. 설경이가 "미국에서 오신 동포이십네다"라고 답하니 그 아가씨가 말을 잇는다.
'너희는 절대 서로 총을 겨누지 말거라'
![]() | |
▲ 함께 사진 찍기를 원했던 기념품상점 아가씨들. | |
ⓒ 신은미 |
![]() | |
▲ 금강산에 휴가 온 북한의 한 가족과 함께. | |
ⓒ 신은미 |
"그렇습니까. 반갑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요즘은 남조선 관광객들이 전혀 오지를 않습니다. 오랜만에 우리 동포들을 보니 너무 반가워서... 전에는 남조선 동포들이 수도 없이 왔는데, 그때는 곧 통일될 줄 알았어요. 얼마나 흥분했는지..."
북한의 주민들이 정말로 '민족 통일'을 갈망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솔직히 나는 북한에 오기 전까지 통일이라는 것에 관심은커녕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그들의 말투며 행동거지가 우리 남한의 발랄한 젊은 딸들을 보는 것 같아서 한층 더 친근한 마음이 든다. 여러 장의 사진을 이런저런 포즈를 취하며 찍는 게 그저 젊은 우리 아이들 같다. 아가씨들은 "같이 사진을 찍어줘서 고맙다"고 연신 인사를 한다. "우리도 너무 좋았다"며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는 내 등이 슬펐다. 뒤돌아보니 계속해서 세 아가씨가 "또 오십시오"라며 손을 흔든다. "그러겠노라"는 지킬 수 없는 말로 답을 대신했다. 하염없이 손만 흔들었다. 그러고 보니 기념품 가게에는 들어가 보지도 못했다.
자동차로 돌아오는 길에 소풍을 즐기는 여러 명의 가족들을 발견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아빠와 엄마 앞에서 노래와 춤을 추며 아이들이 재롱을 부린다. 보기 좋고 행복한 모습이다. 오래 간직하고 싶은 귀중한 모습이라 얼른 같이 사진을 찍자고 했더니 애기 아빠가 선뜻 응해준다. 남편과 내가 아이들을 무릎 위에 앉히고 포즈를 취하며 마음속으로 아이들에게 속삭였다.
'남북의 사랑스런 아이들아. 너희들은 절대로 서로 총을 겨누지 마라. 손에 손을 잡고, 눈을 마주치며 행복의 노래를 아름답게 부르거라.'
![]() | |
▲ 금강산 인근에 있는 삼일포에서 호수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는 금강산 해설원 전은심. | |
ⓒ 신은미 |
금강산에서 내려와 우리는 근처에 있는 삼일포라는 호수에 들렀다. 금강산 해설원 소녀는 삼일포에 얽힌 역사적 사연들을 우리에게 사뭇 진지한 모습으로 열심히 설명한다. 사실 나는 삼일포에 얽힌 역사적 설명보다 곧 헤어질 것을 생각하며 금강산 소녀의 사진만 열심히 사진기에 담았다. 차분하고도 정겨운 그 목소리와 선한 눈빛을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느덧 금강산의 예쁜 소녀와 작별할 시간이 다가왔다. 몇 시간 동안의 만남이 이리도 가슴 깊이 새겨졌을 줄이야... 우리 부부는 자동차에서 내리는 소녀를 꼭 안아줬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작별의 인사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애써 미소 지었지만, 가슴 속은 이미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자동차가 모습을 감출 때까지 소녀는 손을 흔든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던 내 마음속의 금강산이 선명한 색상의 사진이 돼 머릿속 사진첩에 간직됐다. 그 사진 속에는 헤어지며 손등으로 눈물을 닦던 예쁜 소녀의 모습이 담겨 있다. 가슴이 또 미어져 온다. 어째 이 여행은 눈물의 연속이다.
'전마선'을 마주하다
| |
▲ 동해안의 어촌마을. 포구에 전마선들이 보인다. | |
ⓒ 신은미 |
오른쪽으로 동해바다를 끼고 자동차가 산길을 따라 위로 올라가니 작은 목선들이 정박하고 있는 포구가 보였다. 노려 보듯 포구를 바라보던 남편이 갑자기 설경이에게 물었다.
"저 배들이 혹시 '전마선'이라고 부르는 배들인가?"
"네, 맞습네다."
"아... 아주 작구나. 아... 저걸 타고..."
"저걸 타 보시고 싶습네까?"
"아니, 아니, 그게 아니고... 가끔 이곳 동포들이 저 작은 배를 타고 남으로 내려와. 우리가 여기 오기 바로 전에도 저 전마선을 타고 한 열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함경도 어진가를 떠나 남으로 가려고 했는데, 파도에 떠밀렸다지. 그 사람들은 일본 앞바다에서 구조됐는데... 지금 일본에 있는지 아니면 남으로 갔는지 뉴스를 못 봐서 모르겠네."
남편이 탈북자 이야기를 꺼내자 나는 서서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천진난만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속이 없다고 해야 할지... 사실 남편은 마음에 있는 말을 서슴지 않고 마구 하는 사람이었다. 우리가 북한에 가기 전에 시어머님께서 했던 말씀이 떠올랐다.
"얘야. 아범 입조심 단단히 시켜라. 괜히 가서 변이라도 당하지 않게. 아이고, 나는 불안해서 못 견디겠네... 아니, 갈 데가 없어서 북한으로 관광을 가?"
아니나 다를까 드디어 남편이 본격적으로 탈북자 이야기를 설경이에게 계속한다.
"남으로 온 북한 동포들을 탈북자라고 부르는데, 지금 남쪽에 약 2만 명 이상이 살고 있대."
"그 사람들은 남에서 잘 살고 있습네까?"
"우리는 미국서 살고 있으니까 잘 몰라. 주로 인터넷에서 그 사람들의 소식을 듣는 정도인데, 한 사람당 미국 돈으로 한 2만 달러 정도의 정착 지원금을 받는 것 같아. 일부는 그 돈으로 잘 정착해 살기도 하고, 일부는 갑자기 돈이 좀 생기니까 흥청망청 써 버리고 고생하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야. 그중 몇몇 사람들은 '이럴 줄 알았으면 괜히 왔다'고 후회하는 사람도 있고... 또 극소수지만 제3국으로 떠나는 사람들도 있대. 그럴 거면 무엇하러 고생하며 내려갔는지."
"아무리 돈을 준다고 해도 그렇지 고향만 하겠습네까?"
설경이는 전혀 놀라지 않고 차분한 반응을 보여 조금은 안심이 됐다. 남편이 그저 이 정도에서 멈췄으면 하고 있는데... 남편은 이야기를 멈추지 않는다.
북한식 '사교육'에는 돈이 들지 않는다
![]() | |
▲ 작은 고깃배. | |
ⓒ 신은미 |
"지금 남쪽은 경제적으로 잘살고 있거든.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에서 시골에 가도 집에 차 한 대씩은 다 갖고 있어. 대중교통이 세계에서 제일 잘 발달돼 있는데도 말이야. 그래도 사는 것이 쉽지 만은 않아. 아파트, 자동차 등 매달 나가는 돈이 많아. 또 학비도 많이 들어. 특히 학교 공부 외에 따로 공부를 더 시키는데, 그걸 '과외' 또는 '사교육'이라고 불러. 거기에 돈이 많이 들어가. 우리 민족은 교육이라면 껌뻑하잖아."
"여기서도 학교 공부 외에 더 공부를 하기도 하지만, 돈을 주고 하는 경우는 없습네다. 주위에 아는 사람에게 부탁하는데 고저 때 되면 선물하는 정도입네다."
"하여간 탈북자들이 살기에 쉽지 만은 않을 거야. 특히 사회주의 생활방식에 젖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할 거야. 남에서는 모든 걸 자기가 혼자 감당해야 하니까. 게다가 탈북자들이 북에서 받은 교육이라든가 경력이라든가 이 모든 것들이 남에서는 인정 받지 못하거든. 그러니까 많은 탈북자들이 자기 전공분야를 살리지 못하고 막노동을 하는 것 같아. 물론 북에서 교육을 높게까지 받은 탈북자들이 많지는 않다고 하던 걸."
"그런데, '막노동'이란 무슨 일을 하는겁네까?"
"응. 소위 3D 업종이라는 것인데... 설경이도 영어를 잘 하니까 금세 이해할 거야. Difficult(힘들고), Dirty(더럽고), Dangerous(위험하고)의 첫 영어 글자를 따서 3D 업종이라고 부르는데, 말 그대로 고생은 있는 대로 하고 돈은 적게 받는 일을 막노동이라고 불러. 예를 들어 청소일, 공사장이나 공장에서 하는 힘든 일, 고기잡이 배 타고 하는 일..."
"저는 리해가 잘 되질 않습네다. 여기서는 무슨 일이든 보상도 다 비슷하고, 또 힘들고 위험한 로동을 하는 인민들은 오히려 존경을 받으니까 말입네다. 많은 영화나 노래들이 그들을 위해 만든 것들입네다. 물론 여기도 가능하면 편한 일을 하려고 하는 경향은 있습네다. 무슨 일을 하든 보상에 차이가 없으니까.
치과의사였던 우리 어머니와 제가 조선려행사에서 처음 받았던 월급이 거의 차이가 없었습네다.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외국 관광객 안내원일도, 뭐 이 일이 편해서 하는 것은 아니고 고저 제가 외국어를 좋아하다 보니까 하게 됐는데 보상은 다른 일과 별로 차이가 없습네다. 게다가 광부들이나 어부, 공장의 로동자들, 이런 일꾼들을 위해서 만든 노래나 영화는 수도 없이 많지만 우리 외국 관광객 안내원들을 위해 만든 예술작품은 하나도 없습네다. 우리도 나름대로 조국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봉사하고 있는데 말입네다."
설경이가 웃어가며 자기들의 노고에 대한 노래나 영화는 없다고 불평한다. 설경이의 의문은 계속 이어졌다.
"남조선에서는 2만 달러로 뭘 할 수 있는지..."
![]() | |
▲ 자연 그대로의 동해안. 양식장 처럼 보인다. | |
ⓒ 신은미 |
"선생님, 탈북자들이 2만 달러나 받는다고 하는데 그 많은 돈을 갖고 있으면서 어떻게 남조선에서 사는 것이 쉽지 않은지 리해가 안 됩네다. 그거면 여기 북조선에서 일생을 살 수 있습네다. 2만 달러나 갖고도 살기 힘들다면 대체 얼마가 있어야 살 수 있습네까? 남조선에서는 2만 달러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정말 궁금합네다."
"글쎄, 상대적인 거라서 물가를 비교해야 하는데, 나는 이곳의 물가를 전혀 모르니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 하여간 남에서 저소득층 수준으로 산다고 할 경우 2년 정도는 살 수가 있는데... 문제는 집이라든가 가재도구라든가 하는 것을 모두 본인이 마련해야 하니 그 돈 갖고는 생활이 어려울 수 밖에 없지.
게다가 물가가 비싸. 그런데 좋은 직장은 구하기가 힘들고... 좋은 직장을 얻지 못하면 아까 얘기한 막노동을 할 수밖에 없는데, 일은 힘들고 보수는 적어. 그러다보니 '괜히 왔다'고 후회하는 사람들이 생기는 거겠지. 소수지만 사업을 해서 돈을 많이 번 사람도 있대."
"어쨌든 전마선을 타고 남으로 가는 경우는 극히 드물 겁네다. 탈북자라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인데, 사실 조선과 중국의 국경지역은 비교적 자유롭게 왔다갔다 했었습네다. 조그만 장사를 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 고난의 행군 시절 식량을 구하기 위해 간 사람들도 있었고. 또 중국에 살다가 다시 조선에 와서 살기도 하고 그랬었습네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우린 탈남자들이네"
설경이의 말을 들으면서 두 가지 사실에 놀라웠다. 나는 설경이가 탈북자에 대해서 거의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설경이는 이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었으며 그래서 남편이 탈북자에 대해서 열심히 얘기를 할 때도 차분히 들으며 의연히 대응했던 것이다. 또 하나는 탈북자들을 소위 '배신자들'이라든가 아니면 애국심이 없는 형편없는 인간들이라고 폄하할 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설경이는 그들을 단순히 경제적인 이유로 국경을 넘나드는 사람들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남편이 설경이에게 물었다.
"허가를 받지 않고 국경을 넘어도 괜찮은 건가?"
"아닙네다. 선생님. 허가없이 국경을 넘는 것은 공화국의 법을 위반하는 일입네다."
"그러다가 잡히면 어떻게 되지?"
"저도 잘은 모르겠는데 처음일 경우 대부분이 경고 정도를 받을 겁네다."
"응, 그래? 밖에 알려지기로는 탈북하다 잡히면 수용소로 끌려가거나 심하면 사형까지 시킨다고 알려져 있거든."
"그건 순전히 공화국에 악의를 품고 하는 악선전입네다. 10번 이상이나 단속에 걸린 사람들도 있습네다. 우리는 오히려 처벌이 너무 가벼워 그렇다고들 말합네다. 형벌이 무섭다면 어떻게 여러 번이나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습네까?"
설사 형벌이 무겁다고 해도 우리에게 그렇다고 얘기하지는 않겠지만, 어느 정도 수긍할 수는 있었다. 일전에 여러 번 탈북을 시도한 끝에 남으로 들어온 한 탈북자의 수기를 인터넷에서 읽은 적이 있다. 당시 나도 그 사람이 '어떻게 여러 번 잡혔다가 풀려 나왔다가 하면서 남으로 올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이 생긴 적이 있었다. 어쨌든 남쪽에 많은 탈북자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니 이곳의 삶이 어려운 것만은 틀림없을 것이다.
앞 자리에서 남편과 설경이의 대화를 아무 말 없이 듣고 있던 리만룡 안내원이 고개를 돌려 남편에게 물었다.
"그런데 선생님, 경제적으로 잘사는 남조선에 어째서 그렇게 자살률이 높습네까?"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네."
남편이 머뭇거리며 답했다. 나도 똑같은 의문이 들었다. 잠시 조용하다 싶더니 남편이 또 한마디 한다.
"여보,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남한을 떠나 미국에 살고 있는 우리는 그러면 '탈남자'들이네. 안 그래? 말이야 바른 말이지."
우리 차는 원산을 경유해 평양으로 돌아가기 위해 산길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