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 6~10]

2012. 10. 25. 15:57everyday photo

 

 

평양 호텔에 중동 사람들 북적, 속이 상했다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⑥] 원산 석왕사, 다시 평양

12.06.30 15:34l최종 업데이트 12.07.01 12:05l
저는 오래전부터 음악을 공부하고,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오로지 음악에 관한 지식만을 가르쳐왔습니다. 지금은 평범한 주부이자 아이들의 엄마로 살고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과 함께 북한에 가게 됐습니다. 호기심으로 떠난 여행이었지만, 저는 처음으로 우리 민족의 비극적 운명과 민족애를 느꼈습니다. 동시에 통일에 대한 염원이 생기게 됐습니다. 2011년 10월 이후 지난 4월에 열흘 동안, 그리고 5월에는 3주 동안 나진·선봉을 비롯한 북한 전역을 여행했습니다. - 기자말

전날만 해도 낯설게 느껴졌던 바깥 풍경들이 지금은 친숙한 모습들로 우리를 반겨 준다. 가까이 다가가지 않아도 풍경들이 살아 움직이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파도 소리도, 바닷새 소리도 들리는 듯하다. 친근해지니 이렇게 잘 통한다. 나와는 상관없이 다른 공간에서 펼쳐질 것만 같았던 장면들은 이제 나와 함께 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함께 이 하늘을, 이 공기를, 이 우주의 섭리를 공유하고 있다. 우리는 이 우주 공간이라는 한울타리 속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 '너는 너, 나는 나'가 아닌 바로 '우리'로 말이다.

도로변 논둑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다. 우리 차를 보더니 일제히 손을 흔든다. 나도 두 손을 흔들었다. 어릴 적 시골에 갈 때, 차창 밖으로 보여지던 그리운 장면이다. 마음이 훈훈해진다.

설경이가 운전사 당원 아저씨에게 "석왕사 절로 둘러가면 어떨까요"라고 청한다. 고려 말에 세워진 이 절의 풍경이 아름답고 공기와 계곡의 물이 대단히 맑고 깨끗하단다.

"먼 곳에서 힘들게 오셨으니 한 곳이라도 더 참관하고 가는 것이 어떻겠습네까?"

설경이가 우리에게 묻는다. 남편과 나는 사실 피곤해 호텔로 바로 가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설경이가 우리를 생각해주는 마음이 고마워 마지못해 그러자고 했다.

그림 그리는 아이들... 사생대회라도 나왔나

석왕사에 스케치 나온 미술부 학생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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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을 따라 제법 들어온 것 같다. 아무도 살지 않을 것만 같은 산길 풍경과는 달리 석왕사에 접어드니 어디서들 왔는지 초등학생들과 중·고등학생들로 보이는 아이들이 북적댄다.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 아이들에게 주의를 주고 있는 선생님들의 걱정어린 소리... 계곡에서 가재를 잡느라 흥분한 아이들은 선생님의 걱정을 신경 쓰지 않는 듯하다.

반대편 느티나무 아래서는 중·고등학생들로 보이는 아이들이 석왕사를 배경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실력들이 대단해 보인다. 리만룡 안내원에 따르면 이 학생들은 앞으로 미술을 전공할 계획인 '미술 전문반' 아이들이란다. 미술에 대한 전문 지식이 없는 내 눈에도 '역시, 그러면 그렇지' 뭔가 특별하다 싶었다.

관광객이 방문하는 북한의 모든 유적지에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현지 해설원이 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이곳에는 해설원이 보이지 않았다. 설경이가 해설원을 찾는 듯 두리번거리자 운동복 차림의 여자 선생님 한 분이 뛰어 온다.

"이 곳을 방문해 주신 손님이신 게지요? 저는 아이들을 인솔해 온 선생님입니다."

뚜벅뚜벅 걷는 사람들에게서 느껴진 것은...

석왕사에서. 왼쪽부터 설경이, 필자, 그리고 안내를 맡았던 여 선생님.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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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 시민들. 얼굴 표정에 굳은 삶의 의지가 보인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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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은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줄곧 이곳에서 살았을 뿐 아니라 석왕사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으니 이곳을 안내해 주겠단다. 여자 선생님은 친절한 미소를 짓기 바쁘게 석왕사 설명을 시작한다. 아이들에게 동화를 구연하듯 재미있는 말투와 손놀림이 귀엽게 느껴진다.

한 번 훑어보고만 가려고 했던 우리는 신바람 나게 설명하는 선생님 이야기에 취해 저 멀리 꼭대기에 있는 작은 암자까지 단숨에 구경했다. 활달하고 유머 감각이 있는 선생님 덕분에 이별의 슬픔도 느낄 새 없이 우리는 정신없이 웃으며 자동차에 올랐다. 북한에 와서 웃으면서 헤어지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어느새 자동차는 원산시내로 접어들고 있나 보다. 바삐 걷는 사람들의 모습이 뜨문뜨문 보이기 시작한다. 부지런히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처음 봤을 때, 나는 그들에게서 초라함과 고단함, 그리고 무력함을 느꼈다. 하지만, 오늘은 그 모습 속에서 희망을 향하는 간절한 바람이 느껴졌다.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저들의 소망이 모두 이뤄지길 마음으로 기도한다. 기도하는 마음 깊은 곳에서 저들의 소망이 곧 나의 소망으로 다가오는 것을 조용히 느낀다.

북한 아줌마들의 관심사는 바로 이것

북한의 아주머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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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운동장에서 매스게임을 연습하는 초등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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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원산시의 모습은 친숙하다. 학교 운동장에 있는 아이들의 모습도, 남새(야채) 상점 앞에서 속닥 속닥 담소를 나누는 아줌마들의 모습도, 등 뒤에 무언가 잔뜩 지고 바삐 걸어가는 사람들의 모습도 친근하게 느껴진다.

저 아줌마들은 대체 무슨얘기를 나누고 있을지... 같은 아줌마로서 매우 궁금해진다. 옆에 있는 설경이에게 물어봤다. 이곳 아줌마들의 관심사는 무엇이냐고. 설경이는 첫째가 아이들 교육 이야기라고 했다. 그리고 물론 남편 얘기도 빠질 수 없단다. 설경이네 엄마는 자신과 동생의 뒷바라지 때문에 하던 일(치과의사)도 그만뒀다고 한다.

마치 나 자신을 보는 것만 같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지극히 당연한 대답에 왜 나는 놀라는 것일까. 북한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당과 나라만을 위해 태어난 사람들이며, 이들의 관심 또한 당연히 그와 유사한 내용들일 것이라는 내 머릿속 정답은 대체 어디에서 온 오답인 것일까. 머릿속이 퍼즐 조각 마냥 어지럽다.

아쉬운 작별... 당분간 호텔은 텅 비어 있을 듯

원산역 박물관에서 원산시를 배경으로. 왼쪽부터 설경이, 필자, 원산역 해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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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오래전에 세워졌다는 원산의 동명 호텔에서 하루 자고 가기로 했다. 바닷가를 끼고 있는 운치 있는 호텔인데, 손님이 거의 없는 느낌이다. 우리 팀 다섯 사람과 유엔에서 파견된 유니세프 직원 외에는 다른 투숙객을 보지 못했다.

우리 부부는 이 호텔에서 제일 좋은 방에 묵은 것 같다. 넓은 거실과 커다란 책상, 그리고 대형 소파 세트까지... 가구들은 예전의 영광을 추억하며 빛바랜 모습으로 쓸쓸히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살포시 서려 있는 냉기가 이를 말해주고 있다. 분주한 모습의 생기 넘치는 아침이 기다려진다.

아침, 남편이 창문을 연다. 동해의 신선한 아침 바닷바람이 아름다운 햇살과 함께 나의 무거운 심신을 단번에 일으켜 깨운다. 새롭게 맞이하는 오늘이 말할 수 없는 기대감과 호기심으로 설렌다.

아침 식사를 하러 식당에 갔다. 식당 안에는 우리뿐이었다. 늘씬한 아가씨가 우리를 위해 식사를 가져다 줬다. 그 큰 식당에서 혼자 일을 하고 있었다. 설경이가 들어 오더니 반갑게 아가씨와 인사를 나눈다. 식당 종업원 아가씨는 설경이와 같은 학교를 나온 친구인데 평양에서 공부를 마치고 고향인 원산에 내려와 일하고 있단다. 둘은 한동안 친구들의 안부를 물어가며 이야기를 나눈다.

식사를 마친 후 우리는 여러 번의 작별인사를 나눴다. 작별을 고했음에도 못내 아쉬워 마지막 작별인사를 한 번 더 나눈 후에야 비로소 호텔 식당에서 나왔다. 결혼한 딸을 남겨 놓고 오는 부모마냥 발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손을 흔드는 그 아가씨의 모습이 왜 이리도 쓸쓸해 보이는지... 왠지 우리가 떠나고 나면 당분간 호텔은 텅 비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사과밭을 보니... 떠오른 곳이 있었다

지금은 박물관이 된 옛 원산역.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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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시를 벗어나기 전 우리는 예전의 원산역에 갔다. 역사적으로 의미가 깊은 곳이라고 했다. 김일성 주석이 독립운동을 하다 해방된 뒤 소련에서 북한에 귀국해 이 역에서 평양으로 향했다고 안내원이 설명해줬다. 당시 타고 갔던 기차까지도 잘 보관돼 있었다. 김일성 주석이 귀국 후 동지들과 함께 처음으로 회의를 한 장소인 일본식 여관도 역사 유적지로 그대로 보존돼 있었다.

그 사건들을 자랑스럽고 당당하게 설명하는 해설원 아가씨에게서 더 많은 감동을 느꼈다. 나는 단 한 번이라도 내 나라를 얘기하면서 저토록 당당하고 자랑스럽게 말해 본 적이 있었단 말인가.

짧은 시간 동안의 만남이었지만, 항상 헤어질 때는 섭섭하고 아쉽다. 우리가 같은 민족이기 때문이라고 확신했다.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눈빛만으로도 정을 나눌 수 있었다.

내 머릿속의 북한 사람들은 외계인보다 더 낯선 사람들이었는데, 이제는 만나는 사람들마다 낯설지 않다. 오랜 시간 보지 못하고 지낸 고향 사람들처럼 반갑다. 되레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 사람들에게서는 가끔 낯선 감정을 느낄 때도 있는데... 아마도 미국에서 살면서 체득한 한 박자 느린 느긋한 감정 변화가 부지런히 앞질러 가는 내 나라 사람들의 정서를 쫓아가기 벅차서 그런가 싶다. 그런 면에서 이곳 사람들은 예전 방학 때면 내려가 만났던 외가 동네 사람들처럼 편안하다.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감정이기에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우리 다시 만납시다"라며 손 흔들며 배웅하는 한복 차림의 아가씨를 뒤돌아 보니 차마 차에 오를 수가 없다.

원산에서 벗어나자 길가에 사과밭이 보인다. 갑자기 고향 생각이 난다. 내가 태어난 대구광역시는 사과로 유명한 곳. 시내를 조금만 벗어나도 사과밭을 볼 수 있었다. 원산은 나에게 돌아가신 나의 외할머니, 그리고 그리운 내 고향 대구를 떠올리게 하는 추억의 도시로 남을 것이다.

차 이름이 뻐꾸기? 거참 재밌네

평양역 앞에 있는 평화자동차의 대형 광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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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보는 도로변 산들은 나무가 없어 쓸쓸해 보인다. 마치 불기둥이 휩쓸고 간 자리마냥 휑하다. 너도나도 이고 지고 가는 저 땔감이 그 이유를 설명해 준다. 산에 나무가 없으니 홍수 피해가 클 수밖에 없지 않나 싶다. 그나마 도로변을 따라 활짝 피어있는 코스모스가 내 마음을 위로한다.

학교가 끝난 시간인가 보다. 어린아이들이 가방을 메고 종종걸음으로 가고 있다. 자동차가 달리고 있는 길 주위에는 집들도 안 보이는데... 어디쯤 집이 있는 것일까. 집으로 향하는 마음을 다리가 따라주지 않는가 보다. 뛰다시피 하는 종종걸음이 거북이마냥 앞으로 쭉 뺀 몸통을 쫓아간다. 그 와중에 자동차를 보더니 반갑다고 손을 흔든다. 저렇게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살고있는 이 땅을 왜 나는 오랜 시간 외면하고 살았단 말인가. '뿔난 도깨비'들의 나라인 양 금기시하며 살아왔던 지난 세월이 너무 미안해 울컥 차 오르는 눈물마저 부끄럽다.

차들이 점점 많이 다니는 것을 보니 평양이 가까워지고 있나 보다. 이곳에서 만들어내는 자동차 이름들이 재밌다. '휘파람' '준마' '뻐꾸기' 등이다. 우리가 타고 다니는 이 차의 이름은 '삼천리'다. 외국 이름의 자동차에 익숙한 나는 처음에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며칠이 지난 지금, 어느새 그 이름이 순박해서 친근하다. 그다지 멋진 모습의 자동차는 아니지만 이름처럼 휘파람을 불며 삼천리를 휘젓고 다니는 듯하다. 소박하고 겸손하지만, 당당해 보이는 이곳 사람들의 모습과 흡사하다.

언제쯤 덩실덩실 춤출 수 있을까

김대중 대통령의 방북을 기념해 세운 '조국통일 3대헌장 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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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대통령의 방북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는 '조국통일 삼대헌장 기념탑' 앞에서 자동차가 잠시 멈췄다.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에 방문했을 때, 나는 김 대통령의 방북 장면을 특별한 감동 없이 봤다. 텔레비전 속에서 열렬히 환영하던 북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저 위선적인 가면은 언제쯤 벗어 던질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던 것도 떠오른다. 부끄러운 생각에 얼굴이 화끈거린다.

깨끗한 백색의 한복을 입고 서로를 갈구하듯 팔을 뻗쳐 올린 두 여인의 거대한 조각 속에서 백의민족의 지조와 기개, 그리고 민족애가 물씬 풍긴다. 안내원이 "왼쪽의 여인이 남쪽을 대표하고 오른쪽의 여인이 북쪽을 대표한다"고 설명한다.

어느 쪽이 남이든, 어느 쪽이 북이든 아무려면 어떠랴. 그저 한 민족인 것을! 눈기둥처럼 얼어 붙어 있는 조각상이 언제쯤이면 살아나 부둥켜 안으며 덩실덩실 춤출 수 있을까. 어느새 나도 그 텔레비전 속의 한 여인이 돼 그날의 감동을 되새김질 한다. 미래의 한 모습이 돼 다시 보여질 수 있기를 희망 하면서...

북적북적... 이곳이 고려호텔입니다

붐비는 고려호텔 로비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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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주한 고려호텔 앞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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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밤, 우리가 묵을 고려호텔에 도착했다. 호텔은 평양시의 번화가에 자리 잡고 있는 듯하다. 호텔 맞은 편으로는 상점들이 분주히 늘어서 있고, 상점 뒤로는 아파트들이 경쟁이라도 하듯 세워져 있다. 각양각색의 자동차들도 많이 오가고, 걸어 다니는 사람들의 옷차림이나 발걸음 역시 도시적이다. 높은 하이힐에 가죽 핸드백, 그리고 전화를 하면서 걸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호텔 안 분위기도 지난 호텔들과는 달랐다. 관광객들이 아닌 일반 시민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커피숍이나 호텔 상점, 로비에 많이 보인다. 생동감이 느껴져서 그런지 내 기분도 살아난다. 기분이 살아나니 입맛이 돈다.

고려호텔 지하식당 앞. 사진을 찍으려 하자 애기 엄마가 환한 미소로 응해 준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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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식사 시간이 기다려지기는 처음이다. 우리는 방으로 올라가기 전에 먼저 호텔 지하에 있는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다. 호텔 2층에 더 큰 식당이 있는데, 음식은 지하 식당이 훨씬 더 맛있다고 한다. 식당 안은 고급스럽게 잘 꾸며져 있고 많은 사람들로 분주하다. 식당 분위기가 좋으니 음식 맛도 좋을 것이라 기대되기도. 내 생각은 적중했다. 특히 냉면이 맛있어서 국물까지 한 방울도 안 남기고 깨끗이 다 먹어 치웠다.

식사 후 안내원들과 그냥 헤어지기 섭섭해 호텔 커피숍에 갔다. 커피숍은 사람들로 가득 차 앉을 자리가 없었다. 중동 지역 사람들로 보이는 외국인들이 많이 보인다. 그 이유인즉, 북한의 휴대전화 사업은 물론 105층짜리 류경 호텔 공사를 이집트 회사가 맡았기 때문이다. 설경이는 이런 이유 때문에 평양시내 곳곳에서 중동 지역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다고 했다.

한 땅덩어리, 한 형제인 한국에 세계 최고의 기술을 자랑하는 휴대전화 회사, 건설회사들이 즐비한데 왜 여러 면에서 열악한 조건에 놓여 있는 이집트 회사에게 공사를 맡겼는지 생각하니 속이 상해 머리가 아프다. 앉을 자리가 없어 간단히 음료수 몇 병만 사 호텔방에 올라왔다.

저주했던 이땅... 이제 장막이 걷힌다

차 안에서 본 류경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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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치도 모르고 경제도 모른다. 사상과 철학도 잘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알고 있는 게 있다. '어떤 이유에서든 싸우며 원수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내 종교적 신념이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으셨는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상대를 용서하라'라고. 하물며 '원수도 사랑하라'고 말이다.

예전에는 이 북한 땅을 향해 이런 생각을 가져 보기는커녕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악당들이 사는' '그저 무찔러 없애야 하는' 존재였다. 며칠 간 나는 이 악당들의 땅에서 악당들의 실체를 발견하기는커녕 내 마음속 겹겹이 쳐뒀던 검은 장막을 하나하나씩 걷어치우고 있다. 장막이 걷히기 시작하니 조금씩 희미한 빛줄기가 스며들어온다. 따스한 빛줄기다.

오랫동안 헤어져 살았던 형제의 집을 방문하고 보니 헤어져 살아야만 했던 미움도, 서먹한 감정도, 원망의 마음도 이제는 생각나지 않는다. 그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우리의 운명이 슬프고, 또 서러워 두 손 맞잡고 밤새 울고 싶다. 울고 또 울며 그동안 쌓인 회한을 모두 풀고 싶다. 무슨 말이 필요할까. 가슴이 너무 쓰리고 아파서 잠이 오질 않는다. 빨리 내일의 태양이 내 마음속 축축한 이 슬픔을 말려주면 좋겠다.

 

평양에서 정통 '이딸리아 삐짜'를 만나다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⑦] 다시 찾은 평양

12.07.01 11:49l최종 업데이트 12.07.01 15:26l
저는 오래전부터 음악을 공부하고,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오로지 음악에 관한 지식만을 가르쳐왔습니다. 지금은 평범한 주부이자 아이들의 엄마로 살고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과 함께 북한에 가게 됐습니다. 호기심으로 떠난 여행이었지만, 저는 처음으로 우리 민족의 비극적 운명과 민족애를 느꼈습니다. 동시에 통일에 대한 염원이 생기게 됐습니다. 2011년 10월 이후 지난 4월에 열흘 동안, 그리고 5월에는 3주 동안 나진·선봉을 비롯한 북한 전역을 여행했습니다. - 기자말

온 세상이 태양 빛으로 눈이 부시다. 오늘은 평양 시내와 몇 군데 기념비적인 곳에 간다고 한다. 날씨가 쾌청하니 차창 밖 사람들의 모습도 환하게 보인다. 분명 사람들의 겉모습은 평양에 도착하자마자 봤던 그 모습 그대로인데, 훨씬 생동감이 넘쳐 보인다. 마치 얼어 있던 세상이 따스한 봄 햇살에 사르르 녹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내 가슴속 깊이 얼어붙어 있었던 마음의 눈이 녹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전쟁 기념관, 뭘 기념할 수 있을까

평양의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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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해방전쟁 승리 기념관'에 도착했다. 기념관 이름 자체가 내게는 낯설고 어색하다. 말 그대로 '조국이 압제로부터의 해방을 위해 치른 전쟁의 승리를 기리는' 기념관이다. 그들의 표현에 따르자면 압제는 미국으로부터의 압제일 것이고, 해방 역시 미국으로부터의 해방이며, 전쟁 승리의 상대도 미국과 '미국의 앞잡이'인 남한일 것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 부부는 미 제국주의의 '하수인'인, 남한 출신의 미국 시민이다. 적군이 적의 나라에 제 발로 걸어 들어와서 손님 대접을 받으며 다니고 있는 셈이다.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상황인지 감이 안 잡혀서 머리가 복잡하다.

유럽에서 온 관광객들과 함께 안내 설명을 들었다. 열심히 영어로 설명하는 여성군관 해설원도 그 설명을 경청하는 우리 부부도 적과 적의 관계가 아니었다. 그저 남의 이야기처럼 덤덤하다. 설명을 듣는 내내 '이런 비극이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쓰라린 사연을 담고 세상을 달리했던 수많은 이들의 한 맺힌 슬픔이 쓸쓸하고 서글픈 전쟁의 잔해물들이 돼 서늘하게 남아 있다. 전쟁기념관에서 무엇을 기념하며 무엇을 기뻐할 수 있을까.

'조국 해방전쟁 승리 기념관'에서 유럽 관광객들과 함께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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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이 끝나자 여성군관 해설원이 유럽 관광객들을 제쳐놓고 우리를 문앞까지 배웅해 준다. 아마도 남편과 내가 우리 말로 대화하는 것을 듣지 않았나 싶다. 군복을 입은 모습은 내가 처음 평양의 공항에 도착해 봤을 때와 사뭇 느낌이 달라다. 그때는 말이라도 붙이면 어떡하나 불안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내가 먼저 말을 걸어보고 싶었다.

"수고 하셨어요. 힘드셨지요?"
"일없습네다."
"군복이 참 잘 어울리네요."
"아, 그렇습네까? 감사합네다."

얼굴이 약간 붉어지며 수줍음을 탄다. 해설할 때의 당당함은 온데간데없고 영락없는 우리네 여성이다. 내가 북한에서 느낀 것 중의 하나는 사람들이 대부분 겸손하다는 점이다. 특히, 칭찬이라도 하면 남녀를 불구하고 수줍음을 많이 탄다는 것이다. 그들은 아주 다정하다.

따지고 보면 나는 '원쑤'의 나라서 온 사람

'조국 해방전쟁 승리 기념관' 여성군관 해설원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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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데서 오셨습네까?
"저... 저... 미국에서 관광 왔습니다."

북한사람들이 어디서 왔느냐고 물을 때마다 나는 약간 주저했다. 이들에게는 '원쑤'의 나라일 테니까. 겉으로는 아닌 것처럼 행동해도 속으로는 욕을 할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아, 재미동포십네까? 멀리서 오셨습네다. 어쩐지 남조선말을 해서 궁금해 하던 차였습네다. 요즘 남조선에서는 평양에 전혀 오지를 않는다 말입네다. 참관은 많이 하셨습네까?"
"금강산과 원산에 다녀 왔어요."
"조선에는 금강산 말고도 좋은 산이 많습네다. 칠보산도 있고, 묘향산도 좋고, 백두산은 정말로 웅장합네다. 조선 민족의 기상이 깃들여져 있는 산입네다. 이번에 백두산도 가십네까?"
"아니요. 이번에는 못 가고 혹시 다음에 또 오면 꼭 가 볼게요."

어느새 우리 안내원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까지 갔다. 수고했다는 말을 다시 하고 헤어지는 인사를 하는데... 군관답지 않게 거수경례 대신 손을 흔든다. 그런데 얼굴 표정이 아까 해설할 때와는 전혀 달라 보였다. 뭔가 아쉬운 표정. 그 여성군관 해설원은 스물서넛 정도 되지 않나 싶다. 동포의 정이 듬뿍 느껴진다. 또 가슴이 뭉클해진다. '그래, 꼭 또 올게'라고 마음속으로 다짐한다. 만약 그녀가 거수경례를 했다면 그런 뭉클함은 덜 했으리라.

여기가 텔레비전에 나온 그곳 맞아?

김일성 광장. 광장 왼쪽에 아이들이 매스게임 연습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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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을 나오니 마음이 환해진다. 마치 어두운 터널을 지나온 것 같다. 손잡고 나란히 줄지어 가는 학생들의 밝은 얼굴이 보인다. 전쟁이라는 단어조차 떠올리고 싶지 않다. 전쟁 기념관에서 불과 10분쯤 갔을까. 익숙한 넓은 광장이 나왔다. 김일성 광장이다.

텔레비전에서 북한 소식이 보도될 때면 항상 등장하던 그곳. 로봇 같은 군인들이 탱크나 미사일들과 함께 일사불란하게 행진을 하는 모습 대신 아이들이 매스게임 연습을 하고 있어서 처음에는 너무나 생소했다. 텔레비전을 보며 느꼈던 무시무시한 위압감은 온데간데없고 아이들이 뛰어놀면 딱 어울리는 그런 광장이다. 단지 한 건물 위에 김일성 주석의 사진과 북한 깃발이 있고, 광장의 규모가 엄청나 조금은 압도당하는 느낌이다.

연습하다가도 우리와 눈이 마주치면 손을 흔들며 반긴다. 정말 천진난만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이다. '어린아이와 같지 않고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저 아이들 모습 속에서 일깨워져 내 가슴에 새겨진다.

전쟁 후 복구된 대동강 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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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나무 강변을 지나면서 차안에서 본 피라미드 모양의 류경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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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를 따라 주욱 늘어서 있는 버드나무가 병풍 그림처럼 아름답게 펼쳐진다. 내 눈에 평양은 '공산 혁명의 수도'라기 보다는 차라리 아름다운 전원도시로 보인다. 버드나무 가지 사이로 외부공사를 마친 피라미드 모양의 류경호텔이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겉을 유리로 장식해 빛을 발하는 모습이 마치 동서양의 화폭을 새로운 감각으로 섞어 놓은 듯하다.

조금 더 지나니 대동강 철교가 보인다. '조국 해방 전쟁' 때 끊어졌던 철교 다리를 다시 연결시켜 놓았단다. 어린 시절 학교 때 책 속에서 본 듯하다. 끊어진 다리 위를 기어오르며 피란을 가는 사람들을 담은 그 사진 속 그 다리 같다는 생각이 든다. 대동강 철교를 바라보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역사 저편에서 잊히고 있는 희미한 장면을 애써 기억하며 사진으로나마 내 기억 속에 담는 것이 전부였다.

헉! 북한에도 이탈리아 레스토랑이 있다니

'해운 이딸리아 특산물식당'에서. 유럽 사람들이 현지 사람들보다 더 많이 있었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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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저녁에는 여행 일정에 잡혀 있는 식당에 가지 않기로 했다. 남편이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한턱내기로 했기 때문이다. 안내원들과 운전기사 외에 '조선국제려행사' 간부 두 분도 초대했다. 남편이 이 여행을 준비하면서 수집한 정보에 입각해 심사숙고해서 정한 식당이다. 정보에 의하면, 레스토랑 셰프들이 직접 이탈리아에 유학가서 배워 왔단다. 식재료 역시 모두 이탈리아에서 공수해 만든다고 했다.

우리 부부는 풍부한 재료로 만들어진 미국식 피자나 스파게티보다 절제된 정통 이탈리아 음식을 매우 좋아해 이 음식점을 택하긴 했지만, 절대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피자를 즐겨 먹는 남한이라면 모를까 '피자'라는 말이 어느 나라 말인지도 모를 이곳 북한에서 이탈리아 음식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호기심을 안고 우리 일행은 식당으로 향했다. '해운 이딸리아 특산물 식당'이라는 간판이 보인다. 식당 앞에는 우리가 타고 온 차량과 비슷한 버스들이 눈에 띈다. 역시 들어와 보니 유럽 사람들이 현지 사람들보다 더 많이 있었다. 제법 이탈리아 음식점 분위기가 나게끔 신경 써서 장식해 놨다. '해운 이딸리아 특산물 식당'은 극장식 음식점으로 무대에서는 스포티하게 차려입은 아가씨들이 피아노를 번갈아 치며 멋들어지게 칸초네를 부르고 있다. 속으로 노래를 따라부르고 있노라니 곧 식욕이 돌아 빨리 음식을 맛보고 싶어졌다.

'해운 이딸리아 특산물 식당' (피자 레스토랑) 에서. 왼쪽부터 남편, 설경이, 필자 운전기사 당원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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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초대한 간부들과 인사를 나눈 뒤 남편이 피자를 종류별로 하나씩 주문했다. 당원 운전사 아저씨는 이탈리아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다며 위층 한식점에 육개장을 주문했다. 음식을 기다리는 사이에 여행사 간부 한 분이 남편에게 물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이 식당을 아셨습네까?"
"아, 예. 인터넷으로 알아냈습니다."
"그러셨습네까? 그러지 않아도 우리 관광총국에서는 요즘 인터넷에 조선 관광에 대한 많은 정보를 올려 홍보에 크게 힘쓰고 있습네다. 아마 선생님께서도 이 식당에 대해 관광총국에서 유투브에 올려 놓은 것을 보고 아셨을 겁네다."

남편이 물었다.

"혹시 여기서도 인터넷을 쓰고 있나요?"
"아직 인터넷을 전체적으로 쓰고 있지는 않지만, 대학이나 연구소 그리고 정부기관에서는 다 쓰고 있습네다. 일반 인민들은 국내에서만 하는 인트라넷을 하는데 조만간 보완 문제만 해결되면 곧 모든 인민들도 인터넷을 하게 될 겁네다."
"제발 그렇게 됐으면 좋겠습니다. 미국으로 이메일을 좀 보내야 하는데, 원 답답해서..."
"아, 그러십네까? 호텔에 가시면 인터넷을 쓸 수 있게 돼 있습네다. 국제전화도 가능합니다. 저, 리 동무. 호텔에 가면 선생님 인터넷 하실 수 있게끔 안내해 드리오."

남편이 뭔가 계속 이야기하려고 하는데, 그만 음식이 나왔다.

심상치 않은 북한의 '이딸리아 삐짜'

'해운 이딸리아 특산물 식당'(피자 레스토랑)에서 셰프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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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 위에 오른 피자는 모양부터 심상치 않다. 이탈리아에서 맛있게 먹었던 모양 그대로 햄과 소시지로 장식돼 있었다. 기대 이상의 맛이다. 정통 이탈리아 피자 맛이다. 입으로 가슴으로 즐기며 기쁘게 식사했다.

옆에서 육개장을 먹고 있던 운전기사 당원 아저씨는 내가 너무 맛있다고 연신 감탄을 하며 먹으니 "어떤 맛인지 궁금하다"며 한 조각 먹어본다. 맛을 보더니 먹던 육개장을 옆으로 밀어두고 피자 맛에 빠져들고 말았다. 아마 마음속으로는 집에 있는 아이들을 생각하며 '언젠가 기회가 되면 꼭 한번 같이 오리라' 다짐하고 있을 것이다. 모든 부모의 마음은 똑같으니까. 너무나도 평범하고 일상적인 사건들이 왜 북한에서는 신기하고 감동적으로 내 가슴을 두드리는 것일까.

식당을 나오기 전, 우리는 셰프 아가씨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둘 다 "'이딸리아' 로마에서 요리기술을 익혔다"며 "'삐짜' 맛이 어땠냐"고 궁금해한다. 느낀 그대로 말해줬다.

노래 한 곡조에 담긴 애절함

고려호텔 회전식 라운지에서 <그리운 금강산>과 <가고파>를 부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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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정을 마치고 우리 자동차는 고려호텔에 도착했다. 우리 일행은 이탈리아 식당에서 맛봤던 낭만적인 분위기를 좀 더 즐기기 위해 호텔 맨 위층에 있는 360도 회전식 라운지에 올랐다. 꼭대기 라운지에서 내려다보는 평양의 밤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별빛이 아름다운 시골의 밤하늘을 바라보듯 은은한 운치가 있다. 우리 일행은 이미 회전식 창가에 기분을 싣고 밤하늘을 날고 있었다. 라운지는 조용하고 아늑하다. 피아노가 우리 앞에 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나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이 내게 노래를 불러달라고 한다. 거절할 수 없는 분위기라 나는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리운 금강산>을 불렀다. 이 노래를 평양의 한 호텔 라운지에서 부르게 될 줄이야! 꿈에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그 어떤 무대보다 내 마음을 감개무량하게 만들었다.

일행들이 한 곡만 더 불러 달라고 부탁한다. 예의상 청했겠지만, 김동진 선생님의 <가고파>를 불렀다. 북한땅에서 남쪽을 그리며 불러보는 이 노래 또한 내 가슴을 애절하게 했다. 모처럼 느껴보는 여유롭고 푸근한 밤이다.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오묘한 심정을 안고 객실로 향했다.

 

"학생 좀 일어나라우"... 남북은 똑같더라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⑧] 골프장과 먹자골목

12.07.03 21:38l최종 업데이트 12.09.02 09:52l
저는 오래 전부터 음악을 공부하고,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오로지 음악에 관한 지식만을 가르쳐왔습니다. 지금은 평범한 주부이자 아이들의 엄마로 살고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과 함께 북한에 가게 됐습니다. 호기심으로 떠난 여행이었지만, 저는 처음으로 우리 민족의 비극적 운명과 민족애를 느꼈습니다. 동시에 통일에 대한 염원이 생기게 됐습니다. 2011년 10월 이후 지난 4월에 열흘 동안, 그리고 5월에는 3주 동안 나진·선봉을 비롯한 북한 전역을 여행했습니다. - 기자말

기상 전화벨이 울리기 훨씬 전부터 남편이 분주하다. 소풍 가는 어린아이마냥 마음이 들떠서 미리 준비를 다 마친 듯하다. 낚시 못지않게 좋아하는 골프를 치러 가기 때문인가 보다. 남편은 "골프는 소위 '부르주아 운동'이기 때문에 공산국가에서는 하지 않는다"고 했다. 호기심 많은 남편은 도대체 공산주의 국가의 골프장은 어떻게 생겼을지 여행 떠나기 전부터 무척이나 궁금해했다.

평양에도 골프장이 있다니

평양골프장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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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30분 남짓 평양시에서 서쪽으로 내려가니 '평양 골프장'이라는 곳이 나온다. 재일 동포들이 세운 골프장이라는 것 같다. 너무나 한산해 아무도 없나 싶었다. 그런데, "미리 연락을 받았다"며 이곳 책임자로 보이는 아저씨가 어디선가 나타났다. 그의 첫인상은 서글서글했다. 그는 우리를 인도해 클럽하우스로 데려갔다. 남편은 "라커룸에 적혀있는 회원들의 이름이 한자로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 골프장 회원들이 대부분 조총련계 재일동포들이 아닌가 싶다"고 한다.

안내 데스크에는 어디선가 봤을 법한, 마음씨 좋게 생긴 아줌마가 우리를 반갑게 맞아 준다.

"두 분 다 치실 겁네까?"

나는 골프를 치는 것보다 얘기하고 노는 게 더 재미있다고 했다. 그러자 그 아줌마도 자기도 쳐 보지는 않았지만 그럴 것 같다고 한다. 한편, 책임자 아저씨는 남편에게 맞을 만한 골프채를 이것저것 고르고 있다.

수줍음을 많이 타는 얌전한 캐디 아가씨가 카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티 박스에 갔다. 남편은 소위 말하는 '대통령 골프'를 치게 될 듯하다. 드넓은 골프장에서 혼자 친다. 설경이와 만룡 안내원, 운전수 당원 아저씨와 나, 그리고 캐디 아가씨까지 다섯 명의 수행 비서를 옆에 데리고서 말이다.

우리 안내원들은 "골프 구경은 처음 한다"고 입을 모았다. 남편은 혼자만 치는 것이 미안한지 한 홀 한 홀 칠 때마다 골프의 규칙에 대해 설명한다. 남성들은 마치 자기가 치는 것처럼 즐거워한다. 그때, 운전수 당원 아저씨의 호기심이 발동한 모양이다. 자기도 한 번 해보면 안 되겠느냐며 골프채를 잡더니 공을 놓고 휘둘러 본다. 공을 맞히지도 못 했다. 몇 번 더 해보더니 이내 포기하면서 연신 고개를 갸우뚱한다. 나는 그 모습에 웃음을 참느라 혼쭐이 났다.

설경이의 작은 소망

평양골프장 캐디와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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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이 골프에 집중하는 동안 설경이와 나는 지칠 줄 모르고 얘기를 나눴다. 딸과 엄마가 나눌 법한 솔직한 이야기들이었다. 설경이는 영리하고 똑똑했다. 게다가 앞날에 대한 비전도 가슴에 꼭 품은 아이다. 설경이는 속이 깊고 따뜻해서 내 깊은 감정도 헤아려가며 이야기를 받아준다. 집에서 맏딸로 부모에게 효성을 다하는 착한 딸임이 분명하다. 이런 아이가 자신이 품고 사는 희망을 다 이룰 수 있기를 조용히 마음속으로 기도한다.

"제가 말입네다. 세계가 좁아진 이 시대에 태어나서 영어를 전공으로 공부했는데, 언젠가는 외국을 가봐야 되지 않겠습네까?"
"물론 그래야지. 우리 집에도 꼭 오고!"

나는 설경이의 말에 큰 소리로 맞장구쳤다.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암담한 현실이 서로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음을 느낀다. 어서 빨리 북한과 미국이 수교해 우리가 살고 있는 캘리포니아에 설경이가 올 수 있는 날을 고대한다.

남과 북의 지혜롭고 현명한 아이들이 과거에 엉킨 원망과 증오를 걷고 민족의 매듭짓기를 향해 서로 너그러운 사랑으로 포옹하고 다독여 하나가 되는 장면 또한 머릿속에 그려졌다.

평양골프장에서. 왼쪽이 설경이 그리고 오른쪽이 만룡 안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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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나이스 샷!"이라는 캐디 아가씨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캐디 아가씨는 의외로 영어를 쓴다. 아마 우리가 미국에서 왔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모든 것이 남한의 캐디들과 상당히 흡사하다. 복장도, 그리고 그린 위에서 공을 원래 지점보다 약간 더 홀에 가깝게 놓고서는 남편을 쳐다보며 살짝 웃는 애교 섞인 행동까지 모두. 뭐가 그리도 재미있는지 남편과 캐디는 그린 위에서 연신 웃는다. 순간, 나는 이곳이 북한이라는 것을 또다시 망각했다.

몇 홀을 지나자 앞에 다른 팀이 골프를 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외교관이나 비즈니스맨인 것처럼 보인다. 남편이 다가가 영어로 "혼자 치고 있는데 당신들을 지나쳐도 괜찮은지..."라며 양해를 구하자 선뜻 괜찮다며 허락한다.

마음씨 좋아 보이는 안내 데스크 아줌마가 저만치 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클럽하우스 식당에 우리의 점심 식사가 준비돼 있다고 알려주려나 보다. 그때, 우리 카트를 보더니 헐레벌떡 뛰어온다. 식당에는 크고 싱싱한 조개구이와 생선 튀김, 그리고 나물들이 가지런히 차려져 있다. 아줌마가 뛰어와 우리를 반길만 하다 싶었다. 오랜 시간 설경이와 얘기를 나눠서 그런지 배가 고팠다. 특히 남포에서 가져왔다는 조개는 맛이 참 좋았다. 때문에 두 접시를 더 부탁했다. 모두들 할 말도 잊어버린 것이었을까. 일행들은 음식 맛에 심취한 표정이었다.

그곳 사람들과 기약 없는 작별 인사를 나누고 우리는 또 다른 만남을 향해 자동차에 오른다. 남편이 캐디에게 손을 흔들며 못내 아쉬워한다.


평양 사람들의 하루, 그리고 그들의 삶

평양의 차와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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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로 돌아오는 길이 그새 눈에 익숙하다. 괴나리 봇짐을 짊어지고 가는 아줌마도, 모택동 모자를 쓰고 가는 아저씨도, 곱게 한복을 차려입고 새 구두를 신은 듯 어색한 걸음걸이로 걸어가는 소녀들도... 모두 각자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다.

나에게는 더 이상 이 사람들의 겉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이들도 나와 같은 생각과, 걱정과,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하느님의 창조물이기 때문이리라. 하느님은 이들에게 나와 똑같은 육체를 빚어주시고 영혼을 불어넣어 주신 뒤 "보기 좋았더라"라며 감탄하셨으리라. 내 영혼의 맑은 눈으로 보니 '철통 보안'의 두껍고도 단단한 강철담도 맑디맑은 연못 속처럼 훤히 들여다보인다. 그 맑고 따스한 빛이 관통해 내 영혼을 달군다.

우리가 탑승한 차량은 평양 기차역을 지나간다. 예전 흑백 사진 속의 멈춰 있었던 광경들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 속에서 돌덩이처럼 굳어 있었던 삶의 희로애락들이 알알이 흩어져 움직인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역동적인 모습이다.

호텔 앞에 도착하니 어느새 우리 동네 경비 아저씨마냥 친숙해진 벨보이 아저씨가 달려와서 반갑게 문을 열어준다. 달나라보다도 낯설었던 이곳의 모습과 상황들이 이제는 늘 함께 했던 것처럼 익숙하게 느껴진다. 작은 눈동자로 사물을 보는 것은 역시 한계가 있다. 마음의 눈으로 보니 이 세상 모든 것을 단번에 품어볼 수 있다는 것을 새삼 실감한다.

평양우동과 짜장면... 상상이나 해보셨나요

평양우동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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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방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우리는 호텔 앞, 소위 '먹자골목'이라고 할 수 있는 식당 거리를 구경했다. 각양각색의 식당들이 구색을 갖추고 양쪽 도로변에 쭉 늘어서 있다. 많은 식당들은 이름이 없다. 그저 '순두부집' '짜장면집' '불고기집' '흑맥주집' '단고기(개고기)집' '술집' '서양요리'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간혹 '평양 우동집' '창광산 국수집' '사계절 식당'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식당이 눈에 띈다.

식당들은 한산해 보인다. 설경이는 "지금은 식사 시간이 아니라서 사람들이 없고, 저녁 때가 되면 늦게까지 연다"고 설명한다.

같은 민족이 아니랄까봐 이곳 남성들도 퇴근길에 동료들끼리 늘 한 잔씩 술을 걸치고 집에 들어간다고 한다. 그리고 이 점이 아내들의 단골 '바가지' 메뉴란다. 설경이는 "남자 친구도 친구를 좋아하고, 같이 술 마시는 분위기를 즐겨 벌써 저도 바가지를 긁는다"고 설명해준다.

평양의 먹자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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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럽게 말해 주는 설경이의 얘기를 아무렇지 않은 듯 받아들이자니 나의 표정 관리가 잘 되지않아 당황스럽다. 내가 마음대로 정해 놓은 북한 사람들의 생활 계획표 속에는 이런 상황은 없었다. 절대 받아들여질 수 없는 부분이다. 애써 태연한 척하지만 내 마음은 매일매일 폭풍 속에 떠 있는 돛단배마냥 출렁인다. 이 여행이 끝날 때쯤이면 잔잔해지려나...

호텔로 돌아오는 길목에 '꿀빵' '남새빵' '지짐'이라고 써 놓은 작은 스낵 부스의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참 정겹다. 배낭을 멘 아줌마가 빵을 사고 있다. 그러고는 뛰어가듯 걸어간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아이들 생각에 터질 듯한 배낭이 나비마냥 팔랑팔랑 날아간다.

절도 있는 그녀의 손동작

여성 교통 안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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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당 창당기념일이 임박해 오는가 보다. 이날은 아침부터 평양시내 곳곳에서 축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수많은 색상의 한복 때문에 시내가 온통 물감을 흩뿌려놓은 듯 아름다웠다.

차들도 많이 다닌다. 평양에 와서 보고 느낀 것들 중의 하나는 거리 위의 차들이 텔레비전을 통해 봤던 것보다 훨씬 많다는 점이다. 도로에는 어김없이 '여성 교통 안전원'이 있다. 외국 관광객들에게 평양의 명물로 꼽힌다는 여성 교통안전원. 이들이 교통 정리를 하는 모습은 마치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무희 같기도 하다. 또한, 절도있는 손동작은 마치 거리의 자동차들을 데리고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같기도 하다.

남편이 여성 교통 안전원에게 다가가 "사진을 함께 찍을 수 있겠느냐"고 부탁한다. 머뭇거리던 여성 안전원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지금은 근무시간 이라서 그럴 수가 없습네다. 규정 위반이라서..."

'규정 위반'이라는 여성 교통 안전원의 말에 남편은 얼른 인사를 하고 물러섰다. 말하는 교통 안전원의 표정에서 '그렇게 해 드리면 좋을 텐데...'라는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교통정리 하는 모습이 너무 신기해 우리는 인도에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설경이가 "저 모습이 그렇게 재미있습네까?"라고 묻는다. 우리가 계속 구경을 하고 있자 교통 안전원이 다가와 "저... 혹시 교대시간까지 기다리실 건가요? 아직도 많이 남았는데..."라고 한다.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는 얼른 그곳을 떠났다. 근무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를 배려해 준 여성 교통 안전원의 마음이 고맙게 느껴진다.

처음으로 타본 북한 지하철... 어떻게 생겼을까

평양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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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하철을 한 번 타 보기로 했다. 끝도 보이지 않는 지하철 에스컬레이터가 내 '고소공포증'을 유발한다. 마치 놀이공원의 아찔한 놀이기구를 탄 듯. 낭떠러지의 절벽에 매달린 듯한 서늘한 가슴으로 내려갔다.

다 내려와 보니 내 눈앞에는 수십 년 전에 만들어졌다고 하기에는 견고한 기둥과 화려한 장식의 지하철 승강장이 나온다. 은은한 불빛 속에서도 벽화와 벽에 붙어있는 조각들이 시선을 집중시킨다. 웅장한 어느 동굴 안을 구경하듯 중압감을 느끼게 한다. 모든 역들이 이렇게 화려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우리에게 제일 멋진 역을 보여 주지 않았나 싶다. 외국 관광객들에게 좋은 것만을 보여 주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일일 테니까.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게시판에 붙어 있는 신문을 보고 있다. 어두침침한 곳에서 눈들을 신문에 고정시켜 놓고 정신없이 읽고 있다.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을 많이 쓰는 것을 보니 삶을 대하는 마음이 적극적이며 능동적으로 보인다. 얼핏 보니 제호가 <로동신문>이다.

지하철 안. 사진을 찍으려하자 아기 엄마가 환한 웃음을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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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 안은 크게 붐비지 않았다. 할머니 한 분이 타시더니 다른 곳에 빈자리가 많음에도 출입문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는 여고생에게 다가간다. 그러자 할머니는 다짜고짜 "좀 일어나라우"라고 한다. 여학생이 군말 없이 "네"하며 벌떡 일어난다. '저 할머님 지하철 막말녀한테 걸리면 어쩌시려고'라고 생각하며 남편을 쳐다봤다. 그러자 남편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웃음을 짓는다.

서너 정거장을 지난 후에 지하철을 갈아탔다. 이번 전철 안에는 서울의 출퇴근 시간처럼 승객들로 꽉 차 있었다. 이 와중에 남편이 사진을 찍겠다고 카메라를 들이대니 고맙게도 한 아기 엄마가 아기의 얼굴을 카메라 쪽으로 향해 준다.

"녀사님! 춤 실력이 대단하십네다"

개선문 광장에서 춤추는 대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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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한 지하철역처럼 우리는 떠밀리듯 내렸다.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거리면서 내리는 우리의 모습이 어색했는지 지나가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실쭉 웃으며 쳐다본다. 간신히 지하도를 나와보니 이 지하철역이 유독 붐볐던 이유를 알 것 같다. 광장 곳곳에, 놀이 공원 앞에는 주말을 즐기러 나온 사람들로 가득하다. 여행 첫날 지나갔던 '개선문' 앞 광장이다.

광장 곳곳마다 포크댄스를 추는 모습들이 일사불란하다. 우리 일행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춤추는 광장으로 향했다. 그 큰 광장에는 춤추는 남녀 대학생들로 꽉 차 있었다. 우리 부부는 설경이의 권유로 포크댄스 대열에 합류했다.

개선문 광장에서 춤추는 대학생들. 그들과 함께 어울려 춤을 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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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크댄스가 끝난 뒤 귀가하는 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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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등학교 체육 시간에 교생 실습을 나왔던 여 선생님이 포크 댄스를 가르쳐 주던 게 생각났다. 흥에 겨워 창피한지도 모르고 우왕좌왕 따라 췄다. 마음은 원하고 있으나 몸이 잘 따라와 주지 못해 춤추는 다른 학생들에게 폐만 끼친 것 같다.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살펴보니 많은 외국 관광객들이 함께 어우러져 춤을 추고 있다. 일부는 우리의 엉거주춤한 춤을 구경하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나는 망신스러워 얼른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설경이는 쫓아오면서 "녀사님! 춤 실력이 대단하십네다. 많이 춰 보신 실력입네다"라며 놀려댄다.

이런 설경이의 놀림에 맞장구를 치면서 한마디 거들 것만 같은 남편을 쳐다보며 두 눈을 찡긋했다. 내가 어려서 국가 사절단으로 외국을 돌아다니며 춤을 췄던 일이나, 하나밖에 없는 내 언니가 무용교수라는 사실이 알려질까 싶었다. 남편은 그 의미를 알아차린 듯 근질근질한 입을 단속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보채는 아이 때문에 부부는 옥신각신... 북한도 똑같네

서커스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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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광장에서 10분 남짓 나오니 멋진 공연장이 나온다. 북한의 교예(서커스) 공연장이란다. 북한은 어려서부터 교예에 재능있는 아이들을 선별해 체계적인 훈련을 시키고 있으며, 교예는 사람들이 선망하는 직종 중 하나라고 한다. 또한 실력도 세계 최고라서 수많은 국제대회에 나가 1등을 차지한단다.

이날이 토요일이라서 그런지 공연장 앞에는 교예를 구경하러 온 사람들로 붐빈다. 지방에서 단체로 온 것 같기도 했다. 가족 단위가 많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온 한 부모는 교예 포스터를 가리키며 아이에게 열심히 설명을 해주고 있다. 아이는 부모의 설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빨리 보러 들어가자고만 한다. 아빠가 보따리에서 과자 봉지를 꺼내더니 "이 과자 먹으면서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보채는 아이를 다독인다. 엄마는 "아이 버릇 나빠진다"며 과자 봉지를 다시 보따리에 넣고 참을성을 길러야 한다며 아이에게 뭐라고 한마디 한다. 그러자 아빠는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다. 부부 사이에 의견 대립이 생긴 듯하다. 보채던 아이가 자기 때문에 엄마 아빠가 언성을 높이자 보채던 것을 뚝 그치고 엄마 아빠를 말린다.

우리 일상에서 흔히 겪고, 흔히 마주했던 모습은 새삼 사람 사는 정겨운 냄새로 푸근하게 다가온다.

교예장 안은 바깥서 보던 것보다 훨씬 크고, 멋있게 꾸며져 있다. 솔직히 말해서 나의 뇌리에 박혀 있는 '서커스'라는 단어는 듣기만 해도 서글픈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아마 서커스를 주제로 한 영화나 이야기들은 어느 하나 다를 바 없이 서글픈 역사 속 사람들의 이야기로 꾸며져 있어서가 아닌가 싶다. 그런 스토리에서 나오는 서커스단의 어설픈 천막 공연장 또한 그 서글픔을 몇 배로 증폭시킨다.

그런데 이곳 북한 서커스단은 이런 내 선입견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공연장도, 단원들도 최고의 수준이며 교예 배우들은 사람들의 존경과 부러움의 대상이 된단다. 배경 음악도 달랐다. 오케스트라가 배경 음악을 직접 연주하고 있다.


두 시간가량의 공연 시간 동안 우리는 수준 높은 기술과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아슬아슬한 묘기들 때문에 숨 한 번 크게 쉴 수가 없었다. 온몸에 힘을 주고 긴장했던 탓인지 공연장을 걸어나오는 순간 현기증이 난다.


바깥 공기를 마시고 난 뒤에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고 사람들이 선망하는 직업이라지만 저토록 어렵고 위험한 동작을 최고의 수준으로 익히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인내하며 땀을 흘렸을지 상상이 된다. 공연한 사람들이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도 요즘 시대에는 쉽게 구경할 수 없는 귀한 공연을 봤음은 틀림없다.


다음날은 북한에서 맞는 첫 주일이다. 내게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관광 일정 중 하나인 평양의 교회에 예배를 드리러 간다. 그리고 교회에 가기 전 김일성 주석의 시신이 안치돼 있는 '금수산 궁전'을 관람한다고 한다.


평양의 교회에서 예배를 본다는 생각에 잠을 이룰 수가 없다. 내일이 너무나 기다려진다.

 

"이 교회 가짜죠?" 평양 목사의 반응은...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⑨] 금수산궁전과 봉수교회

12.07.07 21:06l최종 업데이트 12.07.07 21:42l
저는 오래 전부터 음악을 공부하고,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오로지 음악에 관한 지식만을 가르쳐왔습니다. 지금은 평범한 주부이자 아이들의 엄마로 살고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과 함께 북한에 가게 됐습니다. 호기심으로 떠난 여행이었지만, 저는 처음으로 우리 민족의 비극적 운명과 민족애를 느꼈습니다. 동시에 통일에 대한 염원이 생기게 됐습니다. 2011년 10월 이후 지난 4월에 열흘 동안, 그리고 5월에는 3주 동안 나진·선봉을 비롯한 북한 전역을 여행했습니다. - 기자말

일요일이다. 교회에 가기 앞서 김일성 주석의 시신이 보존된 '금수산 궁전'을 먼저 참관한다고 한다. 전날 밤, 설경이는 "가능하면 단정한 옷차림을 부탁한다"고 일러줬다. 마침 교회에 가기 위해 준비해 온 정장이 한 벌씩 있어 다행이다.

설경이가 양복을 입은 남편을 보더니 "야! 정말 멋있습네다. 아주 위신 있어 보이십네다"란다.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다고. 그동안 남편은 골프 모자를 눌러쓰고 덜렁거리며 다녔다. 이날 정장을 입은 남편을 보니 내 눈에도 조금은 차분해 보인다.

엄숙한 분위기의 금수산 궁전

김일성 주석의 시신이 안치돼 있는 '금수산 궁전' 앞에서 남편과 함께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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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산 궁전은 오전 9시부터 참관할 수 있으며 목요일과 일요일에만 대중에 공개된다고 한다. 그곳에 도착한 우리는 귀빈 대기실로 안내됐는데, 그곳에는 이미 수많은 서양인 관광객들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동양인은 우리 둘뿐이다. 오전 9시가 되면 우선 외국관광객들이 먼저 입장하게 된단다. 평양에서 숱하게 봤던 중국 관광객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이 들어가는 입구가 따로 있는지, 아니면 일반 북한 주민들과 함께 입장하는지 의문이다.

대기실을 나와 무빙워크를 탔다. 끝도 없이 한참 동안 가는 긴 복도. 복도 주위에는 대리석 장식의 벽화와 아름다운 꽃들이 있어 지루한 줄 모르고 본관까지 갈 수 있었다. 우리는 카메라뿐 아니라 모든 지참물을 보관소에 맡긴 뒤 금속 탐지기를 통과했다. 이어 살균실 같은 곳(사방에서 센 바람이 나왔다)을 통과하니 시신이 안치된 메인 홀이 나온다.

주위의 어두운 불빛과 대조되게 시신대를 환하고 화려하게 비추는 조명, 그리고 잔잔한 음악과 함께 엄숙한 분위기가 참관객을 저절로 숙연하게 만든다. 내 전공이 음악인지라 자연스레 음악에 관심이 갔다. 진취적인 리듬에 화려한 멜로디, 그리고 적당한 템포와 은은한 음향 조절이 있었다.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속삭이듯 설경이에게 물었다.

"지금 나오는 저 연주곡이 뭐야?"
"<김일성 장군의 노래>라고 하는데, 원래 박자보다 느린 속도로 편곡된 연주 록음입네다. 김원균이라는 음악가가 작곡했는데 우리나라의 애국가도 그 분이 작곡했습네다."

어떤 노래인지 노랫말과 함께 원곡을 들어보고 싶은 호기심이 생긴다.

외국 관광객들 뒤로 조총련계 재일교포 학생들이 김일성 주석의 시신이 안치된 관 주위를 돌며 정중히 절을 한다. 일부는 눈물을 흘리고 있다. 우리와 함께 들어온 서양인 관광객들도 숨소리조차 낼 수 없는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시신 주위를 돌며 참배한다. 자유분방한 그들이 이곳에서는 말 한마디도 꺼내지 않는다.

오열하던 평양시민의 모습... 진실 아니었을까

모란봉 극장에서 바라 본 김일성 주석 동상.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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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 홀을 나와 그 옆에 있는 유물 전시관을 참관한 후 다시 무빙워크를 타고 나왔다. 북한 주민의 행렬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다. 남성들은 양복 또는 인민복을 입었고, 여성들은 대부분 한복 차림이다. 어느 누구 하나 말을 하거나 자세를 흩트리지 않는다. 숨소리마저 조심하는 것 같은 숙연한 느낌이다. 이들의 엄숙하고 진지한 모습에서 그리움의 연민 속에 애절한 참배의 마음이 보이는 것 같다.

김일성 주석 서거 당시 오열하면서 쓰러지는 평양시민의 모습을 텔레비전 뉴스로 봤다. 그때 나는 '저 모습은 진실일 수가 없다. 틀림없이 가식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모든 언론도 그렇게 보도했다.

지금 내가 이곳 평양에 와서 느끼는 것은 북한 주민은 진심으로 김일성 주석을 존경하고 있으며, 김일성 주석의 서거 당시 평양시민의 통곡하는 모습은 아마도 진실이었을 것이라 는 점이다. 박정희 대통령,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의 장례 행렬 속에 가슴 치며 오열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았는가.

밖으로 나오니 건물 앞 광장을 장식하는 인공 호수 위에 백조 한 쌍이 떠다닌다. 위축됐던 심장이 활짝 펴진다.

반신반의로 향한 북한 교회

교회가는 길에서 본 평양시내 모습.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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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이번 여행에서 내가 가장 기대하던 교회를 방문하게 됐다. 떠나기 전 남편은 미국 여행사에 "아내가 기독교인인데 평양에도 교회가 있다고 하니 일요일에 예배를 볼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알기로 북한에서는 종교 생활이 금지돼 있고, 전도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알고 있다. 게다가 종교를 가졌다가 적발이 되면 감옥에 간다고 들었다. 기독교인이 있긴 하지만, 비밀리에 지하 교회서 예배를 본다고 들었다.

나는 과거 평양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기독교 활동이 활발했던 곳이었는데, 공산주의가 들어오면서 기독교 활동이 완전히 소멸된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 부부는 평양에 교회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외부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일 것'이라 반신반의하면서 주일 예배를 위해 교회를 방문하기로 했다.

북한으로 여행을 떠나기 전, 우리가 평양의 교회에 간다고 하니까 주위 사람들은 그 교회가 진짜 교회인지 가짜 교회인지 잘 살펴보고 오라고 부탁했다. 때문에 일종의 사명감을 안고 이 미션을 수행해야 한다. 막상 이 나라에 와서 보니 내 나름의 예리한 더듬이가 상황 판단에 착오를 많이 일으켜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을지 자신감이 점점 상실된다.

교회로 가는 평양시내 길. 잔디 위에서 아이들이 뛰어 놀고 있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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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교회든 가짜 교회든 무슨 의미가 있으랴. 나는 적어도 진심으로 내가 예배드리는 그 시간만큼은 그 자리에 하느님이 함께하심을 믿는다. 때문에 그 예배당에서 기도를 할 수만 있다면 나의 역사적인 임무 수행을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흥분된 마음으로 평양 시내에 있는 봉수교회로 향했다.

우리가 묵고 있는 호텔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교회가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우리 일행이 금수산 궁전에 들른 데다 그곳에서 생각보다 오래 머물렀다. 우리는 예배 시간에 늦을 것 같아 초조한 마음으로 교회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교회로 가는 주택가의 길이 도로수리 공사로 막혀버렸다. 사실 말이 공사지 내 눈에는 동내 주민 몇 명이 나와 험하게 망가진 집 앞 도로를 임시 방편삼아 땜질하는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한 아줌마가 집에서 들고 나왔는지 양동이에다 시멘트를 개고 있다. 그 옆에서 한 아이가 시멘트를 가지고 뭔가를 만들며 논다. 심각한 공사도 아니고, 그저 무료한 시간을 보내며 놀이 삼아 시간을 보내고 있는 듯한데, 마치 큰 공사라도 하는 것처럼 자동차를 보더니 놀던 아이까지 나와 막으며 지나갈 수 없단다. 단호한 얼굴로 손짓까지 한다. 한 아저씨가 어디선가 돌을 가져오더니 금지구역 표시를 하는 것마냥 도로를 가로질러 가져온 돌들을 띄엄띄엄 줄지어 놓는다.

어떻게라도 얘기해서 살짝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른바 '당원'이라는 운전수 아저씨는 차 밖으로 나가 그 사람들과 몇 마디 나누고는 끽소리도 못한 채 덜커덩덜커덩 오던 길을 다시 되돌아간다. 우리 차는 이리로 저리로 교회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무방비 상태로 맞닥뜨리고 돌아서 가는 길은 마치 산동네 재개발 구역처럼 허름하고 누추했다. 골목길 주택가의 초라한 모습에 혼미해져 버린 머릿속을 진정시키느라 교회에 도착할 때까지 어디를, 무슨 목적으로 가고 있는지 잊고 있었다.

여기가 바로... 북한 교회입니다

정면에서 바라 본 평양의 봉수교회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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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한 잿빛 안갯속에 교회가 위엄이 서려 있는 웅장한 성처럼 보인다. 주위 환경과 어색한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어울린다. 마치 인쇄체로 써 내려가던 글귀에 필기체로 몇 단어를 써 놓은 듯한 어울림이다. 우리 일행은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교회에 도착했다.

우리가 닿았을 때, 마침 예배가 끝났나 보다. 사람들이 우르르 계단을 내려온다. 설경이가 갑자기 뛰어가더니 어떤 아주머니 한 분에게 정중히 인사를 드리며 다정하게 얘기를 나눈다. '조선 국제려행사'에서 같이 일하는 친구의 어머니란다. 그 친구는 우리 일행이 오늘 봉수교회에 간다니까 "혹시 우리 엄마를 보면 안부를 전해달라"고 했단다. 그 친구도 요즘 유럽 관광객들을 안내하느라 집에 못 간 지 오래됐다고. 설경이 친구의 어머니는 이 교회 성가대서 피아노를 치신다고 한다.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 평양 봉수교회 성도들. 김일성 주석의 배지를 달고 있지 않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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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을 내려오는 사람들의 얼굴빛이 환하다. 가짜 교회에서 가짜로 예배를 보러온 사람들이라고 하기에는 꾸밈이 없다. 얼굴빛이 밝고 생기가 넘친다. 이날 이곳에 예배를 드리러 온 외국 관광객은 우리밖에 없는데, 설마 이 예배 시간도 맞추지 못한 우리에게 가짜 성도들을 출연시키지는 않았으리라.

한 가지 특이한 점은 북한 사람들이라면 모두 왼쪽 가슴에 달고 다니는 '김일성 주석 배지'를 거의 모든 신도들이 달고 있지 않은 것이었다. 교회에 올 때는 배지를 달지 않아도 되는가 보다.

'조선 그리스도교 연맹'이 준 선물

평양 봉수교회 담임 목사님.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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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예배는 끝났지만 예배당 안에서 기도라도 하고 갈 마음에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 목사님께서 예배당 안에서 나오시다가 우리를 보시고는 반갑게 맞는다. 목사님께서 자상하게 교회를 안내해 주신다. 이 교회 건물의 땅은 국가에서 제공했고, 기금은 지난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남한에 있는 교회들이 보태줘 원래 있던 교회 건물을 증축하고 설비를 더 갖췄다고 한다. 교회에는 그랜드 피아노가 있었으며 음향 시설과 영상 시설도 현대식으로 아주 잘 갖춰놓고 있었다.

목사님은 "많은 남한 사람들도 이 교회에 와 예배도 드리고, 찬양도 하고 갔다"고 설명했다. 그래서인지 한국의 교회에 와 있는 것처럼 친근하고 마음이 편해진다.

봉수교회에서 기도하는 필자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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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사진을 찍느라고 교회 안 여기저기를 다니는 사이, 나는 의자에 앉아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사실 상상도 해보지 않은 일이었다. '공산혁명의 수도'라는 평양의 한복판에서 예배를 보다니! 눈물이 고인다.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고 오직 예수님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처럼 뜨거운 마음으로 '이 땅이 열리고 남과 북이 하나 돼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길' 간절히 기도해 본 적이 없었다.

목사님은 내가 어린 시절 다니던 교회의 목사님처럼 친근하다. 생각해보니 그분도 북쪽 사투리를 쓰시곤 했다. 목사님은 '조선 그리스도교 연맹'에서 번역한 성경과 찬송가책을 선물로 주셨다. 성경을 우리말로 풀이해 놓아 이해하기가 수월했다. 목회 활동이 궁금했다. 목사님께 말을 걸었다.

"전도는 어떻게 하시나요?"
"주로 개인적으로 많이 합네다. 우선 열여덟 살 미만의 아이들한테는 (전도를) 못하게 돼 있습네다. 왜냐하면 아직 판단할 수 있는 나이가 안 되기 때문입네다. 전도는 주로 봉사활동을 통해 하지요. 남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하면 사람들은 자연히 교회에 관심을 갖게 되니까니..."

동양의 예루살렘이었던 평양

평양 봉수교회 담임 목사님으로 부터 성경책과 찬송가책을 선물 받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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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이 말씀은 세계 어느 나라의 교회에도 다 해당되는 말이다. 아무리 길거리에서 전단을 나눠주며 "예수 믿으세요, 예수 믿으세요"라고 해봐야 소용없다. 실천이 없는 기독교인들을 바라보는 보통 사람들은 아예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다. '아마 나도 신앙과 생활이 분리돼 있는 그런 부류의 기독교인이 아닐까'라고 반성해 본다.

평소에도 '실천하는 신앙'이라는 말을 귀가 따갑도록 많이 들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 평범한 진리를 "진짜 교회 인지, 가짜 교회인지" 헤아려 보러 온 이 교회에서 깨닫게 되는 것인지...

목사님의 설명에 따르면 북한에도 가정 교회가 꽤 있다고 한다. 예전부터 믿어오던 가정들은 꼭 교회에 나오지 않더라도 가정에서 예배를 본다고 한다. 목사님의 말씀이 끝나기가 무섭게 남편이 평소에 품고 있던 폭탄 발언을 해버렸다.

평양 봉수교회 담임 목사님과 헤어지며 교회 앞에서. 왼쪽 부터 남편, 목사님, 그리고 필자.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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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 이 교회 진짜 교회 맞습니까? 혹시 가짜 교회 아닙니까?"

내 머릿속에서 폭탄이 "쾅!"하고 터진 듯했다. 목사님께 너무도 죄송했다. 설사 이 교회가 가짜 교회며 이 목사님이 진짜 목사님이 아니라고 해도 그렇지 도저히 할 수 있는 수준의 질문이 아니었다. 수습이 안 되는 상황. 그런데 다행히도 목사님이 초연한 미소로 너그럽게 실타래를 풀어주신다. 목사님의 말 속에는 신념이 가득 차 있었다.

"그렇지 않습네다. 하루빨리 북과 남의 교회가 한 마음으로 서로 교통하며 예배 볼 수 있을 날을 내 살아 생전 희망하며 기도할 뿐입네다."

그래, 무슨 말이 필요할까. 이런 질문을 받을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목회를 하자니 세상의 말과 생각으로 장황하게 설명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진짜 교회인지 가짜 교회인지는 북녘땅에서만 해야 할 질문이 아니다. 번지르르하게 교회의 탈을 쓰고 있는 세상의 모든 교회들에 해야 할 질문이다. 과연 내 마음의 성전은 진정 거짓 없는 아름다운 성전이라 떳떳이 말할 수 있을까.

한 때 바티칸으로부터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렸다는 평양. 봉수교회에서의 짧은 기도는 너무나도 강렬히 영혼에 남아 내 가슴에 파장을 일게 한다.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

저는 오래 전부터 음악을 공부하고,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오로지 음악에 관한 지식만을 가르쳐왔습니다. 지금은 평범한 주부이자 아이들의 엄마로 살고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과 함께 북한에 갔습니다. 호기심으로 떠난 여행이었지만, 저는 처음으로 우리 민족의 비극적 운명과 민족애를 느꼈습니다. 동시에 통일에 대한 염원이 생겼습니다. 2011년 10월 이후 지난 4월에 열흘 동안, 그리고 5월에는 3주 동안 나진·선봉을 비롯한 북한 전역을 여행했습니다. - 기자말

교회를 떠나 평양 시내로 돌아오는 차 속에서 물끄러미 차창 밖을 내다봤다. 수많은 생각에 잠긴다. 설경이가 조용히,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어본다.

"녀사님, 어데가 편찮으십네까?"

내 표정이 몹시 어두웠나 보다. 자동차가 김일성 광장 앞에 도착해서야 나의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영혼의 간절한 바람이 현실의 시간 앞에서 잠시 나래를 접을 수 있었다.

다시 만난 김일성 광장, 그리고 선조들의 질책

주체사상탑에서 바라 본 김일성 광장. 왼쪽 하단이 조선 미술 박물관. 사진 하단에 롤러스케이트나 스케이트 보드를 타는 아이들이 작게 보인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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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에서 매스게임을 연습하던 생기발랄한 아이들과 이들을 지도하시는 선생님의 모습을 이날은 볼 수 없다. 일요일이기 때문인가 보다. 큰 광장이 텅 비어있어 쓸쓸해 보인다. 아이들이 없는 광장에 서늘한 기운이 감돈다. 텔레비전에서 봤던 군인들의 퍼레이드가 머릿속을 지나간다. 과거에 봤던 이 광장에 대한 기억의 파편이다.

이제는 이 광장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다면 친구들과 재잘거리며 뛰놀고, 선생님 말씀에 귀 기울이며 연습하다가도 우리를 보며 손을 흔들던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광장으로, 회색빛 기억 위에 밝은 무지개 색을 덧칠해 가슴속에 간직할 것이다.

우리 부부는 광장 옆에 있는 '조선미술박물관'을 구경하러 들어갔다. 박물관 안에서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해설원이 활짝 웃는 얼굴로 걸어 나오며 우리를 반긴다.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비롯해 역사적으로 귀중한 미술 작품들이 빼곡하게 전시돼 있었다. 나 같은 미술 문외한이 어찌 우리 선조들의 예술성을 이해하겠는가. 이 미술 작품들이 내게 주는 감동은 그저, '너희들은 남이 아니노니...'라는 선조들의 소리 없는 질책뿐이다.

해설원이 정성을 다해 작품마다 설명을 해줬지만, 전시물들이 조금은 어설프게 보관돼 있는 듯해 걱정됐다. 이때, 남편이 또 한소리 한다.

"이렇게 허술하게 전시를 해 놓으면 얼마 가지 않아 작품들이 훼손될 텐데 대책을 강구해야 하지 않아요?"

남편은 마치 시찰 나온 사람처럼 지적하고 넘어간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하고픈 말을 분명히 하고 넘어가는 점이 남편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또 한 번 나는 당황할 수밖에. 서글서글하게 생긴 해설원은 잠시 멈칫하더니 입을 뗐다.

"좋은 충고 감사합네다. 그러나 선생님, 귀한 작품을 이토록 장애물 없이 가까이에서 볼 기회도 없으실 텐데 걱정해 주시는 마음 잠시 덮어 두시고, 편안한 마음으로 자세히 마음껏 감상하십시오."

"집에 가면 남편한테 한바탕 해야겠습네다"

조선 미술 박물관 해설원과 함께. 이 붙임성 많은 해설원과의 인연은 2차, 3차 여행으로 이어진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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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원은 작품 설명 중간중간에 농담도 잘 한다. 지금까지 만난 해설원 중에서 가장 재치와 유머가 넘치고 붙임성이 많은 해설원이었다.

"선생님, 부인께서 오십이 넘었다는데, 저렇게 젊게 보이니 남편을 잘 만나서가 아닌가 싶습네다."

기분 좋으라고 한 농담을 남편은 "참, 듣던 중 옳은 말을 여기서 듣네!"라며 기고만장이다. 이때다 싶은지 자화자찬하느라 여념이 없는 남편. 1년에 한두 번 연중행사처럼 별미를 요리한답시고 온 부엌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놔 나는 뒤치다꺼리하느라 바쁜 상황을, 매일 나를 위해 만찬을 차려주는 것처럼 표현했다. 남편의 자화자찬이 끝나자 해설원은 감격하는 시늉을 하면서 이렇게 받아친다.

"이렇게 자상하신 남편이라면 나는 업고도 다니겠습네다. 당장에 오늘 집에 가면 남편한테 한바탕 해야겠습네다."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사람 사는 이야기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대화가 북한 사람에게서 나올 법한 얘기란 말인가. '남편을 잘 만났다'라는 얘기는 내가 태어난 한국이나 내가 지금 살고 있는 미국에서도 일부 여성들 입에서나 나올 법한 말이다. 북한 여성들은 '인간의 행복은 당과 조국에 달려 있을 뿐, 여자의 행복이란 남편과는 무관한 일'이라고 생각할 것으로 믿고 있던 내게 이 여성 해설원의 농담은 충격 그 자체였다.

더 이상 이 사회는 내가 건너 배우고, 간접적으로 들어서 알고 있던 그런 사회가 아니라, 내가 아는 인간 사회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단지 '잘 만난 남편'이란 어떤 남편인지 같은 여자로서 궁금할 따름이다.

롤러 스케이트를 타는 아이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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킥보드를 타는 아이의 티셔츠에 놀랍게도 영어와 디즈니 캐릭터가 그려져 있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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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여성 해설원은 전시장을 둘러보는 내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많은 얘기를 나눈다. 나는 작품 감상보다 그들의 대화 내용에 더 귀를 기울였다. 남편은 이 해설원과 헤어지면서도 농담을 하며 작별 인사를 나눈다. 그 농담은 쉽게 이뤄질 수 없을 것처럼 들렸다.

"다음에는 우리 둘만 조용히 만납시다."
"기다리겠습네다. 그런데 선생님, 오늘 녀사님으로부터 무사하실 수 있을지 심히 걱정이 됩네다."

여성 안내원은 내게 눈을 찡긋했다. 우리는 끝까지 웃음 속에서 작별인사를 나눴지만, 우리의 뒷자락에는 헤어짐의 아쉬움만이 끌려오고 있었다. 미술관 앞에서 광장을 바라보니 언제 나왔는지 아이들이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있다. 이제 이 광장은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군사 퍼레이드 장면과 함께, 매스게임 연습을 하는 아이들과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아이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삶의 냄새를 물씬 풍기는 조선미술박물관 해설원의 모습이 어우러져 내 마음속 깊이 담기게 될 것이다.

공연보러 온 사람들... 스타디움은 북적북적

평양 구경 온 할머니와 손자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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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아니면 할 수 없다'고 설명되는 <아리랑> 공연을 보러 간다. 멀리서 보니 연꽃 모양을 한 스타디움 지붕이 보인다. 15만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세계에서 제일 큰 경기장이라고 설경이가 힘주어 얘기한다. 가까이 도착하고 보니 과연 세계에서 제일 큰 경기장이라 할만큼 규모가 엄청나다.

우리는 공연 예정시간보다 1시간 정도 일찍 도착했다. 그런데 이미 많은 관광객들과 구경 온 사람들로 경기장 앞은 시끌벅적. 북한에 전기가 부족하다지만 이곳 경기장 앞은 마치 축제 마당처럼 불빛으로 화려하다. 분수대에서 각양각색의 불빛을 받으며 분수쇼가 진행되고 있다.

꼬부랑 할머니가 어린 손자의 손에 이끌려 굽은 허리를 한 손으로 부여잡고 힘겹게 쫓아가신다. 아이가 분수대 앞에 가더니 흥에 겨워 펄쩍펄쩍 춤추며 뛴다. 힘겹게 쫓아온 할머니도 큰 호흡을 몇 번 내쉬시더니 마냥 귀여운 손자의 모습에 손뼉을 치면서 장단을 맞추신다. 축제 기간 동안 멀리서 <아리랑> 공연을 보러 평양에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와 아이, 둘 다 등에 부풀어 터질 것 같은 배낭이 있었다.

옆에서 사진을 찍던 남편이 속상해한다. 카메라의 배터리가 나갔단다. 찍고 싶은 장면들이 많은데, 그럴 수 없게 돼 무척이나 안타까워한다. 나는 "머리와 가슴으로 담아 가는 것이 더 의미 있다"는 낭만적인 말로 위로해봤지만,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남편에게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 듯.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 아닌가. 눈동자 조리개를 활짝 열고 최선을 다해 머릿속 카메라에 담아가는 수밖에...

고난의 행군 떠올리다 눈물 흘린 설경이

공연시간이 임박해 오니 어디서 몰려 왔는지 스타디움 주변은 인산인해를 이룬다. 내 옆으로 한 그룹의 군인들이 지나간다. 설경이가 군인들이라고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그저 군복 같은 교복을 입은 남녀 중학교 학생 한 단체가 구경을 하러 온 것인 줄 알았을 게다. 너무 체격이 왜소하고 작아 어린 학생들처럼 보인다. 일부 군인들의 키가 내 눈에는 150cm 정도로 보인다. 이들이 군인이라니 믿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함께 섞여 있는 여성들의 키가 훨씬 더 커 보인다. 그런데 여성들도 군복을 입고 있었다. 난 너무 의아해 설경이에게 "저 여자아이들도 군인들이야?"라고 물었더니 그렇단다. 설경이 말로는 수많은 여자아이들도 군대에 지원해 간다고 한다.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나 같으면 도저히 못할 텐데... 여성이 군대를 지원해 남성 병사들과 함께 생활을 한다니!

남편이 만룡 안내원에게 물어본다.

"혹시 저 군인들이 어렸을 때, 소위 말하는 '고난의 행군'시절, 잘 못 먹어서 그런 게 아닌가?"
"네, 맞습네다. 잘 보셨습네다, 선생님."

나도 '고난의 행군'이라는 시기가 있었다는 것을 북한 여행을 오기 얼마 전에 남편에게서 들었다. 1995년도부터 연달아 홍수와 가뭄의 자연재해로 농토가 다 초토화돼 수를 알 수 없는 많은 사람이 희생됐다고 한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인명피해.

만룡 안내원 말로는 그때 만룡 안내원도 칡뿌리를 끓여 먹었다며 도시인 평양보다 되레 농사를 짓는 지방사람들이 덜 고생을 했단다. 또, 조선 사람들이니까 해냈지, 다른 나라 사람들 같으면 어림도 없었을 것이라는 설명도 잊지 않았다.

그 소리를 듣고 있던 설경이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지난날의 기억이 되살아난 모양이다. 내가 설경이에게 나즈막이 말해줬다.

"남녘의 많은 동포들도 쌀을 보내고 싶어했어. 그런데 지금 남과 북은 대치하고 있는 상태잖아. 그래서 일부 남녘의 동포들이 북에 쌀을 보내면 군량미로 쓰인다며 반대하고 있거든."

"잘 압네다. 오래전 쌀이 남포항에 도착했을 때, 우리의 운송 수단이 안 좋다보니 인민 군대 트럭들이 운송을 위해 동원됐습네다. 당시 이를 지켜 보던 남조선 대표단이 몹시 불편해 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네다. 군대 트럭이 쌀을 실어 날랐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 충분히 리해합네다."

2011년 10월 판문점 방문 당시. 판문점의 북한 병사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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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공감이 됐다. 원산에 갔을 때 적어도 수십 년은 돼 보이는 낡은 트럭들이 뜨문뜨문 다니는 것을 봤으니까. 북한 농촌의 주요 운송 수단은 내가 어린 시절 봤던 소달구지인 것 같았다.

'고난의 행군' 때 어린 시절을 보낸 아이들이 지금 군대에 갈 만한 나이가 됐나 보다. 저 군인들도 사람이요, 내 아들 딸처럼 누군가의 소중한 자식들인 것을. '북한에 식량을 보내야 한다' '아니다. 보내면 군대로 다 가기 때문에 안 된다'며 사람 생명이 달려있는 식량을 가지고 탁상공론하며 옥신각신 논쟁을 벌이던 텔레비전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쌀 보내기를 반대하는 한 토론자는 "북한은 자급자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급자족해서 나온 쌀은 군대로 안 가나?

쌀을 보내면 그것이 어디로 가느니 하는 논쟁 이전에 어서 빨리 평화체제를 만들어야겠다는 논의가 선행돼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하기야 그때는 나도 북한 군인들을 사람이기 이전에 그저 '무찔러야 하는 악당 로봇'이라 생각했다.

남쪽에서는 남아도는 쌀의 보관비용, 그리고 버리는 음식만 천문학적 액수라고 하는데... '가난한 자, 약한 자, 굶주린 자, 목마른 자, 병든 자'의 친구가 되려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어떠한 마음으로 이들을 보시고 계실까.

내가 설경이를 안고 등을 두드리면서 위로를 하는 사이, 남편과 만룡 안내원은 군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만룡 안내원의 말로는 6년 전부터 북한에서는 병역이 더 이상 의무가 아니라고 한다. 지원제를 택했단다. 남편이 깜짝 놀라 말했다.

"의무제가 아니라 지원제라고? 이런... 새빨간 거짓말하고는... 아니, 지금 여기 널린 게 군인들인데 이게 다 지원병들이란 말이야?"
"아니, 선생님. 왜 제가 선생님께 거짓말을 하나요. 6년 전부터 바뀌었습네다."
"그럼 의무제가 아니라면... 누가 군대에 가려고 해?"
(북한 군 복무제도가 지원제라는 언급에 대해 정부 관계자는 "6년 전부터 지원제가 됐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다"며 "지원제가 아니라 징집제를 계속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 편집자말)

의심 많은 남편이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만룡 안내원이 계속 말을 이어간다.

"선생님, 그래도 남자는 다 군대에 지원해 갑네다. 여자들도 군대 안 갔다 온 남자하고는 결혼도 잘 하지 않으려 하지요. 또, 여기서는 '남자는 군대 갔다 와야 사람 된다'고 말하기도 합네다."

'남자는 군대 갔다 와야 사람 된다'는 말. 남이나 북이나 같은 말을 쓰고 있었구나. 이 말이 또 한 번 내 가슴을 때린다. 그런데, 아직도 믿기지가 않는다. 내가 북한에 방문한 이래 여기 사람들의 말은 다 신용이 갔는데, 병역이 지원제라는 말은 좀처럼 믿어지지 않는다. 만룡 안내원이 거짓말을 했던 걸까?

눈을 어디에 둬야할지... 화려했던 <아리랑> 공연

주체사상탑 위에서 바라 본 아리랑 스타디움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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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등석 자리의 표를 산 우리 부부는 스타디움의 가장 중간에 앉았다. 노무현 대통령과 클린턴 행정부 시절의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앉아서 봤다는 주석단 바로 옆자리다. 광대한 경기장을 한눈에 품어 볼 수 있었다. 경기장 분위기에 한층 더 압도됨을 느낀다.

우리가 앉아 있는 자리 바로 반대편에서는 2만 명으로 이루어진 카드 섹션단이 연습을 하고 있다. 실제 공연 할 때에는 8만 명이 경기장 무대에 더 등장 한다고 한다. 간단히 이뤄지는 카드섹션 연습 장면 하나만으로도 소름이 끼칠 정도인데 10만 명이 한꺼번에 공연할 것을 생각해 보니... 상상만으로도 공연 보러 온 제값을 다 치른 것 같다.

이 큰 경기장이 어느새 다 찼다. 드디어 공연이 시작되나 보다. 아름다운 조명빛에 카드섹션이 파도처럼 넘실대기 시작한다. 공연이 시작된 시각부터 끝날 때까지 10만의 공연자와 수만 명의 관객이 혼연일치가 돼 한몸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 눈이 두 개밖에 없다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영상화면처럼 흐르는 카드 섹션의 퍼레이드를 보고 있노라니 8만 명의 공연자가 경기장 그라운드에서 화려하게 펼치는 공연을 놓칠까봐 내 눈을 어디에다 둬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2002년의 붉은 악마가 떠오른 순간

공연하는 사람들도 대단하지만, 어떻게 저 많은 인원을 동원해 연습할 수 있었는지, 연습을 시킨 사람들, 연습한 사람들의 열정에 경의를 표할 뿐이다. 공연의 웅장함은 말할 것도 없고, 예술 측면이나 기술 실력 등은 인간의 말로는 표현하기 힘들다. 그저 '벌어진 입을 다물 길이 없다'는 말밖에.

이 공연을 보면서 내 기억 속 또 다른 장면이 연상된다. 2002년 대한민국 전 국토를 붉게 물들였던 '붉은악마'들의 응원이다.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온 국민이 하나 돼 세계가 놀라도록 응원하지 않았던가. 전국 방방곡곡, 모든 광장에 수백만 명의 인파가 모여 열광하고, 흥분해 서로 껴안고 좋아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모습을 텔레비전으로 보면서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난다.

남과 북의 이 뜨거운 열정이 하나돼 빛을 발하게 된다면 그 어떤 빛보다도 정열적인 에너지로 온 세상을 따사롭게 덮을 것이다. <아리랑> 공연을 보는 내내 우리 민족의 숨길 수 없는 강렬한 열정들이 서로 껴안는 빛으로 승화돼 어둠을 밝히는 세상의 등대가 되면 좋겠다는 간절한 기도를 해본다.

다음날에는 평안북도에 있는 묘향산을 가기 위해 북쪽으로 간다고 한다. 지금 여기가 북쪽인데 더 올라갈 북쪽 땅이 있단 말인가. 한반도가 그리 작은 땅덩어리가 아니라는 생각을 난생처음으로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