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 16~20]
2012. 10. 25. 16:13ㆍeveryday photo
뉴스
북한 남성의 '어이없는' 부탁, 할 말을 잃었다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 16] 평양 출근길, 그리고 평양 음대12.08.03 10:27
최종 업데이트 12.08.03 10:55저는 오래 전부터 음악을 공부하고,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오로지 음악에 관한 지식만을 가르쳐왔습니다. 지금은 평범한 주부이자 아이들의 엄마로 살고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과 함께 북한에 갔습니다. 호기심으로 떠난 여행이었지만, 저는 처음으로 우리 민족의 비극적 운명과 민족애를 느꼈습니다. 동시에 통일에 대한 염원이 생겼습니다. 2011년 10월 이후 지난 4월에 열흘 동안, 그리고 5월에는 3주 동안 나진·선봉을 비롯한 북한 전역을 여행했습니다. - 기자말
어느날 뜻밖의 전화가 왔다... "평양에 함께 가자"
2012년 5월의 북한 여행이 보다 뜻깊은 방문이 될 수 있도록 우리는 여러모로 북한을 돕기 위한 계획도 함께 세웠다. 첫째로 자선 단체에서 북한을 열심히 돕고 있는 미국 친구들이 그곳에 있는 탁아소 등을 돕는 길을 열어 놓고 오는 계획을 세웠다. 기회가 닿는 한 초·중·고등학교에 학용품을 지원하는 계획도, 그리고 의약품을 지원하는 방향도 터 놓고 오기 위해 친구들과 우리 부부는 각자들 맡은 분야에서 기쁜 마음으로 준비에 착수했다.
그러기를 여러 날, 내 마음을 흔드는 한 통의 전화가 왔다. 매년 4월 북한에서 열리는 '세계친선 예술 봄 축전'에 재미동포 예술단이 초청됐는데, 내가 북한 여행을 다녀왔다는 사실을 아는 몇 분이 적극적으로 나를 추천했다며 북한에 함께 갈 것을 제안한 것. 150명의 미국인으로 이뤄진 남성 합창단도 간다고 들었다.
때마침 베이징에서 북한-미국의 '2·29 합의'가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당시 체결됐던 여러 가지 합의 사항 중 하나가 바로 북한과 미국 간의 문화·예술·체육의 교류 증진이었다.
나를 추천해 주신 분들에게는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싶은 일이지만 5월에 미국 친구들과 재미동포 부부, 이렇게 11명이 이미 북한 여행 갈 것을 약속하고 준비를 하고 있었으므로 흔쾌히 답을 주지 못하고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순간, 지난해 10월 처음으로 북한에 닿았을 때 우리 부부를 따뜻한 동포애로 대해줬던 북한 동포들의 모습이 또렷이 떠올랐다. 김일성 광장에서 매스게임 연습을 하다 우리에게 손을 흔들던 천진난만한 아이들, 모란봉 공원에서 맥주를 권하던 소풍객들, 잠깐 만나고 헤어지면서도 눈물을 글썽였던 북한 동포들의 모습들이 말이다.
"그래, 나는 노래로 북한동포들에 대한 나의 사랑과 진심을 전할 수 있겠구나!"
내 마음은 어느새 진실한 사랑의 노래를 타고 북쪽 동포들과 마음의 교감을 이루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었다.
결심을 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공연에 참가하겠다는 내 생각을 남편에게 이야기하자 남편은 "내 마음까지도 노래에 함께 담아 달라"며 자신도 동행하겠다고 한다.
북한 또 간다는 말에 어머니는 머리를 싸매고
이 사실을 가족들에게 알리니, 지난 여행 때보다 더 강력하게 나서서 말린다. 5월에 다시 북한을 관광 간다는 소식 때문에 걱정하던 찰나에 예정에도 없던 때에 북한에 다시 가겠다고 하니 말이다. 한국에 살고 계신 내 어머니, 언니, 친지, 친구들은 마치 내가 최전방 전선에 가는 것처럼 걱정에 걱정을 거듭한다.
남편도 함께 간다는 소식에 시어머니께서는 자리를 펴고 눕기까지 하셨단다. 김정일 위원장의 사망 소식과 4월 인공위성 발사 소식 때문에 그러신 듯하다. 세계적인 뉴스가 난 상황에서 북한에 간다고 하니 심란하고 걱정스러운 주변 사람들의 마음들이 충분히 이해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한 번 북한에 다녀오고 보니, 별다른 걱정이 앞서지 않는다. '불감증'이라고나 할까. 예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전쟁이 곧 터질 것만 같은 불안한 소식이 들려도 한국을 들락날락했다. 미국 친구들이 "한국 출입을 자제하라"고 말림에도 말이다. 이제 우리는 북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자세를 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 마음은 북한 동포들과 함께 어울리며, 노래를 통해 그들과 교감할 생각에 되레 기대와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최선을 다해 연습해야 할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부를 노래를 정하고 연습을 하려 드니 그동안 아이들 뒷바라지하느라 연습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하나의 부담으로 다가온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연습과 의지로 부담을 떨쳐낼 수밖에.
나는 푸치니의 오페라 아리아들과 어둠이 지나가고 희망의 아침이 밝아 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레온카발로의 <아침의 노래>를 선곡했다. 내가 부를 노래를 마음으로 경청할 북한 동포들을 생각하며 노래를 연습하니 저절로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기대와 흥분으로 동포들을 마주할 날을 기다렸다.
다시 찾은 북한... 이젠 익숙해졌다
2012년 4월 9일. 어느덧 두 번째 북한을 방문하기 위해 베이징 공항의 고려항공 카운터 앞에 도착했다. 지난 여행 때보다 훨씬 많은 인파들이 북적북적 댄다. 평상시에는 일주일에 세 번 비행기가 운항한다는데 '친선 봄 축제' 기간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비행기가 뜬단다.
멀리서 단정한 정장 차림의 중년 여성이 활짝 웃으며 다가온다. 그 여성은 자신이 북한 문화성 직원이며 우리 일행을 마중 나왔다며 정중히 인사를 건넨다. 중국까지 북한 당국자가 마중 나온 것을 보면 이 축제가 대단한 행사인 것 같다.
지난 여행 당시에는 북한 고려항공 직원들만 보고서도 마치 되돌릴 수 없을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놀이공원의 롤러코스터 앞자리에 앉아 고지를 향해 천천히 올라가고 있는 풍경을 마주하고 있는 사람마냥 숨도 크게 쉬지 못했는데 말이다. 하지만, 두 번째 마주한 고려항공 카운터 앞 풍경은 그저 늘 봐왔던 공항 안의 낯설지 않은 모습처럼 편안하다.
비행기 안의 승무원들도, 그리고 지난번 내 마음에 거부감을 일으켰던 안내 방송의 말씨도 우리나라 다른 지방의 사투리를 듣는 것 같아 어색하지 않다. 마음의 벽을 허무니 모든 것이 친숙하고 안락하게 받아들여진다. 우리나라 몸통에 꽁꽁 매여 있는 답답한 허리띠도 풀어헤쳐 버리면 얼마나 시원하고 편안할까.
평양공항은 지난 여행 때와 같이 여전히 시외버스 터미널 같은 임시 건물 같았다. 그 자그마한 건물은 북적대는 사람들로 마치 파장시간을 앞둔 번잡한 시장터처럼 분주했다. 공항이 송두리째 폭발할 것 같기도 했다. 많은 나라에서 찾아온 관광객들과 초청손님들, 그리고 예술단이 한꺼번에 어우러져 각자의 말들과 몸짓과 차림새들을 하고 있는 게 벌써 축제의 장을 이뤄 한 편의 예술공연을 보는 것 같다.
정신없이 떠밀려 짐 수색대를 지나고 나니 북한의 해외동포원호위원회와 문화성에서 우리를 마중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를 초청한 기관은 문화성이며 우리가 머무는 동안 안내를 맡은 기관은 해외동포원호위원회라고 한다.
공항의 주차장에는 지난해 10월 우리의 관광을 안내한 '조선국제려행사'의 차들도 눈에 들어온다. 20대 중반의 단정한 아가씨들을 보면 모두 설경이처럼 보인다. 북녘땅에 도착하고 보니 더욱더 설경이가 보고 싶다. 혹시나 우연히 만나게 될 수 있을는지.
'로동신문' 네 글자에 평양임을 직감
우리 '재미동포 예술단'이 열흘 동안 묵게 될 숙소, 해방산호텔에 도착했다. 호텔 로비에서는 유럽과 중국서 온 예술단원들이 방 배정을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호텔의 맞은 편에는 고전미와 현대미가 어우러진 '연극 대극장'이 있고, 오른쪽에는 '로동신문사'가 있다.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평양대극장'과 '김일성 광장'이 있다. '해방산 호텔' '로동신문사'라는 건물의 이름을 보니 내가 북한 땅에 다시 온 것이 실감 난다.
우리들을 열흘간 안내하며 데리고 다닐 이들은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김정남 아저씨, 그리고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박정철 아저씨. 그들의 짧은 환영 인사와 '내일 오전 9시에 로비에서 재미 예술단이 모여 리허설을 하러 간다'는 짧은 공지만 들은 후 우리는 객실로 올라갔다. 4월 평양의 밤은 아직도 냉기가 흐른다.
평양의 아침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로 시작된다. 사방에서 노랫소리가 들리는데,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우리 부부는 벌떡 일어나 창밖을 내다봤다. 정체불명의 소리들이 창밖 거리에 울려 퍼지고 있는 가운데, 어느새 많은 사람들이 마치 행진이라도 하듯 거리를 걸어 다니고 있다. 출근을 하는 모양이다.
북한 출근길의 민낯 이렇습니다
시계를 보니 오전 7시다. 호텔 모닝콜이 따로 없는 듯하다. 남편은 바깥 구경을 하러 나가겠다며 분주하게 준비한다. 사실 나는 오늘 오전에 있을 리허설을 위해 좀 더 잠을 자고 싶었으나 이 상황에서 잠을 잔다는 것은 불가능하리라. 나는 '일어나서 아침 공기나 마시는 게 낫겠다'고 생각해 준비를 마친 후 로비로 내려가니, 박정철 안내원이 기다리고 있다.
"바깥소리에 잠을 푹 주무시지 못하셨습네까? 조금 전에 정 선생님(남편)께서는 산책하러 나가셨습네다."
박정철 아저씨는 왠지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아마 남편이 한바탕 불평을 늘어놓고 나갔음이 분명하다.
박정철 아저씨는 "아침부터 희망차고 즐겁게 하루를 시작하라고 틀어주는 음악"이라며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굳이 바깥 음악을 설명한다. 내 귀에는 음악 소리라기 보다는 주파수를 잘못 맞춰 놓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소음 같다. 얼핏 바깥을 내다보니 길 건너 '연극 대극장' 앞에서는 중학교 밴드부 학생들이 열심히 나팔을 불고 있다. 출근길 시민들을 격려하기 위해 연주를 한단다.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나를 부른다. 미네소타 주립대학에서 공부하던 시절, 우리 음대 바이올린 교수로 계셨던 분으로 나와는 같은 교회도 다녔고, 연주도 여러 번 함께하며 가까이 지냈던 선생님이시다. 너무 반가워 소녀처럼 폴짝폴짝 뛰었다. 선생님도 이번 예술단 공연에 초대돼 오셨단다.
우리는 머릿속, 빛바랜 사진첩을 꺼내보며 지난날의 향수에 젖어 아침식사도 잊은 채 이야기를 나눴다. 옆에서 박정철 안내원이 더 흥분해 한마디 거든다. "누가 보면 '이산가족 상봉'이라도 하는 줄 알겠습네다"라며...
음악에 담긴 마음의 교감... 이미 시작됐더라
재미동포 예술단의 이름으로는 세 명의 성악가와 한 명의 바이올린 연주자 그리고 한 명의 지휘자 등 총 다섯 명이 초대돼 이곳 평양에 와 있다. 우리는 첫 리허설을 하기 위해 '김원균 명칭 평양음악대학' 연주홀로 갔다. 북한 최고의 예술대학이라고 한다.
'김원균'이라는 이름을 들으니 생각이 났다. 지난해 10월 김일성 주석의 시신이 안치돼 있는 금수산 궁전에 갔을 때, 설경이가 설명해준 <김일성 장군의 노래>와 북한 국가를 작곡했다는 그 작곡가의 이름이었다.
이미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연주홀에 도착해 연습을 하고 있었다. 연주홀 로비에 들어서니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의 유명한 아리아인 <공주는 잠 못 이루고>(Nessun Dorma)가 들린다. 아! 아름다운 선율이 내 심장 박동을 멈춰 버릴 것만 같다. 무슨 말이 필요한가. 우리는 우리의 영혼에 음악의 언어를 싣고 이미 마음과 마음으로 교감을 나누고 있었다.
연주홀 안은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크고 웅장하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30대 정도 돼 보이는 지휘자에 맞춰 혼연일치가 돼 연습에 열중하고 있다. 옆에 있던 우리 안내원 아저씨가 귀띔해준다. "저 지휘자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유학하고 온 재능 있는 지휘자"라고 말이다. 오케스트라는 학생들과 교원들로 이뤄져 있으며 수준 높은 연주 실력을 뽐내고 있었다. 지휘자와 연주자들은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내 차례가 돼 리허설을 했다. 멋진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니 노래가 절로 흥겹다. 온통 음악을 품어 안고 황홀하게 연주홀 안을 날아다니는 기분이다. 연습 내내 사랑의 노래를 들어 줄 북한 동포들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그러나 이런 흥취도 잠시, 리허설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 남성이 다가왔다. 문화성에서 나온 음악감독이라고 한다.
"저 혹시... 우리 노래를 불러주시면 안 되겠습네까? 외국곡들은 외국 사람들에게 부르라고 하고, 신 선생님께서는 우리 동포로서 우리 조선의 노래를 불러주시면 인민들이 정말 좋아할 것이라 생각이 들어서 말입네다. 갑자기 무리인 줄 알지만 선생님이라면 해 주실 수 있을 것 같아서..."
공연까지 이틀밖에 안 남았는데 무리는 말할 것도 없고, 물어보는 것 자체가 '어이없는' 성격의 부탁이었다. 이곳 노래를 불러 북한 동포들에게 더 많은 감동을 나누고 내 마음을 전달하는 것은 좋으나 불가능해 보였다. 생각도 해보기 전에 음악감독은 "부탁합네다"라는 짧은 말만 남기고 무심히 사라져 버렸다. 옆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던 박정철 안내원이 나를 위로할 뿐이었다.
"선생님이라면 할 수 있다 싶어서 부탁하신 것 같습네다. 그리고 선생님한테서는 뭔가 우리 동포를 끌어들이는 특별한 감성이 있단 말입네다."
위로의 말인 줄 알면서도 할 수 있다는 힘과 의지가 생긴다. 마침 내가 미국에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유튜브를 통해 알아낸 <생이란 무엇인가>라는 북한 노래 한 곡을 준비해 오긴 했다. 모두 세 곡을 불러 달라고 하는데 나머지 두 곡은 어찌하란 말인가...
박정철 안내원에게 북한 주민들이 제일 좋아하는 곡이 어떤 것인지 물어봤다. 박정철 안내원은 "<심장에 남는 사람>이라는 노래가 있는데, 예전에 남쪽의 손님들이 와서 많이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제가 좋아하는 노래로 <지새지 말아다오, 평양의 밤아>라는 노래가 있는데, 북한 동포들이 아주 좋아한다"고 한다.
갑작스럽게 계획된 노래라 오케스트라 악보가 준비돼 있지 않다고 한다. 할 수 없이 피아노 반주에 맞춰 불러야 한단다. 그나마 피아노 반주로도 악보가 준비돼 있지 않아 반주자와 함께 논의해 반주 악보를 그려야 할 상황이었다.
마침내 반주를 해 줄 한 선생을 만나게 됐다. 자신을 박혜영이라고 소개한 그 반주자 선생은 다행히도 세 곡의 멜로디를 정확히 알고 있어서 곡조를 익히는 것과 반주 악보를 준비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대학 입학시험을 준비하듯 이틀 동안 잠자는 시간마저도 흥얼흥얼 연습을 했다. 동포들과 한마음이 돼 노래를 부를 생각에 초인적인 기억력과 에너지가 생겼나 보다.
피아노 반주자 박혜영 선생은 26세며 이 학교의 교원이라고 한다. 어릴 때 동네에서 '피아노 신동'이라는 말을 들으며 자라서 자신이 정말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신동인 줄 알았단다. 그녀의 꿈은 '금성학원'에 들어와서 깨지고 말았지만 말이다. '금성학원'은 굳이 비유하자면 한국의 예술고등학교인데 그 학교에 입학하고 나니 북한의 날고 기는 '예술 학생'들이 다 모여 있었단다.
박혜영 선생은 "그래도 우리 아버지는 지금까지도 세상에서 제가 피아노를 제일 잘 치는 줄 아신다"며 애교 있게 말한다. 말하는 모습이 예쁘고 사랑스럽다. 서로가 처음으로 호흡을 맞추면서 연습을 하는 데도 오랫동안 함께 연주해 왔던 사람처럼 감정 표현과 곡 해석이 놀라울 정도로 편하게 일치한다. 또한, 즉흥적으로 주문한 곡의 편곡도 아무런 어려움없이 능숙하게 잘해낸다.
공연 전날, 참 설렜습니다
반주자와 함께 연습하고 나니 자신감이 부쩍 생겼다. 옆에서 우리의 연습 과정을 초조하게 지켜보던 남편과 박정철 안내원도 응원의 박수와 함께 미소로 우리에게 힘을 줬다. 연습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오는 자동차 속. 내 마음은 마치 하늘을 나는 것처럼 가벼웠다.
늦은 점심식사를 하러 호텔 안 식당에 들렀다. 유난히 미소가 예쁜 아가씨가 우리 일행을 반기면서 자리를 안내한다. 웨이트리스 아가씨의 이름은 황연희. 그녀의 아버지는 의과대학 교수고 어머니는 의사란다. 그녀는 "많은 외국 사람들에게 조국을 바로 알리며, 또한 조국에 대한 좋은 인상을 심어 드리고 싶어서 관광대학을 나왔다"고 한다. 말하는 모습이 참 상냥하다. 그 후 일 주일 동안 우리는 그녀 덕분에 서늘한 4월의 평양에서 따스함과 포근함을 느끼며 지낼 수 있었다.
내일은 첫 공연이 시작되는 날. 공연을 앞두고 이렇게 가슴이 설레는 경험을 한 기억이 없다.
어느날 뜻밖의 전화가 왔다... "평양에 함께 가자"
2012년 5월의 북한 여행이 보다 뜻깊은 방문이 될 수 있도록 우리는 여러모로 북한을 돕기 위한 계획도 함께 세웠다. 첫째로 자선 단체에서 북한을 열심히 돕고 있는 미국 친구들이 그곳에 있는 탁아소 등을 돕는 길을 열어 놓고 오는 계획을 세웠다. 기회가 닿는 한 초·중·고등학교에 학용품을 지원하는 계획도, 그리고 의약품을 지원하는 방향도 터 놓고 오기 위해 친구들과 우리 부부는 각자들 맡은 분야에서 기쁜 마음으로 준비에 착수했다.
그러기를 여러 날, 내 마음을 흔드는 한 통의 전화가 왔다. 매년 4월 북한에서 열리는 '세계친선 예술 봄 축전'에 재미동포 예술단이 초청됐는데, 내가 북한 여행을 다녀왔다는 사실을 아는 몇 분이 적극적으로 나를 추천했다며 북한에 함께 갈 것을 제안한 것. 150명의 미국인으로 이뤄진 남성 합창단도 간다고 들었다.
때마침 베이징에서 북한-미국의 '2·29 합의'가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당시 체결됐던 여러 가지 합의 사항 중 하나가 바로 북한과 미국 간의 문화·예술·체육의 교류 증진이었다.
나를 추천해 주신 분들에게는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싶은 일이지만 5월에 미국 친구들과 재미동포 부부, 이렇게 11명이 이미 북한 여행 갈 것을 약속하고 준비를 하고 있었으므로 흔쾌히 답을 주지 못하고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순간, 지난해 10월 처음으로 북한에 닿았을 때 우리 부부를 따뜻한 동포애로 대해줬던 북한 동포들의 모습이 또렷이 떠올랐다. 김일성 광장에서 매스게임 연습을 하다 우리에게 손을 흔들던 천진난만한 아이들, 모란봉 공원에서 맥주를 권하던 소풍객들, 잠깐 만나고 헤어지면서도 눈물을 글썽였던 북한 동포들의 모습들이 말이다.
"그래, 나는 노래로 북한동포들에 대한 나의 사랑과 진심을 전할 수 있겠구나!"
내 마음은 어느새 진실한 사랑의 노래를 타고 북쪽 동포들과 마음의 교감을 이루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었다.
결심을 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공연에 참가하겠다는 내 생각을 남편에게 이야기하자 남편은 "내 마음까지도 노래에 함께 담아 달라"며 자신도 동행하겠다고 한다.
북한 또 간다는 말에 어머니는 머리를 싸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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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산 호텔 정면에 있는 연극 대극장. | |
ⓒ 신은미 |
이 사실을 가족들에게 알리니, 지난 여행 때보다 더 강력하게 나서서 말린다. 5월에 다시 북한을 관광 간다는 소식 때문에 걱정하던 찰나에 예정에도 없던 때에 북한에 다시 가겠다고 하니 말이다. 한국에 살고 계신 내 어머니, 언니, 친지, 친구들은 마치 내가 최전방 전선에 가는 것처럼 걱정에 걱정을 거듭한다.
남편도 함께 간다는 소식에 시어머니께서는 자리를 펴고 눕기까지 하셨단다. 김정일 위원장의 사망 소식과 4월 인공위성 발사 소식 때문에 그러신 듯하다. 세계적인 뉴스가 난 상황에서 북한에 간다고 하니 심란하고 걱정스러운 주변 사람들의 마음들이 충분히 이해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한 번 북한에 다녀오고 보니, 별다른 걱정이 앞서지 않는다. '불감증'이라고나 할까. 예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전쟁이 곧 터질 것만 같은 불안한 소식이 들려도 한국을 들락날락했다. 미국 친구들이 "한국 출입을 자제하라"고 말림에도 말이다. 이제 우리는 북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자세를 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 마음은 북한 동포들과 함께 어울리며, 노래를 통해 그들과 교감할 생각에 되레 기대와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최선을 다해 연습해야 할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부를 노래를 정하고 연습을 하려 드니 그동안 아이들 뒷바라지하느라 연습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하나의 부담으로 다가온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연습과 의지로 부담을 떨쳐낼 수밖에.
나는 푸치니의 오페라 아리아들과 어둠이 지나가고 희망의 아침이 밝아 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레온카발로의 <아침의 노래>를 선곡했다. 내가 부를 노래를 마음으로 경청할 북한 동포들을 생각하며 노래를 연습하니 저절로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기대와 흥분으로 동포들을 마주할 날을 기다렸다.
다시 찾은 북한... 이젠 익숙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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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근길 시민들. | |
ⓒ 신은미 |
2012년 4월 9일. 어느덧 두 번째 북한을 방문하기 위해 베이징 공항의 고려항공 카운터 앞에 도착했다. 지난 여행 때보다 훨씬 많은 인파들이 북적북적 댄다. 평상시에는 일주일에 세 번 비행기가 운항한다는데 '친선 봄 축제' 기간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비행기가 뜬단다.
멀리서 단정한 정장 차림의 중년 여성이 활짝 웃으며 다가온다. 그 여성은 자신이 북한 문화성 직원이며 우리 일행을 마중 나왔다며 정중히 인사를 건넨다. 중국까지 북한 당국자가 마중 나온 것을 보면 이 축제가 대단한 행사인 것 같다.
지난 여행 당시에는 북한 고려항공 직원들만 보고서도 마치 되돌릴 수 없을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놀이공원의 롤러코스터 앞자리에 앉아 고지를 향해 천천히 올라가고 있는 풍경을 마주하고 있는 사람마냥 숨도 크게 쉬지 못했는데 말이다. 하지만, 두 번째 마주한 고려항공 카운터 앞 풍경은 그저 늘 봐왔던 공항 안의 낯설지 않은 모습처럼 편안하다.
비행기 안의 승무원들도, 그리고 지난번 내 마음에 거부감을 일으켰던 안내 방송의 말씨도 우리나라 다른 지방의 사투리를 듣는 것 같아 어색하지 않다. 마음의 벽을 허무니 모든 것이 친숙하고 안락하게 받아들여진다. 우리나라 몸통에 꽁꽁 매여 있는 답답한 허리띠도 풀어헤쳐 버리면 얼마나 시원하고 편안할까.
평양공항은 지난 여행 때와 같이 여전히 시외버스 터미널 같은 임시 건물 같았다. 그 자그마한 건물은 북적대는 사람들로 마치 파장시간을 앞둔 번잡한 시장터처럼 분주했다. 공항이 송두리째 폭발할 것 같기도 했다. 많은 나라에서 찾아온 관광객들과 초청손님들, 그리고 예술단이 한꺼번에 어우러져 각자의 말들과 몸짓과 차림새들을 하고 있는 게 벌써 축제의 장을 이뤄 한 편의 예술공연을 보는 것 같다.
정신없이 떠밀려 짐 수색대를 지나고 나니 북한의 해외동포원호위원회와 문화성에서 우리를 마중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를 초청한 기관은 문화성이며 우리가 머무는 동안 안내를 맡은 기관은 해외동포원호위원회라고 한다.
공항의 주차장에는 지난해 10월 우리의 관광을 안내한 '조선국제려행사'의 차들도 눈에 들어온다. 20대 중반의 단정한 아가씨들을 보면 모두 설경이처럼 보인다. 북녘땅에 도착하고 보니 더욱더 설경이가 보고 싶다. 혹시나 우연히 만나게 될 수 있을는지.
'로동신문' 네 글자에 평양임을 직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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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산 호텔 오른쪽에 있는 <로동신문> 본사. | |
ⓒ 신은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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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 대극장. | |
ⓒ 신은미 |
우리 '재미동포 예술단'이 열흘 동안 묵게 될 숙소, 해방산호텔에 도착했다. 호텔 로비에서는 유럽과 중국서 온 예술단원들이 방 배정을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호텔의 맞은 편에는 고전미와 현대미가 어우러진 '연극 대극장'이 있고, 오른쪽에는 '로동신문사'가 있다.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평양대극장'과 '김일성 광장'이 있다. '해방산 호텔' '로동신문사'라는 건물의 이름을 보니 내가 북한 땅에 다시 온 것이 실감 난다.
우리들을 열흘간 안내하며 데리고 다닐 이들은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김정남 아저씨, 그리고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박정철 아저씨. 그들의 짧은 환영 인사와 '내일 오전 9시에 로비에서 재미 예술단이 모여 리허설을 하러 간다'는 짧은 공지만 들은 후 우리는 객실로 올라갔다. 4월 평양의 밤은 아직도 냉기가 흐른다.
평양의 아침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로 시작된다. 사방에서 노랫소리가 들리는데,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우리 부부는 벌떡 일어나 창밖을 내다봤다. 정체불명의 소리들이 창밖 거리에 울려 퍼지고 있는 가운데, 어느새 많은 사람들이 마치 행진이라도 하듯 거리를 걸어 다니고 있다. 출근을 하는 모양이다.
북한 출근길의 민낯 이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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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근길 시민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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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근길 시민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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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를 보니 오전 7시다. 호텔 모닝콜이 따로 없는 듯하다. 남편은 바깥 구경을 하러 나가겠다며 분주하게 준비한다. 사실 나는 오늘 오전에 있을 리허설을 위해 좀 더 잠을 자고 싶었으나 이 상황에서 잠을 잔다는 것은 불가능하리라. 나는 '일어나서 아침 공기나 마시는 게 낫겠다'고 생각해 준비를 마친 후 로비로 내려가니, 박정철 안내원이 기다리고 있다.
"바깥소리에 잠을 푹 주무시지 못하셨습네까? 조금 전에 정 선생님(남편)께서는 산책하러 나가셨습네다."
박정철 아저씨는 왠지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아마 남편이 한바탕 불평을 늘어놓고 나갔음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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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근길 시민들을 위해 연주하는 중학교 밴드부 학생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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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철 아저씨는 "아침부터 희망차고 즐겁게 하루를 시작하라고 틀어주는 음악"이라며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굳이 바깥 음악을 설명한다. 내 귀에는 음악 소리라기 보다는 주파수를 잘못 맞춰 놓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소음 같다. 얼핏 바깥을 내다보니 길 건너 '연극 대극장' 앞에서는 중학교 밴드부 학생들이 열심히 나팔을 불고 있다. 출근길 시민들을 격려하기 위해 연주를 한단다.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나를 부른다. 미네소타 주립대학에서 공부하던 시절, 우리 음대 바이올린 교수로 계셨던 분으로 나와는 같은 교회도 다녔고, 연주도 여러 번 함께하며 가까이 지냈던 선생님이시다. 너무 반가워 소녀처럼 폴짝폴짝 뛰었다. 선생님도 이번 예술단 공연에 초대돼 오셨단다.
우리는 머릿속, 빛바랜 사진첩을 꺼내보며 지난날의 향수에 젖어 아침식사도 잊은 채 이야기를 나눴다. 옆에서 박정철 안내원이 더 흥분해 한마디 거든다. "누가 보면 '이산가족 상봉'이라도 하는 줄 알겠습네다"라며...
음악에 담긴 마음의 교감... 이미 시작됐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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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원균명칭 평양음악대학 연주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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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대 캠퍼스에 서 있는 북한의 작곡가 김원균 동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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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동포 예술단의 이름으로는 세 명의 성악가와 한 명의 바이올린 연주자 그리고 한 명의 지휘자 등 총 다섯 명이 초대돼 이곳 평양에 와 있다. 우리는 첫 리허설을 하기 위해 '김원균 명칭 평양음악대학' 연주홀로 갔다. 북한 최고의 예술대학이라고 한다.
'김원균'이라는 이름을 들으니 생각이 났다. 지난해 10월 김일성 주석의 시신이 안치돼 있는 금수산 궁전에 갔을 때, 설경이가 설명해준 <김일성 장군의 노래>와 북한 국가를 작곡했다는 그 작곡가의 이름이었다.
이미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연주홀에 도착해 연습을 하고 있었다. 연주홀 로비에 들어서니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의 유명한 아리아인 <공주는 잠 못 이루고>(Nessun Dorma)가 들린다. 아! 아름다운 선율이 내 심장 박동을 멈춰 버릴 것만 같다. 무슨 말이 필요한가. 우리는 우리의 영혼에 음악의 언어를 싣고 이미 마음과 마음으로 교감을 나누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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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습 중인 평양 음대 오케스트라 단원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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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홀 안은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크고 웅장하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30대 정도 돼 보이는 지휘자에 맞춰 혼연일치가 돼 연습에 열중하고 있다. 옆에 있던 우리 안내원 아저씨가 귀띔해준다. "저 지휘자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유학하고 온 재능 있는 지휘자"라고 말이다. 오케스트라는 학생들과 교원들로 이뤄져 있으며 수준 높은 연주 실력을 뽐내고 있었다. 지휘자와 연주자들은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내 차례가 돼 리허설을 했다. 멋진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니 노래가 절로 흥겹다. 온통 음악을 품어 안고 황홀하게 연주홀 안을 날아다니는 기분이다. 연습 내내 사랑의 노래를 들어 줄 북한 동포들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그러나 이런 흥취도 잠시, 리허설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 남성이 다가왔다. 문화성에서 나온 음악감독이라고 한다.
"저 혹시... 우리 노래를 불러주시면 안 되겠습네까? 외국곡들은 외국 사람들에게 부르라고 하고, 신 선생님께서는 우리 동포로서 우리 조선의 노래를 불러주시면 인민들이 정말 좋아할 것이라 생각이 들어서 말입네다. 갑자기 무리인 줄 알지만 선생님이라면 해 주실 수 있을 것 같아서..."
공연까지 이틀밖에 안 남았는데 무리는 말할 것도 없고, 물어보는 것 자체가 '어이없는' 성격의 부탁이었다. 이곳 노래를 불러 북한 동포들에게 더 많은 감동을 나누고 내 마음을 전달하는 것은 좋으나 불가능해 보였다. 생각도 해보기 전에 음악감독은 "부탁합네다"라는 짧은 말만 남기고 무심히 사라져 버렸다. 옆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던 박정철 안내원이 나를 위로할 뿐이었다.
"선생님이라면 할 수 있다 싶어서 부탁하신 것 같습네다. 그리고 선생님한테서는 뭔가 우리 동포를 끌어들이는 특별한 감성이 있단 말입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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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아노 반주자와 함께 연습 중인 필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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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의 말인 줄 알면서도 할 수 있다는 힘과 의지가 생긴다. 마침 내가 미국에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유튜브를 통해 알아낸 <생이란 무엇인가>라는 북한 노래 한 곡을 준비해 오긴 했다. 모두 세 곡을 불러 달라고 하는데 나머지 두 곡은 어찌하란 말인가...
박정철 안내원에게 북한 주민들이 제일 좋아하는 곡이 어떤 것인지 물어봤다. 박정철 안내원은 "<심장에 남는 사람>이라는 노래가 있는데, 예전에 남쪽의 손님들이 와서 많이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제가 좋아하는 노래로 <지새지 말아다오, 평양의 밤아>라는 노래가 있는데, 북한 동포들이 아주 좋아한다"고 한다.
갑작스럽게 계획된 노래라 오케스트라 악보가 준비돼 있지 않다고 한다. 할 수 없이 피아노 반주에 맞춰 불러야 한단다. 그나마 피아노 반주로도 악보가 준비돼 있지 않아 반주자와 함께 논의해 반주 악보를 그려야 할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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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리허설을 마치고 대기실에서 피아노 반주자 박혜영 선생과 함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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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반주를 해 줄 한 선생을 만나게 됐다. 자신을 박혜영이라고 소개한 그 반주자 선생은 다행히도 세 곡의 멜로디를 정확히 알고 있어서 곡조를 익히는 것과 반주 악보를 준비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대학 입학시험을 준비하듯 이틀 동안 잠자는 시간마저도 흥얼흥얼 연습을 했다. 동포들과 한마음이 돼 노래를 부를 생각에 초인적인 기억력과 에너지가 생겼나 보다.
피아노 반주자 박혜영 선생은 26세며 이 학교의 교원이라고 한다. 어릴 때 동네에서 '피아노 신동'이라는 말을 들으며 자라서 자신이 정말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신동인 줄 알았단다. 그녀의 꿈은 '금성학원'에 들어와서 깨지고 말았지만 말이다. '금성학원'은 굳이 비유하자면 한국의 예술고등학교인데 그 학교에 입학하고 나니 북한의 날고 기는 '예술 학생'들이 다 모여 있었단다.
박혜영 선생은 "그래도 우리 아버지는 지금까지도 세상에서 제가 피아노를 제일 잘 치는 줄 아신다"며 애교 있게 말한다. 말하는 모습이 예쁘고 사랑스럽다. 서로가 처음으로 호흡을 맞추면서 연습을 하는 데도 오랫동안 함께 연주해 왔던 사람처럼 감정 표현과 곡 해석이 놀라울 정도로 편하게 일치한다. 또한, 즉흥적으로 주문한 곡의 편곡도 아무런 어려움없이 능숙하게 잘해낸다.
공연 전날, 참 설렜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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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남편, 해방산 호텔 식당의 웨이트레스 황연희, 그리고 필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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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주자와 함께 연습하고 나니 자신감이 부쩍 생겼다. 옆에서 우리의 연습 과정을 초조하게 지켜보던 남편과 박정철 안내원도 응원의 박수와 함께 미소로 우리에게 힘을 줬다. 연습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오는 자동차 속. 내 마음은 마치 하늘을 나는 것처럼 가벼웠다.
늦은 점심식사를 하러 호텔 안 식당에 들렀다. 유난히 미소가 예쁜 아가씨가 우리 일행을 반기면서 자리를 안내한다. 웨이트리스 아가씨의 이름은 황연희. 그녀의 아버지는 의과대학 교수고 어머니는 의사란다. 그녀는 "많은 외국 사람들에게 조국을 바로 알리며, 또한 조국에 대한 좋은 인상을 심어 드리고 싶어서 관광대학을 나왔다"고 한다. 말하는 모습이 참 상냥하다. 그 후 일 주일 동안 우리는 그녀 덕분에 서늘한 4월의 평양에서 따스함과 포근함을 느끼며 지낼 수 있었다.
내일은 첫 공연이 시작되는 날. 공연을 앞두고 이렇게 가슴이 설레는 경험을 한 기억이 없다.
소지품 두고 내려오라는 안내원, 왠지 불안하다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 17] 시작된 봄축전 공연, 그리고 재회
12.08.06 21:31
최종 업데이트 12.08.07 09:05저는 오래 전부터 음악을 공부하고,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오로지 음악에 관한 지식만을 가르쳐왔습니다. 지금은 평범한 주부이자 아이들의 엄마로 살고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과 함께 북한에 갔습니다. 호기심으로 떠난 여행이었지만, 저는 처음으로 우리 민족의 비극적 운명과 민족애를 느꼈습니다. 동시에 통일에 대한 염원이 생겼습니다. 2011년 10월 이후 지난 4월에 열흘 동안, 그리고 5월에는 3주 동안 나진·선봉을 비롯한 북한 전역을 여행했습니다. - 기자말
마지막 리허설을 마친 날 오후, 휴식을 위해 우리는 김일성 광장에 있는 조선미술박물관으로 향했다. 차에서 내려 광장에서 춤 연습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구경하기 위해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박물관에서 한 여자가 뛰어나와 우리의 손을 잡아 흔들며 반기는 것이 아닌가! 지난번 방문 때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것이 남편을 잘 만나서 그런 것 같다"고 농담했던 바로 그 해설원이다.
너무나 놀라며 "어떻게 또 왔느냐"고 묻는다. 재미동포 예술단원으로 왔다고 하자 자기도 꼭 구경하러 가겠단다. 나를 아는 북한 사람이 객석에 앉아 내 공연을 지켜본다는 것을 상상하니 갑자기 신기하다는 생각이 든다.
공연의 도시 '평양'
이날 저녁, 우리는 봄축전 개막식에 참가했다. '재미동포 예술단'이라는 푯말을 앞세우고 어린이들의 환영을 받으며 '동평양대극장'에 입장했다. 지난번 뉴욕필하모니가 평양을 방문해 역사적인 공연을 했다는 바로 그 극장이다. 과연 뉴욕필하모니가 칭찬할만하다. 화려하기가 그지없다.
평양은 '공연장의 도시'라고 칭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훌륭한 시설을 갖추고 있는 극장들이 도처에 널려있으니 말이다. 북한 사람들에게 음악은 생활화돼 있는 듯하다. 모든 사람들이 한 가지 이상의 악기를 다룰 줄 안단다. 그런데 이들에게 음악이란 단순히 즐기는 오락만은 아닌 것 같다. 음악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이 사상을 고취하고 단결을 도모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듯하다. 거의 모든 예술 작품들이 그러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우리가 예술을 대하는 자세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드디어 연주회 날이 밝았다. 내 노래를 들어 줄 북한동포들에 대한 호기심과 함께 그들의 반응이 궁금해진다.
북한 성악가들이 마이크 쓰지 않는 이유, 따로 있었네
평양음대 연주홀에 도착하니 우리보다 먼저 온 유럽 연주자들이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춰 리허설을 하고 있다. 무대 조명 및 소도구 등을 챙기는 아저씨들과 음악감독 아저씨도 분주히 오간다. 도대체 누가, 몇 시에, 몇 번째 순서로 노래를 불러야 하는지 이곳 연주홀에 오기까지 아무도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다. 우리의 안내원 아저씨들에게 물어봐도 "공연 시작할 때가 돼봐야 압네다"라는 말 한마디뿐이다. 도저히 공연이 제대로 진행될 것 같지 않았다.
"마지막 점검 순서가 됐다"며 한 남학생이 분장실로 나를 찾으러 온 것을 보니 오늘 연주를 하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교복으로 보이는 하얀 셔츠에 검정색 치마 내지는 바지를 입은 학생들이 열심히 경청하고 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음악감독이 "마이크 없이 한 번 더 불러 주시겠습네까"란다. 예전에는 모든 음악에 무조건 마이크를 사용했는데, 요즘 들어 마이크 없이 하는 것을 선호한다고 한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김정일 위원장이 북한의 성악가들에게 다른 나라들의 성악가들처럼 마이크를 사용하지 않고 노래 부를 수 있는 방도를 찾으라고 생전에 지시했다고 한다. 그 대책의 일환으로 이탈리아의 '벨칸토식' 창법을, 1년에 몇 개월씩 외국에서 성악가를 초빙해 특강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아마 수년 뒤에는 우리가 흔히 기대하며 들어왔던 북한식 전통 창법은 사라지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든다. 특별히 음악감독 선생이 내게 마이크 없이 노래를 부르라고 한 것도 아마 학생들에게 교육 차원에서 보여주기 위함이었으리라.
마지막 리허설을 마치고 분장실에 돌아오니 남편이 중요한 비밀정보라도 입수한 듯 헐레벌떡 분장실로 뛰어들어왔다. 공연장의 여러 사람한테 물어서 어렵사리 알아냈다며 정확한 내 연주 차례를 가르쳐 주고 갔다. 그나마 그 정보가 정확한지 조차 의문이다. 과연 정상적으로 연주가 진행될 수 있을는지 내 눈에는 모든 정황들이 어설프게 보인다.
북한의 성형수술 그리고 멋부리는 여자들
반주자 박혜영 선생은 옆에서 열심히 치장을 하고 있다. 크고 예쁜 눈을 더 크고 더 예뻐 보이게 하려는지 눈꺼풀 위에 쌍꺼풀을 만들어주는 임시 테이프를 붙이고 있다. 예전에 내 친구가 자기 눈이 작다면서 틈만 나면 테이프 같은 것을 열심히 눈에 붙이던 기억이 살아나서 흥미롭게 쳐다보고 있었다. 언제 들어왔는지 김정남 안내원이 그 광경을 지켜보더니 한마디 한다.
"아무튼 우리 딸을 비롯해서 여자들 맵시(모양) 내는 것은 아무도 못 말립네다. 머리에 물들이는 것을 그렇게 단속해도 소용이 없습네다. (조그마한 소리로 귀에다 대고는) 요즈음 들어서는 쌍꺼풀 수술이 유행입네다. 엉터리 시술사한테 해서 실패하는 녀성들도 꽤 있답네다. 오죽하면 '수술하는 것은 말리지 않으니 제발 정식 병원에 가서 제대로 쌍꺼풀 수술을 받으라'고 하겠습네까?"
그러고 보니 쌍꺼풀 수술을 한 여성들, 그리고 머리카락을 밝은 색상으로 물들인 여성들이 종종 눈에 띈다.
내 관심은 '내 순서는 몇 번째며 언제 무대 뒤로 나가 있어야 하는지'였다. 하지만 김정남 안내원은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는지 "선생님 순서가 되면 부르러 오겠다"는 말 한마디만 남기고는 사라졌다. 이런 상황이 매우 익숙한지 박혜영 선생 또한 별걱정이 없어 보인다. 그녀는 "머리를 동네 미장원에서 하고 왔는데, 어색해 보이지는 않습네까"라며 화장을 하다 말고 거울 속에 비치는 자기 모습을 보며 안절부절해 한다.
내가 "아니야, 너무 예뻐. 마치 궁전 안을 거닐고 있는 공주 같아"라고 말해 주니 '다행이다' 싶은지 수줍은 미소를 짓는다. 연보라색 드레스를 입고 이리저리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면서 멋진 포즈를 잡는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박혜영 선생의 예쁜 모습에 빠져 정작 나는 무대에 오를 때 무슨 옷을 입어야 하는 게 좋을지 정하지도 못했다.
사실 나는 외국 노래를 부를 생각에 서양 드레스에만 신경을 써 가지고 왔는데, 이곳 노래를 부르게 됐으니 드레스보다는 한복을 입는 게 나을 듯했다. 혹시나 해서 미국서 가져온 한복을 입는 편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재미동포 예술단 중 어느 누구도 한복을 입은 사람이 없었으니 말이다.
"조선 옷은 단아해야지요... 요새 옷들은 촌스러워요"
북한의 여성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한복을 즐겨 입는다. 그것도 화려한 디자인의 한복을 말이다. 이들 한복에 비하니 내 한복은 초라하기 그지없어 불쌍해 보일 지경. 그래도 나는 한복을 입기로 결정했다.
정신없이 치장하고 있던 박혜영 선생이 한복 입은 나를 보더니, "선생님, 너무 좋습네다. 빨간 저고리에 단순한 문양의 하얀 치마가 너무나 고와 보입네다"라고 말한다. 한복이 초라해 보인다고 생각했던 내 마음이 들통 났는지, 박혜영 선생의 위로는 끊이지 않는다.
"선생님, 자고로 조선 옷은 단아하고 정숙해야 지조 있어 보이지 요즘처럼 너무 화려하게 만들어진 조선 옷은 멋져 보이기는커녕 촌스러워 보입네다."
박혜영 선생의 말 한마디에 위로가 된다. 그녀의 마음이 너무 고맙게 느껴진다.
드디어 시작된 평양 공연
연주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한복을 차려입은 안내원들이 줄지어 들어오는 관객을 객석으로 안내한다. 남성 관객들은 신사복이나 인민복, 여자들은 한복이나 정장을 차려입고 왔다. 극장 안내원은 바지를 입고 온 한 여성 관객에게 '다음부터는 치마를 입고 오라'며 정중한 주의를 주기도 했다.
관객들은 자리에 앉아 엄숙한 자세로 공연을 기다리고 있다. 마치 경연대회의 심사위원 같은 모습으로 말이다. 이내 주의사항을 알리는 아나운서의 근엄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공연 중 옆 사람과 얘기를 한다든가, 껌을 씹는다든가, 손전화를 켜놓고 있다든가 하는 행동을 자제해 주십시오."
갑자기 초조한 마음이 불쑥 고개를 내민다. '과연 저 딱딱한 모습의 사람들에게 내 마음이 노래로 전달될 수 있을까'라고 말이다. 게다가 죽 늘어선, 중계방송을 위한 텔레비전 카메라들이 내 마음속 긴장감을 증폭시킨다. 무대 뒤에 있는 연습실로 향한다. 오로지 내 마음이 공연장을 찾은 저 북한동포들에게 순수히 전달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박혜영 선생과 무대에 오르기 전, 마지막 연습에 최선을 다했다.
시간이 제법 지나 김정남 안내원이 허겁지겁 나를 찾아왔다. 다음에 무대에 올라가야 하니 준비하라고.
화려한 한복을 멋지게 입은 사회자가 내 차례를 소개한다. 살짝 객석을 내다보니 빈자리 없이 꽉 차 있다. 마음이 어느새 벅찬 감격으로 흥분된다.
드디어 나는 무대의 중앙에 섰고, 화려한 불빛 조명을 받았다. 박혜영 선생의 감미로운 전주곡이 시작된다. 마치 심사위원처럼 심각하게 앉아 있던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관객들 사이에 작은 파장이 인 듯하다. 앞서 연주한 사람들 모두가 서양음악을 연주했는데, 내 차례가 되고 북한 노래가 흘러나오니 전주서부터 벌써 관객들은 감흥을 느낀 듯하다.
민족이 하나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나의 소망이 노래를 통해 저들의 마음으로 흘러들어 감을 느낀다. 저들은 한 소절, 한 박자도 놓침이 없이 내 마음을 꼭 안아 준다. 어느새 내 영혼도 동포들과 하나가 돼 그들의 마음속에 머무르고 있음을 느낀다. 관객석 여기저기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는 모습들이 보인다. 나 또한 눈물을 떨군다. 목이 메이면서도 노래는 저들과 나를 이어주고 있다.
문득 지난해 10월, 눈물의 연속이었던 첫 북한 여행 당시가 떠올랐다. 그런데 이 공연마저도 아직 그 연장선 상에 있는 모양이다.
"재청! 재청! 재청!"
공연장에 울려 퍼지는 관객들의 목소리. '아! 내 생애 최고의 공연이구나. 음악을 공부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노래로 북녘 동포들과 한 마음을 이뤘으니...
헤어진 가족, 60년 만에 다시 만나다
공연을 마치고 호텔 식당으로 들어섰다. 황연희 아가씨가 예쁜 미소로 우리를 반긴다.
"선생님 공연 잘 하셨습네까? 저도 꼭 보고 싶었는데... 아마 텔레비전으로 볼 수 있을 겁네다. 이런 귀중한 공연들은 방송국에서 녹화해 두고두고 보여줍네다."
그리고 "제가 가족들과 친지들에게 '제가 접대하고 있는 분이 공연에 초대돼 오신 분들인데, 가서 공연을 보라'고 했습네다"라고 진심 어린 말을 건넨다. 따스한 미소 만큼이나 마음도 따뜻하다.
우리 식탁 건너편에는 애절해 보이는 여러 가족이 앉아 있다. 텔레비전에서 혹은 말로만 듣던 이산가족 상봉식이었다. 식탁에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음식에는 관심이 없다. 그저 서로의 손을 붙잡고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만 닦고 있다. 각자의 사연들을 담고 있는 이산가족들의 상봉 장면은 내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한 여인은 사업상 남쪽에 내려가 있는 남편을 찾아 뱃속의 아이와 두 딸을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 가기로 결심한다. 그 여인의 엄마, 즉 아이들의 외할머니는 '곧 전쟁이 마무리될 덴데 홀몸도 아니고 두 아이를 데리고 가는 것은 무리니까 걸을 수 있는 여섯 살바기 큰딸만 데리고 가고, 두 살짜리 여자 아이는 내가 보살피마'라고 말씀하셨단다.
그 후 헤어져 살게 된 60여 년의 세월. 두살바기 여자 아이는 외할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후 한 많은 세월을 살았단다. 무슨 말이 필요 하겠는가. 돌아가신 외할머니 또한 어린 손녀딸을 혼자 남겨 놓고 어떻게 눈을 감으셨을지... 그 심정, 미루어 가늠할 수 있었다.
지금은 너무나도 연로해 거동이 불편한 애기 엄마는 평생을 북쪽에 남겨놓고 온 딸 생각으로 살아도 살아 있음을 느끼지 못한 채 사셨단다. 마침내 이들 가족은 남겨 두고 온 딸을, 동생을, 누나를 한 번이라도 만나 볼 생각으로 미국 시민권을 받았단다.
다행히도 애기 엄마는 거동이 불편해지기 전 육십 노인이 돼 버린 두 살바기 어린 딸을 만날 수 있었단다. 지금은 거동이 불편해 엄마는 북한에 올 수 없다고. 여섯 살 언니와 뱃속 남동생이 엄마 대신 기회가 닿는 대로 북한을 방문한다고 한다. 그나마 엄마는 큰딸과 아들이라도 두 살바기 딸 아이를 만나보고 올 수 있으니 그 희망으로 남은 여생을 버티신단다.
"이산가족은 이 순간에도 고통 안고 죽어갑니다"
아무리 자주 찾아와 본들 지난 60년의 그리움을 어떻게 채울 수 있을까. 그저 일주일 내내 서로 붙잡고, 껴안고, 울고 또 울 뿐이다. 그래도 그들의 눈물은 마르지 않을 것이다. 여섯 살바기 언니는 훌쩍 늙어버린 사위와 며느리를 데리고 온 두 살바기 동생이 못내 안쓰럽고 가여워 눈물을 닦아줄 힘마저 없어 보인다.
한편, 한 할아버지는 그 옆 테이블에 앉아 한 할머니와 60대로 보이는 남성의 손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 전쟁 때 헤어진 부인과 아들이란다. 부인은 남으로 간 남편이 언젠가는 꼭 돌아올 것이라 믿으며 아들을 키우며 일생을 혼자 살았단다.
이 이산가족들이 옆에서 함께 눈물을 닦고 있는 우리에게 한마디 한다.
"그래도 우리는 외국 시민권을 갖고 있어 헤어진 가족들을 만날 수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쓰라린 고통을 안고 죽어 가는 남과 북의 이산가족들을 생각하면... 그분들께 너무나 죄송하고 미안합니다..."
이런 비극이 세상 천지에 또 어디 있으랴. 피붙이를, 내 형제, 내 자매, 내 부모를 생이별하고 남북 두 나라가 너무나도 태연하게 존재하고 있으니... 끊어진 인연의 끈을 방치하고 있는 두 나라에 어떤 벌이 내려질까를 생각하니 가슴이 서늘해진다. 이 비극은 그 어떤 번드르르한 말로도, 그 어떤 이유로도 설명될 수 없을 것이다.
이 밤은 너무나도 길고, 또 슬프다. 미어지는 가슴을 추스르기 힘들어 창문을 연다. 하늘의 별빛이 희망의 속삭임으로 다가와 조금은 위안이 된다.
이틀 동안 재미동포 예술단은 같은 연주홀에서 두 번의 공연을 더 했다. 공연은 회를 거듭할수록 서로를 향하는 뜨거운 민족애와 하나 되기를 원하는 간절한 바람으로 채워졌다. 노래를 부르는 나도, 내 노래를 듣는 북한동포들도 마음에 드리우고 있던 잿빛 장막을 걷어 올리고 자유롭게 교감했다. 같은 언어, 같은 정서를 공유한다는 것이 이렇게 따스함으로, 친근함으로 다가올 줄이야. 몇십 년을 살아온 미국에서도 사람들로부터 이와 같은 친화력을 느껴보지 못했다. 분명 내 민족, 내 나라에서만 느껴 볼 수 있는 감정의 하모니였다.
김일성 주석 기리는 열병식... 정말 보고 싶었지만
4월 15일. 김일성 주석의 '100주년 탄생 기념일'이다. 북한의 제일 큰 명절이요, 축하행사들이 곳곳에서 벌어지는 날이란다. 그 축하 행사의 백미는 예전 텔레비전을 통해서만 볼 수 있었던, 그리고 내 머리 신경세포를 쭈뼛 세우게 한 '열병식'이란다.
남편은 당연 '열병식'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큰 기대에 마음이 들떠 있었지만, 외국인 관광객들이나 외국 초청 손님들은 김일성 광장에서 벌어지는 열병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같은 시각, '대성산 공원'이라는 곳에서 친선 도모를 위한 공연 관람 및 체육대회가 열린다고 한다. 남편은 열병식을 볼 수 있을 것이라 학수고대하고 있다가 참석하지 못한다는 말에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체육대회 같은 것으로는 명함도 못 내밀 대체 수단이었다. 안내원은 대성산에 가자며 우리를 부르러 방에 올라왔다. 남편은 호텔에서 쉬겠다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안내원 이야기로는, 열병식 대열이 호텔을 끼고 있는 양쪽 도로를 지나가기 때문에 호텔 안의 모든 투숙객들은 이곳에 머무를 수 없다고 한다. 순간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다는 생각이 내 머리를 스친다.
"여보, 아마 오늘 대성산에 가면 설경이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요."
'설경이'라는 말에 침대에 누워있던 남편이 벌떡 일어난다.
"설경이를 만날 수 있다고?"
"아니... 설경이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고요. 왜냐면 모든 외국 관광객들이 대성산 유원지에 모인다는 데 설경이네 팀도 그곳에 오지 않겠어요?"
북한에 다시 닿은 뒤 한순간도 설경이와 만룡 안내원, 그리고 리인덕 운전수 아저씨를 잊은 적이 없었다.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조선국제려행사'라고 쓰여 있는 버스를 보면 혹시 그들이 아닐까 눈이 빠질 듯, 목이 빠질 듯 쳐다봤다.
운좋게도 그저께는 우리 호텔 앞에 '조선국제려행사'라고 써 붙인 자동차가 서 있었다. 그 운전사에게 리인덕 운전사의 안부를 물었다. 마침 그 운전사는 리인덕 운전수 아저씨와 잘 아는 사이여서 그에게 전화를 걸어줬다. 우리는 전화가 터져라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목소리만 들었는데도 우리는 서로 반가움에 울먹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리인덕 운전수 아저씨의 말이 "설경이는 판문점 쪽에 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연락을 해봤으나 통화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만룡 안내원은 대학원에 진학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역시 전화가 안 된다고 했다. 리인덕 아저씨만이라도 통화가 된 것이다. 당시의 반가움은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오늘, 설경이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비록 1%의 확률밖에 되지 않는다고 해도 대성산 유원지에 가야 한다는 희망적인 '명분'임은 분명했다.
우리 부부는 쏜살같이 대성산 유원지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안내원들은 문제아 학생들을 개과천선시킨 것 마냥 흐뭇하게 우리를 반긴다.
대성산 유원지에 도착하니 관광객을 실어 나른 자동차들이 즐비하게 늘어 서 있다. 그 중 많은 버스들이 '조선국제려행사'에서 온 것들이었다. 우리의 기대는 확률적으로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도착하기가 무섭게 남편은 설경이를 찾는다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나도 나름 한쪽으로 안내원들의 지시 사항을 준수하며 다른 한쪽으로는 신경을 곤두세워 '설경이 찾기'에 온 집중하고 있었다.
다시 만난 그녀, 눈물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북한에 들어와 있는 모든 관광객, 그리고 외국 손님들은 다 이곳에 불러 놓은 모양이다. 한쪽에서는 흥겨운 밴드 연주에 맞춰 사람들이 춤을 춘다. 다른 한쪽에서는 우리를 위해 공연을 하러 온 어린 아이들과 사진을 찍기 바쁘다. 그 와중에 주최 측 지침에 잘 따르고 있는 일부 모범생 외국 손님들은 주최 측에서 정성스레 준비해온 체육대회 프로그램에 열심히 참여하고 있다. 청군·홍군 모자를 쓰고 말이다. 가끔씩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면서 왔다갔다하는 남편의 모습이 애절해 보인다.
시간은 자꾸 흐르고 있다. 이제는 나도 적극적으로 뛰어다니며 설경이를 찾아 나서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리저리로 찾아다닌 보람이 있는 지 설경이가 이곳에 와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우리 부부는 안달이 나 설경이를 찾아다녔다. 설경이 뒷모습을 닮은 이들이 어찌나 많은지...
멀리서 나를 다급히 부르는 남편의 목소리가 들린다. 순간 '찾았구나'라며 벌떡 일어나 뒤를 돌아보니 꿈인지 생시인지 남편이 설경이 손을 꼭 잡고서 뛰어오고 있는 게 아닌가. 서로 얼싸 안기도 전에 우리는 이미 눈물로 반가움과 기쁨을 표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겁네까? 어떻게 이런 일이... 이렇게 기쁜 일이... 꿈은 아니갔지요? 4월에 만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했는데... 5월에 오실 거라는 소식은 회사에서 말해줘서 알고 있었습네다."
설경이는 차오르는 감격으로 말을 잇지 못한다. 나 역시 어떤 말로도 이 반가움을 표현하기가 힘들었다. 그저 우리 셋은 잡은 손을 다시 꼭 잡으며 마음을 대신했다.
시간은 무심하게도 빨리 지나갔다. 또다시 헤어져야 하는 순간이 됐다. 남편이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한다.
"설경아, 우리 다음 달에 다시 보자. 너를 꼭 우리 안내원으로 해 달라고 부탁해 놨어."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우리는 서로 갈 길을 향해 이별의 손짓을 해야 했다. 마음뿐 아니라 무엇이라도 주고파서 뒤돌아 보는 설경이를 쫓아갔다. 그리고, 내가 차고 있던 팔찌를 설경이에게 채워줬다. 설경이는 팔찌를 채워주는 내 손을 물끄러니 쳐다보며 내 손등에 눈물을 떨군다.
호텔로 돌아와 침울한 마음으로 쉬고 있는데, 갑자기 안내원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모든 소지품을 호텔방에 놔두고 로비로 내려오란다. 특히 남편의 담배는 물론이고, 라이터는 더더욱 안 된다고 한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마지막 리허설을 마친 날 오후, 휴식을 위해 우리는 김일성 광장에 있는 조선미술박물관으로 향했다. 차에서 내려 광장에서 춤 연습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구경하기 위해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박물관에서 한 여자가 뛰어나와 우리의 손을 잡아 흔들며 반기는 것이 아닌가! 지난번 방문 때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것이 남편을 잘 만나서 그런 것 같다"고 농담했던 바로 그 해설원이다.
너무나 놀라며 "어떻게 또 왔느냐"고 묻는다. 재미동포 예술단원으로 왔다고 하자 자기도 꼭 구경하러 가겠단다. 나를 아는 북한 사람이 객석에 앉아 내 공연을 지켜본다는 것을 상상하니 갑자기 신기하다는 생각이 든다.
공연의 도시 '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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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만난 조선미술박물관 해설원. | |
ⓒ 신은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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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막식 공연 장면. | |
ⓒ 신은미 |
이날 저녁, 우리는 봄축전 개막식에 참가했다. '재미동포 예술단'이라는 푯말을 앞세우고 어린이들의 환영을 받으며 '동평양대극장'에 입장했다. 지난번 뉴욕필하모니가 평양을 방문해 역사적인 공연을 했다는 바로 그 극장이다. 과연 뉴욕필하모니가 칭찬할만하다. 화려하기가 그지없다.
평양은 '공연장의 도시'라고 칭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훌륭한 시설을 갖추고 있는 극장들이 도처에 널려있으니 말이다. 북한 사람들에게 음악은 생활화돼 있는 듯하다. 모든 사람들이 한 가지 이상의 악기를 다룰 줄 안단다. 그런데 이들에게 음악이란 단순히 즐기는 오락만은 아닌 것 같다. 음악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이 사상을 고취하고 단결을 도모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듯하다. 거의 모든 예술 작품들이 그러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우리가 예술을 대하는 자세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드디어 연주회 날이 밝았다. 내 노래를 들어 줄 북한동포들에 대한 호기심과 함께 그들의 반응이 궁금해진다.
북한 성악가들이 마이크 쓰지 않는 이유, 따로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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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은 날 공연하는 외국 예술단원들의 모습이 보인다. | |
ⓒ 신은미 |
평양음대 연주홀에 도착하니 우리보다 먼저 온 유럽 연주자들이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춰 리허설을 하고 있다. 무대 조명 및 소도구 등을 챙기는 아저씨들과 음악감독 아저씨도 분주히 오간다. 도대체 누가, 몇 시에, 몇 번째 순서로 노래를 불러야 하는지 이곳 연주홀에 오기까지 아무도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다. 우리의 안내원 아저씨들에게 물어봐도 "공연 시작할 때가 돼봐야 압네다"라는 말 한마디뿐이다. 도저히 공연이 제대로 진행될 것 같지 않았다.
"마지막 점검 순서가 됐다"며 한 남학생이 분장실로 나를 찾으러 온 것을 보니 오늘 연주를 하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교복으로 보이는 하얀 셔츠에 검정색 치마 내지는 바지를 입은 학생들이 열심히 경청하고 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음악감독이 "마이크 없이 한 번 더 불러 주시겠습네까"란다. 예전에는 모든 음악에 무조건 마이크를 사용했는데, 요즘 들어 마이크 없이 하는 것을 선호한다고 한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김정일 위원장이 북한의 성악가들에게 다른 나라들의 성악가들처럼 마이크를 사용하지 않고 노래 부를 수 있는 방도를 찾으라고 생전에 지시했다고 한다. 그 대책의 일환으로 이탈리아의 '벨칸토식' 창법을, 1년에 몇 개월씩 외국에서 성악가를 초빙해 특강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아마 수년 뒤에는 우리가 흔히 기대하며 들어왔던 북한식 전통 창법은 사라지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든다. 특별히 음악감독 선생이 내게 마이크 없이 노래를 부르라고 한 것도 아마 학생들에게 교육 차원에서 보여주기 위함이었으리라.
마지막 리허설을 마치고 분장실에 돌아오니 남편이 중요한 비밀정보라도 입수한 듯 헐레벌떡 분장실로 뛰어들어왔다. 공연장의 여러 사람한테 물어서 어렵사리 알아냈다며 정확한 내 연주 차례를 가르쳐 주고 갔다. 그나마 그 정보가 정확한지 조차 의문이다. 과연 정상적으로 연주가 진행될 수 있을는지 내 눈에는 모든 정황들이 어설프게 보인다.
북한의 성형수술 그리고 멋부리는 여자들
반주자 박혜영 선생은 옆에서 열심히 치장을 하고 있다. 크고 예쁜 눈을 더 크고 더 예뻐 보이게 하려는지 눈꺼풀 위에 쌍꺼풀을 만들어주는 임시 테이프를 붙이고 있다. 예전에 내 친구가 자기 눈이 작다면서 틈만 나면 테이프 같은 것을 열심히 눈에 붙이던 기억이 살아나서 흥미롭게 쳐다보고 있었다. 언제 들어왔는지 김정남 안내원이 그 광경을 지켜보더니 한마디 한다.
"아무튼 우리 딸을 비롯해서 여자들 맵시(모양) 내는 것은 아무도 못 말립네다. 머리에 물들이는 것을 그렇게 단속해도 소용이 없습네다. (조그마한 소리로 귀에다 대고는) 요즈음 들어서는 쌍꺼풀 수술이 유행입네다. 엉터리 시술사한테 해서 실패하는 녀성들도 꽤 있답네다. 오죽하면 '수술하는 것은 말리지 않으니 제발 정식 병원에 가서 제대로 쌍꺼풀 수술을 받으라'고 하겠습네까?"
그러고 보니 쌍꺼풀 수술을 한 여성들, 그리고 머리카락을 밝은 색상으로 물들인 여성들이 종종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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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꺼풀 수술을 한 것으로 보이는 북한 여성 | |
ⓒ 신은미 |
내 관심은 '내 순서는 몇 번째며 언제 무대 뒤로 나가 있어야 하는지'였다. 하지만 김정남 안내원은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는지 "선생님 순서가 되면 부르러 오겠다"는 말 한마디만 남기고는 사라졌다. 이런 상황이 매우 익숙한지 박혜영 선생 또한 별걱정이 없어 보인다. 그녀는 "머리를 동네 미장원에서 하고 왔는데, 어색해 보이지는 않습네까"라며 화장을 하다 말고 거울 속에 비치는 자기 모습을 보며 안절부절해 한다.
내가 "아니야, 너무 예뻐. 마치 궁전 안을 거닐고 있는 공주 같아"라고 말해 주니 '다행이다' 싶은지 수줍은 미소를 짓는다. 연보라색 드레스를 입고 이리저리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면서 멋진 포즈를 잡는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박혜영 선생의 예쁜 모습에 빠져 정작 나는 무대에 오를 때 무슨 옷을 입어야 하는 게 좋을지 정하지도 못했다.
사실 나는 외국 노래를 부를 생각에 서양 드레스에만 신경을 써 가지고 왔는데, 이곳 노래를 부르게 됐으니 드레스보다는 한복을 입는 게 나을 듯했다. 혹시나 해서 미국서 가져온 한복을 입는 편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재미동포 예술단 중 어느 누구도 한복을 입은 사람이 없었으니 말이다.
"조선 옷은 단아해야지요... 요새 옷들은 촌스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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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장실에서 대기 중인 필자 | |
ⓒ 신은미 |
북한의 여성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한복을 즐겨 입는다. 그것도 화려한 디자인의 한복을 말이다. 이들 한복에 비하니 내 한복은 초라하기 그지없어 불쌍해 보일 지경. 그래도 나는 한복을 입기로 결정했다.
정신없이 치장하고 있던 박혜영 선생이 한복 입은 나를 보더니, "선생님, 너무 좋습네다. 빨간 저고리에 단순한 문양의 하얀 치마가 너무나 고와 보입네다"라고 말한다. 한복이 초라해 보인다고 생각했던 내 마음이 들통 났는지, 박혜영 선생의 위로는 끊이지 않는다.
"선생님, 자고로 조선 옷은 단아하고 정숙해야 지조 있어 보이지 요즘처럼 너무 화려하게 만들어진 조선 옷은 멋져 보이기는커녕 촌스러워 보입네다."
박혜영 선생의 말 한마디에 위로가 된다. 그녀의 마음이 너무 고맙게 느껴진다.
드디어 시작된 평양 공연
연주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한복을 차려입은 안내원들이 줄지어 들어오는 관객을 객석으로 안내한다. 남성 관객들은 신사복이나 인민복, 여자들은 한복이나 정장을 차려입고 왔다. 극장 안내원은 바지를 입고 온 한 여성 관객에게 '다음부터는 치마를 입고 오라'며 정중한 주의를 주기도 했다.
관객들은 자리에 앉아 엄숙한 자세로 공연을 기다리고 있다. 마치 경연대회의 심사위원 같은 모습으로 말이다. 이내 주의사항을 알리는 아나운서의 근엄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공연 중 옆 사람과 얘기를 한다든가, 껌을 씹는다든가, 손전화를 켜놓고 있다든가 하는 행동을 자제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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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객들의 모습 | |
ⓒ 신은미 |
갑자기 초조한 마음이 불쑥 고개를 내민다. '과연 저 딱딱한 모습의 사람들에게 내 마음이 노래로 전달될 수 있을까'라고 말이다. 게다가 죽 늘어선, 중계방송을 위한 텔레비전 카메라들이 내 마음속 긴장감을 증폭시킨다. 무대 뒤에 있는 연습실로 향한다. 오로지 내 마음이 공연장을 찾은 저 북한동포들에게 순수히 전달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박혜영 선생과 무대에 오르기 전, 마지막 연습에 최선을 다했다.
시간이 제법 지나 김정남 안내원이 허겁지겁 나를 찾아왔다. 다음에 무대에 올라가야 하니 준비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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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복을 화려하게 차려 입은 공연 사회자 | |
ⓒ 신은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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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연 중인 필자 | |
ⓒ 신은미 |
화려한 한복을 멋지게 입은 사회자가 내 차례를 소개한다. 살짝 객석을 내다보니 빈자리 없이 꽉 차 있다. 마음이 어느새 벅찬 감격으로 흥분된다.
드디어 나는 무대의 중앙에 섰고, 화려한 불빛 조명을 받았다. 박혜영 선생의 감미로운 전주곡이 시작된다. 마치 심사위원처럼 심각하게 앉아 있던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관객들 사이에 작은 파장이 인 듯하다. 앞서 연주한 사람들 모두가 서양음악을 연주했는데, 내 차례가 되고 북한 노래가 흘러나오니 전주서부터 벌써 관객들은 감흥을 느낀 듯하다.
민족이 하나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나의 소망이 노래를 통해 저들의 마음으로 흘러들어 감을 느낀다. 저들은 한 소절, 한 박자도 놓침이 없이 내 마음을 꼭 안아 준다. 어느새 내 영혼도 동포들과 하나가 돼 그들의 마음속에 머무르고 있음을 느낀다. 관객석 여기저기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는 모습들이 보인다. 나 또한 눈물을 떨군다. 목이 메이면서도 노래는 저들과 나를 이어주고 있다.
문득 지난해 10월, 눈물의 연속이었던 첫 북한 여행 당시가 떠올랐다. 그런데 이 공연마저도 아직 그 연장선 상에 있는 모양이다.
"재청! 재청! 재청!"
공연장에 울려 퍼지는 관객들의 목소리. '아! 내 생애 최고의 공연이구나. 음악을 공부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노래로 북녘 동포들과 한 마음을 이뤘으니...
헤어진 가족, 60년 만에 다시 만나다
공연을 마치고 호텔 식당으로 들어섰다. 황연희 아가씨가 예쁜 미소로 우리를 반긴다.
"선생님 공연 잘 하셨습네까? 저도 꼭 보고 싶었는데... 아마 텔레비전으로 볼 수 있을 겁네다. 이런 귀중한 공연들은 방송국에서 녹화해 두고두고 보여줍네다."
그리고 "제가 가족들과 친지들에게 '제가 접대하고 있는 분이 공연에 초대돼 오신 분들인데, 가서 공연을 보라'고 했습네다"라고 진심 어린 말을 건넨다. 따스한 미소 만큼이나 마음도 따뜻하다.
우리 식탁 건너편에는 애절해 보이는 여러 가족이 앉아 있다. 텔레비전에서 혹은 말로만 듣던 이산가족 상봉식이었다. 식탁에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음식에는 관심이 없다. 그저 서로의 손을 붙잡고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만 닦고 있다. 각자의 사연들을 담고 있는 이산가족들의 상봉 장면은 내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한 여인은 사업상 남쪽에 내려가 있는 남편을 찾아 뱃속의 아이와 두 딸을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 가기로 결심한다. 그 여인의 엄마, 즉 아이들의 외할머니는 '곧 전쟁이 마무리될 덴데 홀몸도 아니고 두 아이를 데리고 가는 것은 무리니까 걸을 수 있는 여섯 살바기 큰딸만 데리고 가고, 두 살짜리 여자 아이는 내가 보살피마'라고 말씀하셨단다.
그 후 헤어져 살게 된 60여 년의 세월. 두살바기 여자 아이는 외할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후 한 많은 세월을 살았단다. 무슨 말이 필요 하겠는가. 돌아가신 외할머니 또한 어린 손녀딸을 혼자 남겨 놓고 어떻게 눈을 감으셨을지... 그 심정, 미루어 가늠할 수 있었다.
지금은 너무나도 연로해 거동이 불편한 애기 엄마는 평생을 북쪽에 남겨놓고 온 딸 생각으로 살아도 살아 있음을 느끼지 못한 채 사셨단다. 마침내 이들 가족은 남겨 두고 온 딸을, 동생을, 누나를 한 번이라도 만나 볼 생각으로 미국 시민권을 받았단다.
다행히도 애기 엄마는 거동이 불편해지기 전 육십 노인이 돼 버린 두 살바기 어린 딸을 만날 수 있었단다. 지금은 거동이 불편해 엄마는 북한에 올 수 없다고. 여섯 살 언니와 뱃속 남동생이 엄마 대신 기회가 닿는 대로 북한을 방문한다고 한다. 그나마 엄마는 큰딸과 아들이라도 두 살바기 딸 아이를 만나보고 올 수 있으니 그 희망으로 남은 여생을 버티신단다.
"이산가족은 이 순간에도 고통 안고 죽어갑니다"
아무리 자주 찾아와 본들 지난 60년의 그리움을 어떻게 채울 수 있을까. 그저 일주일 내내 서로 붙잡고, 껴안고, 울고 또 울 뿐이다. 그래도 그들의 눈물은 마르지 않을 것이다. 여섯 살바기 언니는 훌쩍 늙어버린 사위와 며느리를 데리고 온 두 살바기 동생이 못내 안쓰럽고 가여워 눈물을 닦아줄 힘마저 없어 보인다.
한편, 한 할아버지는 그 옆 테이블에 앉아 한 할머니와 60대로 보이는 남성의 손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 전쟁 때 헤어진 부인과 아들이란다. 부인은 남으로 간 남편이 언젠가는 꼭 돌아올 것이라 믿으며 아들을 키우며 일생을 혼자 살았단다.
이 이산가족들이 옆에서 함께 눈물을 닦고 있는 우리에게 한마디 한다.
"그래도 우리는 외국 시민권을 갖고 있어 헤어진 가족들을 만날 수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쓰라린 고통을 안고 죽어 가는 남과 북의 이산가족들을 생각하면... 그분들께 너무나 죄송하고 미안합니다..."
이런 비극이 세상 천지에 또 어디 있으랴. 피붙이를, 내 형제, 내 자매, 내 부모를 생이별하고 남북 두 나라가 너무나도 태연하게 존재하고 있으니... 끊어진 인연의 끈을 방치하고 있는 두 나라에 어떤 벌이 내려질까를 생각하니 가슴이 서늘해진다. 이 비극은 그 어떤 번드르르한 말로도, 그 어떤 이유로도 설명될 수 없을 것이다.
이 밤은 너무나도 길고, 또 슬프다. 미어지는 가슴을 추스르기 힘들어 창문을 연다. 하늘의 별빛이 희망의 속삭임으로 다가와 조금은 위안이 된다.
이틀 동안 재미동포 예술단은 같은 연주홀에서 두 번의 공연을 더 했다. 공연은 회를 거듭할수록 서로를 향하는 뜨거운 민족애와 하나 되기를 원하는 간절한 바람으로 채워졌다. 노래를 부르는 나도, 내 노래를 듣는 북한동포들도 마음에 드리우고 있던 잿빛 장막을 걷어 올리고 자유롭게 교감했다. 같은 언어, 같은 정서를 공유한다는 것이 이렇게 따스함으로, 친근함으로 다가올 줄이야. 몇십 년을 살아온 미국에서도 사람들로부터 이와 같은 친화력을 느껴보지 못했다. 분명 내 민족, 내 나라에서만 느껴 볼 수 있는 감정의 하모니였다.
김일성 주석 기리는 열병식... 정말 보고 싶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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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성산 공원 입구에 있는 남문 | |
ⓒ 신은미 |
4월 15일. 김일성 주석의 '100주년 탄생 기념일'이다. 북한의 제일 큰 명절이요, 축하행사들이 곳곳에서 벌어지는 날이란다. 그 축하 행사의 백미는 예전 텔레비전을 통해서만 볼 수 있었던, 그리고 내 머리 신경세포를 쭈뼛 세우게 한 '열병식'이란다.
남편은 당연 '열병식'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큰 기대에 마음이 들떠 있었지만, 외국인 관광객들이나 외국 초청 손님들은 김일성 광장에서 벌어지는 열병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같은 시각, '대성산 공원'이라는 곳에서 친선 도모를 위한 공연 관람 및 체육대회가 열린다고 한다. 남편은 열병식을 볼 수 있을 것이라 학수고대하고 있다가 참석하지 못한다는 말에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체육대회 같은 것으로는 명함도 못 내밀 대체 수단이었다. 안내원은 대성산에 가자며 우리를 부르러 방에 올라왔다. 남편은 호텔에서 쉬겠다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안내원 이야기로는, 열병식 대열이 호텔을 끼고 있는 양쪽 도로를 지나가기 때문에 호텔 안의 모든 투숙객들은 이곳에 머무를 수 없다고 한다. 순간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다는 생각이 내 머리를 스친다.
"여보, 아마 오늘 대성산에 가면 설경이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요."
'설경이'라는 말에 침대에 누워있던 남편이 벌떡 일어난다.
"설경이를 만날 수 있다고?"
"아니... 설경이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고요. 왜냐면 모든 외국 관광객들이 대성산 유원지에 모인다는 데 설경이네 팀도 그곳에 오지 않겠어요?"
북한에 다시 닿은 뒤 한순간도 설경이와 만룡 안내원, 그리고 리인덕 운전수 아저씨를 잊은 적이 없었다.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조선국제려행사'라고 쓰여 있는 버스를 보면 혹시 그들이 아닐까 눈이 빠질 듯, 목이 빠질 듯 쳐다봤다.
운좋게도 그저께는 우리 호텔 앞에 '조선국제려행사'라고 써 붙인 자동차가 서 있었다. 그 운전사에게 리인덕 운전사의 안부를 물었다. 마침 그 운전사는 리인덕 운전수 아저씨와 잘 아는 사이여서 그에게 전화를 걸어줬다. 우리는 전화가 터져라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목소리만 들었는데도 우리는 서로 반가움에 울먹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리인덕 운전수 아저씨의 말이 "설경이는 판문점 쪽에 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연락을 해봤으나 통화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만룡 안내원은 대학원에 진학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역시 전화가 안 된다고 했다. 리인덕 아저씨만이라도 통화가 된 것이다. 당시의 반가움은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오늘, 설경이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비록 1%의 확률밖에 되지 않는다고 해도 대성산 유원지에 가야 한다는 희망적인 '명분'임은 분명했다.
우리 부부는 쏜살같이 대성산 유원지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안내원들은 문제아 학생들을 개과천선시킨 것 마냥 흐뭇하게 우리를 반긴다.
대성산 유원지에 도착하니 관광객을 실어 나른 자동차들이 즐비하게 늘어 서 있다. 그 중 많은 버스들이 '조선국제려행사'에서 온 것들이었다. 우리의 기대는 확률적으로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도착하기가 무섭게 남편은 설경이를 찾는다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나도 나름 한쪽으로 안내원들의 지시 사항을 준수하며 다른 한쪽으로는 신경을 곤두세워 '설경이 찾기'에 온 집중하고 있었다.
다시 만난 그녀, 눈물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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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국인들을 위해 공연을 베풀어준 어린이들 | |
ⓒ 신은미 |
북한에 들어와 있는 모든 관광객, 그리고 외국 손님들은 다 이곳에 불러 놓은 모양이다. 한쪽에서는 흥겨운 밴드 연주에 맞춰 사람들이 춤을 춘다. 다른 한쪽에서는 우리를 위해 공연을 하러 온 어린 아이들과 사진을 찍기 바쁘다. 그 와중에 주최 측 지침에 잘 따르고 있는 일부 모범생 외국 손님들은 주최 측에서 정성스레 준비해온 체육대회 프로그램에 열심히 참여하고 있다. 청군·홍군 모자를 쓰고 말이다. 가끔씩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면서 왔다갔다하는 남편의 모습이 애절해 보인다.
시간은 자꾸 흐르고 있다. 이제는 나도 적극적으로 뛰어다니며 설경이를 찾아 나서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리저리로 찾아다닌 보람이 있는 지 설경이가 이곳에 와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우리 부부는 안달이 나 설경이를 찾아다녔다. 설경이 뒷모습을 닮은 이들이 어찌나 많은지...
멀리서 나를 다급히 부르는 남편의 목소리가 들린다. 순간 '찾았구나'라며 벌떡 일어나 뒤를 돌아보니 꿈인지 생시인지 남편이 설경이 손을 꼭 잡고서 뛰어오고 있는 게 아닌가. 서로 얼싸 안기도 전에 우리는 이미 눈물로 반가움과 기쁨을 표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겁네까? 어떻게 이런 일이... 이렇게 기쁜 일이... 꿈은 아니갔지요? 4월에 만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했는데... 5월에 오실 거라는 소식은 회사에서 말해줘서 알고 있었습네다."
설경이는 차오르는 감격으로 말을 잇지 못한다. 나 역시 어떤 말로도 이 반가움을 표현하기가 힘들었다. 그저 우리 셋은 잡은 손을 다시 꼭 잡으며 마음을 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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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만난 설경이 | |
ⓒ 신은미 |
시간은 무심하게도 빨리 지나갔다. 또다시 헤어져야 하는 순간이 됐다. 남편이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한다.
"설경아, 우리 다음 달에 다시 보자. 너를 꼭 우리 안내원으로 해 달라고 부탁해 놨어."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우리는 서로 갈 길을 향해 이별의 손짓을 해야 했다. 마음뿐 아니라 무엇이라도 주고파서 뒤돌아 보는 설경이를 쫓아갔다. 그리고, 내가 차고 있던 팔찌를 설경이에게 채워줬다. 설경이는 팔찌를 채워주는 내 손을 물끄러니 쳐다보며 내 손등에 눈물을 떨군다.
호텔로 돌아와 침울한 마음으로 쉬고 있는데, 갑자기 안내원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모든 소지품을 호텔방에 놔두고 로비로 내려오란다. 특히 남편의 담배는 물론이고, 라이터는 더더욱 안 된다고 한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김정은 대장'과 함께 본 불꽃놀이, 섬뜩했습니다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 18] 대동강 불꽃놀이와 만찬회
12.08.13 20:25
최종 업데이트 12.08.13 20:25저는 오래 전부터 음악을 공부하고,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오로지 음악에 관한 지식만을 가르쳐왔습니다. 지금은 평범한 주부이자 아이들의 엄마로 살고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과 함께 북한에 갔습니다. 호기심으로 떠난 여행이었지만, 저는 처음으로 우리 민족의 비극적 운명과 민족애를 느꼈습니다. 동시에 통일에 대한 염원이 생겼습니다. 2011년 10월 이후 지난 4월에 열흘 동안, 그리고 5월에는 3주 동안 나진·선봉을 비롯한 북한 전역을 여행했습니다. - 기자말
담배와 라이터는 물론이고 카메라 등 아무것도 소지하지 말고 오라는 전화를 받고 나서 나와 남편은 불안한 마음으로 로비에 내려갔다. 조금 있으니 다른 재미동포 예술단원들도 하나둘씩 모여 들고 있었다. 우리는 영문을 몰라 서로들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
마음속에 있는 말을 참지 못하는 남편의 성격이 발동했다. 남편은 김정남 안내원에게 퉁명스럽게 물었다.
"도대체 어디를 가길래 담배도, 라이터도, 카메라도 못 가지고 간단 말입니까?"
"가 보시면 압네다."
"어디가 어딘지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가 가본다고 거기가 어디인 줄 어떻게 압니까? 어디 간다고 설명을 해 줘야지 알지. 거참, 기가 막혀서..."
옆에 서 있던 우리의 일행들도 속이 시원하다는 표정과 함께 남편의 말에 동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돌아오는 답변은 여전히 "가 보시면 압네다"였다. '가 보면 안다'는 말만 반복하는 안내원, 남편은 더 이상 질문을 거두고 차에 올랐다.
영문도 모른 채 김일성 광장 쪽으로 향하다
우리를 태운 차는 열병식이 있었던 김일성 광장 쪽으로 가고 있었다. 광장에 도착하니 이미 많은 차들이 서 있었으며, 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광장 한가운데 일렬로 줄을 선 채 다음 장소를 향해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주로 외국인들이었다. 우리만 있는 게 아닌 걸 알게 되자 불안한 마음은 사라졌다. 대신 극도의 호기심이 고개를 든다. 대체 무슨 일이 있길래...
우리 일행이 버스에서 내리자 한 군인이 우리가 타고 온 버스에 올라 차를 샅샅이 검사하고 내려왔다. 그것도 부족해서 이번에는 금속 탐지기로 차에서 내린 우리 몸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수색하기 시작했다. 이후 우리는 김정남 안내원의 안내를 받아 조선미술박물관을 지나 대동강 변으로 안내됐다.
삼엄한 경계 속에서 예술단 일행은 이미 마련돼 있는 우리 자리로 이끌려 갔다. 대동강이 보이는 곳에 마련된 자리, 가운데는 귀빈석이 마련돼 있었고, 그 주위에는 북한사람들이 둘러싸고 앉아 있었다. 우리는 외국사절단과 함께 그들의 옆자리에 앉게 됐다. 우리의 왼쪽에는 어느 나라 것인지 알 수 없는 군복을 입은 장교들이 북한 여성 통역군관들의 안내를 받고 있었다.
"곧 축포를 쏠 예정입네다"
잠시 후 150명으로 이뤄진 미국 남성 합창단이 우리 오른쪽 자리에 앉았다. 합창단원들은 처음 오는 북한 땅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지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 앉는다. 한 합창단원이 남편에게 "북한사람이냐"고 물었다. 남편이 "미국 국적의 한국인"이라고 대답하자 반가운 기색을 보였다.
자신들은 조지아주에서 왔는데 북한-미국 간 문화교류 증진의 일환으로 이곳 북한에 왔다고 설명했다. 남편이 "우리도 미국에서 온 예술단"이라고 설명하니 안도의 한숨과 함께 반가운 표정을 짓는다. 이들과 미국 얘기로 집에 대한 향수를 달랬다.
같은 국적을 갖고 있으니 친근감이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일. 북한에서 제2의 고향사람들을 만나니 마치 '우리집 소식'을 접한 것만 같은 반가움이 느껴졌다. 남이고, 북이고, 미국이고, 이렇게 한데 어울려 지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본다. 하지만, 잠시 후 김정남 안내원이 나타나자 남편은 또다시 불만을 터트리기 시작한다.
"아니, 강가에 오면서 무슨 불날 일이 있다고 담배하고 라이터도 못 가지고 오게 했습니까? 대체 여기서 뭘 하는 겁니까?"
"곧 축포(불꽃놀이)를 쏠 예정입네다."
"아니, 그까짓 불꽃놀이 하면서 아무것도 못 가지고 오게 합니까?"
"기다려 보면 압네다."
남편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미국 합창단원과 조지아주에서 벌어졌던 골프대회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만세! 만세! 만세!" 라는 우레와 같은 함성이 울려 퍼졌다. "만세!" 소리를 수십 번은 한 것 같다. 우렁찬 함성에 지진이 난 듯 땅이 울린다.
'김정은 대장'과 함께 봤던 화려한 불꽃놀이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조금 전까지 어두웠던, 북한 사람들이 앉아 있던 관람석 중앙이 환하게 빛을 밝히고 있었다. 곧이어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김정은 대장'이 수행원들과 함께 등장한다. 온 지구를 울리고도 남을 듯한 함성은 끊이지 않았다.
곧 이어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축사를 낭독한다. 우레와 같은 함성에 귀가 먹먹해졌나 보다. 아니면 뇌의 기능이 멈춰 버렸는지 연설 내용은 '웅얼웅얼' 소리가 돼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축사가 끝나고 불꽃놀이의 시작이 선포되자 평양시내의 전기가 일제히 나가면서 순식간에 온 세상이 캄캄한 암흑으로 변했다. 어떻게 도시 전체가 동시에 불을 끌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동시에 섬뜩한 느낌도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순간 우리가 앉아 있는 반대편 대동강 변에서 연이어 축포가 터진다. 여러 군데서 쉬지 않고 동시에 축포를 터트리고 있었다. 그 축포의 빛이 음악에 맞춰 대동강을 형형색색 아름다운 '불빛 무리'로 만들었다.
이 역시도 '아리랑 공연' 때처럼 두 눈으로만 감상할 수가 없었다. 눈을 이리저리 돌려 가면서 간신히 불빛 쇼에 적응하려고 애썼다. 그러자 난데없이 대동강을 가로질러 나 있는 다리로 축포 행렬이 이어졌다. 마치 나이아가라 폭포가 화려한 불빛을 뿜어내며 흘러내리듯 다리 위부터 강물을 향해 불꽃송이가 무리지어 떨어진다.
아! 장관이다! 이런 불꽃놀이는 난생 처음이다. 이제까지 내가 본 여러 나라의 불꽃놀이 중 최고는 뭐니뭐니해도 미국의 독립기념일 때 벌어지는 불꽃놀이였다. 하지만, 그것은 오늘 내가 평양에서 목격한 이 불꽃놀이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 시간동안 축포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내 심장도 터지고 있음을 느끼면서 대동강 변 풍경으로 서서히 빠져들고 있었다.
불꽃놀이의 또 다른 의미
그런데, 엄청난 불꽃놀이와 함께 터지고 있는 내 심장이 갑자기 멈추기라도 하듯, 섬뜩한 느낌이 동시에 찾아 든다. 북한의 거의 모든 예술이 이념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이 불꽃놀이 또한 단순히 화려한 쇼나 오락이 아닌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쉬지 않고 쏘아대는 이 불꽃놀이는 마치 '적이 우리를 공격하면 우리는 이렇게 응징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듯했다.
불꽃놀이가 끝나자 김정남 안내원이 늦은 저녁식사를 한단다. "이번에는 또 어디로 가느냐"는 남편의 빈정 섞인 질문에 안내원은 "인민문화궁전으로 간다"고 친절히 알려준다.
나는 어느새 의식불명에서 방금 깨어난 것만 같은 몽롱한 기분으로 인민문화궁전 대연회장에 앉아 있다. 시원한 냉수를 한 잔 들이켜고 나니 정신이 좀 드는 것 같다. 이곳은 여러 나라에서 초청돼 온 예술단들을 환영하기 위한 만찬회 자리란다.
웅장한 '축포 공연'의 스케일과 맞먹는 만찬회장. 옆에 있는 안내원이 "천여 명의 손님이 이곳에 와서 식사를 한다"고 귀띔해준다. 우리 테이블 뒷자리에는 미국에서 온 150여 명의 합창단들이 나처럼 두리번거리면서 주위를 살펴보고 있었다.
귀빈석에 양형섭 인민회의 부의장과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문화상(문화부 장관)이 도착해 축사를 마치자 어디서들 나왔는지 정장을 입은 몇백여 명의 남자 접대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식사를 내온다.
경제가 어려운 가운데 자신의 나라를 찾은 외국의 예술단원들을 정성껏 대접하려는 따뜻한 노력이 마음에 다가온다. 자세히 보니 테이블마다 차림표가 준비돼 있었다. 처음 보는 북한 요리들이었다. 전통 음식이 코스별로 나오는데, 순하면서도 깊은 맛을 내는 북녘 요리들이었다. 나는 이 음식들을 맛보며 우리나라 음식 문화의 다양성에 깜짝 놀랐다.
김치만 나눠 먹어도 통일이 빨라질 텐데...
하지만 우리 부부가 가장 감동한 음식은 김치였다. 붉은색이었지만 고춧가루는 보이지 않은데다 치장도 하지 않았다. 배추와 소금, 고춧가루 외에는 아무것도 들어간 게 없어 보인다. 자극적인 양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김치를 맛보니 입안의 침샘이 요동치며 짜릿한 전율이 느껴졌다. 종지째 국물을 들이켜고 나면 시원한 미소가 뒤따랐다.
이를 눈치챈 접대원이 연신 김치를 가져다준다. 남편이 네 종지를, 그리고 나는 세 종지나 비워 버렸다. 아! 남북의 동포들이 한자리에 모여 이 김치만 나눠 먹어도 통일이 훨씬 더 가까워질 수 있을텐데….
호텔로 돌아와 로비에 앉아 쉬고 있는데 텔레비전에서 오늘 있었던 열병식 녹화 중계를 방영하고 있었다. 텔레비전 볼륨을 낮춰놔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좀 답답했다. 그저 예전에 한국 뉴스에서 보던 것처럼 대형 트럭 위에 미사일이 얹혀 지나가는 장면들이 나오고 있었다.
항일유격대... 나도 그들처럼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정작 내 관심을 끌었던 장면은 열병식 맨 처음에 등장한, 치마를 입은 여군들이었다. 그런데 군복이 요즘 군인들 같지 않아 김정남 안내원에게 물었다.
"저 여군들은 어떤 군인들인가요?"
"항일유격대원들을 재연한 겁네다."
"항일유격대라니요?"
"아니, 항일유격대를 몰라요? 신녀사님은 조선 사람이 아니고 미국 사람입네까? 정말 모르십네까?"
"네, 정말 모르겠는데요."
김정남 안내원은 한숨을 쉬더니 차분히 설명을 해준다. 일제 치하 빼앗긴 나라를 찾기 위해 무장을 하고 만주 등지에서 일본군과 싸우는 군대에 속해 있었던 여성 항일전사들이 바로 그들이라는 설명이다.
우리나라에도 당시 총대를 메고 일본군에 대항해 전투를 벌였던 여성들이 있었다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내가 만약 그때 태어났다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연약한 여성의 몸으로 나라의 독립을 갈구하면서 전투를 치렀던 그분들을 떠올리며 숙연한 마음으로 방에 올라갔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밤이다.
담배와 라이터는 물론이고 카메라 등 아무것도 소지하지 말고 오라는 전화를 받고 나서 나와 남편은 불안한 마음으로 로비에 내려갔다. 조금 있으니 다른 재미동포 예술단원들도 하나둘씩 모여 들고 있었다. 우리는 영문을 몰라 서로들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
마음속에 있는 말을 참지 못하는 남편의 성격이 발동했다. 남편은 김정남 안내원에게 퉁명스럽게 물었다.
"도대체 어디를 가길래 담배도, 라이터도, 카메라도 못 가지고 간단 말입니까?"
"가 보시면 압네다."
"어디가 어딘지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가 가본다고 거기가 어디인 줄 어떻게 압니까? 어디 간다고 설명을 해 줘야지 알지. 거참, 기가 막혀서..."
옆에 서 있던 우리의 일행들도 속이 시원하다는 표정과 함께 남편의 말에 동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돌아오는 답변은 여전히 "가 보시면 압네다"였다. '가 보면 안다'는 말만 반복하는 안내원, 남편은 더 이상 질문을 거두고 차에 올랐다.
영문도 모른 채 김일성 광장 쪽으로 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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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일성 광장의 모습 | |
ⓒ 신은미 |
우리를 태운 차는 열병식이 있었던 김일성 광장 쪽으로 가고 있었다. 광장에 도착하니 이미 많은 차들이 서 있었으며, 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광장 한가운데 일렬로 줄을 선 채 다음 장소를 향해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주로 외국인들이었다. 우리만 있는 게 아닌 걸 알게 되자 불안한 마음은 사라졌다. 대신 극도의 호기심이 고개를 든다. 대체 무슨 일이 있길래...
우리 일행이 버스에서 내리자 한 군인이 우리가 타고 온 버스에 올라 차를 샅샅이 검사하고 내려왔다. 그것도 부족해서 이번에는 금속 탐지기로 차에서 내린 우리 몸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수색하기 시작했다. 이후 우리는 김정남 안내원의 안내를 받아 조선미술박물관을 지나 대동강 변으로 안내됐다.
삼엄한 경계 속에서 예술단 일행은 이미 마련돼 있는 우리 자리로 이끌려 갔다. 대동강이 보이는 곳에 마련된 자리, 가운데는 귀빈석이 마련돼 있었고, 그 주위에는 북한사람들이 둘러싸고 앉아 있었다. 우리는 외국사절단과 함께 그들의 옆자리에 앉게 됐다. 우리의 왼쪽에는 어느 나라 것인지 알 수 없는 군복을 입은 장교들이 북한 여성 통역군관들의 안내를 받고 있었다.
"곧 축포를 쏠 예정입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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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의 합창단 | |
ⓒ 신은미 |
잠시 후 150명으로 이뤄진 미국 남성 합창단이 우리 오른쪽 자리에 앉았다. 합창단원들은 처음 오는 북한 땅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지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 앉는다. 한 합창단원이 남편에게 "북한사람이냐"고 물었다. 남편이 "미국 국적의 한국인"이라고 대답하자 반가운 기색을 보였다.
자신들은 조지아주에서 왔는데 북한-미국 간 문화교류 증진의 일환으로 이곳 북한에 왔다고 설명했다. 남편이 "우리도 미국에서 온 예술단"이라고 설명하니 안도의 한숨과 함께 반가운 표정을 짓는다. 이들과 미국 얘기로 집에 대한 향수를 달랬다.
같은 국적을 갖고 있으니 친근감이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일. 북한에서 제2의 고향사람들을 만나니 마치 '우리집 소식'을 접한 것만 같은 반가움이 느껴졌다. 남이고, 북이고, 미국이고, 이렇게 한데 어울려 지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본다. 하지만, 잠시 후 김정남 안내원이 나타나자 남편은 또다시 불만을 터트리기 시작한다.
"아니, 강가에 오면서 무슨 불날 일이 있다고 담배하고 라이터도 못 가지고 오게 했습니까? 대체 여기서 뭘 하는 겁니까?"
"곧 축포(불꽃놀이)를 쏠 예정입네다."
"아니, 그까짓 불꽃놀이 하면서 아무것도 못 가지고 오게 합니까?"
"기다려 보면 압네다."
남편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미국 합창단원과 조지아주에서 벌어졌던 골프대회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만세! 만세! 만세!" 라는 우레와 같은 함성이 울려 퍼졌다. "만세!" 소리를 수십 번은 한 것 같다. 우렁찬 함성에 지진이 난 듯 땅이 울린다.
'김정은 대장'과 함께 봤던 화려한 불꽃놀이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조금 전까지 어두웠던, 북한 사람들이 앉아 있던 관람석 중앙이 환하게 빛을 밝히고 있었다. 곧이어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김정은 대장'이 수행원들과 함께 등장한다. 온 지구를 울리고도 남을 듯한 함성은 끊이지 않았다.
곧 이어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축사를 낭독한다. 우레와 같은 함성에 귀가 먹먹해졌나 보다. 아니면 뇌의 기능이 멈춰 버렸는지 연설 내용은 '웅얼웅얼' 소리가 돼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축사가 끝나고 불꽃놀이의 시작이 선포되자 평양시내의 전기가 일제히 나가면서 순식간에 온 세상이 캄캄한 암흑으로 변했다. 어떻게 도시 전체가 동시에 불을 끌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동시에 섬뜩한 느낌도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순간 우리가 앉아 있는 반대편 대동강 변에서 연이어 축포가 터진다. 여러 군데서 쉬지 않고 동시에 축포를 터트리고 있었다. 그 축포의 빛이 음악에 맞춰 대동강을 형형색색 아름다운 '불빛 무리'로 만들었다.
이 역시도 '아리랑 공연' 때처럼 두 눈으로만 감상할 수가 없었다. 눈을 이리저리 돌려 가면서 간신히 불빛 쇼에 적응하려고 애썼다. 그러자 난데없이 대동강을 가로질러 나 있는 다리로 축포 행렬이 이어졌다. 마치 나이아가라 폭포가 화려한 불빛을 뿜어내며 흘러내리듯 다리 위부터 강물을 향해 불꽃송이가 무리지어 떨어진다.
아! 장관이다! 이런 불꽃놀이는 난생 처음이다. 이제까지 내가 본 여러 나라의 불꽃놀이 중 최고는 뭐니뭐니해도 미국의 독립기념일 때 벌어지는 불꽃놀이였다. 하지만, 그것은 오늘 내가 평양에서 목격한 이 불꽃놀이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 시간동안 축포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내 심장도 터지고 있음을 느끼면서 대동강 변 풍경으로 서서히 빠져들고 있었다.
불꽃놀이의 또 다른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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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양절을 축하하는 평양시민들의 모습 | |
ⓒ 신은미 |
그런데, 엄청난 불꽃놀이와 함께 터지고 있는 내 심장이 갑자기 멈추기라도 하듯, 섬뜩한 느낌이 동시에 찾아 든다. 북한의 거의 모든 예술이 이념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이 불꽃놀이 또한 단순히 화려한 쇼나 오락이 아닌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쉬지 않고 쏘아대는 이 불꽃놀이는 마치 '적이 우리를 공격하면 우리는 이렇게 응징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듯했다.
불꽃놀이가 끝나자 김정남 안내원이 늦은 저녁식사를 한단다. "이번에는 또 어디로 가느냐"는 남편의 빈정 섞인 질문에 안내원은 "인민문화궁전으로 간다"고 친절히 알려준다.
나는 어느새 의식불명에서 방금 깨어난 것만 같은 몽롱한 기분으로 인민문화궁전 대연회장에 앉아 있다. 시원한 냉수를 한 잔 들이켜고 나니 정신이 좀 드는 것 같다. 이곳은 여러 나라에서 초청돼 온 예술단들을 환영하기 위한 만찬회 자리란다.
웅장한 '축포 공연'의 스케일과 맞먹는 만찬회장. 옆에 있는 안내원이 "천여 명의 손님이 이곳에 와서 식사를 한다"고 귀띔해준다. 우리 테이블 뒷자리에는 미국에서 온 150여 명의 합창단들이 나처럼 두리번거리면서 주위를 살펴보고 있었다.
귀빈석에 양형섭 인민회의 부의장과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문화상(문화부 장관)이 도착해 축사를 마치자 어디서들 나왔는지 정장을 입은 몇백여 명의 남자 접대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식사를 내온다.
경제가 어려운 가운데 자신의 나라를 찾은 외국의 예술단원들을 정성껏 대접하려는 따뜻한 노력이 마음에 다가온다. 자세히 보니 테이블마다 차림표가 준비돼 있었다. 처음 보는 북한 요리들이었다. 전통 음식이 코스별로 나오는데, 순하면서도 깊은 맛을 내는 북녘 요리들이었다. 나는 이 음식들을 맛보며 우리나라 음식 문화의 다양성에 깜짝 놀랐다.
김치만 나눠 먹어도 통일이 빨라질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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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부부가 받은 태양절 기념연회 초대장 | |
ⓒ 신은미 |
하지만 우리 부부가 가장 감동한 음식은 김치였다. 붉은색이었지만 고춧가루는 보이지 않은데다 치장도 하지 않았다. 배추와 소금, 고춧가루 외에는 아무것도 들어간 게 없어 보인다. 자극적인 양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김치를 맛보니 입안의 침샘이 요동치며 짜릿한 전율이 느껴졌다. 종지째 국물을 들이켜고 나면 시원한 미소가 뒤따랐다.
이를 눈치챈 접대원이 연신 김치를 가져다준다. 남편이 네 종지를, 그리고 나는 세 종지나 비워 버렸다. 아! 남북의 동포들이 한자리에 모여 이 김치만 나눠 먹어도 통일이 훨씬 더 가까워질 수 있을텐데….
호텔로 돌아와 로비에 앉아 쉬고 있는데 텔레비전에서 오늘 있었던 열병식 녹화 중계를 방영하고 있었다. 텔레비전 볼륨을 낮춰놔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좀 답답했다. 그저 예전에 한국 뉴스에서 보던 것처럼 대형 트럭 위에 미사일이 얹혀 지나가는 장면들이 나오고 있었다.
항일유격대... 나도 그들처럼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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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일 유격대 복장을 한 유적지 해설원과 함께 | |
ⓒ 신은미 |
그러나 정작 내 관심을 끌었던 장면은 열병식 맨 처음에 등장한, 치마를 입은 여군들이었다. 그런데 군복이 요즘 군인들 같지 않아 김정남 안내원에게 물었다.
"저 여군들은 어떤 군인들인가요?"
"항일유격대원들을 재연한 겁네다."
"항일유격대라니요?"
"아니, 항일유격대를 몰라요? 신녀사님은 조선 사람이 아니고 미국 사람입네까? 정말 모르십네까?"
"네, 정말 모르겠는데요."
김정남 안내원은 한숨을 쉬더니 차분히 설명을 해준다. 일제 치하 빼앗긴 나라를 찾기 위해 무장을 하고 만주 등지에서 일본군과 싸우는 군대에 속해 있었던 여성 항일전사들이 바로 그들이라는 설명이다.
우리나라에도 당시 총대를 메고 일본군에 대항해 전투를 벌였던 여성들이 있었다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내가 만약 그때 태어났다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연약한 여성의 몸으로 나라의 독립을 갈구하면서 전투를 치렀던 그분들을 떠올리며 숙연한 마음으로 방에 올라갔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밤이다.
평양대극장 LG에어컨, 왜 이리 반가울까?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 19] 다시 찾은 '삐짜'집과 평양대극장
12.08.16 21:36
최종 업데이트 12.10.24 22:16저는 오래 전부터 음악을 공부하고,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오로지 음악에 관한 지식만을 가르쳐왔습니다. 지금은 평범한 주부이자 아이들의 엄마로 살고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과 함께 북한에 갔습니다. 호기심으로 떠난 여행이었지만, 저는 처음으로 우리 민족의 비극적 운명과 민족애를 느꼈습니다. 동시에 통일에 대한 염원이 생겼습니다. 2011년 10월 이후 지난 4월에 열흘 동안, 그리고 5월에는 3주 동안 나진·선봉을 비롯한 북한 전역을 여행했습니다. - 기자말
오늘도 텔레비전에서는 전날 거행됐던 열병식 장면이 계속 나오고 있다. 나는 '김정은 대장'의 육성 연설에 깜짝 놀랐다. 북한 지도자의 육성 연설을 처음으로 들어 봤다. 연설은커녕 목소리조차 들어 본 기억이 없는 데 말이다.
연설문을 신기하게 듣던 중 내 마음에 와 닿는 부분이 있었다. 그건 바로 "다시는 인민들이 허리띠를 졸라매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구절. 제발 그렇게 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해 본다.
그런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남북관계, 그리고 북미관계의 변화가 꼭 필요한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국방비를 조금만 줄여도 우리 인민들이 잘살 수 있건만... 미국의 위협이 존재하는 한 우리 인민들은 그 불편을 감수해 나갈 것"이라며 확고한 표정을 짓던 우리 차량 운전기사 아저씨의 모습이 언뜻 떠오른다.
옆에서 함께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남편도 "평화 체제가 이뤄져 남과 북의 국방비만 줄여도 온 겨레가 행복하게 살 수 있음은 물론, 통일 비용까지도 충당할 수 있을 텐데..."라며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다. 나 역시도 같은 생각이다.
"'이딸리아 삐짜'가 드시고 싶으십네까?"
오늘은 특별한 일정이 없으니 푹 쉬란다. 전날 밤, 늦은 시각까지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긴장을 많이 한 탓인지 영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평양 시내 구경가자"는 예술단 일행들의 제의도 마다하고 오전 내내 침대 속에만 파묻혀 있다.
북한의 4월은 여전히 싸늘하다. 밤에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겨울마저 따스한 캘리포니아 날씨에 익숙해져 있어서인지, 전날 밤 '불꽃놀이'에서 긴장 속에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벌벌 떨었던 내 몸의 근육과 신경세포들이 놀라 얼어붙었나 보다.
점심 식사 때가 지났다며 김정남 안내원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전화를 걸었다. "몸이 힘들수록 억지로라도 뭘 먹어서 기운을 내야 한다"며 "특별히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말해 달라"고 한다. 남편은 신경 써 주는 게 고마워 일단 로비에서 만나자고 답한다.
로비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김정남 안내원은 "두 분께서 이렇게 힘이 없어 보이시니 저도 기운이 빠집네다"란다. 우리는 뭐라도 먹어서 기운을 차리자며 행선지를 논했다. 논의 끝에 먹으러 가기로 한 것은 피자. 피자가 먹고 싶어서라기보다는 지난해 10월 여행 당시 "꼭 다시 뵙기를 희망합네다"라던 이탈리아 식당 요리사 아가씨들, 정겨운 그들이 보고 싶어서 결정했다. 김정남 안내원이 다시 한 번 확인하듯 묻는다.
"'이딸리아 삐짜'가 드시고 싶으십네까?"
"네. 지난번 평양에 왔을 때 아주 맛있게 먹었거든요. 저희가 대접할 테니 다른 안내원분들도 다 함께 가자고 하세요. 꼭 우리 팀 안내원이 아니라도 괜찮아요."
"평양에 '삐짜' 식당이 몇 군데가 있는데... 어느 곳을 가셨는지 이름이 기억 나십네까?"
"'해운 이딸리아 식당'이라고 기억하고 있어요."
김정남 안내원은 "피자를 좋아하는 딸에게 확실하게 물어봐야겠다"며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아마도 딸에게 우리가 갔다는 식당이 어떻게 생겼는지 묻는 모양이다. 김정남 안내원은 딸과의 통화를 마친 후 전화를 끊으며 우리에게 묻는다.
"딸 얘기가 그곳 말고도 더 맛있는 곳이 있다는데, 이왕이면 새로운 곳으로 가지 않겠습네까?"
또 다른 피자식당에 대한 궁금증도 고개를 들었지만, 우리가 피자를 먹겠다고 결정한 것은 꼭 피자가 먹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 식당의 요리사들을 다시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해운 이탈리아 식당에 가자고 말했다. 반가운 재회를 고대하면서 자동차에 오르니 마음속 풀 죽은 잎사귀에 생기가 돋는 듯했다.
휴대전화로 아버지 안부 묻는 모습, 한국 풍경이 아닙니다
다시 보니 더 반가운 '해운 이딸리아 특산물 식당'. 우리는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피자를 굽고 있던 요리사 아가씨들이 우리를 알아보고는 하던 일을 멈추고 펄쩍펄쩍 뛰며 반겨준다.
"또 오시겠다고 하셨는데 빈말이 아니었습네다. 반갑습네다."
"그동안 많은 손님들이 왔을 텐데... 어떻게 우리를 기억하고 있어요?"
"해외동포 손님은 흔치가 않아 잊을 수가 없습네다. 그때 여기서 '이딸리아' 노래도 부르셨지 않았습네까. 동무들과 '언제나 또 오실까'하고 이야기하곤 했지요. 그런데 '봄 축전 공연' 중계화면에 선생님이 나오지 않갔습네까. 모두들 깜짝 놀라 '야! 가수였구나, 어쩐지...'라며 '지금 평양에 계실 텐데 혹시 안 오실까' 했습네다.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릅네다."
"아, 그랬군요. 우리도 보고 싶어 일부러 안내원에게 부탁해서 왔어요. 정말 반가워요."
"맛있게 구워드릴 테니 어서 앉으시라요."
정말 순수하고 정이 많은 아가씨들이다. 오늘 '삐짜' 맛은 먹어 보나 마나다.
지난번 먹었던 피자 중에서 가장 맛있었던 피자를 주문했다. 김정남 안내원은 "큰딸이 삐짜를 좋아해서 가끔씩 집에 사가는데 비위가 안 맞아서 거의 먹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면서 냉면을 주문한다. 때마침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잘 찾아갔는지 걱정이 돼 전화한 모양인데 얼마 뒤 "걱정하지 말라우, 약은 잘 챙겨 먹고 있으니까니"란다.
어디가 편찮으시냐고 물어보니 김정남 안내원은 "심장 쪽 가슴이 아프다"고 말한다. 이어 "이제는 정말 담배를 끊어야겠다"고 단단히 다짐한다. '딸아이 무서워서' 여러 번 시도를 했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고. 김정남 안내원은 "사실 딸아이는 지금도 담배를 끊은 줄 알고 있다"며 두 눈을 찡긋거렸다. 웃는 김정남 안내원에게 "효녀 딸을 두셔서 좋으시겠어요"라고 했더니 어깨를 들썩이며 수줍은 표정을 짓는다.
정말이지 이곳도 휴대전화 문화가 빠른 속도로 일반화되고 있는 듯하다. 아버지와 딸이 휴대전화로 건강 상태를 묻고, 친구끼리 문자를 주고받는다. 또, 사람들이 <로동신문>을 휴대전화로 읽는 모습도 종종 보인다. 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동영상을 휴대전화에 저장해 우리에게 보여주기까지 하니 말이다.
오늘은 명절기간이라 식당 안이 꽤 붐비는데, 외국 관광객보다는 북한주민들이 더 많이 눈에 들어온다. 식당의 무대 위에서 한 꼬마가 춤추며 노래를 부른다. 아이의 엄마가 흐뭇한 모습으로 지켜보고 있다. 꼬마의 아빠는 먼발치서 사진을 찍고 있다. 행복한 모습이다. 다른 쪽 테이블에서는 아이의 흥겨운 춤솜씨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한 쌍의 젊은 남녀가 상기된 얼굴을 하고 다정히 담소를 나누고 있다. 시켜 놓은 피자가 그대로 있는 것을 보니 피자를 먹으러 온 것이 아니라 진솔한 사랑의 고백이라도 하러 온 듯 보인다.
스피커에서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산타루치아>가 흘러나온다. 얼어 붙어있던 내 근육 세포들이 나른해진다. 아! 북한에도 이런 낭만이 있다니... 북녘의 모든 동포들이 이렇듯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되는 그날을 간절히 소망해 본다.
"5월에 미국 친구들과 꼭 다시 오겠다"며 식당 요리사 아가씨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몸과 마음에 새로운 에너지를 비축하고 밖으로 나왔다. 바깥은 여전히 환하고 걸어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 역시 생기발랄해 보인다. 남편도 이리저리 열심히 사진을 찍으며 김정남 안내원과 쉬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니 기력을 회복했음이 분명하다.
북한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외화는?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기념품점에 들러 쇼핑을 했다. 북한에서 쇼핑할 때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 '외국인은 북한 화폐를 소유하거나 사용할 수 없다'는 게 바로 그것. 보통 외국여행을 할때 그 나라 화폐를 써 보는 것도 관광의 중요한 부분인데, 이게 북한에서는 불가능하다. 항상 돈을 내려고 할 때면 상점의 직원은 "어느 나라 돈으로 내시겠냐"고 묻는다. 그동안 북한의 이곳저곳 다니면서 느낀 것은 이곳 사람들은 중국의 인민폐를 가장 선호한다는 것이다. 그 다음이 유로(Euro), 다음이 달러다.
북한 사람들조차 호텔이나, 식당, 상점에서 외화를 쓰고 있었다. 주로 중국 인민폐를 낸다. 북한 화폐를 쓰는 사람들도 보이긴 했지만, 극히 드물었다.
상점에 있는 대부분의 물건들은 중국산이었다. 놀랍게도 미국 제품들도 눈에 띄었지만, 그마저도 겉 포장지에는 한자가 적혀 있었다. 중국과 활발하게 교역을 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러니 중국 화폐를 선호하는 게 자연스러웠다.
군데군데, 국가가 운영하며 북한 주민들이 이용하고 있는 곳으로 보이는 화폐 교환소가 보인다. 공식 환율은 1달러당 대충 북한돈 100원. 그런데 화폐 교환소에 붙어 있는 환율표를 언뜻 보니 1달러당 북한돈 4천 원이 넘는 것 같다. 북한 주민들은 다른 환율 계산법을 사용하고 있는 듯했다. 어떻게 저런 큰 환율 차이가 나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북한에서는 꾸겨지거나 약간이라도 파손된 외화를 받지 않는다는 점. 그 때문에 여행사 안내문에는 '북한 관광을 갈 때는 꼭 깨끗한 돈을 준비해 가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덕분에 우리도 이곳에 올 때 새 돈을 준비하느라 이 은행 저 은행을 오가곤 했다. 무슨 이유로 그러는지 역시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
궁금한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안내원에게 물어볼까 생각해봤지만, 앞으로 하나하나씩 알게 될 것이라 믿어 그만두기로 했다.
우리가 들어간 기념품 가게는 북한 화폐 개혁 이전에 사용됐던 구화폐들을 기념품으로 포장해서 팔고 있었다. 남편은 구화폐 한 세트를 샀고, 나는 아기자기한 전통 수예품과 인형을 샀다.
평양 달리는 현대 자동차, 놀랍습니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 내일 공연을 하게 될 '평양대극장'을 지나쳤다. 극장 앞 광장에는 아이들과 가족들이 자전거를 타고, 롤러스케이트를 타며 휴일을 즐기고 있는 북한 사람들이 보인다. 우리 호텔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어 들러보자고 했다. 건물 주위를 돌아보면서 우연히 건물 벽을 쳐다봤는데... 한국의 LG 에어컨 실외기가 달려 있는 게 아닌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사실 차를 타고 평양을 다니다 보면 가끔 대우나 현대자동차가 달리고 있는 것을 볼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어떻게 한국의 차들이 여기에 있을 수 있을까'라는 놀라움과 의문, 그리고 설렘이 미묘하게 교차했다. 순간적으로 통일된 나라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 때도 있었다.
오늘 평양 대극장의 벽에 LG 에어컨이 달려 있는 것을 보고 나니 더욱 더 그런 느낌이 든다. 지난해 10월 북한을 처음 여행할 때 나는 정치나 경제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 방면에 문외한인 나는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경제학을 전공한 남편 역시 북한에 대해 모르기는 매한가지. 게다가 당시 나의 관심사는 '북한의 동포들은 과연 우리와 얼마나 다를까'라는 것, 그것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이번 여행을 통해 나는 관심의 영역을 더 넓힐 수 있었다. 열흘간 평양에서만 머무르면서 이곳 사람들의 생활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그런 가운데 떠오른 생각이 바로 '활발한 남북 경제교류'였다. 경제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나 같은 아줌마도 이곳에서 어느 정도의 시간을 보내다 보니 눈에 훤히 보이는 것들이 있다.
평양의 중심에서 '경제'를 생각하다
우선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어디를 가나 볼 수 있고, 또 구입할 수 있는 중국상품들이다. 나는 '이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질 좋은 한국의 상품들이 진열대의 중국제품들을 밀어낸다면 서로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휴대전화 사업만 해도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양질의 값싼 노동력. 그동안 북한에 와서 귀동냥으로 들은 바에 의하면 북한의 인건비는 월 50달러도 채 되지 않는 듯하다. 한국 돈으로 6만 원도 안 되는 돈이다. 두 배로 쳐서 100달러를 준다고 해도 월 12만 원을 넘지 않는다. 우리 기업이 해외로 나가는 이유 중 하나가 값싼 노동력 때문이라고 하던데, 세상에 이보다 더 싼 임금이 어디 있을까. 게다가 이곳 사람들은 교육을 잘 받아 일정한 수준의 교양을 갖추고 있다. 뿐만 아니라 손재주 역시 좋아서, 하다 못해 뜯어진 옷의 수선을 부탁하면 감쪽같이 그 자리서 해결한다. 말해서 무엇하랴, 우리 민족인데. 그뿐이랴, 말 통하고 먹는 음식 같으며 정서적인 부분에서 공유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생각에 생각을 잇다 이내 속만 상한다.
가까운 미래에 북한 사람들이 세계 각국을 활보하고 있는 멋진 한국의 자동차를, 요술 방망이같이 질 좋은 휴대전화를, 이곳 사람들도 좋아하는 맛 좋은 라면들과 과자 등을 함께 즐길 수 있길 바랄 뿐이다. 뿐만 아니라 지금은 모조리 중국 사람들이 향유하고 있는 북한의 싱싱한 수산물, 수려하고 오염되지 않은 묘향산, 금강산, 송악산, 백두산의 풍경, 싱그러운 산나물과 맛 좋은 생수들을 남쪽 사람들이 누릴 수 있게 되길 절실히 바란다. 이런 생각을 하니 가슴 한쪽이 아프게 저리다.
문득, 지난 10월에 판문점을 떠나 평양으로 향하면서 지나쳤던 개성공단이 떠오른다. 나는 지금까지 '개성공단은 북한을 전적으로 도와주기만 하는 곳'으로 알고 있었다. 남북 경제협력 얘기가 나오면 소위 '퍼주기'라는 말들을 많이 해 자연스레 선입견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만일 개성공단에서 우리 기업들이 수년간 월 100달러의 임금을 지불하며 기업 활동을 했다면 이것이 과연 '퍼주기'만 했던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기간 값싼 임금으로 생긴 수익만 따져봐도 수십억 달러에 달하지 않았을까 싶다.
호텔로 돌아와서도 내내 생각해 본다. '나 같은 아줌마도 남북경제협력의 엄청난 혜택이 훤히 보이는데, 경제부국 한국의 경제인들이 모를 리 없지 않을까'라고. 정치인들의 지혜와 그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지 처음으로 실감해 본다.
이제 그만 생각해야겠다. 내일은 '평양대극장'에서 중요한 공연이 있으니 말이다. 동포들과의 더 깊은 교감을 위해 공연에 집중해야겠다.
침대에 몸을 눕히고 두 눈을 감는다. 지금까지 스쳐 지나간 북한 동포들이 애잔한 미소를 지으며 나타난다. 그 미소가 나의 가슴에 파고들어 와 내 입과 눈을 애틋한 전율로 떨리게 한다.
오늘도 텔레비전에서는 전날 거행됐던 열병식 장면이 계속 나오고 있다. 나는 '김정은 대장'의 육성 연설에 깜짝 놀랐다. 북한 지도자의 육성 연설을 처음으로 들어 봤다. 연설은커녕 목소리조차 들어 본 기억이 없는 데 말이다.
연설문을 신기하게 듣던 중 내 마음에 와 닿는 부분이 있었다. 그건 바로 "다시는 인민들이 허리띠를 졸라매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구절. 제발 그렇게 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해 본다.
그런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남북관계, 그리고 북미관계의 변화가 꼭 필요한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국방비를 조금만 줄여도 우리 인민들이 잘살 수 있건만... 미국의 위협이 존재하는 한 우리 인민들은 그 불편을 감수해 나갈 것"이라며 확고한 표정을 짓던 우리 차량 운전기사 아저씨의 모습이 언뜻 떠오른다.
옆에서 함께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남편도 "평화 체제가 이뤄져 남과 북의 국방비만 줄여도 온 겨레가 행복하게 살 수 있음은 물론, 통일 비용까지도 충당할 수 있을 텐데..."라며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다. 나 역시도 같은 생각이다.
"'이딸리아 삐짜'가 드시고 싶으십네까?"
오늘은 특별한 일정이 없으니 푹 쉬란다. 전날 밤, 늦은 시각까지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긴장을 많이 한 탓인지 영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평양 시내 구경가자"는 예술단 일행들의 제의도 마다하고 오전 내내 침대 속에만 파묻혀 있다.
북한의 4월은 여전히 싸늘하다. 밤에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겨울마저 따스한 캘리포니아 날씨에 익숙해져 있어서인지, 전날 밤 '불꽃놀이'에서 긴장 속에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벌벌 떨었던 내 몸의 근육과 신경세포들이 놀라 얼어붙었나 보다.
점심 식사 때가 지났다며 김정남 안내원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전화를 걸었다. "몸이 힘들수록 억지로라도 뭘 먹어서 기운을 내야 한다"며 "특별히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말해 달라"고 한다. 남편은 신경 써 주는 게 고마워 일단 로비에서 만나자고 답한다.
로비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김정남 안내원은 "두 분께서 이렇게 힘이 없어 보이시니 저도 기운이 빠집네다"란다. 우리는 뭐라도 먹어서 기운을 차리자며 행선지를 논했다. 논의 끝에 먹으러 가기로 한 것은 피자. 피자가 먹고 싶어서라기보다는 지난해 10월 여행 당시 "꼭 다시 뵙기를 희망합네다"라던 이탈리아 식당 요리사 아가씨들, 정겨운 그들이 보고 싶어서 결정했다. 김정남 안내원이 다시 한 번 확인하듯 묻는다.
"'이딸리아 삐짜'가 드시고 싶으십네까?"
"네. 지난번 평양에 왔을 때 아주 맛있게 먹었거든요. 저희가 대접할 테니 다른 안내원분들도 다 함께 가자고 하세요. 꼭 우리 팀 안내원이 아니라도 괜찮아요."
"평양에 '삐짜' 식당이 몇 군데가 있는데... 어느 곳을 가셨는지 이름이 기억 나십네까?"
"'해운 이딸리아 식당'이라고 기억하고 있어요."
김정남 안내원은 "피자를 좋아하는 딸에게 확실하게 물어봐야겠다"며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아마도 딸에게 우리가 갔다는 식당이 어떻게 생겼는지 묻는 모양이다. 김정남 안내원은 딸과의 통화를 마친 후 전화를 끊으며 우리에게 묻는다.
"딸 얘기가 그곳 말고도 더 맛있는 곳이 있다는데, 이왕이면 새로운 곳으로 가지 않겠습네까?"
또 다른 피자식당에 대한 궁금증도 고개를 들었지만, 우리가 피자를 먹겠다고 결정한 것은 꼭 피자가 먹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 식당의 요리사들을 다시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해운 이탈리아 식당에 가자고 말했다. 반가운 재회를 고대하면서 자동차에 오르니 마음속 풀 죽은 잎사귀에 생기가 돋는 듯했다.
휴대전화로 아버지 안부 묻는 모습, 한국 풍경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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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찿은 '해운이딸리아특산물식당'. 왼쪽부터 운전기사 아저씨, 필자, 김정남 안내원 | |
ⓒ 신은미 |
다시 보니 더 반가운 '해운 이딸리아 특산물 식당'. 우리는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피자를 굽고 있던 요리사 아가씨들이 우리를 알아보고는 하던 일을 멈추고 펄쩍펄쩍 뛰며 반겨준다.
"또 오시겠다고 하셨는데 빈말이 아니었습네다. 반갑습네다."
"그동안 많은 손님들이 왔을 텐데... 어떻게 우리를 기억하고 있어요?"
"해외동포 손님은 흔치가 않아 잊을 수가 없습네다. 그때 여기서 '이딸리아' 노래도 부르셨지 않았습네까. 동무들과 '언제나 또 오실까'하고 이야기하곤 했지요. 그런데 '봄 축전 공연' 중계화면에 선생님이 나오지 않갔습네까. 모두들 깜짝 놀라 '야! 가수였구나, 어쩐지...'라며 '지금 평양에 계실 텐데 혹시 안 오실까' 했습네다.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릅네다."
"아, 그랬군요. 우리도 보고 싶어 일부러 안내원에게 부탁해서 왔어요. 정말 반가워요."
"맛있게 구워드릴 테니 어서 앉으시라요."
정말 순수하고 정이 많은 아가씨들이다. 오늘 '삐짜' 맛은 먹어 보나 마나다.
지난번 먹었던 피자 중에서 가장 맛있었던 피자를 주문했다. 김정남 안내원은 "큰딸이 삐짜를 좋아해서 가끔씩 집에 사가는데 비위가 안 맞아서 거의 먹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면서 냉면을 주문한다. 때마침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잘 찾아갔는지 걱정이 돼 전화한 모양인데 얼마 뒤 "걱정하지 말라우, 약은 잘 챙겨 먹고 있으니까니"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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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화를 하며 걷고 있는 여학생 | |
ⓒ 신은미 |
어디가 편찮으시냐고 물어보니 김정남 안내원은 "심장 쪽 가슴이 아프다"고 말한다. 이어 "이제는 정말 담배를 끊어야겠다"고 단단히 다짐한다. '딸아이 무서워서' 여러 번 시도를 했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고. 김정남 안내원은 "사실 딸아이는 지금도 담배를 끊은 줄 알고 있다"며 두 눈을 찡긋거렸다. 웃는 김정남 안내원에게 "효녀 딸을 두셔서 좋으시겠어요"라고 했더니 어깨를 들썩이며 수줍은 표정을 짓는다.
정말이지 이곳도 휴대전화 문화가 빠른 속도로 일반화되고 있는 듯하다. 아버지와 딸이 휴대전화로 건강 상태를 묻고, 친구끼리 문자를 주고받는다. 또, 사람들이 <로동신문>을 휴대전화로 읽는 모습도 종종 보인다. 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동영상을 휴대전화에 저장해 우리에게 보여주기까지 하니 말이다.
오늘은 명절기간이라 식당 안이 꽤 붐비는데, 외국 관광객보다는 북한주민들이 더 많이 눈에 들어온다. 식당의 무대 위에서 한 꼬마가 춤추며 노래를 부른다. 아이의 엄마가 흐뭇한 모습으로 지켜보고 있다. 꼬마의 아빠는 먼발치서 사진을 찍고 있다. 행복한 모습이다. 다른 쪽 테이블에서는 아이의 흥겨운 춤솜씨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한 쌍의 젊은 남녀가 상기된 얼굴을 하고 다정히 담소를 나누고 있다. 시켜 놓은 피자가 그대로 있는 것을 보니 피자를 먹으러 온 것이 아니라 진솔한 사랑의 고백이라도 하러 온 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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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자식당에서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 어린이 | |
ⓒ 신은미 |
스피커에서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산타루치아>가 흘러나온다. 얼어 붙어있던 내 근육 세포들이 나른해진다. 아! 북한에도 이런 낭만이 있다니... 북녘의 모든 동포들이 이렇듯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되는 그날을 간절히 소망해 본다.
"5월에 미국 친구들과 꼭 다시 오겠다"며 식당 요리사 아가씨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몸과 마음에 새로운 에너지를 비축하고 밖으로 나왔다. 바깥은 여전히 환하고 걸어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 역시 생기발랄해 보인다. 남편도 이리저리 열심히 사진을 찍으며 김정남 안내원과 쉬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니 기력을 회복했음이 분명하다.
북한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외화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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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념품으로 판매되고 있는 화폐개혁 이전의 구화폐 | |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앙은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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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념품 가게에서 산 테이블보를 비롯한 각종 수공예품 | |
ⓒ 신은미 |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기념품점에 들러 쇼핑을 했다. 북한에서 쇼핑할 때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 '외국인은 북한 화폐를 소유하거나 사용할 수 없다'는 게 바로 그것. 보통 외국여행을 할때 그 나라 화폐를 써 보는 것도 관광의 중요한 부분인데, 이게 북한에서는 불가능하다. 항상 돈을 내려고 할 때면 상점의 직원은 "어느 나라 돈으로 내시겠냐"고 묻는다. 그동안 북한의 이곳저곳 다니면서 느낀 것은 이곳 사람들은 중국의 인민폐를 가장 선호한다는 것이다. 그 다음이 유로(Euro), 다음이 달러다.
북한 사람들조차 호텔이나, 식당, 상점에서 외화를 쓰고 있었다. 주로 중국 인민폐를 낸다. 북한 화폐를 쓰는 사람들도 보이긴 했지만, 극히 드물었다.
상점에 있는 대부분의 물건들은 중국산이었다. 놀랍게도 미국 제품들도 눈에 띄었지만, 그마저도 겉 포장지에는 한자가 적혀 있었다. 중국과 활발하게 교역을 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러니 중국 화폐를 선호하는 게 자연스러웠다.
군데군데, 국가가 운영하며 북한 주민들이 이용하고 있는 곳으로 보이는 화폐 교환소가 보인다. 공식 환율은 1달러당 대충 북한돈 100원. 그런데 화폐 교환소에 붙어 있는 환율표를 언뜻 보니 1달러당 북한돈 4천 원이 넘는 것 같다. 북한 주민들은 다른 환율 계산법을 사용하고 있는 듯했다. 어떻게 저런 큰 환율 차이가 나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북한에서는 꾸겨지거나 약간이라도 파손된 외화를 받지 않는다는 점. 그 때문에 여행사 안내문에는 '북한 관광을 갈 때는 꼭 깨끗한 돈을 준비해 가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덕분에 우리도 이곳에 올 때 새 돈을 준비하느라 이 은행 저 은행을 오가곤 했다. 무슨 이유로 그러는지 역시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
궁금한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안내원에게 물어볼까 생각해봤지만, 앞으로 하나하나씩 알게 될 것이라 믿어 그만두기로 했다.
우리가 들어간 기념품 가게는 북한 화폐 개혁 이전에 사용됐던 구화폐들을 기념품으로 포장해서 팔고 있었다. 남편은 구화폐 한 세트를 샀고, 나는 아기자기한 전통 수예품과 인형을 샀다.
평양 달리는 현대 자동차, 놀랍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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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대극장 | |
ⓒ 신은미 |
호텔로 돌아오는 길, 내일 공연을 하게 될 '평양대극장'을 지나쳤다. 극장 앞 광장에는 아이들과 가족들이 자전거를 타고, 롤러스케이트를 타며 휴일을 즐기고 있는 북한 사람들이 보인다. 우리 호텔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어 들러보자고 했다. 건물 주위를 돌아보면서 우연히 건물 벽을 쳐다봤는데... 한국의 LG 에어컨 실외기가 달려 있는 게 아닌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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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대극장 건물 벽에 붙어 있는 LG 에어컨 | |
ⓒ 신은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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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에서 본 현대 자동차. 국제녹십자사 차량인 듯하다. | |
ⓒ 신은미 |
사실 차를 타고 평양을 다니다 보면 가끔 대우나 현대자동차가 달리고 있는 것을 볼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어떻게 한국의 차들이 여기에 있을 수 있을까'라는 놀라움과 의문, 그리고 설렘이 미묘하게 교차했다. 순간적으로 통일된 나라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 때도 있었다.
오늘 평양 대극장의 벽에 LG 에어컨이 달려 있는 것을 보고 나니 더욱 더 그런 느낌이 든다. 지난해 10월 북한을 처음 여행할 때 나는 정치나 경제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 방면에 문외한인 나는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경제학을 전공한 남편 역시 북한에 대해 모르기는 매한가지. 게다가 당시 나의 관심사는 '북한의 동포들은 과연 우리와 얼마나 다를까'라는 것, 그것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이번 여행을 통해 나는 관심의 영역을 더 넓힐 수 있었다. 열흘간 평양에서만 머무르면서 이곳 사람들의 생활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그런 가운데 떠오른 생각이 바로 '활발한 남북 경제교류'였다. 경제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나 같은 아줌마도 이곳에서 어느 정도의 시간을 보내다 보니 눈에 훤히 보이는 것들이 있다.
평양의 중심에서 '경제'를 생각하다
우선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어디를 가나 볼 수 있고, 또 구입할 수 있는 중국상품들이다. 나는 '이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질 좋은 한국의 상품들이 진열대의 중국제품들을 밀어낸다면 서로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휴대전화 사업만 해도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양질의 값싼 노동력. 그동안 북한에 와서 귀동냥으로 들은 바에 의하면 북한의 인건비는 월 50달러도 채 되지 않는 듯하다. 한국 돈으로 6만 원도 안 되는 돈이다. 두 배로 쳐서 100달러를 준다고 해도 월 12만 원을 넘지 않는다. 우리 기업이 해외로 나가는 이유 중 하나가 값싼 노동력 때문이라고 하던데, 세상에 이보다 더 싼 임금이 어디 있을까. 게다가 이곳 사람들은 교육을 잘 받아 일정한 수준의 교양을 갖추고 있다. 뿐만 아니라 손재주 역시 좋아서, 하다 못해 뜯어진 옷의 수선을 부탁하면 감쪽같이 그 자리서 해결한다. 말해서 무엇하랴, 우리 민족인데. 그뿐이랴, 말 통하고 먹는 음식 같으며 정서적인 부분에서 공유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생각에 생각을 잇다 이내 속만 상한다.
가까운 미래에 북한 사람들이 세계 각국을 활보하고 있는 멋진 한국의 자동차를, 요술 방망이같이 질 좋은 휴대전화를, 이곳 사람들도 좋아하는 맛 좋은 라면들과 과자 등을 함께 즐길 수 있길 바랄 뿐이다. 뿐만 아니라 지금은 모조리 중국 사람들이 향유하고 있는 북한의 싱싱한 수산물, 수려하고 오염되지 않은 묘향산, 금강산, 송악산, 백두산의 풍경, 싱그러운 산나물과 맛 좋은 생수들을 남쪽 사람들이 누릴 수 있게 되길 절실히 바란다. 이런 생각을 하니 가슴 한쪽이 아프게 저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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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성의 송악산 | |
ⓒ 신은미 |
문득, 지난 10월에 판문점을 떠나 평양으로 향하면서 지나쳤던 개성공단이 떠오른다. 나는 지금까지 '개성공단은 북한을 전적으로 도와주기만 하는 곳'으로 알고 있었다. 남북 경제협력 얘기가 나오면 소위 '퍼주기'라는 말들을 많이 해 자연스레 선입견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만일 개성공단에서 우리 기업들이 수년간 월 100달러의 임금을 지불하며 기업 활동을 했다면 이것이 과연 '퍼주기'만 했던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기간 값싼 임금으로 생긴 수익만 따져봐도 수십억 달러에 달하지 않았을까 싶다.
호텔로 돌아와서도 내내 생각해 본다. '나 같은 아줌마도 남북경제협력의 엄청난 혜택이 훤히 보이는데, 경제부국 한국의 경제인들이 모를 리 없지 않을까'라고. 정치인들의 지혜와 그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지 처음으로 실감해 본다.
이제 그만 생각해야겠다. 내일은 '평양대극장'에서 중요한 공연이 있으니 말이다. 동포들과의 더 깊은 교감을 위해 공연에 집중해야겠다.
침대에 몸을 눕히고 두 눈을 감는다. 지금까지 스쳐 지나간 북한 동포들이 애잔한 미소를 지으며 나타난다. 그 미소가 나의 가슴에 파고들어 와 내 입과 눈을 애틋한 전율로 떨리게 한다.
"남편이 여보라고? 북한서는 촌스러운 말입네다"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 20] 평양에서의 마지막 공연
12.08.24 16:54
최종 업데이트 12.08.24 17:21저는 오래 전부터 음악을 공부하고,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오로지 음악에 관한 지식만을 가르쳐왔습니다. 지금은 평범한 주부이자 아이들의 엄마로 살고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과 함께 북한에 갔습니다. 호기심으로 떠난 여행이었지만, 저는 처음으로 우리 민족의 비극적 운명과 민족애를 느꼈습니다. 동시에 통일에 대한 염원이 생겼습니다. 2011년 10월 이후 지난 4월에 열흘 동안, 그리고 5월에는 3주 동안 나진·선봉을 비롯한 북한 전역을 여행했습니다. - 기자말
평양의 중심가에 웅장한 모습으로 서 있는 '평양 대극장'에서의 공연 날. 오늘은 초대받은 모든 예술단들이 한자리에 모여 공연을 한단다. 그 많은 예술인들이 모두 무대에 설 수 없어 예술단 중 한두 명이 대표로 선발돼 공연을 하게 됐다. 나는 재미동포 예술단 대표로 나가 노래를 부르게 됐다. 아마도 내가 한복을 입고 북한 노래를 불렀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북한 젊은이들의 최대 관심사는 바로...
반주자 혜영 선생은 "선생님 덕분에 저도 이 좋은 극장에서 연주할 수 있어서 영광입네다"라며 오늘은 특별히 결혼한 언니네 집 앞에 있는 미용실에서 머리를 하고 왔단다. 혜영 선생은 머리가 흡족한지 거울 앞에서 싱글벙글. 그러고 보니 예전 머리보다 좀 더 우아해 보인다. 미용실에서 얼굴 화장도 신경을 썼는지 다른 날보다 더 예뻐 보였다.
"혜영 선생, 오늘 남자 친구라도 오는가 봐?"
"아닙네다. 아직 남자친구가 없습네다. 대신 어머니가 오실 겁네다."
"오늘따라 너무 예쁜데 어머니께서 선 볼 남자라도 데리고 오시지 않을까?"
"오마나! 선생님이 그런걸 어떻게…그러지 않아도 공연할 때 아버지께서 몇 번 그랬답네다."
"나도 똑같은 경험 많이 했지. 우리 아버지도 여러 번 그러셨단다. 그래, 혜영 선생은 아버지께서 데리고 온 남자들을 만나 봤어? 어땠어?"
"딱 한 사람 만나 봤는데 마음에 들지 않아 그다음부터는 절대 안 나갑네다."
"아버지께서 야단 안 치셨어?"
"아무래도 제가 나이가 드니까니 서두르라 하시는데, 저는 지금 하고 있는 음악 활동이 너무 좋아 당분간은… 그래도 생각 안 할 수는 없지요. 역시 우리 나이가 결혼할 나이니만큼 내 또래 동무들 사이에서도 단연 결혼이 최고 관심사 중에 하나입네다."
"여기서는 남녀가 어떻게 만나서 결혼을 해? 연애 아니면 누가 소개해줘서?"
"고저 반반입네다. 서로 좋아해 하는 경우도 있고, 또 누가 소개해줘서 하는 경우도 있습네다. 그런데 누가 소개해 줬다 해도 여러 번 만나 마음에 들어야 하지 그렇지 않은 경우는 안 합네다."
"서로 좋아하는데 부모님들이 반대하는 경우도 있어?"
"그러믄요. 그러나 남녀가 서로 좋아한다는데 그건 누구도 못 말립네다."
인간의 삶이란 어딜 가나 모두 같은가 보다. 이념이 다르고, 체제가 다르다고 해서 인생의 희로애락까지 달라지지는 않으니 말이다. 물론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궁금증이 발동한 나는 혜영 선생에게 몇 가지를 더 물었다.
"혜영 선생은 어떤 남자를 좋아해? 잘생긴 남자 아니면 좋은 직장을 갖고 있는 남자?"
"(웃으면서) 둘 다 입네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남자다워야 합네다."
"남자다운 사람이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거야?"
"조국을 위해 눈물을 흘릴 줄 알고 목숨도 바칠 수도 있는 그런 남자 말입네다."
부끄럽게도 나는 지금까지 단 한번도 해보지 못한 생각이었다.
"그런데 선생님 저도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네다."
"뭔데? 말해 봐."
"신 선생님은 언제부터 남편을 '여보'라고 부르셨습네까?"
"결혼하고 나서부터. 그런데 그게 왜 궁금해? 여기서는 그렇게 안 부르나봐?"
"여기서도 그렇게 부르는 사람들이 있긴 있습네다. 그런데 이제는 그 말이 촌스럽다고 해서 잘 쓰지 않는단 말입네다. 선생님처럼 세련된 부부가 '여보'라는 말을 써서 재미있기도 하고 깜짝 놀라기도 했드랬습네다."
하기사 우리나라 젊은이들도 잘 쓰지 않는 호칭임은 분명하다.
"그래? 그럼 여기서는 결혼한 부부가 서로를 어떻게 부르지?"
"예를 들어 '철희 엄마' '혜영이 아버지'하는 식입네다."
"남쪽에서도 그렇게들 많이 불러. 그건 크게 다르지 않네. 그러면, 결혼 전에는 서로를 어떻게 불러?"
"나이가 비슷하면 '철희 동무' '헤영 동무'라고 부릅네다. 그런데 남자와 나이 차가 많으면 '동무'란 말 대신 '철희 동지'라고 하고, '동지'라는 말을 씁네다. 그러다 가까워지면 '혜영' '혜영이' 또는 '혜영아' 하고 그냥 이름을 부르기도 합네다. 남쪽에서는 결혼 전에 서로 어떻게 부르나요?"
"보통 이름을 부르거나 '누구누구씨', 또는 여자들이 남자를 보고 '오빠'라고도 많이 불러. 결혼하고도 그렇게 부르는 여자들도 있고."
"오마나, 남편을 '오빠'라고 말입네까?"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오갔다. 나는 너무 재미있어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가고 싶은데, 혜영 선생이 긴장도 풀 겸 바깥 공기를 마시러 나가는 게 어떠냐고 묻는다. 정문 쪽으로 나가보니 사람들이 벌써부터 입장을 위해 줄을 길게 서 기다리고 있다. 공연시간까지는 아직도 한 시간이나 더 남았는데 말이다.
북한서도 일고 있는 금연 운동
할 수 없어 뒷문 쪽으로 갔다. 남편은 열심히 무언가를 얘기하고 있고, 김정남 안내원은 흐뭇한 표정으로 담배를 태우고 있는 게 아닌가. 나를 보더니 얼른 담뱃불을 끈다.
"아니 지난번 피자집에서 담배를 끊겠다고 다짐을 하더니 어떻게 된 거예요? 아빠 건강 걱정에 노심초사하는 딸한테 아무래도 알려줘야 할 것 같네요. 전화 좀 걸어 주세요."
"사실이지 건강 챙긴다고 술·담배 딱 끊은 친구들이 끊기가 무섭게 먼저 세상 뜨고 말았단 말입네다. 그래서 좀 끊기가…. 제가 지금 담뱃불을 끈 것은 신 녀사님께서 노래를 부르셔야 하는데 담배 연기가 목에 좋지 않아서 끈 겁네다."
김정남 안내원은 눈을 찡긋하며 겸연쩍은 마음을 은근슬쩍 감춘다.
이곳 북한에서도 요새 들어 금연 운동이 일어나고 있단다. 공공장소에서는 금연 표시도 많이 볼 수 있다고 한다. 남편이 "정말인가요? 내가 평양에 오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아무 데서나 담배를 마음 놓고 필 수 있어서인데…"라고 장난스레 한마디 건네며 웃는다. 내 남편도 제발 담배 좀 끊었으면 더 바랄 게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참, 인공위성 실험한 것은 어떻게 됐어요?"
갑자기 생각이 났는지 남편이 물어봤다. 나도 궁금했던 차였다. 김정남 안내원은 "아, 그것이 궤도에 들어가지 못하고 실패했습네다. 인공위성 띄우는 일이라는 게 실패를 해가며 하는 일이니까니 뭐…"라며 아쉬운 표정을 짓는다.
순간 남편과 나는 서로 쳐다보며 의아해 했다. 이제까지 북한에서는 발사할 때마다 성공했다는 발표만 했는데 이렇게 빨리, 그것도 실패한 뉴스를 발표해 의외였기 때문이다.
북녘 동포들은 이렇듯 과학 기술도 있고 부지런하며 근면하고 재주도 많다. 하기야 조그마한 반쪽 나라, 당당히 세계 경제 대국으로 우뚝 솟아 오른 한국, 우리와 한민족이니 말해 무엇하랴.
그럼에도 힘들고 가난하게 살고 있는 북녘 동포들을 보니 정말 마음이 아프고 안타깝다. 이유야 어쨌든 복잡하게 얽히고 꼬여버린 남북의 힘든 관계 속에서 하루빨리 벗어나 '서로 이해하고 도와 가며 새로운 한겨레의 멋진 역사를 행복하게 써내려 가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흐뭇한 기대가 현실로 이뤄질 날을 상상한다. 마음이 마구 설렌다. 언젠가 그날이 꼭 오리라는 간절한 소망을 다시 한 번 확인해 본다.
뜨거운 마음... "잠깐 만나도 심장에 남아"
공연 순서를 설명하는 연주 해설원의 소개로 무대에 올랐다. 동포들과 뜨겁게 하나가 되고픈 마음을 안고 무대에 오른다. 백 마디 말이 서로에게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아름다운 멜로디에 진심을 담아 동포들에게 전하니 그저 서로의 호흡에서, 눈빛에서 어그러져 있던 감성들이 포근한 화음이 돼 가지런하게 제자리를 찾아간다. 그동안 시나브로 쌓여왔던 미움도, 분열도, 증오도 영혼이 화합하니 사랑의 마음으로 다시 태어나 벅찬 감동으로 우리 가슴을 애절하게 달궜다.
내일모레는 우리 일정의 마지막 날. 마지막 공연이 끝나고 나면 우리 재미예술단이 다른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공연 관계자들을 저녁 만찬에 초대하기로 했다. 평양대극장 안에 있는 식당에서 하기로 돼 있어 답사차 둘러보기로 했다. 식당은 아늑했다. 그런데, 식당의 한 구석에는 놀랍게도 크리스마스 트리가 서 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호텔 방에 들어와 잠자리에 드니 노랫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잠깐 만나도, 잠깐 만나도, 심장 속에 남는 이 있네…." 잠깐 만나도 심장 속에 남아 있는 북녘 동포들, 꿈속에서나마 이 애달픈 마음이 시원하게, 시원하게 풀렸으면 하고 되뇌며 달콤한 잠을 청한다.
웅장한 규모의 '대공연', 이름값 합니다
다음날은 공연이 없는 날이다. 일정이 없는 대신 평양체육관에서 열리는, 태양절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대공연'을 보러 간단다. '대공연'은 북한 예술인들이 북한 주민들과 외국 손님들을 위해 하는 공연이다. 얼마나 또 우리를 놀라게 하려고 음악회를 체육관서 한다고 하는지….
안에 들어가 보니 공연 무대 장치만 봐도 이 음악회의 웅장함을 가늠할 수 있었다. 곧 음악회가 시작됐고, 공연 내용을 알리는 해설원이 등장한다. 이 음악회의 주제는 '북한의 역사'란다. 무대 벽면에는 체육관의 절반가량을 차지하는 대형 스크린이 놓여 있었고, 화면 에는 북한의 역사를 시대 순서별로 상영했다.
무대에는 천여 명의 합창단과 수백 명에 달하는 오케스트라 대원들이 연주자들의 반주를 맡았다. 설명이 필요 없는 대단한 공연, 또 다른 '아리랑 공연'이나 다름없다. 큰 체육관의 무대 공간이 부족할 정도의 규모이다. 과연 '대공연'이라 할 만했다.
설경이와의 내기, 남편은 졌습니다
어느덧 이번 축제의 마지막 공연날. 공연장으로 가기에 앞서 냉면으로 유명한 옥류관에 들러 점심을 먹는단다. 사실 지난 10월 첫 여행을 준비하면서부터 꼭 한 번 옥류관 냉면 맛을 보고 싶었는데 당시 옥류관 앞길이 공사 중이어서 갈 수 없었다. 특히 냉면을 좋아하는 남편은 지난번에 먹지 못한 것까지 두 그릇을 먹겠다며 아침부터 벼르고 있었다.
옥류관으로 가는 길에 새로 지은 고층 아파트들이 가로수처럼 죽 늘어서 있다. 지난 10월, 설경이가 "내년 4월이면 완공됩네다"라고 설명했던 그 아파트들이다. 앙상하게 뼈대만 있던 건축물들이 아파트로 태어났다.
'내년 4월까지 다 완공되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고 호언장담했던 남편이 내 귀에 대고 슬그머니 속삭인다.
"저거 순 날림 공사일 거야. 그게 아니면 사람이 살지 않거나…. 둘 중에 하나야. 틀림없어. 아니 6개월 사이에 저걸 무슨 재주로 완공해?"
"여보, 누가 듣겠어요. 조용히 좀 하세요."
지난 10월 여행 당시 봉수교회의 목사에게 "이 교회, 가짜 아닌가요"라고 물어 나를 당황케 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안내원에게 '저 아파트에 사람은 살고 있나요'라고 물을 것만 같아 남편의 손을 꼭 잡고 '제발 가만히 있으라'고 눈짓으로 간청했다.
지난번 때와는 달리 완벽한 모습으로 단장한 아파트 건물들을 의아해하며 지나치니 멀리 옥류관이 눈에 들어온다. 옥류관 건물 앞은 지방에서 올라온 단체 관광버스로 가득 차 있었다. 남녀노소, 군인 등 수많은 사람으로 무척이나 붐볐다.
우리 일행은 안내원의 도움으로 2층에 마련돼 있는 특별연회장 같은 곳에 들어갔다. 운동장만큼이나 넓은 식당 안은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로 꽉 차 있다. 그야말로 안팎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안내원 말에 따르면, 옥류관은 기념비적인 곳이라 한번쯤은 꼭 와보는 식당이지만, 사실 평양에는 시민들이 자주 찾는, 맛있는 식당들이 더 많이 있단다. 요즘은 식당들끼리 경쟁도 치열하다고. '식당들 사이에 경쟁이 붙었다'는 말에 남편이 뭔가 물으려고 하다 내가 신호를 주자 이내 포기하고 만다.
담백하면서도 짜릿한, 달지 않으면서도 감칠맛 나는 시원한 냉면 국물을 그릇째 들이켜고 나니 노래가 절로 나올 것만 같다.
마지막 공연서 북한의 '목화 할머니'를 만나다
드디어 마지막 공연이 시작됐다. '애증의 화석 덩어리가 송두리째 애정의 불덩어리로 변해 주체하기 어려울 정도로 뜨거워진 내 마음을 이 무대서 쏟아 놓으리라'고 다짐했다. 달아오르는 마음을 한 음절 한 음절 헛되지 않게 털어놓으려니 가슴에 눈물이 알알이 맺힌다. 내 마음을 들이마신, 사랑하는 내 동포들이 눈물로 화답한다.
노래가 끝나자 네다섯 명의 여성들이 한복과 양장을 정숙하게 차려입고 무대 위로 꽃다발을 들고 올라온다. 감동에 겨운 눈빛으로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교환한다. 감사의 마음을 담아 마지막 인사를 하려는 순간 낯이 익은 또 한 여성이 꽃다발과 함께 눈물을 닦으며 무대 위를 걸어온다. 아! 조선미술박물관의 그 정 많고 살가웠던 해설원이 아닌가. 며칠 전 우연히 만나 재회의 기쁨을 나누며 공연 소식을 전하긴 했으나 용케 이렇게 찾아올 줄은 미처 기대하지 못했다.
너무나도 기쁘고 반가운 마음에 꽃다발을 무대 위에 내려놓은 채 그 안내원과 무대 위에서 특별한 상봉을 한 것처럼 진심 가득한 포옹을 했다. 감격의 마음이 서로의 눈물이 돼 눈가를 촉촉이 적신다.
오늘의 이 숨 가쁘도록 벅찬 순간은 또 다른 그리움이 돼 속절없는 세월 속에 묻히겠지. 하지만 이 순간의 감격을 잊지는 못할 것이다.
공연을 마친 후 터질듯한 감격으로 분장실에 앉아 남북 한민족이 사랑으로 하나 될 그날을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기도를 하고 있는데 여러 재미동포분들이 분장실로 찾아왔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서로의 마음은 서로 꼭 잡은 손을 통해 오가고 있었다. 한 분 한 분 모두 따뜻한 마음으로 사랑의 삶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분들이다.
특별히 그 중 한 분은 미네소타에서 공부하던 시절, '미네소타 한인 장로교회'에 나와 함께 다니시던 분으로 그 시절부터 북한의 농업발전을 위해 동분서주하시던 김필주 박사님이었다. 북한의 시골 구석구석을 다니며 농작물 품종 개발에 지금까지도 당신의 평생을 던지고 계신다. 김필주 박사님은 2011년 뉴스위크지가 선정한 '세계를 뒤흔드는 여성 150인'에 힐러리 클린턴, 미얀마의 아웅산 수치 등과 함께 오르신 분이다.
훌쩍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드신 선생님은 북한에서 '목화 할머니'로 통하신단다. 아마도 '목화꽃'처럼 마음이 순백하고 실질적 삶에 도움을 주는 분이라 그렇게 불리는 게 아닌가 싶다. 선생님과의 반가운 재회를 통해 다시 한 번 지난날, 무심히 살아온 내 삶을 반성해본다.
지난 열흘 동안의 감격스러운 공연은 오늘로 막을 내렸다. 그동안 우리를 위해 수고해 준 김원균 명칭 평양음악대학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관계자들, 그리고 재미동포 예술단은 저녁 만찬을 위해 평양대극장 안에 있는 식당으로 향했다. 이곳에서의 마지막 만찬인 셈이다.
솟아오르는 애달픔... 아리랑만 목놓아 부릅니다
열흘간 내 노래 반주를 하느라 애를 쓴 박혜영 선생도 이 만찬에 참석했다. 혜영 선생은 내 옆에 앉아 언제 다시 보게 될 지 모를 내 손을 꽉 붙잡고서 연신 눈물을 글썽이고 있다. 나 역시 혜영 선생과의 기약 없는 이별을 아쉬워하며 대동강 맥주잔을 꼭 쥔 채 차오르는 슬픔을 꾹꾹 누르고 있다.
이미 음악을 통해 서로 마음을 나눈 우리는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한 식탁에 둘러앉자마자 다가올 이별에 대한 애틋한 교감을 시작하고 있었다. 오랜 세월을 늘 함께해온 사람들처럼 편안하게 말이다.
우리는 어느새 화음을 넣어 가며 <아리랑>과 <고향의 봄>을 힘차게 부르고 있다. 중간중간에 자신들의 악기 소리를 목소리로 내 간주와 박자를 넣어 가면서...
즐거운 듯 웃고 있는 우리들의 얼굴 언저리에는 다시 헤어져야만 하는 쓰라린 우리 민족의 운명과 아픔의 잔재가 드리워져 있었다. 내 앞의 순박하게 생긴 연출자 아저씨, 오스트리아에서 공부했다는 젊은 지휘자, 광부로 있다가 발탁돼 왔다는 '바순' 부는 정 많은 아저씨, 남편이 비뇨기과 의사라며 "남편에게 물어볼 것 없이 자기에게 직접 먼저 물어보면 웬만한 것은 자신이 다 고쳐줄 수 있다"며 박장대소를 끌어내는 재치 넘치는 바이올린 연주자의 얼굴 위에도...
우리는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고 살아가야만 하는, 아무도 알 길이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역사의 흐름 속에 묵묵히 떠내려가야만 하는 것일까. 착잡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애꿎은 "아리랑… 아리랑…" 노랫말이 하염없이 입가에 맴돈다.
이제는 대한항공만큼이나 익숙해진 고려항공. 비행기 안에서 그동안 목에 걸고 다녔던, '신은미, 재미조선인예술단 자유 가수'라고 적혀 있는 아이디 카드를 바라보니 아름다운 기억들이 애달픈 추억으로 스멀스멀 피어올라 눈물이 주르륵 떨어진다.
끊이지 않는, '내 생애에 가장 아름답고도 슬픈 여행'이었다.
평양의 중심가에 웅장한 모습으로 서 있는 '평양 대극장'에서의 공연 날. 오늘은 초대받은 모든 예술단들이 한자리에 모여 공연을 한단다. 그 많은 예술인들이 모두 무대에 설 수 없어 예술단 중 한두 명이 대표로 선발돼 공연을 하게 됐다. 나는 재미동포 예술단 대표로 나가 노래를 부르게 됐다. 아마도 내가 한복을 입고 북한 노래를 불렀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북한 젊은이들의 최대 관심사는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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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연이 끝난 후 세계각지에서 온 동포 출연자들과 함께 | |
ⓒ 신은미 |
반주자 혜영 선생은 "선생님 덕분에 저도 이 좋은 극장에서 연주할 수 있어서 영광입네다"라며 오늘은 특별히 결혼한 언니네 집 앞에 있는 미용실에서 머리를 하고 왔단다. 혜영 선생은 머리가 흡족한지 거울 앞에서 싱글벙글. 그러고 보니 예전 머리보다 좀 더 우아해 보인다. 미용실에서 얼굴 화장도 신경을 썼는지 다른 날보다 더 예뻐 보였다.
"혜영 선생, 오늘 남자 친구라도 오는가 봐?"
"아닙네다. 아직 남자친구가 없습네다. 대신 어머니가 오실 겁네다."
"오늘따라 너무 예쁜데 어머니께서 선 볼 남자라도 데리고 오시지 않을까?"
"오마나! 선생님이 그런걸 어떻게…그러지 않아도 공연할 때 아버지께서 몇 번 그랬답네다."
"나도 똑같은 경험 많이 했지. 우리 아버지도 여러 번 그러셨단다. 그래, 혜영 선생은 아버지께서 데리고 온 남자들을 만나 봤어? 어땠어?"
"딱 한 사람 만나 봤는데 마음에 들지 않아 그다음부터는 절대 안 나갑네다."
"아버지께서 야단 안 치셨어?"
"아무래도 제가 나이가 드니까니 서두르라 하시는데, 저는 지금 하고 있는 음악 활동이 너무 좋아 당분간은… 그래도 생각 안 할 수는 없지요. 역시 우리 나이가 결혼할 나이니만큼 내 또래 동무들 사이에서도 단연 결혼이 최고 관심사 중에 하나입네다."
"여기서는 남녀가 어떻게 만나서 결혼을 해? 연애 아니면 누가 소개해줘서?"
"고저 반반입네다. 서로 좋아해 하는 경우도 있고, 또 누가 소개해줘서 하는 경우도 있습네다. 그런데 누가 소개해 줬다 해도 여러 번 만나 마음에 들어야 하지 그렇지 않은 경우는 안 합네다."
"서로 좋아하는데 부모님들이 반대하는 경우도 있어?"
"그러믄요. 그러나 남녀가 서로 좋아한다는데 그건 누구도 못 말립네다."
인간의 삶이란 어딜 가나 모두 같은가 보다. 이념이 다르고, 체제가 다르다고 해서 인생의 희로애락까지 달라지지는 않으니 말이다. 물론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궁금증이 발동한 나는 혜영 선생에게 몇 가지를 더 물었다.
"혜영 선생은 어떤 남자를 좋아해? 잘생긴 남자 아니면 좋은 직장을 갖고 있는 남자?"
"(웃으면서) 둘 다 입네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남자다워야 합네다."
"남자다운 사람이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거야?"
"조국을 위해 눈물을 흘릴 줄 알고 목숨도 바칠 수도 있는 그런 남자 말입네다."
부끄럽게도 나는 지금까지 단 한번도 해보지 못한 생각이었다.
"그런데 선생님 저도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네다."
"뭔데? 말해 봐."
"신 선생님은 언제부터 남편을 '여보'라고 부르셨습네까?"
"결혼하고 나서부터. 그런데 그게 왜 궁금해? 여기서는 그렇게 안 부르나봐?"
"여기서도 그렇게 부르는 사람들이 있긴 있습네다. 그런데 이제는 그 말이 촌스럽다고 해서 잘 쓰지 않는단 말입네다. 선생님처럼 세련된 부부가 '여보'라는 말을 써서 재미있기도 하고 깜짝 놀라기도 했드랬습네다."
하기사 우리나라 젊은이들도 잘 쓰지 않는 호칭임은 분명하다.
"그래? 그럼 여기서는 결혼한 부부가 서로를 어떻게 부르지?"
"예를 들어 '철희 엄마' '혜영이 아버지'하는 식입네다."
"남쪽에서도 그렇게들 많이 불러. 그건 크게 다르지 않네. 그러면, 결혼 전에는 서로를 어떻게 불러?"
"나이가 비슷하면 '철희 동무' '헤영 동무'라고 부릅네다. 그런데 남자와 나이 차가 많으면 '동무'란 말 대신 '철희 동지'라고 하고, '동지'라는 말을 씁네다. 그러다 가까워지면 '혜영' '혜영이' 또는 '혜영아' 하고 그냥 이름을 부르기도 합네다. 남쪽에서는 결혼 전에 서로 어떻게 부르나요?"
"보통 이름을 부르거나 '누구누구씨', 또는 여자들이 남자를 보고 '오빠'라고도 많이 불러. 결혼하고도 그렇게 부르는 여자들도 있고."
"오마나, 남편을 '오빠'라고 말입네까?"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오갔다. 나는 너무 재미있어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가고 싶은데, 혜영 선생이 긴장도 풀 겸 바깥 공기를 마시러 나가는 게 어떠냐고 묻는다. 정문 쪽으로 나가보니 사람들이 벌써부터 입장을 위해 줄을 길게 서 기다리고 있다. 공연시간까지는 아직도 한 시간이나 더 남았는데 말이다.
북한서도 일고 있는 금연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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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연 한 시간 전부터 기다리고 있는 관람객들 | |
ⓒ 신은미 |
할 수 없어 뒷문 쪽으로 갔다. 남편은 열심히 무언가를 얘기하고 있고, 김정남 안내원은 흐뭇한 표정으로 담배를 태우고 있는 게 아닌가. 나를 보더니 얼른 담뱃불을 끈다.
"아니 지난번 피자집에서 담배를 끊겠다고 다짐을 하더니 어떻게 된 거예요? 아빠 건강 걱정에 노심초사하는 딸한테 아무래도 알려줘야 할 것 같네요. 전화 좀 걸어 주세요."
"사실이지 건강 챙긴다고 술·담배 딱 끊은 친구들이 끊기가 무섭게 먼저 세상 뜨고 말았단 말입네다. 그래서 좀 끊기가…. 제가 지금 담뱃불을 끈 것은 신 녀사님께서 노래를 부르셔야 하는데 담배 연기가 목에 좋지 않아서 끈 겁네다."
김정남 안내원은 눈을 찡긋하며 겸연쩍은 마음을 은근슬쩍 감춘다.
이곳 북한에서도 요새 들어 금연 운동이 일어나고 있단다. 공공장소에서는 금연 표시도 많이 볼 수 있다고 한다. 남편이 "정말인가요? 내가 평양에 오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아무 데서나 담배를 마음 놓고 필 수 있어서인데…"라고 장난스레 한마디 건네며 웃는다. 내 남편도 제발 담배 좀 끊었으면 더 바랄 게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참, 인공위성 실험한 것은 어떻게 됐어요?"
갑자기 생각이 났는지 남편이 물어봤다. 나도 궁금했던 차였다. 김정남 안내원은 "아, 그것이 궤도에 들어가지 못하고 실패했습네다. 인공위성 띄우는 일이라는 게 실패를 해가며 하는 일이니까니 뭐…"라며 아쉬운 표정을 짓는다.
순간 남편과 나는 서로 쳐다보며 의아해 했다. 이제까지 북한에서는 발사할 때마다 성공했다는 발표만 했는데 이렇게 빨리, 그것도 실패한 뉴스를 발표해 의외였기 때문이다.
북녘 동포들은 이렇듯 과학 기술도 있고 부지런하며 근면하고 재주도 많다. 하기야 조그마한 반쪽 나라, 당당히 세계 경제 대국으로 우뚝 솟아 오른 한국, 우리와 한민족이니 말해 무엇하랴.
그럼에도 힘들고 가난하게 살고 있는 북녘 동포들을 보니 정말 마음이 아프고 안타깝다. 이유야 어쨌든 복잡하게 얽히고 꼬여버린 남북의 힘든 관계 속에서 하루빨리 벗어나 '서로 이해하고 도와 가며 새로운 한겨레의 멋진 역사를 행복하게 써내려 가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흐뭇한 기대가 현실로 이뤄질 날을 상상한다. 마음이 마구 설렌다. 언젠가 그날이 꼭 오리라는 간절한 소망을 다시 한 번 확인해 본다.
뜨거운 마음... "잠깐 만나도 심장에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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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대극장 실내 모습 | |
ⓒ 신은미 |
공연 순서를 설명하는 연주 해설원의 소개로 무대에 올랐다. 동포들과 뜨겁게 하나가 되고픈 마음을 안고 무대에 오른다. 백 마디 말이 서로에게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아름다운 멜로디에 진심을 담아 동포들에게 전하니 그저 서로의 호흡에서, 눈빛에서 어그러져 있던 감성들이 포근한 화음이 돼 가지런하게 제자리를 찾아간다. 그동안 시나브로 쌓여왔던 미움도, 분열도, 증오도 영혼이 화합하니 사랑의 마음으로 다시 태어나 벅찬 감동으로 우리 가슴을 애절하게 달궜다.
내일모레는 우리 일정의 마지막 날. 마지막 공연이 끝나고 나면 우리 재미예술단이 다른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공연 관계자들을 저녁 만찬에 초대하기로 했다. 평양대극장 안에 있는 식당에서 하기로 돼 있어 답사차 둘러보기로 했다. 식당은 아늑했다. 그런데, 식당의 한 구석에는 놀랍게도 크리스마스 트리가 서 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호텔 방에 들어와 잠자리에 드니 노랫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잠깐 만나도, 잠깐 만나도, 심장 속에 남는 이 있네…." 잠깐 만나도 심장 속에 남아 있는 북녘 동포들, 꿈속에서나마 이 애달픈 마음이 시원하게, 시원하게 풀렸으면 하고 되뇌며 달콤한 잠을 청한다.
웅장한 규모의 '대공연', 이름값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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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체육관에서 있었던 봄축전의 하이라이트 '대공연' 장면 | |
ⓒ 신은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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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체육관에서 있었던 봄축전의 하이라이트 '대공연' 장면 | |
ⓒ 신은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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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체육관에서 있었던 봄축전의 하이라이트 '대공연' 장면 | |
ⓒ 신은미 |
다음날은 공연이 없는 날이다. 일정이 없는 대신 평양체육관에서 열리는, 태양절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대공연'을 보러 간단다. '대공연'은 북한 예술인들이 북한 주민들과 외국 손님들을 위해 하는 공연이다. 얼마나 또 우리를 놀라게 하려고 음악회를 체육관서 한다고 하는지….
안에 들어가 보니 공연 무대 장치만 봐도 이 음악회의 웅장함을 가늠할 수 있었다. 곧 음악회가 시작됐고, 공연 내용을 알리는 해설원이 등장한다. 이 음악회의 주제는 '북한의 역사'란다. 무대 벽면에는 체육관의 절반가량을 차지하는 대형 스크린이 놓여 있었고, 화면 에는 북한의 역사를 시대 순서별로 상영했다.
무대에는 천여 명의 합창단과 수백 명에 달하는 오케스트라 대원들이 연주자들의 반주를 맡았다. 설명이 필요 없는 대단한 공연, 또 다른 '아리랑 공연'이나 다름없다. 큰 체육관의 무대 공간이 부족할 정도의 규모이다. 과연 '대공연'이라 할 만했다.
설경이와의 내기, 남편은 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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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이 옥류관 오른쪽이 4월에 완공된 고층 아파트들 | |
ⓒ 신은미 |
어느덧 이번 축제의 마지막 공연날. 공연장으로 가기에 앞서 냉면으로 유명한 옥류관에 들러 점심을 먹는단다. 사실 지난 10월 첫 여행을 준비하면서부터 꼭 한 번 옥류관 냉면 맛을 보고 싶었는데 당시 옥류관 앞길이 공사 중이어서 갈 수 없었다. 특히 냉면을 좋아하는 남편은 지난번에 먹지 못한 것까지 두 그릇을 먹겠다며 아침부터 벼르고 있었다.
옥류관으로 가는 길에 새로 지은 고층 아파트들이 가로수처럼 죽 늘어서 있다. 지난 10월, 설경이가 "내년 4월이면 완공됩네다"라고 설명했던 그 아파트들이다. 앙상하게 뼈대만 있던 건축물들이 아파트로 태어났다.
'내년 4월까지 다 완공되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고 호언장담했던 남편이 내 귀에 대고 슬그머니 속삭인다.
"저거 순 날림 공사일 거야. 그게 아니면 사람이 살지 않거나…. 둘 중에 하나야. 틀림없어. 아니 6개월 사이에 저걸 무슨 재주로 완공해?"
"여보, 누가 듣겠어요. 조용히 좀 하세요."
지난 10월 여행 당시 봉수교회의 목사에게 "이 교회, 가짜 아닌가요"라고 물어 나를 당황케 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안내원에게 '저 아파트에 사람은 살고 있나요'라고 물을 것만 같아 남편의 손을 꼭 잡고 '제발 가만히 있으라'고 눈짓으로 간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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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안에서 바라본 옥류관 | |
ⓒ 신은미 |
지난번 때와는 달리 완벽한 모습으로 단장한 아파트 건물들을 의아해하며 지나치니 멀리 옥류관이 눈에 들어온다. 옥류관 건물 앞은 지방에서 올라온 단체 관광버스로 가득 차 있었다. 남녀노소, 군인 등 수많은 사람으로 무척이나 붐볐다.
우리 일행은 안내원의 도움으로 2층에 마련돼 있는 특별연회장 같은 곳에 들어갔다. 운동장만큼이나 넓은 식당 안은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로 꽉 차 있다. 그야말로 안팎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안내원 말에 따르면, 옥류관은 기념비적인 곳이라 한번쯤은 꼭 와보는 식당이지만, 사실 평양에는 시민들이 자주 찾는, 맛있는 식당들이 더 많이 있단다. 요즘은 식당들끼리 경쟁도 치열하다고. '식당들 사이에 경쟁이 붙었다'는 말에 남편이 뭔가 물으려고 하다 내가 신호를 주자 이내 포기하고 만다.
담백하면서도 짜릿한, 달지 않으면서도 감칠맛 나는 시원한 냉면 국물을 그릇째 들이켜고 나니 노래가 절로 나올 것만 같다.
마지막 공연서 북한의 '목화 할머니'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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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공연 당시 | |
ⓒ 신은미 |
드디어 마지막 공연이 시작됐다. '애증의 화석 덩어리가 송두리째 애정의 불덩어리로 변해 주체하기 어려울 정도로 뜨거워진 내 마음을 이 무대서 쏟아 놓으리라'고 다짐했다. 달아오르는 마음을 한 음절 한 음절 헛되지 않게 털어놓으려니 가슴에 눈물이 알알이 맺힌다. 내 마음을 들이마신, 사랑하는 내 동포들이 눈물로 화답한다.
노래가 끝나자 네다섯 명의 여성들이 한복과 양장을 정숙하게 차려입고 무대 위로 꽃다발을 들고 올라온다. 감동에 겨운 눈빛으로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교환한다. 감사의 마음을 담아 마지막 인사를 하려는 순간 낯이 익은 또 한 여성이 꽃다발과 함께 눈물을 닦으며 무대 위를 걸어온다. 아! 조선미술박물관의 그 정 많고 살가웠던 해설원이 아닌가. 며칠 전 우연히 만나 재회의 기쁨을 나누며 공연 소식을 전하긴 했으나 용케 이렇게 찾아올 줄은 미처 기대하지 못했다.
너무나도 기쁘고 반가운 마음에 꽃다발을 무대 위에 내려놓은 채 그 안내원과 무대 위에서 특별한 상봉을 한 것처럼 진심 가득한 포옹을 했다. 감격의 마음이 서로의 눈물이 돼 눈가를 촉촉이 적신다.
오늘의 이 숨 가쁘도록 벅찬 순간은 또 다른 그리움이 돼 속절없는 세월 속에 묻히겠지. 하지만 이 순간의 감격을 잊지는 못할 것이다.
공연을 마친 후 터질듯한 감격으로 분장실에 앉아 남북 한민족이 사랑으로 하나 될 그날을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기도를 하고 있는데 여러 재미동포분들이 분장실로 찾아왔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서로의 마음은 서로 꼭 잡은 손을 통해 오가고 있었다. 한 분 한 분 모두 따뜻한 마음으로 사랑의 삶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분들이다.
특별히 그 중 한 분은 미네소타에서 공부하던 시절, '미네소타 한인 장로교회'에 나와 함께 다니시던 분으로 그 시절부터 북한의 농업발전을 위해 동분서주하시던 김필주 박사님이었다. 북한의 시골 구석구석을 다니며 농작물 품종 개발에 지금까지도 당신의 평생을 던지고 계신다. 김필주 박사님은 2011년 뉴스위크지가 선정한 '세계를 뒤흔드는 여성 150인'에 힐러리 클린턴, 미얀마의 아웅산 수치 등과 함께 오르신 분이다.
훌쩍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드신 선생님은 북한에서 '목화 할머니'로 통하신단다. 아마도 '목화꽃'처럼 마음이 순백하고 실질적 삶에 도움을 주는 분이라 그렇게 불리는 게 아닌가 싶다. 선생님과의 반가운 재회를 통해 다시 한 번 지난날, 무심히 살아온 내 삶을 반성해본다.
지난 열흘 동안의 감격스러운 공연은 오늘로 막을 내렸다. 그동안 우리를 위해 수고해 준 김원균 명칭 평양음악대학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관계자들, 그리고 재미동포 예술단은 저녁 만찬을 위해 평양대극장 안에 있는 식당으로 향했다. 이곳에서의 마지막 만찬인 셈이다.
솟아오르는 애달픔... 아리랑만 목놓아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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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케스트라 단원들과의 마지막 만찬 | |
ⓒ 신은미 |
열흘간 내 노래 반주를 하느라 애를 쓴 박혜영 선생도 이 만찬에 참석했다. 혜영 선생은 내 옆에 앉아 언제 다시 보게 될 지 모를 내 손을 꽉 붙잡고서 연신 눈물을 글썽이고 있다. 나 역시 혜영 선생과의 기약 없는 이별을 아쉬워하며 대동강 맥주잔을 꼭 쥔 채 차오르는 슬픔을 꾹꾹 누르고 있다.
이미 음악을 통해 서로 마음을 나눈 우리는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한 식탁에 둘러앉자마자 다가올 이별에 대한 애틋한 교감을 시작하고 있었다. 오랜 세월을 늘 함께해온 사람들처럼 편안하게 말이다.
우리는 어느새 화음을 넣어 가며 <아리랑>과 <고향의 봄>을 힘차게 부르고 있다. 중간중간에 자신들의 악기 소리를 목소리로 내 간주와 박자를 넣어 가면서...
즐거운 듯 웃고 있는 우리들의 얼굴 언저리에는 다시 헤어져야만 하는 쓰라린 우리 민족의 운명과 아픔의 잔재가 드리워져 있었다. 내 앞의 순박하게 생긴 연출자 아저씨, 오스트리아에서 공부했다는 젊은 지휘자, 광부로 있다가 발탁돼 왔다는 '바순' 부는 정 많은 아저씨, 남편이 비뇨기과 의사라며 "남편에게 물어볼 것 없이 자기에게 직접 먼저 물어보면 웬만한 것은 자신이 다 고쳐줄 수 있다"며 박장대소를 끌어내는 재치 넘치는 바이올린 연주자의 얼굴 위에도...
우리는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고 살아가야만 하는, 아무도 알 길이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역사의 흐름 속에 묵묵히 떠내려가야만 하는 것일까. 착잡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애꿎은 "아리랑… 아리랑…" 노랫말이 하염없이 입가에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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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흘간 목에 걸고 다녔던 아이디 카드 | |
ⓒ 신은미 |
이제는 대한항공만큼이나 익숙해진 고려항공. 비행기 안에서 그동안 목에 걸고 다녔던, '신은미, 재미조선인예술단 자유 가수'라고 적혀 있는 아이디 카드를 바라보니 아름다운 기억들이 애달픈 추억으로 스멀스멀 피어올라 눈물이 주르륵 떨어진다.
끊이지 않는, '내 생애에 가장 아름답고도 슬픈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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