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 21~25]

2012. 10. 25. 16:21everyday photo

 

 

"기리니끼니... 신발이 좀 날라리 같디요?"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 21] 벌써 세번째... 이번엔 라진-선봉으로

12.09.03 15:22l최종 업데이트 12.09.03 15:22l
저는 오래 전부터 음악을 공부하고,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오로지 음악에 관한 지식만을 가르쳐왔습니다. 지금은 평범한 주부이자 아이들의 엄마로 살고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과 함께 북한에 갔습니다. 호기심으로 떠난 여행이었지만, 저는 처음으로 우리 민족의 비극적 운명과 민족애를 느꼈습니다. 동시에 통일에 대한 염원이 생겼습니다. 2011년 10월 이후 지난 4월에 열흘 동안, 그리고 5월에는 3주 동안 나진·선봉을 비롯한 북한 전역을 여행했습니다. - 기자말

북한으로 향하기 앞서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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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열흘간의 평양공연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온 우리는 시차 적응을 할 겨를도 없이 다시 북한에 가기 위해 베이징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때는 5월 초. 7명의 미국 친구들 중 1명은 가정문제로 또 1명은 직장 문제로 동행할 수 없어 나머지 5명과 재미동포 부부, 그리고 우리 부부까지... 모두 9명이 12일 동안 함께 북한을 여행하게 됐다.

12일간의 북한 여행을 마치고 나면, 우리 부부를 제외한 나머지 일행들은 베이징을 경유해 미국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우리 부부는 베이징 공항에서 그들과 작별 인사를 한 다음, 항공편으로 옌지(연길)에 닿아 육로로 함경북도 나진·선봉에 갈 계획이었다. 평양에서 직접 나진·선봉을 갈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직접 가기에는 교통 사정이 여의치 않아 힘들다고 했다.

다음에 나진·선봉에 갈 때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꼭 평양에서 육로로 그곳까지 가리라 마음먹었다. 지난해 10월, 첫 북한 여행 당시 내 고향 대구를 떠올리게 했던 추억의 도시 원산을 경유해 함흥, 청진을 거쳐 슬프디 아름다운 동해안을 따라서 말이다.

한 실향민의 목 메임... "고향 땅 가보는 게 소원"

이번 여행의 백미는 평양 봉수교회에서의 예배와 백두산 방문, 그리고 나진·선봉 지역 관광이었다. 그러나 우리 부부에게는 관광보다 더 중요한 두 가지 일이 있었다.

첫째는, 무슨 일이 있어도 '황해도 사리원'에 가겠다는 것.

북한으로 떠나기 일주일 전쯤이었다. 고향이 이북이라는 한 할아버님이 전화를 걸었다. 자신의 고향은 황해도 사리원이며, 열세살 때 부모님을 따라 남으로 내려오셨다고 한다. 그런데 그 할아버님은 "아직 미국 시민권이 없어 고향 방문을 못하고 있다"며 "혹시 당신들이 사리원에 간다면 사진이라도 좀 찍어올 수 있겠느냐"고 부탁했다.

할아버님은 "죽기 전에 친척들을 만나고, 고향 땅 한 번 밟아 보는 게 소원"이라고 하셨다. 논이며, 밭이며, 시내로 향하는 신작로며, 마을의 동무들이며... 모든 것이 눈에 선하다며 울컥하셨다. 그 할아버님은 "고향 생각이 날 때, 약주를 마시며 <고향의 봄>을 부르는데, 목이 메어 노래를 끝까지 불러본 적이 없다"고 하셨다.

사실, 그동안 남편은 황해도 사리원에 있는 한 보육원에 의약품을 전달해 달라는 한 구호단체의 부탁을 받고 사리원 방문을 추진하고 있었다. 하지만 북한 측은 "관광 목적으로 입국했을 경우, 관광 외의 일은 할 수 없다"며 단호히 거절했다. 남편은 그래도 사리원을 가야겠다며 북측과 승강이를 벌였다. 그러던 중 그 구호단체에서 연락이 왔다. "보내려고 했던 물품들이 유효 기간이 지나 보낼 수가 없게 됐다"고. 그 연락 덕에 우리는 여행사에 연락을 해 "사리원에 가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놓은 상태였다.

눈시울을 적시며 할아버님과 통화를 하던 남편은 전화를 끊자마자 여행사에 다시 전화를 걸어 "보육원에는 가지 않아도 되니, 그저 시내 구경만이라도 할 수 있게 일정을 변경해 달라, 황해도 사리원에 꼭 가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다시 사리원에 가게 해 달라는 남편의 부탁에 북한 측은 보육원 방문도 취소된 마당에 왜 저렇게 사리원을 가려고 하는지 의심하는 것 같았다. 과연 사리원 방문을 허가할지 의문이었다.

순간 그 할아버님께 죄스러운 마음이 생겼다. "고향 땅을 단 한 번만이라도 밟아 보면 소원이 없겠다"는 곳들을 우리는 한가하게 관광 목적으로 다녔다니... 갑자기 북한에 가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기도 했다.

둘째는 평양의학대학 병원에 인공관절 치환 수술 장비를 전해 주는 일.

이 장비들은 지난해 10월 첫 북한 여행에서 돌아와 처음 뵌 이후 우리 부부가 스승으로 모시게 된, 세계적인 정형외과 의사이자 하버드 의대 교수를 지낸 오인동 박사님께서 평양 의학대학 병원에 보내달라고 부탁한 것들이었다.

지난해 북한을 처음 다녀온 후, 나의 무지함을 깨고, 굳게 빗장이 걸려 있던 마음의 눈을 열고 보니 곳곳에서 자신의 재능과 따스한 가슴으로 우리 민족을 위해 정열을 뜨겁게 불태우고 계시는 훌륭한 분들이 재미동포 사회에 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특별히 우리 부부는 오인동 박사님이 쓰신 저서 중 하나인 <평양에 두고 온 수술 가방>을 감명 깊게 읽었다. 우리는 그분의 진심어린 동포애와 민족 통일의 염원을 가슴으로 읽으며 우리 자신을 부끄러워하게 됐고, 뒤늦게나마 그분의 끝없는 열정을 어설프게나마 좇으려 했다.

이미 선생님께서는 수차례 북한을 방문해 북한 동포들에게 '인술'을 베풀어 오셨다. 또한, 그들에게 선진 의술을 전수하고 있었다. 의학 활동뿐만이 아니었다. 오인동 박사님은 지난 2008년 문화관광부 선정 역사분야 우수도서인 <꼬레아 Corea, 코리아 Korea : 서양인이 부른 우리나라 국호의 역사>를 비롯해 <통일의 날이 참다운 광복의 날이다> 등의 저서를 통해 조국의 진정한 독립인 통일을 향해 온몸과 온마음을 불태우고 계셨다.

우리는 박사님의 동포 사랑에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고자 이번 5월 여행에 박사님께서 정성스레 준비한 수술 장비와 의료품을 전달하고자 계획했다.

"오마니!"... 다시 만난 '우리 딸' 설경이

추억의 평양 순안공항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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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평양공연 여행 후 2주 만에 또다시 찾은 5월의 북녘땅. 이제는 낯설 수 없었다. 그저 반갑고, 보고 싶은 고향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 내 나라의 일부처럼 친근하다. 우리와 함께 이 여행에 동행한 미국 친구들도 이미 우리 부부에게 들은 북한 이야기들 때문인지 두려워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설렘과 호기심으로 들떠 있다.

어느 시골의 버스터미널 같은 임시공항청사도, 멀리 보이는 순박한 공항청사 직원 아저씨들의 모습, 그리고 세관에서 일하는 아저씨들의 모습도, 모든 것이 여전하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달나라보다도 낯설게만 느껴졌었던 어느 북한 땅에 너무나도 보고 싶은 '우리 딸' 설경이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지난해 10월, 우리와 함께했던 만룡 안내원과 리인덕 운전사 '당원 아저씨'도 보고 싶은 마음 간절했으나 그 두 사람은 볼 수가 없다고 한다. 만룡 안내원은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에 전념하고 있다고 했으며, 리인덕 운전사 아저씨는 작은 밴 전속 담당 운전사로 보직이 바뀌어 우리 일행을 모두 태우고 다닐 수 없단다. 대신 큰 버스 운전을 담당하는 다른 운전사 아저씨가 나올 것이라고 들었다.

섭섭함과 실망스러움을 감출 길이 없지만, 만룡 안내원과 리인덕 운전사 아저씨를 대신해 새롭게 인연을 맺을 사람들에 대한 기대감이 고개를 든다. 아쉬운 마음을 기대감으로 위로해 본다.

추억의 평양 순안공항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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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어두컴컴한 공항청사를 빠져나가 흥분에 들떠 있을 설경이를 만나고 싶다. 그런데, 좋지 않은 공항청사의 전기 공급 사정 때문에 짐을 찾는 레일이 여러 번 정지했다. 때문에 짐 찾는 데 시간을 허비한다. 미국 친구들은 이조차도 "관광지에서만 새길 수 있는 좋은 추억거리"라며 느긋해한다.

과연 설경이가 밖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여행을 수속하는 과정서부터 여러 번 북한을 다녀온 경험이 있는 한 지인은 "같은 안내원을 두 번 다시 연결시켜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도 지난해 첫 북한 여행에서 돌아와 또다시 평양에 가겠다며 계획을 세웠던 이유는 '설경이와의 재회'였다. 우리는 여행사에 단호하게 부탁했다.

"만약 설경이를 볼 수 없다면 여행을 포기하겠다."

애절하게 부탁했던 내 마음이 무색하리만큼 우리 여행을 담당한 여행사는 "북한에서 흔쾌히 선생님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고 말해줬다. 또 "안 그래도 같은 안내원을 붙여 드리면 좋아하실 것 같아서 이미 그렇게 준비해 놓고 있다"며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우리를 안심시켰다. 그런데, 공항청사에서 짐을 찾고 있는 동안, 남편의 의심증이 또다시 발동했다.

"여보, 설경이가 정말 나와 있을까? 어쩌면 우리를 또 관광 오게 하려고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어..."
"설마..."


부정도 긍정도 아닌 이 짧은 말. 이 말 이외에는 다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북한서 새로 만난 '조카'

12일 동안 우리와 함께한 '조선국제여행사' 버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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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사리 가방을 찾고 청사를 빠져나가기 위해 줄을 서 있는데, 누군가가 "오마니! 오마니!"라며 목청을 높이고 있다. 나는 직감적으로 '설경이다'라고 생각했다. 맞았다. 세관 너머 수많은 인파 사이에서 설경이가 두 손을 머리 위로 흔들면서, 발을 동동 구르면서 소리치고 있다. 나 또한 창피한 줄 모르고 설경이의 이름만 소리 높여 불렀다. 이후 세관을 통과한 우리는 서로 얼싸안고 빙글빙글 돌았다.

"그래. 어머님, 아버님은 안녕하시고?"
"네, 그러지 않아도 오신다고 했더니 '잘 모시라'고 하셨어요. 지난 4월 축전 때 뵙고 3주 만인 것 같은데... 왜 이래 오래된 것 같나요?"


흥분을 가라앉힌 설경이가 옆에 서 있는 남자 안내원을 우리에게 소개한다. 내가 본 북한 남성 중 키가 제일 크지 않나 싶은 이 사람의 이름은 방현수. 마른 체격을 더 말라 보이게 하는 콧날, 뾰족한 멋쟁이 구두를 신고 있었다. 방현수 안내원은 자신의 별명이 '탈피(마른명태)'라며 싱글싱글 웃는다. 기분 좋은 웃음이 절로 난다.

방현수 안내원은 대학을 졸업하고 다른 부서에서 근무하다가 이곳 '조선국제려행사'로 옮겨 온 지 몇 개월 안 됐단다. 그는 "부족한 면이 있더라도 잘 부탁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천성이 순하고 재치가 있는 방현수 안내원. 나와 그의 관계가 '이모-조카' 사이로 발전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설경이는 버스에 오르자마자 유창한 영어로 미국 친구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서 꼼꼼히 설명한다. 그러고 보니 설경이가 영어로 말하는 걸 처음 듣는 듯. 마치 설경이와 함께 미국에 와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신발이 좀 자유주의입네다"

장난기 많은 방현수 안내원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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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옆에 앉은 방현수 안내원이 "설경 동무는 매사에 빈틈없고 능숙해서 나는 할 일이 없습네다. 고저 설경 동무 하자는 대로, 시키는 대로 하면 무탈합네다"란다. 그러더니 정말 할 일이 없는지 차 안에서 뾰족한 구두를 열심히 닦는다.

"구두가 참 멋있네요!"
"우리 집사람이 며칠 전, 요즘 유행하는 기라며 사다 줬는데 구두가 좀 점잖티 안티요? 기랫티 않습네까?"
"부인이 정말 멋쟁이 구두를 잘 골라 사줬네요. 좋기만 한데요?"


"긴데... 신발이 좀 자유주의입네다..."
"자유주의라뇨?"
"기리니끼니... 좀 '날라리' 같다는 말입네다."
"어머, 여기서도 '날라리'라는 말을 쓰네요."
"'날라리' 말입네까? 날라리... 뭐... 좀 있디요. 뭐..."


지금껏 내가 만나 본 북한 사람들 중 가장 북한 사투리가 심한 사람이었다. 이곳 북한도 젊은 사람들일수록 우리가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쓴다. 그런데 39세밖에 안 된 방현수 안내원은 북한 사투리가 정말 심하다. 게다가 말끝마다 '뭐'자를 붙이는데, 꼭 여성 말씨다. 게다가 농담과 장난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그 재미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방현수 안내원의 심한 사투리, 농담, 그리고 장난기로 인해 우리는 금세 가까워질 수 있었다.

병원에는 갈 수는 있는데 장비는 전할 수 없다니...

호텔로 가는 차 안에서 남편이 설경이를 불러 옆에 앉히고는 묻는다.

"설경아, 평양의대 병원이 어디 있어?"
"평양의대요? 아, 지금은 김일성종합대학과 합쳐졌는데,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고려호텔 바로 근처입네다. 기런데 '평의대병원'은 왜... 오데가 아프십네까?"
"아니, 그게 아니고... 우리 짐 가방 중 제일 큰 것이 평양의대병원으로 가는 수술장비들인데, 급히 전해야 하거든. 미국에 사시는 오인동 박사님이라는 분이 보내시는 건데, 지금 '문상민'이라는 병원장님께서 이 장비를 기다리고 계실 거야. 오 박사님께서 이미 이메일을 보내 놨다고 하셨어."


"아, 그렇습네까. 직접 전해 주실 수는 없고... 조금 있으면 '리종' 동지가 호텔로 오기로 돼 있는데, 리 동지에게 부탁하시면 됩네다."
"리종 동지?"
"작년에 '삐짜' 식당에서 함께 만나시지 않았습네까.(웃음) 왜... 저... 머리가 좀 없는..."

"어, 그 '대머리' 선생?"
"리종 동지가 그러지 않아도 선생님 뵙겠다고 호텔로 오고 있는 중입네다. 기런데, '대머리'라 그러지 마십시오. 되게 싫어 합네다. 아버님은 좀 너무 솔직해서..."
"응, 알았어. 그 분 앞에서는 '대머리'라고 절대 안 그럴게. 그런데, 내가 직접 전해줄 수는 없나? 병원 구경도 좀 할 겸."


"병원 참관은 원하시면 할 수 있습네다만, 수술 장비를 전달하는 것은 직접 안 됩네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야. 병원구경은 할 수 있는데 거기까지 가서 물건은 전할 수 없다니. 이왕 가는 김에 물건까지 전하면 좋잖아. 안 그래?"
"공화국에도 다 법과 규칙이 있습네다. 따라야 할 절차가 있습네다."


병원 구경은 원하면 할 수 있지만, 수술 장비를 전하는 것은 절차를 밟아야 한다니... 아주 다급한 환자들을 위한 것은 아니니 천만다행이지만, 만일 이 장비들이 분초를 다투는 위급한 환자들을 위한 것들이라면...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는 북한

 

 

점점 새로워 지는 평양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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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거리는 그야말로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는 듯하다. 지난 4월에 다녀간 뒤 2~3주뿐이 되지 않았는데, 뼈대만 보이는 것 같았던 새 건물들이 그새 또 조금 더 모양새를 갖춰가고 있다.

봄이라 그런지 도로변에 활짝 핀 꽃들은 사람들의 옷차림을 한층 생동감 있게 만들었다. 마치 꽃들이 화사한 무늬가 된 듯하다. 따스한 봄 햇살 속 여인네들은 화려하게 수놓은 양산을 쓰고 꽃가루와 함께 둥실둥실 하늘로 떠오를 것만 같다. 호기심이 많은 미국 친구들도 말로만 듣던 북한을 직접 와서 눈으로 보니 신기한 것들이 눈에 띄었나 보다. 연신 설경이를 붙잡고 이것저것 물어본다.

어느새 눈에 익은 고려호텔에 도착했다. 우리 짐을 받아주는 벨보이 아저씨도, 프런트 데스크의 아가씨들도 지난 10월에 만났던 우리를 기억하고서 반가운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녀사님! 지난 번 '친선 봄 축전'에서 노래 부르시는 것 텔레비죤에서 보았습네다. 너무 반가와서리 눈물이 다 찔끔했습네다."

벨보이 아저씨가 말하니 옆에 있던 아가씨들도 내가 노래 부르는 것을 봤다며 맞장구쳐준다.

화려한 양산을 즐겨 쓰고 다니는 평양의 여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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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을 만났어도 순수한 마음과 마음의 만남은 시공을 초월하는 교감을 만든다. 문득, 우리나라는 사상이나 이념이 갈라놓은 나라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절대로 인간을 갈라 놀 수가 없음을 이곳 북한에서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 일행은 호텔방을 배정받고 저녁 식사 전까지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우리 부부는 방에다 짐만 가져다 놓은 뒤 설경이, 방현수 '조카', 그리고 "북한의 '용성맥주'와 같은 이름을 갖고 있어 쉽게 이름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40대 중반의 김용성 운전수 아저씨와 회포를 풀기 위해 로비에 있는 커피숍에서 만나기로 했다. 리종 선생도 이곳 커피숍으로 오기로 돼 있단다.

수술 장비 가방을 끌고 서둘러 내려가니, 벌써 리종 선생과 세 사람 모두 우리 부부를 기다리고 있었다. 리종 선생은 우리의 손을 붙잡고 아래위로 흔들면서 반가움을 표하더니 그것으로 부족한지 "악수로는 반가움이 전해지지 않으니 미국식으로 '포옹' 한 번 합세다. 영어로는 '허그'라고 하디요?"라고 말한다. 영어를 전공한 티를 낸다.

내가 보기에는 그리 심한 것 같지 않아 보이지만, "머리카락 빠지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신경 쓰이는 일"이라며 머리카락을 신줏단지 모시듯 하는 리종 선생에게 다음에 북한에 올 때는 탈모방지약을 꼭 선물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관계의 단절은 '형벌'... 우리는 벌을 자처한 걸까

고려호텔 커피숖에서 '탈피(마른명태)'를 다듬고 있는 설경이. 별명이 '탈피'인 방현수 안내원은 도저히 마른 명태하고는 사진을 찍을 수 없다며 얼굴을 가리는 시늉을 하고 있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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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의 반가움으로 축배를 들자"며 초저녁부터 맥주를 마실 명분을 찾은 남자들은 일심으로 의기투합하고 있다. 안주는 '탈피'(마른 명태)! 탈피를 시키면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방현수 안내원을 쳐다 보며 웃었다. 방현수 안내원의 별명이 '탈피'라서. 그러자 방현수 안내원이 귀엽게 한 마디 던진다.

"술자리에는 '탈피' 내가 빠질 수 없디요."

새로운 만남, 그리고 재회! 이것이야 말로 살아있음을 감사하게 만든다. 희열을 느끼게 해준다. '가족, 형제자매, 친지, 친구들...' 생각만 해도 가슴 뭉클한 관계이자 소중한 만남이다. 끊을려야 끊을 수 없는 이 소중한 관계의 단절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형벌일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 민족은 이런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인지, 혹시 우리 스스로 이 형벌을 자처하고 나선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고 또 반성해 본다.

남편은 리종 선생에게 "우리가 미국서부터 들고 온 중요한 수술 장비 가방을 꼭 평양의학대학 병원에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리종 선생은 "기꺼이 이 소중한 물건들을 잘 전달해 드리겠다"며 의과대학을 대신해 우리 부부와 오인동 박사님께 감사의 마음을 표했다.

이 장비로 수술을 받고 다시 걸을 수 있게 될 동포들을 생각하니 내 얼굴에도 미소가 절로 피어난다. 수술 장비를 우리에게 넘겨 주시면서 흐뭇한 표정을 지으시던 오인동 박사님의 모습도 함께 떠오른다.

안내원 "이미 다 지시 받았습네다"

평양 고려호텔 로비에서. 왼쪽부터 설경이, 필자, 리종 선생, 그리고 남편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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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친구들은 먼 여행길에 피로를 느끼기도 했지만, 즐겁게 식사를 마치고 내일 일정을 기대하며 각자의 방으로 올라갔다. 설경이와 우리 부부는 헤어짐이 못내 아쉬워 좀 더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호텔 꼭대기 층에 있는 360도 회전 식당으로 향했다. 물론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정이 듬뿍 가는 방현수 안내원도 함께 말이다. 책임감이 남다른 김용성 운전사 아저씨는 "내일의 안전 운행을 위해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 한다"며 양해를 구하고 먼저 방으로 올라갔다.

우리는 유머 감각이 풍부한 방현수 안내원 덕분에 정신없이 웃으며 피곤한 줄 모르고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방현수 안내원은 내가 자기 막내 이모처럼 친근하게 느껴진단다. 덕분에 만난 지 하루 만에 나는 이모, 남편은 이모부가 돼 버렸다. 그의 순박한 붙임성은 나로 하여금 그를 진짜 조카처럼 느껴지게 했다. 나는 방현수 안내원에게 "앞으로 동생 설경이를 잘 돌봐주길 바란다"고 신신당부하니 남편이 한 마디 덧붙인다.

"내가 오늘 하루 가만히 지켜보니까 방 조카가 설경이를 잘 돌봐주기는커녕 설경이 힘들게나 안 하면 천만다행이겠구만."
"설경 동무한테 벌써 다 듣고 지시 받았습네다."


"뭘 다 듣고 지시 받아?"
"설경 동무 이야기가, 정 선생님 말씀하실 때는 반박하려고도 하지 말고, 따지려고 들지도 말고, 설득하려 들지도 말고, 고저 아무 소리 말고...:"
"음... 그건 맞는 말이지. 근데 아무 소리 말고 뭐?"
"고저... 고저...한 쪽 귀로 듣고 흘려 버리라고 말입네다."


그러자 방현수 안내원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도망치는 시늉을 한다. 남편이 설경이를 쳐다보며 한마디 한다.

"너, 이놈의 자식, 그동안 내가 한 말을 한 귀로 듣고 바로 흘려버렸단 말이야?"
"아버지, 오해하지 마시라요. 제가 그런 뜻으로 말하지 않았어요. 아버지 말 속에 들어있는 애정어린 말뜻을 잘 알아서 찾아 들으라 했시요. 안 기래요. 방 동지?"


설경이는 두 눈을 찡긋하며 애교섞인 미소를 띄운다.

고려호텔 회전식당에서 설경이와 함께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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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딸, 그리고 조카... 너무나도 친숙하고 정감 넘치는 사람들의 대화다. 내가 방 조카에게 "걱정 말라"며 한마디 했다.

"조카 뒤에는 든든한 이모가 있으니, 이모부 무서워서 도망치지 말고 내 옆에 꼭 붙어 앉아 있으면 돼."
"긴데... 기러다간 이모까지 '폭탄' 맞을 것 같으니 기냥 올라 가갔시요."


방현수 안내원은 "사실, 내일 미국 관광객 중 한 분이 오전 6시에 조깅을 하는데, 안내원인 내가 함께 가기로 돼 있다"며 "함께 뛰려면 힘을 비축해 놔야 하기 때문에 일찌감치 방에 올라가 잠을 좀 자둬야 겠다"고 한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의 '조깅 사건'이 고려호텔 안팎으로 회자되리라곤 어느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다.

 

북한 신혼부부, 결혼식 마치고 어디 가나 봤더니...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 22] 평양의 아침, 그리고 혁명열사능

12.09.11 15:03l최종 업데이트 12.09.11 15:03l
저는 오래 전부터 음악을 공부하고,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오로지 음악에 관한 지식만을 가르쳐왔습니다. 지금은 평범한 주부이자 아이들의 엄마로 살고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과 함께 북한에 갔습니다. 호기심으로 떠난 여행이었지만, 저는 처음으로 우리 민족의 비극적 운명과 민족애를 느꼈습니다. 동시에 통일에 대한 염원이 생겼습니다. 2011년 10월 이후 지난 4월에 열흘 동안, 그리고 5월에는 3주 동안 나진·선봉을 비롯한 북한 전역을 여행했습니다. - 기자말

뾰족 구두 신고 조깅한 방현수 안내원

호텔방에서 내려다 본 평양의 이른 아침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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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서의 첫 아침이다. 서둘러 로비로 내려가니 설경이는 아침부터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큰소리를 내며 웃고 있다. 무슨 일인지 물어보니 넋을 잃고 로비 의자에 축 늘어져 앉아 있는 방현수 안내원이 더듬거리며 이야기를 해준다.

우리 일행 중 한 분은 오전 6시가 되면 무슨 일이 있어도 조깅을 한다. 이미 전날 저녁 그분이 "아침에 조깅을 할 것"이라고 알려줬고, 방현수 안내원은 그분의 조깅에 동행하기로 예정돼 있었다. 사실 방현수 안내원은 낯선 평양, 여행 첫날부터 조깅을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쨌든 오전 6시가 되자 방현수 안내원은 양복 차림에 코가 뾰쪽한 '멋쟁이 구두'를 신고 로비에 내려갔다고 한다. 그런데 반바지 차림에 서 있는 그 여행객을 보고 순간 당황했다고 설명하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여기서도 물론 운동을 하디. 그렇디만 반바지 차림에 이른 아침부터 시내 중심가를 뛰다니는 사람은 정신 나가지 않고서야 없디 뭐. 고저 놀래 멍해서 쳐다보고 있는데 '렛츠 고우'라고 하면서리 호텔문을 나서더니... 이건 뭐 조깅이 아니라 단거리 선수 뛰듯... 뭐... 죽는디 알았디 뭐."
"아니, 왜?"

"이모, 내가 키가 크다 보니까니 전에 배구선수를 했댄는데, 그때 무릎을 다쳐 잘 뛰지를 못한단 말입네다. 기런데 구두마저 '날라리'다라니 도저히 못 따라 가겠는 기야요. 평양역 앞을 지나... 뭐... 나도 정신이 없어 오데를 갔는지 기억도 안나요. 지나가던 시민들은 서서 구경하디... 여성 교통보안원도 뭔가 해서 쳐다 보며 히쭉거리디... 뭐... 창피해 죽는디 알았디 뭐."

조깅하는 여행객의 뒤를 쫓아가는 방현수 안내원을 보고 웃었다는 여성 교통안전원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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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의 출근 전차. 전차안의 아이들이 우리 버스안을 들여다 보며 환하게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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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뭘 입고 시내 중심가 한가운데서 조깅을 하든 뭘 하든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미국과 이곳은 확실히 달랐다. 건장한 체격에 반바지 바람의 외국인을 뒤쫓아가며 헉헉거리면서 달리는 방현수 안내원, 그것도 모자라 신사복 차림에 뾰족 구두를 신은 홀쭉이 조카를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터진다.

"기래도 사람이 많이 없는 이른 아침이라 다행이었디... 정말 창피해서 혼났디 뭐."

지쳐서 말 할 기운도 없어 보이는 방현수 안내원은 그 와중에 부인이 사다 준 새 양말이 '깨졌다'(뚫어졌다)며 열심히 달린 흔적을 보여준다.

"내 집사람 쫓아다니느라 양말이 깨졌드랬는데 이번이 두 번째야요"라며 농담을 하는 걸 보니 그래도 정신을 좀 차린 것 같다.

"통일이 되면 개 한 마리 걸치고 서울로 찾아갈게"

방현수 안내원(왼쪽), 김용성 운전기사 아저씨(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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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현수 조카는 아침마다 조깅 쫓아다니느라 힘들 때면 어리광을 부린다.

"이모, 이모부! 힘들어 죽겠습네다. 한 5킬로는 깠습네다. 몸 보신 좀 시켜 주시라요."(체중이 줄었다는 말)

그 모습이 참으로 친근하고 정이 간다. 남편은 방현수가 '이모, 이모부'라고 말만 하면 "그래, 오늘 밤은 뭐가 먹고 싶어? 뭐든지 말해. 다 사줄 테니..."라고 답했다.

일행과 함께하는 저녁식사는 오후 6시 정도에 제공됐다. 지난해 10월, 남편과 단 둘이서 왔을 때는 저녁식사 전 우리가 먹고 싶어하는 음식을 설경이가 미리 물어보기도 하며 식사 시간을 변경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단체 여행이다 보니 미리 정해 놓은 식당에서 비교적 정확한 시각에 식사를 하게 됐다. 보통 식사가 끝나고 호텔에 돌아오면 자유롭게 쉴 수 있었다.

이런 '자유 시간'에 우리 부부는 설경이와 방현수 안내원과 함께 커피숍에서 사람 사는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함께했다. 물론 관광객과 안내원이 아닌, 동포로서의 정을 듬뿍 나누면서 말이다. 그저 다 어디서나 하는 얘기들이 오갔다.

방현수 안내원의 관심은 단연 자식 교육이다. 특히 여덟 살난 딸아이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소조활동'(과외활동)으로 무용을 한단다. 휴대전화에 저장해 놓은 딸아이의 동영상을 봤는데, 정말이지 춤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앞으로 무용을 전공시키라'는 내 조언에 "실력있는 아이들이 너무 많아 경쟁이 심하다"며 "웬만한 치맛바람이 아니면 턱도 없다"고 걱정이다. 남이나 북이나 우리 민족은 자식 교육이라면 부모들이 인생을 거는 듯하다.

그러다가 식당이 닫기 직전에 방현수 안내원의 핑계로 한 끼 식사를 더 한 뒤 호텔로 돌아와 꼭대기 층 회전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오전 12시가 다 되도록 북한산 차나 대동강 맥주를 마시며 정을 쌓았다.

북한에서는 육개장을 '소육개장'이라고 부르는데, 방현수 안내원은 특히 육개장을 참 좋아했다. 그는 가끔씩 물리는 듯하면 냉면을 먹곤 했다. 내가 잘하는 음식 중 하나가 바로 육개장인데, 언제쯤 내가 직접 만든 육개장을 설경이와 방현수 안내원에게 먹일 수 있을지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문다.

오늘 늦은 밤에도 어김없이 소육개장을 한 그릇 뚝딱 비운 방현수 안내원이 한마디 한다.

"이모, 이모, 통일이 되면 내가 개 한 마리 잡아 목에 턱 거치고 서울로 찾아갈게."
"에그, 징그러워! 나는 개고기 못 먹어. 그리고 나는 미국 살잖아."
"개고기가 아니라 '단고기'디. '단고기' 못 먹으면... 기게... 조선사람이 아니디 뭐. 긴데 이모는 통일이 돼도 조국에서 안 살고 미국서 살낀가?"

북한도 결혼철은 역시 꽃피는 5월

한 식당안에 있는 결혼식장에서 직원들이 예식 준비에 여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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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코스를 다니다 보니 여기저기서 결혼사진을 찍고 있다. 순간 깜짝 놀랐다. 지난해 12월 김정일 국방위원장 서거 이후 한국의 몇몇 언론매체가 '북한에서는 앞으로 3년간 결혼식이라든가 일체의 연회를 하기 어려워질 것'이라는 내용의 뉴스가 보도됐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우리가 가는 곳곳마다 결혼식을 막 끝낸 듯한 차림의 신혼부부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그럼 한국에서 보도된 뉴스들은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반공 교육의 일환으로 누군가가 만들어 내는 것일까. 그렇다면, '머리에 뿔나고 얼굴이 새빨간 북한 사람' 수준의 반공 교육이 아직도 살아 있는 듯한 모양새다.

우리가 찾은 많은 식당들이 결혼식을 열 수 있는 홀을 갖추고 있었다. 결혼철이라서 그런지 결혼식 준비를 위해 홀을 치장하느라 바삐 움직이고 있다. 내가 설경이에게 "결혼식장은 정했어?"라고 물으니 아직 정하지 못했단다. 아무래도 피로연을 함께할 수 있는 곳이 편리하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친정집과 시집에서 논의하고 있단다.

만수대를 찿은 신혼 부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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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열사능'을 찿은 신혼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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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여행 일정에는 '혁명열사능'이 포함돼 있다. 우리나라로 치면 국립묘지와 같은 이곳. 여기에도 참배를 하러 온 신혼부부들이 눈에 많이 보인다. 설경이의 이야기에 따르면 신혼부부들이 결혼식 날 예식을 마치고 가장 많이 찾는 곳 중 하나가 바로 '혁명열사능'이라고 한다.

"오마니, 우리 나라에서는 결혼을 하거나 집안에 좋은 경사가 생기면 우선 먼저 주석님과 나라를 있게 해 주신 애국열사들을 참배하고 경의를 표합네다."

설경이가 또박또박 목소리에 힘을 주며 다른 일행들에게도 영어로 설명한다. 미국 친구들이나 우리 부부나 결혼식이 끝난 후 국립묘지 같은 곳을 참배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해보지 못한 일이 아니었던가. 오늘 만난 모든 신혼부부들이 앞으로 마주할 세상은 화해와 평화, 그리고 용서와 사랑이 가득한 세상이길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한다.

설경이의 설명에 따르면, 북한에서는 꽃이 만개하는 5월에 결혼식을 제일 많이 한단다. 자기도 5월에 결혼식을 올리고 싶었는데, 서로 바빠서 10월에 하기로 했다고. 이 이야기를 듣자 마음이 앞서는 남편이 한마디 거든다.

"그때 꼭 올게, 설경아. 여보, 우리집 새로 산 밥통 이름이 뭐였지? 그 밥통이 제일 좋다면서? '쿡쿠 밥솥'이라고 했나? 그 밥솥 들고 올께, 설경아."

정말 마음이 먼저 앞서서 그런지 이것저것 따져보지도 않고 마구 말한다. 그러나 우리의 진심을 이미 알아차린 정 많고, 마음 약한 설경이는 눈물부터 글썽인다.

뚫어진 양말 보여주며 결혼을 허락받다니

왼쪽에서 두 번째와 네 번째가 자하철에서 외국관광객들에게 안내 책자를 나눠주던 '조선국제려행사' 직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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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행선지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타고 내리는데, 두 명의 아가씨가 우리 일행에게 다가온다. '조선국제려행사'에서 나온 안내원들이라며 설경이가 반긴다. 편의를 위해 지역마다 직원을 파견해 평양을 알리기 위한 안내 책자를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나눠주고 있단다. 말하자면 '관광 안내소'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 이 또한 전에는 보지 못했던 장면이다.

지난 4월 공연 여행 당시 한 안내원이 "여기 식당들도 이제는 경쟁을 한다"고 하더니... 분명 여러 면에서 변화가 생겼음이 틀림없다고 생각됐다. 이곳 사람들의 걸음걸이와 행동 또한 빠르게 느껴진다.

평양의 기념비적인 건물 여기저기를 구경하고 대동강변을 산책하니 마음이 여유로워진다. 지하철이나 평양 시내서 본 사람들과는 달리 이곳, 강변에 나와 있는 사람들은 여유롭게 이른 저녁 시간을 즐기고 있다.

시원한 대동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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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데이트하는 젊은 남녀가 지나가니 방현수 안내원이 "좋을 때"라며 부러운 눈빛을 던진다. 방현수 안내원은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고, 첫 만남 때의 떨림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며 나긋한 목소리로 말한다. 휴대전화에 저장해 놓은 부인과 딸아이의 또 다른 동영상을 보여준다. 아빠를 꼭 닮은 여덟 살 딸아이의 춤 실력, 그리고 예쁜 딸아이 모습을 바라보면서 미소 짓고 있는 방현수 안내원 부인의 모습은 순박한 사랑이 넘쳐 흘러 보인다. 남편이 방현수 안내원의 동영상을 보더니...

"이런 탈피(마른명태) 같은 남자가 뭐가 좋다고 저렇게 예쁜 색시가 결혼을 했을까?"
"그런 이모부는 어떻게 이런 고운 이모를 만나셨습네까? 공항에서 처음 뵙는데 딸하고 나오시는 줄 알았디 뭐."

남편도 인정하는지 웃고 만다. 방현수 안내원의 통쾌한 '한판승'이다.

방현수 안내원은 지금의 아내와 '인민대학습당' 앞 분수대에서 처음 '상봉'했다고 한다. 당시 모르는 척하며 분수대를 거닐었던 사람들이 지금의 장인과 장모, 그리고 처형들이라고 한다. 방현수 안내원이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는 듯한 표정으로 말한다.

"기때는 기걸 까맣게 모르고 있었디. 손이라도 잡았드라면 다 끝날 뻔 했디 뭐."

방현수 안내원은 첫눈에 반해 양말이 떨어지도록 그녀를 따라 다녔단다. 장인어른을 뵈러 가던 날, 방현수 안내원은 떨어진 양말을 신고 가서 '따님 쫓아다니느라 양말이 이렇게 깨졌습네다'고 말했더니 장인어른은 그 자리에서 결혼을 승낙했다고 한다. 비실비실해 보이는 외양과는 달리 남자다운 기개가 있다고 칭찬해주니 "사내가 되어나서 나라에서 주는 배급밥 먹으면서리 그것도 못하면 되겠습네까"라며 제법 의기양양해한다.

사리원을 앞두고... <고향의 봄>에 눈물이 난다

대동강에서 뱃놀이를 하는 사람들, 낚시하는 사람들을 한참 동안 구경하고 나니 내 몸에 쌓여 있던 피로도 스르르 풀리며 식욕이 생긴다. 저녁 식사 메뉴가 뭐냐고 물으니 설경이는 "평양서 제일 유명한 숯불 꼬치구이집에 가는데, 맛이 일품"이란다. 입맛이 핑 돈다.

우리가 닿은 곳은 숯불 꼬치구이집, 설경이가 자신 있게 소개할만 했다. 처음 먹어보는, 전혀 먹지 못할 것만 같은 양고기 구이를 맛있게 먹었으니 말이다.

내일은 사리원을 거쳐, 개성과 판문점을 향해 먼 길을 떠날 계획이니 일찍 쉬어야 할 듯하다. 그런데, '사리원'이라는 소리를 들으니 귀가 번쩍 뜨였다. 우리가 이곳에 오기 전에 전화를 줬던 할아버님이 떠오른다. "죽기 전에 한 번만이라도 땅을 밟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하시며 "혹시 가게 되면 사진이라도 부탁한다"고 말씀하셨던 그 할아버지가 말씀하신 황해도 '사리원'에 간다니!

그 할아버님께서 고향 생각이 나면 불러 보지만 목이 메어 끝까지 불러본 적이 없다던 노래 <고향의 봄>을 조용히 불러본다. 나도 끝까지 부를 수 있을는지.. 잠을 청하며 옆에 누워 묵묵히 노래를 듣고 있는 남편의 눈에 눈물이 맺힌다.

잠이 오지 않는다. 마치 내 자신이 '죽어도 못 가볼 것만 같았던 고향'에 가게 되는 것 같은 기분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때문이다.

 

비통한 판문점... 느닷없이 북한 군인이 달려왔다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 23] 사리원, 개성 그리고 판문점

12.09.12 09:44l최종 업데이트 12.10.24 22:17l
저는 오래 전부터 음악을 공부하고,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오로지 음악에 관한 지식만을 가르쳐왔습니다. 지금은 평범한 주부이자 아이들의 엄마로 살고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과 함께 북한에 갔습니다. 호기심으로 떠난 여행이었지만, 저는 처음으로 우리 민족의 비극적 운명과 민족애를 느꼈습니다. 동시에 통일에 대한 염원이 생겼습니다. 2011년 10월 이후 지난 4월에 열흘 동안, 그리고 5월에는 3주 동안 나진·선봉을 비롯한 북한 전역을 여행했습니다. - 기자말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판문점에 또 가야 한다. 단체관광이니 어쩔 도리가 없다. 그런데 이번에는 지난번과는 달랐다. 이번 여행에서 꼭 들려야 할 곳, 황해도 사리원을 거쳐 간다. 사진을 부탁한 할아버님 생각에 사리원을 향하는 내 마음이 착잡하기 그지없다. 그분을 대신해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사진기에 담아야 하니 어깨가 무겁다. 말이 안 된다. 자신이 태어난 고향 땅에 찾아가 일가친척도 만나 볼 수 없다니...

북한사람, 모자 하나 바꿔 썼을 뿐인데...

평양 교외의 대성산성 일부인 소문봉 성벽에서 설경이와 함께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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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과 판문점으로 가기 전, 평양 교외의 대성산성에서 소풍을 겸해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산성의 일부인 소문봉 성벽에 오르니 멀리 평양이 한눈에 들어 온다. '아리랑 공연'을 하는 모란봉 경기장의 윤곽이 뚜렷하게 보인다. 경기장의 규모가 엄청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낀다.

산성은 고구려 때 축조된 것이라고 한다. 설경이가 옆에서 산성의 건축사적 의의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지만, 나 같은 문외한의 눈에는 그저 돌담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보다는, 1600~1700년 전 우리 조상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는 것에 감동, 또 감동이다. 교실에서나 듣던 대제국 고구려. 나도 그들의 후예라는 것을 실감하며 성벽을 어루만져 본다.

남편의 가방을 메고 남편의 골프모자를 쓰고 있는 방현수 안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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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방현수 안내원은 남편의 가방이 무거워 보였는지 꼭 자기가 메고 다닌다. 남편이 방현수 안내원에게 양복을 벗고 넥타이를 풀어 편하게 다니라고 하며 골프 모자까지 씌우니 전혀 다른 이미지다. 정장을 하고 왼쪽 가슴에 김일성 배지를 단 방현수 안내원을 공항에서 처음 보았을 때, 그는 전형적인 북한의 남성이었다. 그런데 여행 가방을 메고 골프 모자를 쓴 방현수 안내원의 모습은 남한의 평범한 남성과 다르지 않았다. 모자와 가방 같은 것들이 사람을 이렇게 달리 보이게 하다니... 갑자기 가슴이 뭉클해지며 남북이 하나 됨을 느낀다.

설경이가 말해준 '로동'의 보람

모내기가 한창인 5월의 북한 농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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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내기가 한창이다. 얼굴이 탈까봐 여인들은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거나, 챙이 긴 모자를 쓰고 일한다. 이따금 농기계도 보이지만, 대부분의 작업은 손으로 이뤄진다.

지금 북한에서는 만성적인 식량 부족 문제 다음으로 시급한 게 에너지 문제인 듯하다. 전기가 모자라 정전이 자주 되는 것을 보면 이를 쉽게 알 수 있다. 문제는 전기 에너지에만 국한돼 있는 게 아니다. 북한은 남한과 마찬가지로 석유를 전적으로 외국에서 수입한다. 그런데 외환고는 부족하다. 그러니 기계는 있으나마나. 농기계도 이 모양인데, 공장은 제대로 가동될 수 있을까.

설경이도 우리 단체의 관광 일정이 끝나면 농촌에 '로력 봉사'를 다녀올 예정이란다. 북한에서는 직업에 관계없이 누구나 일정 기간 '로력 봉사'를 해야 한다고 한다. 농번기에는 주로 농사일을 거들고, 그렇지 않을 때는 건설현장에 가기도. 피부가 이렇게 고운 아이가 농사일을 할 수 있는지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설경아, 너 농사일 할 줄 알아?"
"그러문요, 오마니. 모내기·김매기·추수·탈곡... 다 합네다."
"힘들지 않아?"
"힘들지요, 오마니. 그렇지만 쌀밥 먹으면서 모내기 한 번 안 해서리 되겠습네까. 꾸부리고 모를 심다 허리를 펴면 땀이 주르르 흐르는데, 심어놓은 모를 바라보면 정말 보람이 있습네다. 그러다 홍수라도 나서 다 자란 벼가 쓸려나가기라도 하면... 그 쓰라린 심정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겁네다. 오마니는 농사일 해 보신 적 있으십네까?"

남편이 옆에서 대신 답한다.

"그럼 있지. 집에서 화초에 물도 주고..."

남편의 빈정대는 농담, 설경이는 재미있는지 배꼽을 잡고 웃는다.

북한 대학생들이 여름에 하는 '로력봉사'

모내기가 한창인 5월의 북한 농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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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니. 미국의 오마니집 사진 보니까 마당이 아주 크던데, 텃밭이라도 가꿔 보시라요. 정말 로동의 보람을 느끼실 겁네다. 단고기(개고기) 먹는 것도 대학교 때 '로력봉사' 나갔다가 배웠습네다."
"어머, 설경아, 너도 개고기 먹어?"

"저도 우리 아파트에서 개를 키우더라니 단고기를 못 먹었단 말입네다. 농촌으로 봉사 나갔다 처음 먹었는데 정말 맛있습네다. 우리 복실이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복실이가 누구야?"
"우리집 강아지 이름입네다. 암놈인데 이름이 '복실이'입네다."
"얘, 설경아... 농사일하고 싶어도 개고기 먹게 될까봐 못 하겠다."
"'개고기'가 아니라 '단고기'라니까요. 건강에도 아주 좋고... 오마니, 단고기 잡수시면 목소리도 더 고와져 노래도 더 잘 될 거야요."

노래를 더 잘 부를 수 있게 된다는 말에 귀가 솔깃해진다.

농촌으로 '로력봉사'를 나갔다가 결혼 날짜도 받아 놓은 아이 피부가 상할까 걱정이 돼 가방 속에 가지고 다니던 'BB크림'을 꺼내줬다.

"이거 꼭 바르고 다녀. 가만 보니까 안내원이라는 직업이 일 년 내내 바깥에서 지내야 하는데 피부가 많이 상하기 쉽겠더라고... 이건... 일명 '피부의 만병통치약'이라 할 수 있는 것인데, 자외선으로부터 피부도 보호해주고, 영양도 줘서 피부를 더 곱게 만들어 준단다. 게다가 얼굴 빛깔도 화사하게 해주고... 화장도 잘 먹게 해준단다. 아주 좋아."

"오마니, 저도 다 알고 있습네다. 기억 못 하시는 모양인데 지난해 10월에도 주시고 가셔서 제가 얼마나 잘 발랐드랬는지 모릅네다. 여기서도 BB크림이 여성들 사이에 인기가 아주 많습네다."

여성들의 미적 관심은 남한이든, 북한이든, 세계 어디에서든 똑같다. 타고난 특질인가 보다.

아, 드디어 사리원에 닿았다

북한 전역에 있는 구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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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구호의 나라이다. 들판에도 거리에도 건물에도 수많은 구호들이 붙어 있다. 그 중에는 '미제국주의자들이 우리를 건드리면...'이라는 식의 반미 구호들도 있다. 한 친구가 때마침 "저 구호의 내용이 뭐야?"라고 물어본다. 난처한 마음으로 그 내용을 설명했더니, 의외로 '재미있고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인다. 구호들이 점점 눈에 많이 띄는 걸 보니 시내로 들어가고 있음이 분명하다.

아! 사리원 시가지가 눈에 들어온다. 가슴이 쿵쿵거리며 고향이 사리원이라고 하셨던 그 할아버님이 떠오른다. 그분의 심정을 떠올리니 내 마음도 울컥. 얼마나 그리우실까. 마음속에 가득, 이곳의 기운과 풍경 그리고 사람들의 온정을 담아 할아버님께 빠짐없이 전해 드려야겠다. 설레던 가슴이 이내 뜨거워진다.

사리원의 도로는 북한의 다른 지방 도시에 비해 상태가 매우 좋았다. 설경이가 옆에서 설명을 잇는다.

"사리원 도로는 남조선에서 성공한 한 기업인께서 새로 놔주신 겁네다. 그분의 고향이 사리원인데, 사리원을 위해서 많은 일을 하셨습네다. 이곳 사리원 사람들은 다들 그분을 존경하고 있습네다. 인품도 참 좋으신 분이라고 들었습네다."

이 북한 땅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나 같은 사람도 북한 주민들이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면 무엇이든 하고 싶은데... 이곳이 고향인 그분은 무엇인들 안 하고 싶었으랴.

사리원의 신혼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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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를 가로 질러 가니 '사리원 민속거리'가 나온다. 여기에도 갓 결혼한 신랑신부들이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신랑! 너무 좋아하는거 티 나누만 기래. 벌어진 입좀 다물라우. 야! 결혼 못한 총각, 애간장 녹게 하누만."

신랑 친구들의 짓궂은 농담에 신부가 얼굴을 붉힌다. 다른 한쪽에서는 중학생들로 보이는 아이들이 그림을 그리고 있다. 혹시나 그 할아버님의 친척이나 친구분들의 자손일 수도 있겠다 싶어 카메라에 담아뒀다.

강서고분 벽화 모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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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관광객들은 우리 일행뿐이다. 아담하게 꾸며놓은 공원은 겉보기에 어설프고 빈약했지만, 속을 보면 충실했다. 고인돌 무덤부터 광개토대왕릉비, 강서고분과 경주에 있는 첨성대까지 있었다. 게다가 공원 내 인공 호수에는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 모형물도 있다. 공원 안을 이리저리 안내하며 하나하나 빠짐없이 설명하는 공원 해설원 아가씨가 살짝 안쓰러워 보이기도.

공원을 나서니 사리원 주민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나무 아래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우리를 보더니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눈빛으로 인사한다.

학교가 파했는지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이 재잘거리며 어디론가 향하고, 개구쟁이 남학생들은 친구와 장난을 치면서 뛰어다닌다. 또 몇몇 학생들은 깃발을 들고, 북을 치며 거리를 행진한다. 아이들은 이방인인 우리를 보고 잠깐 주춤하나 싶더니 이내 "헬로, 헬로"라면서 반가움을 전한다. 어디를 가나 볼 수 있는 사랑스러운 아이들의 모습이다. 그 속에서 나는 희망찬 미래를 그려본다.

고목나무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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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안에 있는 조선시대 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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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치 있는 고목나무 거리를 앞에 두고 있다. 나무들이 수백 년은 돼 보이니, 그 할아버님이 사리원에 계셨을 때도 틀림없이 이 자리에 이 나무들이 있었을 것이다. 얼른 사진을 찍는다. 어쩌면 이 고목나무 거리와, 공원 안에 있는 조선시대 누각만 봐도 '아, 내 고향 사리원'이라며 알아보실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사리원의 내음, 거리의 풍경들, 그리고 사람들... 어느 것 하나도 무심코 스쳐 지나감 없이 온몸과 마음에 담았다.

그래도 걱정이 살포시 고개를 든다. 과연 할아버님께서 이 사진들만 보시고 이곳이 사리원이라는 것을 느끼실 수 있을까. 고목나무 거리와 누각 사진이 있지만, 역시 많이 바뀐 것은 사실이다. 사리원을 떠나는 길, 차 안에서 길거리 풍경을 마구 찍어댔다. 사리원이라는 글자가 들어가 있는 것이라면 모조리 말이다. 사리원 약국, 사리원시 직매점, 사리원 영화관...

'어서 미국에 돌아가 이 사진들을 보여 드려야 하는데'라는 마음이 앞선다. 돌아가려면 아직 2주일 정도 남았는데 말이다.

할머니의 향기가 나는 곳, 개성

개성 '민속려관'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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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원을 떠나 한 시간가량을 더 달리니 개성이 나온다. 전통 가옥의 고풍스러운 내음을 은은히 풍기는 '민속려관'에 짐을 풀었다. '민속려관'은 오래 묵은 목재로 지은 기와집들로 이뤄져 있는데, 못을 하나도 안 쓰고 지었다고 한다.

저녁식사는 '민속려관' 안에 있는 식당에서 한단다. 밤에는 전기가 잘 나갈 수 있으니 손전등을 가져오라고 귀띔한다. 식당에 들어가니 넓은 방에 아기자기한 개성식 밥상이 보기 좋게 차려져 있다. 다행히 식사가 다 끝날 때 즈음 전기가 나갔다. 다리를 쭉 펴고 몸을 벽에 기대고 창밖을 보니, 달빛이 은은하게 방안에 스민다. 기분 좋은 밤이다.

구수하면서도 퀴퀴한, 싱그러우면서도 텁텁한...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향기가 방안에 들어온다. 그래, 친할머니나 외할머니가 사시던 시골집에 가면 맡을 수 있었던 그 향기. 고향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향기가 쌀쌀한 아침 공기에 실려와 내 눈을 뜨게 했다. 그 향기에 취해 방문을 열고 나가 툇마루에 앉아 하늘을 바라본다. 하늘은 세월을 꿀꺽 삼켜버린 듯한 앞마당 단풍나무와 하나가 돼 서로에게 아무런 바람이나 욕심이 없어 보인다. 내 마음도 그들과 하나가 돼 세상을 어우르듯 너그러워진다.

개성시내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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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에서 잠을 자던 설경이가 무거운 눈을 억지로 뜨면서 나온다. 미국에 있는 우리 아이들처럼 한창 잠이 많을 나이인데 하루도 쉴 틈 없이 강행군을 해야 한다는 게 참 안쓰럽다. 게다가 외국인 관광객들을 책임지고 다니려니 고충도 많을 것.

"설경아. 조금 더 자지 왜 나왔어. 문소리에 깬 거야?"
"아닙네다. 무슨 말씀을... 오래된 집이라 방이 춥고 불편하셨지요? 다른 분들께서는 무탈하신지 한 번 돌아보고 오겠습네다."

설경이는 축 처진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다른 일행들이 머물고 있는 가옥을 향해 걸어간다. 부지런하고, 책임감이 강한데다 속까지 깊은 설경이. 어찌도 예쁘고 사랑스러운지!

북녘땅에 딸 하나는 확실히 잘 뒀다는 생각에 안쓰러운 마음과 함께 든든한 마음이 생긴다.

판문점에 걸려 있는 민족의 미래

개성시내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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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점을 참관한 후 남포 근처에 있는 온천으로 가 하루를 머무를 예정이라고 한다.

'다시는 오고 싶지 않았던' 판문점으로 향한다. 지난번 판문점에 들렀다가 가슴 저리게 느꼈던 민족의 비극이 다시금 떠오른다.

일전에 우리의 경호를 맡았던 '국철'이가 참관을 마치고 기념품 가게 안에 있는 우리를 알아보고는 달려와 반갑게 손을 잡고 흔든다. 우리는 단번에 그 군인 아저씨가 국철인지 알았지만, 국철이가 우리를 알아보리라곤, 또 여기서 그를 다시 만날 것을 전혀 예상치 못했다.

"오마니, 아버지, 안녕하셨습네까? 언제 또 오셨습네까? 아, 이렇게 반가울 수가..."
"아니, 어떻게 우리를 알아봤지?"
"재미동포 아니십네까. 지난해 가시고 난 뒤 한시도 잊은 적이 없습네다. 언제 또 오시나 하고..."

판문점 회의실 안에서. 이 회의실의 절반은 남한인데, 방현수 안내원과 나는 실질적으로 남한에 있는 것과 다름없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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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객들이 끊이지 않고 오는데, 우리를 기억하고 있다니 고마운 일이다. 지난번에도 우리가 떠날 때 "오마니, 아버지..."라며 다정하게 손을 잡으며 인사를 나누더니 우리를 잊지 않고 친근하게 맞아준다. 우리에게 '통일이 되는 그날까지 건강하시라'고 인사한다. 오가는 정 때문에 차마 헤어지가가 힘들다.

"국철이도 잘 있어. 군에서 몸조심하고. 고향의 부모님들도 안녕하시지? 보고 싶어 하실 텐데..."
"잘 계십네다. 걱정 없습네다."
"우리 나가서 사진이나 같이 찍자."
"네, 오마니."

오른쪽이 다시 만난 국철이, 그리고 왼쪽은 이번에 우리를 안내한 군관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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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난 '판문점의 국철'이도, 새롭게 만나서 우리 일행을 경호해줬던 인상 좋은 군인 아저씨도, 그저 함께 고통과 슬픔을 나누며 한마음이 된다. 입고 있는 옷은 달라도, 그들은 우리가 함께 보듬고 걸어갈 내 민족이요, 내 사랑하는 아들들이었다.

적국의 나라사람, '철천지 원쑤, 미제의 나라 사람들'도 손님이 돼 이 북녘땅을 드나드는데, 왜 남쪽의 형제들은 눈빛조차 보낼 수 없고, 그리움 담긴 한숨조차 크게 내쉴 수 없는 관계가 돼버렸단 말인가. 형제를 그리워함이 죄가 돼 그리워도, 보고 싶어도, 입 밖으로 표현할 수 없는 이 시국은 대체 어디를 향해서, 누구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란 말인가. 용서하는 마음으로 서로 품을 때 사랑의 불씨가 훨훨 타올라 단단한 강철판에 새겨진 어떤 미움과 증오의 응어리진 쇳덩이를 녹여버릴 텐데 말이다.

판문점을 떠날 때의 마음은 항상 착잡하다. 남편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설경이와 방현수, 이들 또한 민족 비극의 주인공인지라 그 마음에 통감해 눈시울을 적시고 있다.

저 판문점이 열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북한사람들은 조개를 이렇게도 먹는다

휘발유를 끼얹어 익히는 조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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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통함을 안고 묵묵히 달리던 버스가 '공민왕릉' 앞에 섰다. 침묵 속에 내린 일행은 설경이와 방현수 안내원의 안내 아래 왕릉을 향해 계단을 오른다.

우리 부부는 지난 10월 여행 당시 이미 이곳을 방문한 적이 있어 신선한 경관에 착잡한 마음을 날려 보내기 위해 주위를 거닐었다. 한 곳에서 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뭔가 태우고 있다. 멀리서 보니, 마치 숯덩이에 휘발유를 뿌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까이 가서 보니 조개를 휘발유 불에 굽고 있다. 바닥에 조개를 펼쳐 놓고 그 위에 휘발유를 뿌려 불을 붙이며 조개를 익히고 있었던 것. 우리가 신기해하며 주위를 기웃거리자 조개를 굽고 있던 아저씨가 "조개가 다 구워져 가니 드시고 가시라요, 남포에서 가져온 조개인데 그 맛이 기가 막힙네다"란다. 그 아저씨의 설명에 따르면 그들은 평양서 온 외무성 직원들인데 몽골 외교관들을 데리고 공민왕릉을 참배하러 왔단다. 아마 몽골 사람인 '노국공주'가 함께 묻혀 있으니 이곳에 닿은 듯하다.

이내 조개가 맛있게 구워졌다며 먹기를 권한다. 휘발유 냄새가 역겨워 먹기가 꺼려졌으나 막상 먹어보니 크고 싱싱한 조개 맛에 휘발유 냄새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휘발유가 아닌 숯불에 구웠더라면 훨씬 더 맛있었을 텐데... 아쉽기만 하다.

차안에서 바라 본 남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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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는 남포 시가지를 지나 남포항으로 달리고 있다. 창밖으로 보이는 남포시는 초라하고 쓸쓸해 보인다. 살림집들을 끼고 있는 산마루들이 엉성하게 누런 살을 드러내고 있어서 더 그렇게 보인다.

푸른 바다가 넘실대고 있는 남포항이 눈에 들어오니 남포시가 훨씬 생동감 있는 도시로 보인다. 아마 바다가 품고 있는 싱그러운 색채가 가미돼 그런 듯. 남포댐을 둘러본 우리 일행의 다음 목적지는 남포시 근처에 있는 '온천장'. 그런데 어디를 봐도 온천이 있을 것 같지 않다. 남편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설경이한테 말한다.

"설경아. 오늘은 '온천장'에서 쉬고 내일 평양으로 간다고 했지? 오는 길에 어디쯤 온천장이 있을까 싶어 유심히 봤는데... 아무래도 이 근처에는 제대로 된 온천장이 있을 것 같지가 않아. 그냥 평양으로 가는 게 어떻겠니?"

남편이 왜 이런 말을 안 하나 싶었다. 사실은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농기구도 없이 힘겹게 일하고 있는 농부들의 모습, 그 뒤로 벌거벗은 산들, 그리고 황량해 보이는 아파트들과 살림집들... 이런 배경을 앞에 두고 포근하게 쉴만한 '온천장'이 있을 거라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남편의 성정을 잘 알고 있는 설경이는 예상하고 있었다는 표정으로 태연하게 답한다.

"아버지, 조금만 기다려 보세요. 잘 왔다고 생각하실 겁네다. 절 한번 믿어 보시라요."

다시 돌아온 평양, 이젠 내 집 같다

'온천장'에서 설경이와 함께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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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커덩거리며 20여 분을 달렸을까. 갑자기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푸른 숲길을 지나 10여 분께 달리니 멋진 건물이 보인다. 나무와 꽃으로 둘러싸인 리조트 타운하우스가 모습을 드러낸다. 여기가 오늘 우리가 묵고 갈 '온천장'이란다. 이런 별천지가 갑자기 어떻게 나타났는지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건물과 실내가구, 그리고 주위 환경들을 정성껏 치장을 해놓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지속적인 관리는 잘 이뤄지지 않는 듯. 이 큰 '온천장'에 손님이라고는 우리 일행과 중국서 온 관광객 한 팀뿐이니 그럴 만도 하다.

'온천장'에서 하루를 보내고 우리는 평양으로 향했다. 이제는 내 집처럼 익숙해진 평양, 시가지가 보이니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제는 내집처럼 느껴지는 평양의 거리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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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주일이다. 봉수교회로 예배드리러 가는 날. 내게는 이번 여행에서 중요한 일정 중 하나다. 지난해 10월 여행 당시, 늦게 도착해 예배를 드리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설경이에게 신신당부해뒀다.

'북한도 사랑하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꼭 들어주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내일을 기다린다.

 

 

"북한 당국에 감사" 이 유럽인들 왜 이러는 걸까요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 24] 평양봉수교회, 푸에블로호 그리고 백두산

12.09.14 21:24l최종 업데이트 12.09.17 09:47l
저는 오래 전부터 음악을 공부하고,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오로지 음악에 관한 지식만을 가르쳐왔습니다. 지금은 평범한 주부이자 아이들의 엄마로 살고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과 함께 북한에 갔습니다. 호기심으로 떠난 여행이었지만, 저는 처음으로 우리 민족의 비극적 운명과 민족애를 느꼈습니다. 동시에 통일에 대한 염원이 생겼습니다. 2011년 10월 이후 지난 4월에 열흘 동안, 그리고 5월에는 3주 동안 나진·선봉을 비롯한 북한 전역을 여행했습니다. - 기자말

평양에서의 찬양예배, 감동이 밀려왔다

오늘은 주일날이다.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길 수 있으므로 예정 출발시간보다 일찍 서둘러서 '봉수교회'로 향했다. 서두른 보람이 있어 예배시간 20여 분 전에 도착했다. 이미 와서 자리에 앉아 성경을 읽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성가대원들이 눈에 띈다.

예배를 기다리는 신도들이 성경을 읽고 있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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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경이가 '미국에서 방문하신 분들'이라며 목사님에게 우리를 소개해주었다. 목사님은 나와 남편을 보시더니 금방 우리를 기억해 내셨다.

"지난 가을이었던가, 그때 오셨던 두 분 아니십네까? 정말 반갑습네다. 그리고 부인께서는 '리화여대'에서 성악을 전공했다고 하셨디요?"
"네, 맞습니다. 어떻게 그런 것까지도 기억하고 계세요?"


"지난번에는 늦게 와서 예배도 못 드리고 기냥 기도만 하고 간 것 다 생각납네다. 남편께서 '이 교회 가짜 교회 아니냐'고 물은 것도 기억 나고…. 북남교류가 활발했을 시절에 '리화여대' 출신의 성악가를 비롯해서 몇분의 성악가들이 방문해 은혜스런 찬양을 불렀댔디요. 지난 번에 부인께서 리화여대에서 성악을 전공하셨다고 해서 예전 생각이 났습네다."

목사님은 그때 온 성악가들의 이름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계셨다. 그들 성악가 중에는, 내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 솔리스트로 활동한 서울 강남 '소망교회' 성가대에서 함께 오랫동안 교회생활을 한 언니도 있다. 그 언니는 지금 한국에서 유명한 성악가이자 교수다. 그 뿐만 아니라 그 시절, 같은 성가대에서 봉사하던 사람 중에 지금의 우리나라 최고 높으신 분의 사모님도 계셨다.

'아! 순수하면서도 열정적으로 우리 모두 하나가 되어 찬양을 드리던 그런 시절이 있었는데…'라는 기억이 새록새록 살아나니 세월 속, 누렇게 빛 바랜 지금의 내 영혼이 부끄러워 괜시리 움츠려 든다.

목사님은 내게 '예배 중 특별찬양을 불러주면 고맙겠다'고 청했고 나는 흔쾌히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목사님 옆에 서 있던 한 여인이 본인은 교회 전도사라면서 반갑게 우리에게 인사를 한 뒤 우리 일행을 앞쪽 자리로 안내해 주었다.

평양봉수교회 성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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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교회 피아노 반주는 설경이 친구의 엄마라는 분이 하고 계신다. 드디어 예배를 알리는 개회 찬송이 성가대원들의 찬양과 피아노 소리와 함께 어우러져 교회 안에 울려 퍼진다. 내 영혼의 간절한 소원도 찬양의 소리에 하나의 울림으로 흡수되어 북녘땅의 하늘 위로 널리 널리 메아리 치고 있음을 감지한다.

적어도 오늘, 나와 함께 예배를 드리는 북한의 이 동포들은 진정으로 우리 민족이 사랑으로 하나되어, 흑암 가운데 방황하는 많은 나라들을 밝게 비춰주는 등대와 같은 민족이 될 수 있도록 한마음이 되어 기도하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목사의 축도를 받고 있는 신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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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사님의 대중 기도에 이어 목사님이 설교를 하신다. 오늘이 '어머니 주일'이라며 어머니의 사랑을 하나님의 사랑에 빗대어 설교하신다. '어머니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면서도 올바른 질책과 때로는 자신의 살이 떼어지는 듯한 아픔을 감수하듯, 하나님도 한량없는 사랑을 베풀면서도 더 큰 인간이 되도록 시련과 연단을 주신다'는 그런 내용의 설교였다. 북녘 땅에서 동포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니 한없는 감동이 밀려왔다.

나의 특별찬양 순서가 되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 갑니다. 내 뜻과 정성 모두어 날마다 기도합니다."

그저 나의 간절한 기도가 찬양이 되어서 '하늘로 하늘로' 울려 퍼지기만을 바랄 뿐이다. 나보다 앞서, 이곳에서 찬양을 부르고 간 선배 언니의 모습을 떠올려 보니, 그 언니의 찬양이 한목소리 되어 나와 함께 부르고 있는 듯하다. 내 영혼이 떨린다. 신도들이 구석 구석에서 조용히 머리를 숙이고 나와 함께 찬양을 따라부르고 있다. 어떤 성도는 나즈막하게 기도를 하고 있다.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신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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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가 끝나자 신도들이 다가와 인사를 하며 반가움을 전한다. 손을 잡아 체온이 느껴지니 눈물이 난다.

평양에 오면 좋은 점이 하나 더 있다. 교회가기를 게을리 하는 남편이 평양에만 오면, 이미 정해진 일정 때문이겠지만 '군말없이' 꼬박 교회에 '졸졸' 쫓아나오니.

"조국을 무시하는 행동은 참을 수가 없다"

대동강에 전시되어 있는 미 해군 정보함 '푸에블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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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를 마친 후 미 해군 함정이었던 '푸에블로'호가 전시되어 있는 곳으로 간다고 한다. "북한 영해를 침범해 원산 앞바다에서 첩보활동을 하다 나포될 당시 배의 안팎을 그대로 보존해 놓았다"고 한다.

남편에게 물었다.
"당신은 이 사건을 아세요?"

"응. 내가 중학교 때가 아닌가 싶네. 당시에는 전쟁나는 줄 알았지. 자세한 내막은 나도 커서 알았어."

"무슨 일이었어요?"
"미국은 '공해상에서 합법적인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배를 북한이 불법나포했다'고 말하고, 북한은 그 반대로 주장했었어."

"누구 말이 맞아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어. 그냥 여기 해설원 얘기 들어봐."


푸에블로호의 여성 해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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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에블로호. 원 안은 당시 전투 상황을 말해주는 총탄 흔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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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복을 입은 여자 해설원이 그 당시에 어떻게 나포되었는지를 자세히 설명하면서 그때의 생생한 기록 필름도 보여주었다. 풀이 죽은 미국 군인들이 생포된 채 배에서 끌려나오는 장면과 미국이 국제법을 어겨 책망받는 그런 내용의 흑백 기록 필름이었다. 미국은 사과를 하고 북한은 판문점을 통해 포로들을 석방했다고 기록 영상은 말한다.

미국 친구들이 마음이 불편하고 난처한지 아무렇지도 않은듯, 이해하는 듯 하면서도 알고 보면 전혀 그렇지 않은, 그들의 방식대로 북한에 대한 가시달린 부정적인 말들을 비웃듯이 내뱉었다.

영어를 잘 알아듣는 내 옆의 설경이가 신경쓰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내 마음을 전혀 아랑곳하지도 않는 미국 친구들은 여전히 큰소리로 웃어가며 불편하고 난처한 마음을 감추는듯 드러낸다. 남편도 그들의 의식없는 행동에 어쩔 줄 몰라 한다. 자기의 막말 때문에 그 동안 내가 겪은 고초를 이제는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있겠지.

푸에블로호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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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처한 표정으로 설경이를 쳐다 보니, 의외로 설경이는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다. 바깥에 나와 나는 조용히 설경이에게 그들을 대신해 이해를 구했더니 설경이는 이렇게 말한다.

"저도 저분들의 언행에 순간 마음이 격분했지만, '저들의 입장에서는 그런 반응이 나올 수도 있갔지…' 생각하며 이내 마음을 다스렸습네다. '로마에서는 로마의 방식을 따르라'는 말도 있는데 전세계가 미국의 잘못을 비방하고 인정한 사건을, 속으로는 어떨지라도 예의상 저런 무례한 행동을 하는 것은 우리 조국을 완전히 무시한 행동으로 보였습네다. 우리 아바지, 오마니, 친구분들이시고 또 조국을 찿아온 손님들이니 어쩌겠습네까만, 저는 우리의 조국을 무시하는 행동은 참을 수가 없습네다."

우리와 함께 온 일행들은 대부분 퇴직 교수들인데 다행히 우리의 부탁을 잘 이해하고 협조를 하겠다고 한다. 그래도 오늘은 평양에서 맞는 포근한 일요일이다.

프로펠러 비행기에 몸을 싣고 백두산으로

내가 태어나서 말을 하기 시작하며 배운 노래 중 하나가 애국가이다. 아무리 불러도 '동해물과 백두산'은 마르지도 않고 닳지도 않지만 가볼 수 없는 산, 백두산. 내게 백두산은 상상의 산이었지 실제로 존재하는 산이 아니었다.

한때 우리 부부는 남의 땅을 밟고서라도 백두산을 보기 위해 중국 여행을 계획한 적이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 바라보는 그 산은 장백산이지 백두산이 아닐 것이다'라며 계획을 포기했었다.

평양 순안공항의 비행기 시간표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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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우리는 비행기로 '삼지연' 공항에 내려 백두산으로 간다. 나는 이번 여행을 떠나기 전 '백두산 가기 전날 밤은 흥분이 되어 틀림없이 잠을 못 이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의외로 나는 차분한 마음이 되어, 상상 속 백두산의 장엄함에 미리 취해 스르르 잠이 들고 있다.

'엄숙한' 자세를 취하고 일어나 로비에 내려가니, 설경이와 방조카는 오늘 점심에 먹을 도시락과 물을 버스에 실어 나르고 있다. '삼지연'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버스를 타고 곧바로 '백두산'으로 향하는데 산 정상에 다 갈 무렵 백두산 봉우리를 바라보며 점심을 먹을 예정이라고 한다.

'백두산을 바라보며 도시락을 먹는다?' 아! 마르고 닳도록, 이제서야 흥분이 되고 가슴이 두근 두근거린다.

평양 순안공항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방조카가 나보다 더 흥분해 있다. 나는 순간, '이곳 동포들에게도 백두산은 그 언제 가봐도 흥분이 되는 산인가 보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방조카가 흥분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방조카는 '비행기를 처음 타 본다.'

옆자리에 앉아 휘파람을 신나게 분다.

"휘파람 소리가 신바람나네. 백두산 가서 좋은가 보지?"
"이모, 나 지금…뭐…신나고 떨리고 하디. 비행기를 처음 타니까니."

"비행기 타는 거 재미있을 것 같아?"
"재밌지 않캈나? 하늘을 날으는데… 야, 이거야 뭐 흥분되 죽갔구만."


북한 동포들은 꾸밈이 없는 사람들이다. 우리 같으면 비행기 못 타본 게 창피해서라도 잠자코 가만이 있을 법도 한데. 흥분한 방조카가 계속 쉬지 않고 떠든다.

"또 내가 삼지연에서 군대생활을 하지 않았갔시요? 그곳에서의 추억도 많고 보고싶은 사람도 있디. 그 시절 내 상관이었던 분이 아직 그 곳에서 살고 있디. 꼭 뵙고싶은 분이디요. 자상하고 따뜻하신 분입네다. 배도 고팠고 힘도 들었던 시절이었는데 그 상관이 큰 힘이 되어 주셨디. 참, 기리구 백두산에 가면 그곳에서 자라는 '불로초'가 있는데, 만병통치약으로 아주 유명하니까니 이모도 꼭 한 봉다리 사가디고 오시라요. 나도 집사람이 사가디고 오라해서리 꼭 사야해요. 안 기러면 집사람 달래느라 또 양말 꿰지지 뭐."

"꼭 사가. 그래봐야 방조카 해 줄라고 그러는 거지."

혼자 비행기를 타고 백두산에 가는 것이 마음에 걸려서인지 부인한테 전화를 한다.

"나 지금 공항으로 가고 있디. 알았어, 알았어, 안 잊어먹갔서."

목소리가 들떠서 날아갈 지경이다. 그 모습이 영락없는 어린아이 같다.

세계에서 단 두 대만 남아있는 희귀 비행기

세계에 단 두 대밖에 없다는 옛 소련산 프로펠러 비행기. 비행 가능한 것은 이 비행기 한 대 뿐인데 우리는 이 비행기를 타고 백두산으로 향했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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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하니 오십여 명 정도의 한 그룹이 우리보다 먼저 와서 비행기 탈 수속을 하고 있다. '조선국제려행사'를 통해 온 이 단체는 '항공 애호가 동호회' 회원들인데 유럽에서 왔다고 했다. 우리가 백두산에 타고 갈 비행기는 옛 소련에서 생산한 프로펠러 비행기다. 세계에 단 두 대만 남아있는 희귀종 비행기라고 한다. 한대는 이곳 북한에 있고, 다른 한대는 소말리아에 있는데, 소말리아에 있는 것은 관리 불량으로 폐기처리 일보직전이라 날지를 못한단다. 그러니 북한의 이 오래된 프로펠러 비행기가 유일하게 타 볼 수 있는 귀중한 비행기라고 한다.

'항공 애호가 동호회' 사람들이 자신들은 '행운아들'이라며 오늘의 감격스러운 순간을 잊지 않기 위함인지 연신, 쉬지 않고 비행기를 향해 사진을 찍어댄다. 이들은 오로지 이 비행기를 만져보고, 또 타보기 위해 여러 유럽나라에서 이곳에 왔다고 말했다.

우리 일행은 저 오래된 프로펠러 비행기에 한 시간 동안 목숨을 맡길 생각에 바짝 긴장해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있는데, 저들은 비행기를 보고는 "아름답다. 사랑스럽다. 멋지다…"라며 영어, 불어, 독일어로 할 수 있는 감탄사란 감탄사는 모조리 입밖으로 낸다. 이들의 말이 가히 교향곡 수준이다. 그리고 이 비행기를 탈 수 있게 잘 관리해 준 북한 당국에 고맙다는 말과 함께 타 볼 수 있게 돼 영광이라고까지 한다. 저들의 감격적인 비행기 상봉식을 우리는 넋을 놓고 신기하게 구경하고 있었다. 사물을 어떤 마음과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이렇게 다른 반응을 보이다니… 사소한 상황 속에서 삶의 지혜를 하나 터득했다.


비행기를 처음탄다는 방현수 안내원이 앉아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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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현수 조카는 내 옆에 앉아서 자신의 휴대폰에 달려있는 카메라로 비행기 좌석에 앉아 있는 자신의 모습을 이런 저런 포즈를 취해 가며 찍고 있다. 소위 우리 아이들이 말하는 '셀카 촬영'을 하는 것이다. "나이에 안 맞게 뭘 하고 있는거야?" 했더니, 자기 부인한테 보내주어야 한다며 자신도 조금은 겸연쩍은지 키득 키득 웃으면서 사진을 찍는다. 사진을 다 찍었는지 조그마한 소리로 부인에게 전화를 건다.

"나, 지금 비행기 안이야. 사진도 몇 장 찍었디 뭐. 다녀오갔시요."

애교스럽게 존댓말을 하며 전화를 끊는다. 금실 좋은 부부가 살아가는 흐뭇한 모습이다.

설경이는 몹씨 피곤한 모양이다. 비행기 안에서 단잠을 잔다. 얼마나 피곤할까. 아홉 명, 그것도 머나 먼 미국 땅에서 온 이 까다로운 사람들의 호기심과 기대감을 온통 여린 어깨에 울러 메고서… 최선을 다하여 조국의 좋은 모습과 이미지를 심어주려 얼마나 애를 써야하고, 또 신경이 쓰일까. 설경이의 쪼그리고 잠자는 모습 속에서 이 딸아이의 깊은 마음 속을 모조리 읽을 수가 있겠다. 자는 모습이 안쓰럽다.

방현수 조카는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려 이륙을 시작하자 의자의 팔걸이를 손으로 꼭 쥐고 아무것도 안 보이는 희미한 안개빛 바깥세상을 집중해서 노려보고 있다. 무슨 생각을 저토록 골똘히 하고 있을까. 머릿속, 세상을 그려보고 있겠지. 어쩌면 백두산이 아니라 외국여행하는 상상을. 아니면 온 세상이 한데 어우러져 구름처럼 둥실 둥실 떠다닐 수 있을 앞날의 세상을.

평양 순안공항에서 한시간 정도 비행한 것 같다. 삼지연 공항에 도착을 알리는, 이제는 '완전히' 익숙해진 억양의 기내 방송이 흘러 나온다. 방조카는 뭔가 아쉬운 표정이다. 조금 더 탔으면 하는 표정이다. 비행기가 곧 착륙을 한다니까 다시 긴장하는 얼굴이다. 비행기 바퀴가 활주로에 닿으면서 '쿵' 하는 소리를 내자 얼른 좌석의 팔걸이를 꼭 잡고 앞만 바라본다.

삼지연행 국내선 비행기 내부. 스튜어디스가 바쁘게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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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탄 비행기의 승무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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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 처음 비행기에서 내려와 본다는 방현수 '조카' 안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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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시베리아 벌판에 도착한듯 5월의 봄 공기가 쌀쌀하다 못해 살갗을 시리게 한다. 왠지 백두산의 천지를 구경할 수 없을것만 같은 실망감이 차가운 고개를 든다. 게다가 오후에는 비가 올 수도 있단다. 설경이는 서둘러 백두산에 가야 한다며 느릿느릿,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과 얘기 나누느라 정신이 없는 우리더러 버스에 빨리 오르라고 손짓한다.

버스에 탄 남편은 주위에 좀 높다 싶은 봉우리만 보이면 "저것이 백두산이냐"고 방조카와 설경이에게 묻는다. 설경이는 웃으면서, 지금부터 한 시간 정도 숲 속을 달려야 하는데, 그나마 날씨가 좋아야 봉우리를 볼 수 있다며, 백두산 천지 구경은 90퍼센트가 운이라고 한다. 아마 아직도 천지는 얼어있어 올라가도 푸른 천지물은 감상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 그래도 그 웅장한 전경을 볼 수만 있어도 다행이란다.

백두산 26km를 알리는 이정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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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고도가 높아지며 침엽수림으로 바뀌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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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고도가 높아지며 침엽수림으로 바뀌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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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지대가 높지 않아서인지 우리의 차는 푸른 숲 속을 달리고 있다. 백두산 '26 km' 라고 쓰인 이정표가 보인다. 버스는 백두산을 향해 끝도없이 펼쳐지는 침엽수 숲 사이 길을 달린다. 사방이 산이고 도대체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표지판이 없다면 같은 곳을 계속해서 빙빙 배회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설경이 말이, 이 끝없는 '잇깔나무' 숲을 따라가면 어디가 어디인지 전혀 알 수 없는 깊은 산 속으로 연결되고, 그 산은 만주로도 연결된다고 한다.

"우리는 이 항일의 역사를 배우면서 자라납네다"

이곳이 바로 일본군과 싸우던 '항일유격대'의 근거지라고 설경이가 설명한다. 5월인 지금도 이렇듯 쌀쌀한데 '모든 삼라만상이 얼어붙는 겨울에, 이런 곳에서 어떻게 그 강력한 일본군에 항거하여 싸울 수 있었는지 나로서는 도무지 상상할 수가 없다. 그저 나라의 독립을 갈망하던 강인하고도 숭고한 그들의 피맺힌 삶과 의지에 내 마음이 숙연해질 뿐이다.

남편이 우스갯소리로 한마디 한다.

"설경아, 나는 따뜻한 여름에는 몰라도 추운 겨울에는 유격대원 못하겠다. 5월인 지금도 이렇게 추운데… 한 칠월에서 구월 초순 정도까지만 하다가 일단 내려가서 지내고… 이듬해 여름 다시 올라와 싸우다가… 9월 초순에 다시 하산해서…."
"'아니, 아버지, 유격전을 한 여름 캠핑하듯 해서 언제 일본놈들 때려 잡고 빼앗긴 나라를 다시 찾갔시요?"

"야, 그래도 그렇지 이건 너무 춥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지요. 그러니 우리가 그분들을 존경하는 겁네다. 여기가 한 겨울에는 영하 30도를 오르내립네다. 보시다시피 먹을 것이라곤 찾을래야 찾을 수 없습네다. 하물며 겨울에는 말할 것도 없구요."

"설경아, 그런데 이 항일 유격대에는 여성들도 있었다며?"
"그라문요. 어린 소녀들도 있었습네다."

"설경아, 너도 그 때 태어났다면 총을 들고 유격대원 할 수 있었겠니?"
"물론이지요, 아버지."

"얘 인마, 거짓말 하지마. 얼굴이 하얀 게 비실비실해 가지고 유격대는커녕…."
"아바지는 저를 아직 잘 모르시는군만요. 모든 게 정신에 달려 있습네다. 아무리 연약해도 정신이 똑바로 박혀있으면 강인한 힘이 나옵네다. 우리는 이 항일의 역사를 배우면서 자라납네다."


북한에서 백두산은, 그냥 추상적인 '민족의 영산'이라든가 하는 곳이 아니다. 북한에서는 '항일무장투쟁'의 성지인 곳이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나도 자연스레 나 자신에게 묻게 된다.

"만약 다시 그 시대로 돌아간다면, 과연 나도 총대를 메고 이 밀림 속에서 헤맬 수 있을까?"

지난 4월 평양의 해방산 호텔에서 열병식 맨 앞에 등장했던 여성 항일유격대원들의 행진을 텔레비전으로 보면서 했던 질문을 또다시 해본다.

구름이 약간 걷히자 드디어 봉우리들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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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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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너머에 백두산 천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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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는 계속해서 완만한 경사길을 올라간다. 이제는 더 이상 나무가 보이지 않는다. 마치 풀만이 자라는 초원 같은 느낌인데 곳곳에 녹지 않은 눈과 얼음이 보인다. 차가 고갯길 하나를 넘어섰다. 안개 같은 구름 속에 봉우리들이 우뚝 솟아 대자연의 병풍을 펼친 듯한 '천지창조'의 모습을 드러내니 바로 백두산이었다.

"야, 백두산이다, 백두산이다!"

운전기사가 차를 멈춘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 몰아치는 바람을 맞으며 봉우리를 바라봤다. 아무 말이 안 나온다. 구름에 가려 봉우리들만 보이는 것이 "아, '하늘위'의 뫼이로다!"

백두산이 손에 잡힐 듯 차가 달려가다 점점 속도를 줄이더니 이내 멈춰 섰다. 운전기사가 내려서 길을 살피더니 더 이상 갈 수가 없다고 한다. 내려가 보니 한 50m 정도의 구간이 마치 도로가 물에 잠긴 듯 얼음으로 덮여 있었다. 남편이 마구 우겨댄다.

"아니, 이 구간만 도로를 벗어나 풀 위로 운전해 가면 되는데 더 이상 못 간다니 말이 됩니까? 빨리 갑시다."
"선생님, 저 풀 밑의 땅이 질어서 사람은 걸어갈 수 있는데 차는 들어가면 바퀴가 빠져, 가는 것은 고사하고 나오지도 못합네다."


의심많은 남편이 도로 옆 풀 위의 땅을 몇 번 디뎌 보더니 아무 말 없이 백두산을 허무하게 바라본다. 구름이 거치면서 봉우리들이 땅과 맞닿아 그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구름 속으로 사라진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기상이 오히려 그 모습을 더 신비하게 그려준다. 게다가 저 위에는 구경조차 하지 못한 천지라는 '하늘의 호수'가 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주체할 수 없는 애국심이 솟아올랐다

우리는 갈 수 있을 때까지 걷기로 했다. 남편과 나는 손을 잡고 백두산을 바라보며 걸으면서 애국가의 첫 소절을 불러봤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주체할 수 없는 애국심이 용솟음쳐 오르면서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에 복받쳐 힘차게 불러댔다.

우리나라는 결코 작은 나라가 아니다. 남으로는 제주도에 열대의 야자수가 넘실 대고 불을 뿜던 한라산이 이를 지켜준다. 북으로는 툰드라의 초원 위에 백두산이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민족의 에너지를 하늘의 호수에 담고 있다. 어찌 대국이 땅덩어리만 크다고 대국이라 하겠는가. 우리에게는 '말 한마디에 천냥 빚도 탕감해 주는' 깊고 넓은 도량을 갖고 있는 국민이 있다.

조국이 통일이 되어 새로운 애국가가 만들어 지게 된다 해도 가사에 백두산만은 꼭 넣었으면 좋겠다. 이제는 꼭 올림픽 메달 시상식에서가 아니더라도, 애국가를 들으면 백두산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릴 것이 뻔하다.

하산 중에 마주친 유럽 관광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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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는 길에 본 백두산 주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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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산 위에 케이블카 레일이 희미하게 보인다. 이제야 현실로 돌아온 것 같다. 밖이 너무 춥고 바람이 불어 차 안에서 도시락을 먹은 뒤 우리는 다시 삼지연으로 향했다. 유럽 관광객들을 태운 세 대의 버스와 마주 쳤다. 설경이가 차에서 내려 '조선국제려행사' 동료인 그들의 안내원에게 상황을 설명해 준다. 그들의 차는 계속 산을 향해 올라간다. 아마 그들도 갈 때까지 가 볼 심산인가 보다.

평화로운 산장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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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수 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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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호텔로 가기 전 '이명수 폭포'라는 곳에 들렸다. 폭포로 가는 길에 있는 산장식 마을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내가 이제까지 본 북한의 시골 마을 중 가장 아름답고 평화로운 마을이다. 그동안 지나치면서 늘 봐 왔던 가난한 북한의 시골마을 같지가 않다. 마치 어느 여행 잡지에서 본 듯한, 조그마한 나라의 이름 모를 한 동네에 온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비 온 뒤의 투명빛 공기 그리고 집집마다 밥 짓는 굴뚝의 연기는 새 하얀 물감이 되어 푸른 하늘을 스르르 물들여 간다. 북한의 온 마을이 여기만 같았으면….

폭포는 바위 위로부터 물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위 틈새로 물이 새어나와 떨어지고 있었다. 그림 같은 폭포수에서는 크리스탈 물망울이 쉬지 않고 살아서 굴러내린다. 청명하게 떨어지는 물소리만 들리지 않는다면 이 모든 것은 영락없는 잡지 속의 사진이다. 희귀한 폭포다. 우리나라에는 별 게 다 있었구나. 포근한 한 편의 영상 필름을 본 것 같은 기분으로 오늘 머무를 호텔로 향했다.

천지까지 올라가지 못함을 그 누구보다도 설경이가 제일 안타까워 한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천지를 우리 일행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으리라. 제 나라의 절경을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소개하며 자랑하고 싶은 마음, 당연할 테니 말이다. 설경이는 백두산의 천지를 보기 위해 먼 길을 마다치 않고 온 손님들에게 마치 자신의 잘못인 것처럼 미안한 마음을 금치 못한다. 그 마음 백 번 이해하고도 남는다.

"이렇게 미련을 남겨두고 가야 다음에 또 이곳에 올 구실이 생기지. 안 그래?"
"8월경에 백두산을 오는 것이 제일 좋으니 그때 다시 오십시오. 정말이지 8월의 백두산 천지는 온 하늘을 담아 놓은 것처럼 푸르고 아름답습네다. 정말 꼭 다시 오셔서 보셔야 합네다. 안 그러면 평생 후회하실 겁네다."


'꼭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손가락 걸고 도장도 찍고 손바닥으로 복사도 해가며 약속을 했다. 다음 번에는 백두산뿐 아니라 함경도에 있는 칠보산도 가보고 싶다고 덧붙였다.

서로 총을 겨눈 군인들끼리의 대화가 이렇게 정겹다니

호텔 마당에서 삼지연 감자를 굽고있는 유럽 관광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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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에 도착하니 함께 비행기를 타고 온 '항공 애호가 동호회'사람들이 호텔 앞마당에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삼지연 동네에서 캐 온 감자를 구워먹고 있다. 방조카는, "이모 제가 잘 구운 것으로 가져다 드릴게요" 하더니 염치불구하고 유럽사람들이 구워놓은 감자 한 접시를 들고 온다.

"이모, 감자는 삼지연 감자 맛이 최고디요. 드셔보시라요. 내래 삼지연에서 군대생활 할 때 감자 많이 훔쳐다 먹었디요."

한 입 베어 먹어 보니 구수함과 달큰함이 입안에서 어우러져 스르르 녹는다.

"방조카가 왜 이 감자를 서리해서 먹었는지 알 것 같다. 정말 맛있네. 나라도 그랬겠다. 이렇게 맛있는 감자만 먹었으면서 군대생활이 뭐가 힘들었다고 엄살을 부렸어?"

이 말을 들은 남편이 가만있을 리가 없지 한 마디 한다.

"조카야, 군대는 아무리 잘 입혀주고, 잘 먹여주고, 잘 재워줘도 항상 춥고, 배고프고, 졸린게 군대야. 근데 자네는 맛 있는 건만 훔쳐 먹었네. 나는 훈련 나갔다가 밭에서 똥냄새 나는 무 훔쳐 먹었어. 지금은 화학 비료를 쓰지만 당시만 해도 밭에다 인분을 뿌렸거든. 똥냄새가 사르르 나는 것 같은데 그런게 다 뭐야, 그냥 베물어 먹었지. 너 지금 이 구운 감자 먹으면서 군소리 하지마, 다 뺏어 버릴거야."
"구운 감자요? 감자를 오데서 굽습네까, 불 피웠다간 큰 일 날라고. 날 감자 한번 드셔 보시라요. 그 떫은 맛이 어떤지."


"가서 날감자 하나 가져와봐, 내가 먹어 볼 테니까."

내가 일어나서 가져오려는 시늉을 하는 방조카의 옷소매를 잡고 자리에 앉혔다. 방조카는 당시 '감자 몇 알이라 해도 인민의 재산'에 손을 댄 생각을 하면 지금도 '량심'에 가책을 받는다고 한다. 그러자 남편이 한마디 한다.

"뭘 그런 걸 갖고 그래. 나는 훈련 나가면 또 뽑아 먹으려고 그 무밭을 항상 기억하고 있었는데. 자네는 나보다 양심이 있네."

재미있게 듣고만 있기에는 내 마음이 착잡해진다. 저 대화가 어찌 서로 총을 겨누고 있던 군인들의 얘기라 할 수 있겠는가. 마치 한 나라 군대의 다른 부대 출신 군인들이, 서로 자기 군대 생활이 더 힘들었다며 주고 받는 옛 이야기 같아 보여 씁쓸하다. '전방' 삼지연에 근무하는 평양 출신의 군인 방조카가 이모를 찾아 서울로 휴가를 나오면 나는 조카가 좋아하는 '소 육개장'을 끓여 배불리 먹여주는 그런 상상을 해본다. 통일조국을 안타깝게 그려 보면서.

함께 앉아 있는 다른 팀 안내원들은 한국의 군생활 얘기가 새롭고 흥미로운지 귀를 쫑긋 세우고 열심히 듣고 있다. 아마 자신들 생각에 남한은 '자유국가'라서 군대 생활도 '자유롭게 슬렁 슬렁' 하지 않나 생각한 것 같다. '고되고 철저하게 훈련 받는다'는 의외의 얘기에 놀라워한다. 얘기를 듣던 한 여성 안내원 아가씨가 말한다.

"남조선의 남성들은 '련약하다' 생각했는데 선생님 말씀 듣고 보니 그렇지 안갔습네다."
"그렇고 말구, 같은 민족인데. 내가 멋지고 강인한 남한의 남성을 소개해 줄게요. 나이가 어떻게 되나요? 특별히 좋아하는 스타일은?"

"선생님, 꼭 약속 지키시라요. 선생님 약속 기다리다가 저 결혼 못하는 것은 아니갔지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 얘기 저 얘기 하다 보니, 이곳이 백두산인지, 제주도인지 아니면 속초의 한 야영 캠프장인지, 어디가 어딘지…. 분간이 안 가고 머릿속이 희미해진다.

한 빨치산 소녀의 물 떠먹는 모습에 '뭉클'

손으로 물을 뜨는 빨치산 소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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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 소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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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동안 '삼지연' 이곳 저곳의 기념비적인 장소를 구경 다녔다. 그 중, 내 마음에 깊이 깊이 새겨진 잊지 못할 조각상이 있다. 삼지연 호숫가에 세워져 있는 '한 빨치산 소녀의 물 떠먹는 모습'이었다.

'꿈을 먹고 사는 시절의 어린 소녀가 험한 산속, 일본군을 피해 몸을 숨겨가며 총 칼을 들고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싸운다. 행군 중 불어터진 발을 질질 끌고 호숫가로 다가와 조막만한 손으로 물을 떠먹으려 한다. 지치고 목마른 마음과 몸에 한 모금의 호숫물을 떠마시며 행복의 미소를 짓고 있다'.

내 마음을 에이도록 슬프게 하는 이 앳된 소녀의 아름다운 모습이 자꾸만 내 양심을 시험하고 있다.

'과연 나도 저 시대에 태어나 저 동상의 어린 소녀이었다면, 소녀처럼 일본군에 대항해 빼앗긴 나라를 찾으려 빨치산이 되었을까. 아니면, 나도 우리의 일부 선생님들처럼 일본의 '우에노 음악학교'에 가서 음악 공부를 하고 돌아와 조선의 청년들에게 일본군 입대를 종용하는 노래를 부르고 다녔을까.'

잠자리에 누워 눈을 감고 잠을 청하니 그 어린 소녀의 모습이 살아서 내 마음을 온통 차지한다. 가슴이 아려와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다. '나는 저 소녀의 나이에 무엇을 하였던가…' 아무도 보지 않는 캄캄한 이 밤, 부끄러운 마음에 내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삼지연 스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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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인데도 아침 공기가 초겨울 같다. 오늘은 삼지연 시내를 거쳐 공항으로 갈 예정이란다. 삼지연 시내에 들어서니 스키장이 한눈에 들어 온다. 백두산을 바라보며 스키를 타는 상상만 해도 말 그대로 환상적이다. 삼지연은 천혜의 입지를 갖춘 세계적인 겨울 스포츠 도시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이 든다.

남편 말에 의하면 20년 전 이 곳이 동계아시안게임 개최지로 결정됐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북한은 소위 '고난의 행군' 시기에 들어섰으며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어 개최권을 반납했다고 한다. 후일 통일 조국에서 다시 동계올림픽을 개최한다면 그 장소는 여기 삼지연이 될 것이 틀림없다.

금강산 관광 재개와 더불어 어서 빨리 백두산 관광을 시작해야 한다. 백두산 관광은 우리 국민에게 관광의 즐거움 뿐만이 아니라 남과 북이 한 민족으로 그 뿌리가 하나라는 것을 가슴 깊숙이 새겨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평양으로 돌아가기 위해 프로펠러 비행기가 기다리는 삼지연 공항으로 향했다.

 

그림속 우수에 찬 그녀는 '평양 스타일'?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 25] 평양에서의 마지막 날, 이제 라진-선봉으로

12.09.18 14:17l최종 업데이트 12.09.18 18:09l
저는 오래 전부터 음악을 공부하고,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오로지 음악에 관한 지식만을 가르쳐왔습니다. 지금은 평범한 주부이자 아이들의 엄마로 살고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과 함께 북한에 갔습니다. 호기심으로 떠난 여행이었지만, 저는 처음으로 우리 민족의 비극적 운명과 민족애를 느꼈습니다. 동시에 통일에 대한 염원이 생겼습니다. 2011년 10월 이후 지난 4월에 열흘 동안, 그리고 5월에는 3주 동안 나진·선봉을 비롯한 북한 전역을 여행했습니다. - 기자말

아름다운 사람들이 사는 가난한 나라

삼지연공항에 도착하자 이미 와 있던 항공기 애호 동호인 모임의 유럽 관광객들이 또 비행기에 가까이 가 온갖 찬사를 늘어놓으며 사진을 찍고 있다. 도대체 옛 소련 구형 프로펠러 비행기의 어느 곳이 아름답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나는 그저 겁이 날 뿐인데...

내가 이 비행기를 보며 겁이 났던 이유는 이 비행기가 프로펠러 비행기치고는 너무 컸기 때문이다. 미국 소도시로 여행을 갈 때, 프로펠러 비행기를 타야 할 때가 있는데, 대부분 작은 소형 비행기였다. 그런데 우리가 탔던 이 비행기는 프로펠러가 네 개나 달려 있었으며, 그 크기는 제트 비행기만 했다. 이 큰 비행기가 앞에 달린 '바람개비' 네 개로 하늘을 난다고 생각해보니 겁이 났던 것.

북한 고려항공의 국내선 프로펠러 비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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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평양 순안공항에서 이 비행기를 처음 봤을 때보다는 겁이 덜 난다. 이미 올 때 한 번 타 봤으니까. 사실 이·착륙할 때의 느낌은 생각보다 훨씬 부드러웠다. 특히 이륙할 때는 제트 비행기보다 사뿐하게 떠오르는 기분. 느낌이 좋았다. 그러고 보니 나도 이 비행기가 조금은 아름다워 보이기도. 덩달아 나도 비행기를 카메라 앵글 안에 담았다. 나중에 미국 친구들이 이 프로펠러 비행기에 대해 물어보면 어떤 대답을 할지 미리 생각해두면서 말이다. 아마도 내 대답은 이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It's just so beautiful!'(이건 진짜 아름다워!)

순간, 북한 관광이 마치 이 프로펠러 비행기를 타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세계에서 몇 남지 않은 공산주의 국가, 그 중 가장 '폐쇄적인' 나라로 알려져 있는 북한. 이곳을 여행할 때, 처음에는 무척 겁이 나지만 일단 한 번 와 보게 되면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곧 알게 되기 때문이랄까.

특히 남한 출신의 외국 국적자는 어려서부터 받은 '반공 교육'때문에 그런 느낌이 더 할 것으로 보인다. 돌이켜 보니 나도 거의 종교에 가까운 '반공 세뇌 교육'을 받으면서 자랐다. 그 여파로 나는 초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북한 사람들은 실제 뿔이 달리고 얼굴이 새빨갛다고 믿고 있었다(내가 우둔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물론 나 역시 커가면서 '북한사람들이 (생물학적으로) 뿔이 있거나 얼굴이 빨갛지는 않다'는 것을 알게 됐지만, 그래도 북한 사람들을 인간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로봇' 같은 사람들이라고 믿고 있었던 게 사실이었다.

어려서 받은 이런 교육은 오랫동안 뇌리에 남았다. 덕분에 북한 사람들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기가 무척이나 힘들었다. 그러니 나뿐만 아니라 나처럼 '반공 교육'을 받고 자라난 사람들이 잔뜩 겁을 먹고 북한에 오는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이내 북한 사람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발견하고, '여기에도 사람이 살고 있구나'라는 말을 하게 된다. 내가 북한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뒤 사람들은 내게 '북한이라는 나라는 대체 어떤 나라냐'라는 내용의 질문을 많이 던지고는 했다. 나는 서슴없이 이렇게 답하곤 했다.

"북한? 아름다운 사람들이 사는 가난한 나라야."

평양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남편과 나는 내년 8월, 다시 북한 여행에 갈 것을 다짐했다. 백두산 천지에 오르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함경도 칠보산을 거쳐 동해안을 따라, 내 사촌 은영이와 그녀의 가족이 살고 있는 라진-선봉에 '다시' 가기 위해서 말이다.

이번 여행서 우리는 평양을 떠나 옌지(연길)로 가서 육로로 라진-선봉에 간다. 그곳에 가는 이유 중 하나는 내 사촌 은영이 가족이 그곳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은영이 부부는 무엇 때문에, 안락한 삶을 저버리고 온 가족, 아이들까지 모두 북한에 데리고 가 살고 있는 것일까.

텅 비어 있는 김일성대학... 무슨 일이지?

김일성대학 전자도서관 입구에 붙어 있는 김정일 위원장의 교시. '자기 땅에 발을 붙이고 눈은 세계를 보라!'고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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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으로 돌아온 다음 날, 우리는 김일성대학을 참관했다. 북한의 수재들이 모두 모여 있다는 대학에 닿았다. 5월인데, 학교는 텅 비어 있었다. 우리를 안내하는 교직원에게 남편이 물었다.

"아니, 학생들이 거의 보이질 않네요... 지금 여기는 방학입니까?"
"아, 지금 많은 학생들이 로력 봉사 나가 있습네다."
"어디로요?"
"건설현장에 나가 있기도 하고, 모내기하는 데 가 있기도 하고 그렇습네다."


김일성대학 교내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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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원에 가는 차 안에서 설경이가 대학교 재학 당시 농촌에 '로력봉사'를 나가 '단고기'(개고기)를 먹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우리 일정이 끝나면 농촌으로 '로력봉사'를 나갈 것이라고 했던 게 떠오른다. 그 말을 들으며 손가방에서 BB크림을 꺼내 설경이 손에 쥐여주던 순간 역시 함께 따라온다. 당시 나는 설경이의 이야기를 반신반의했다. 설경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나저나 내게 북한 대학교의 이름들은 참 생소하다. '김일성대학' '김책공대' '김원균 음악대학' 등등. 나도 우리나라 대학들의 이름들이 북한처럼 지어졌다면 어땠을까. '김구대학' '유관순여자대학' '김좌진 육군사관학교' '이순신 해군사관학교' '장영실 공대' '한석봉사범대학' '우륵음대', '김홍도미대' '허준의대'... 제법 그럴싸해 보이는 이름들이 뇌리를 스친다.

유람선에서 바라 본 평양 시내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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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대학 참관을 마치고 우리 일행은 대동강에서 유람선을 타고 점심을 먹었다. 유람선 안에서 바라보는 평양시의 모습들이 햇살을 받으며 물 위를 유유히 행진하듯 지나가고 있다. 유람선을 바라보는 시민들이 대동강변에서 손을 흔든다. 아이들은 배를 쫓아오면서 손을 흔들기도. 추억 속에 아련히 새겨지는 모습들이다.

'내일은 설경이와 방현수 안내원을 데리고 한강에서 유람선을 탈 수 있다면...'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스친다.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그 모습을 상상해보니 세상이 온통 평화의 빛으로 가득 찬 것만 같다.

2013년 8월,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다

다시 만난 리인덕 운전기사 당원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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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람선에서의 점심 식사를 마치고 우리 일행은 소년학생궁전으로 향한다. 이곳에서 뜻밖에 우리가 그리던 사람을 만났다. 차에서 내려 주차장을 가로질러 걸어가는데, 누군가 낯익은 이가 작은 승합차를 닦고 있는 것이 아닌가! 바로 지난해 10월, 북한에 처음 닿았을 때 우리를 태우고 다니며 열흘 동안 함께 했던 리인덕 운전기사 당원 아저씨였다. 너무나 반가워 창피한 줄도 모르고 소리쳤다.

"당원 아저씨! 당원 아저씨!"
"어, 어, 신 녀사님, 종 손생님(정 선생님)!"
"어머,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미국 손님 두 분을 모시고 왔는데, 지금 소년궁전에 들어가 계십네다. 그러지 않아도 지난달 공연차 오셔서 통화할 때 해방산 호텔에 계신다는 말씀을 듣고 찾아가 인사라도 드렸어야 했는데... 저도 그때 손님들을 모시고 있어서..."


"부인하고 아이들도 모두 잘 있지요?"
"네. 5월에 오신다는 건 회사에서 들었는데 이번에는 단체로 오셔서 큰 차가 동원된다고 해서 다른 동무가 운전을... 녀사님 공연하는 걸 록화중계로 봤습네다.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저는 녀사님을 지난 번에 열흘 동안이나 모시지 않았습네까. 화면을 보니 눈물이 핑 해가지고..."
"그러셨어요? 있잖아요... 우리 내년 8월께 또 올 예정인데, 그때 회사에 부탁해 놓을께요. 우리 설경이하고 다함께 다녀요."

남편이 얼른 차에 가 과자와 초콜릿 한 봉지를 가지고 왔다. 참으로 이상한 노릇이다. 왜 북한 사람들은 한 번 만나면, 발걸음을 쉽사리 뗄 수 없는 것인지... 소년궁전으로 걸어가며 뒤를 돌아보니 당원 아저씨는 어서 들어가라며 손을 휘휘 젓는다.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공연을 보는 내내 내 마음은 마치 박하사탕을 입에 쏙 넣은 듯 환해졌다. 그러나 공연장을 나오는 순간, 가슴이 쓰리고 아파온다. 북한 여행은 왜 이런지 모르겠다. 좋은 것을 보면 볼수록 고통이 배가 돼 뒤따른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 조국이 갈라져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냉면 이야기에 가슴이 아리다

두 손으로 공손히 손님의 전화를 받는 식당의 종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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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도착한 식당. 자리를 배정받으려고 기다리는 동안, 한 종업원이 전화로 예약을 받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어쩌면 저리도 공손히 두 손으로 전화를 받는지 예뻐 보여 얼른 카메라에 담아뒀다.

식사는 언제나 그렇듯 온갖 정성이 담긴 음식들이 푸짐하게 차려져 나온다. 그런데 매번 식단에는 미국 친구들이 좋아하지 않는 요리가 '꼭' 하나둘씩 섞여 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들이 싫어하는 요리는 '꼭' 우리 부부가 좋아하는 것이라 모두 우리의 차지가 된다는 것. 오늘도 예외 없이 우리 부부의 입맛을 사로잡는 요리가 나왔다. '가자미식해'가 바로 그것. 냄새가 너무 향긋해 바로 먹기 아까워서 접시를 먼저 들고 향을 맡아봤다. 옆에 서 있던 여종업원이 얼른 다가오더니 걱정스러운 얼굴로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뭐가 잘못 됐습네까?"
"아니요. 냄새가 너무 향긋해서 그만..."
"재미동포라고 들었는데, 미국서도 '가자미 식해'를 먹나요?"
"제가 사는 캘리포니아 남부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살아요. 거기 순대집이 몇 군데 있는데, 그곳에 가면 먹을 수 있지요. 남쪽에서도 즐겨 드시는 분들이 많이 계시고요."

"순대도, 가재미 식해(설경이는 꼭 '가재미'라고 불렀다... 기자 주)도 모두 함경도 료리입네다."

웨이트레스 아가씨의 말이 끝나자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설경이가 가자미식해를 예찬한다.

"오마니, 저는 어려서 아버지 일 때문에 함경도에서 살았습네다. '가재미 식해' 많이 먹었지요. '녹말 국수'를 겨울 김치국물에 비벼 '가재미 식해'에 얹어 먹으면 정말 맛있습네다. '가재미 식해' 말고 명태 식해를 얹으면 더 맛있습네다. 국수가 '어적어적' 씹히는 게 잘 끊어지지도 않아요. 끊어지질 않으니 어떨 때는 다 먹을 때까지 국수를 입에 주렁주렁 매단 채 계속 씹는 거야요."
"어머, 얘, 나도 먹어 보고 싶다. 근데 '녹말국수'는 무슨 국수야?"
"감자로 만든 국수야요."


얘기를 듣고 있던 남편이 한마디 거든다.

"당신 많이 먹어 봤으면서 딴 소리하긴..."
"아니, 내가 언제 '녹말국수'를 먹어 봤어요?"
"당신이 좋아하는 '함흥냉면'이 바로 '녹말국수'야. 나도 어렸을 때 부모가 함경도 분들이신 친구네 집에 가서 이북식 '녹말국수'를 먹어 봤는데, 왜 남쪽 식당에서는 가자미식해나 명태 대신 홍어 무침을 넣는지 모르겠어. 그리고 당신, 냉면 먹을 때 가위 갖다 달라는 소리 좀 제발 하지마. 설경이 말 들었지? 국수를 다 먹을 때 까지 주렁주렁 입에 매달고 씹을 때도 있다고. 냉면을 가위로 잘라 먹는 것은 꼭 햄버거를 나이프로 썰어 먹는 격이란 말이야."


그러고 보니 이곳에서는 냉면 국수를 가위로 잘라 먹는 법이 없다. 지난해 북한에 처음 와 냉면을 먹었을 때도 가위 좀 가져다 달라고 했다가 주위 사람들 모두를 의아하게 만든 적이 있었다.

"그런데 왜 남에서는 함흥냉면이라고 그래요?"
"글쎄... 모르겠네. 함경도 함흥분들이 내려와 만들어서 그랬나..."


가자미식해가 정말 향긋하고 맛있다. 한 점을 입에 넣고 씹으면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피어난다. 함께 섞여 있는 무 한 점을 입에 넣으니 개운한 맛이 돌아 기분을 상쾌하게 한다. 이렇게 정신없이 가자미식해를 즐기고 있는데, 방현수 안내원이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우리를 바라본다.

"방 조카는 많이 들었어? 뭐가 그렇게 좋아서 싱글벙글이야?"
"이모가 식해 먹는 거 보고 그렇디 뭐. '이모도 역시 조선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럼 나도 같은 조선 사람이지. 그걸 말이라고 해?"
"긴데 이모, 통일되면 내가 피양랭면 뎡말 맛있게 만들어 줄께. 옥류관 것은 상대도 안 되디, 뭐."


"어머, 방 조카도 음식을 만들 줄 알아?"
"기건 아니고... 집사람이 잘 하디. 한 겨울에 동티미 국물에 말아 먹는 긴데, 꿩고기 국물을 섞어야 돼. 뎡말 맛있디, 뭐. 랭면은 겨울이 맛있디. 꿩도 겨울에 잡아 먹어야 맛있디, 뭐."
"그래, 통일이 되면 나도 꼭 조국에 와서 살테니 꿩냉면 꼭 해줘."

이 말을 하는데 갑자기 감정이 복받쳐 오른다. 얼른 물 한 잔을 들이킨다. 오늘은 생각치도 않게 냉면이 내 가슴을 아리게 한다.

남북 단일팀, 지난 일로만 두지 맙시다

세계태권도 대회가 열렸다는 평양의 태권도 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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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평양의 여기저기를 다녀 본다고 한다. 다행히 우리 부부가 가보지 못한 곳들이다. 설경이는 하나라도 더 많이 구경시켜 주고 싶었는지 짜임새 있게 시간 분배를 잘해놨다. 오전에는 북한의 태릉선수촌이라 할 수 있는 체육 거리에 들렀다. 예전에 배구선수였다는 방현수 안내원은 남편과 올림픽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남편이 북한의 '계순희' 이야기를 꺼냈다.

"방 조카, '계순희' 선수라고 알지?"
"계순희 모르면 기게 조선사람인가요."
"한 15년 전에 미국 애틀랜타 올림픽 때 계순희가 정말 잘했어. 상대였던 일본의 다무라 료코가 진짜 유명했잖아. 한 번도 진 적이 없었고. 그때 계순희가 매트에 올라오는 걸 보니 얼굴이 앳된 소녀 아이인 거야. 16세였나... '아이고, 이젠 죽었구나'라며 망연자실해하면서 중계를 보는데... 한 1~2분 지났나? 계순희가 상대 선수를 매트에 그냥 꽂아 버리는 게 아니겠어? 너무 좋아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다 마시던 맥주를 다 뒤엎고 난리가 났었지."
"그때 대단했디요, 뭐. 인민들도 좋아서 뛰쳐 나오고 했디. 상대가 일본선수니끼니 더 했디 뭐."


"런던 월드컵 축구대회 이야기는 알아?"
"들어서 알디요, 뭐. 나는 그때 태어나지도 않았으니까. 잘 했다 그러더라고요."

"잘 한 정도가 아냐. 예선에서 강력한 우승후보인 이탈리아를 꺾었고, 8강에 올라서는 포르투갈을 전반에 3-0으로 앞서고 있었어. 그러다가 '유세비오'인지 뭔지 하는 놈이 네 골을 넣는 바람에 5-3으로 지고 말았지."

"그때 그걸 보셨어요?"
"아니, 나도 아주 어렸을 때인데... 뉴스로만 듣다 나중에 세월이 지나고 기록 영화로 일부만 봤지. 그때 북한의 박두익이란 선수가 정말 대단하더라고. 기록 영화를 보니까 세계축구협회 회장이라는 사람이 박두익 선수에게 '동양의 흑진주'라는 별명을 붙였더구만. 그분 아직 살아계시지?"
"네, 국가대표 감독도 하시고 그랬디요. 이모부, 북남이 합치면 우리나라 정말 대단할 텐데 말입네다. 가끔 국제대회 때 북남의 우리 선수들끼리 맞붙으면 가슴 아파 못 보디."
"그래, 예전에 여자탁구 단일 팀 만들어서 중국을 꺾고 우승했잖아."
"... 뭐, 슬프디요, 뭐."


두 사람의 얘기를 듣고 있노라니 문득 북의 성악가들이 생각난다. 지난 4월에 북한에 닿았을 때 북한의 성악가들이 노래 부르는 것을 들을 기회가 많았는데 실력 있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언젠가는 남북의 예술인들이 함께 노래를 부르는 날이 오겠지...

유럽 분위기 풍기는 유화는 '북한 스타일'?

인상에 남는 만수대 창작사의 서양화 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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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에 남는 만수대 창작사의 서양화 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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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영화촬영소'를 참관한 뒤 '만수대 창작사'로 향했다. 북한 최고의 예술가들이 작품활동을 하는 곳이다. '인민예술가' '공훈예술가'라고 불리는 분들이 있다고 한다. '조선화'를 하신다는 유명한 화가와 사진을 찍었는데, 그분의 존함이 생각나질 않는다. 다음부터는 꼭 수첩에 기록을 해야겠다.

이곳의 많은 작품들 역시 사회성이나 이념적 지향을 내포하고 있는 느낌이다. 그중 두 작품이 내 눈길을 끌었다. 서양화인 유화들이 바로 그것. 하나는 한 여성을 그린 초상화인데 우수에 젖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 또한 그녀와 똑같은 감상에 젖어 똑같은 표정을 짓게 된다. 마치 내가 그 그림 속의 여인이라는 착각을 하게 한다. 또 다른 작품은 운하를 끼고 있는, 이탈리아의 한 동네 같은 모습을 그린 유화다. 상당히 의외라고 느껴졌던 작품이다. 과연 북한 사람들이 유럽풍의 풍경을 보고 감상에 빠질 수 있을는지 의문이 고개를 든다. 북한의 현대미술을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평양 근교에 있는 단군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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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식사를 마친 후, 우리는 단군릉으로 향했다. 민족의 시조인 단군의 무덤을 발굴해 새로 단장을 했다고 하는데, 그 규모가 가히 피라미드급이다. 그 찰나, 남편의 의심병이 이곳에서도 발동해 나는 또 한 번의 곤욕을 치러야 했다. 남편이 의심하는 부분은 '이 무덤이 진짜냐 가짜냐' '고증은 제대로 했는가' '고고학적으로 증명이 됐는가' '과학적 검증은 철저히 했는가' 등등. 아... '철이 없으니 겁도 없는' 남편의 의심병과 막말에는 치료약이 없는 듯하다.

차 안에서 본 '민속공원' 건설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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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릉 참관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우리로 하여금 나중에 평양을 다시 찾고 싶게끔 만드는 건설 현장을 목격했다. 엄청난 부지에 '민속공원'이라는 것을 조성하고 있었는데, 내부는 이미 공사가 많이 진척돼 밖에서도 쉽사리 알아볼 수 있었다.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게끔 대표적인 건축물 모형들을 전시해 놓을 계획이란다. 모형이라고 하기에는 꽤 커보였다. 내년에 다시 들르게 되면 필히 들러보겠다는 다짐을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묘향산에 도착했다. 지난 번에 다녀간 곳이긴 하지만, 우리는 보고팠던 사람들과 다시 만날 수 있는 기쁨을 누렸다. '향산호텔' 식당의 다정한 여종업원 아가씨, 서글서글한 벨보이 아저씨, 묘향산 기념품 가게의 순박한 아가씨, 국제친선 관람단의 당찬 해설원 그리고 쑥스러움을 많이 타시던 보현사 스님까지... 지난 10월 여행 당시 만났던 바로 그들을 다시 만났다.

그리던 이와의 만남. 그것은 바로 마음과 마음의 소통이요, 나눔이요, 사랑이다.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아도 마음으로 상대의 마음을 바라보니, 하나 됨에 어긋남이 없다. 사람이 상대를 이해하고 사랑한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나 자신을 가장 행복하게 하는 고귀한 비결임을 깨달았다.

우리 일행은 묘향산에서 돌아온 뒤 환송회를 위해 외교관 클럽으로 향한다. 이곳은 지난 10월 여행 때 들렀던 곳이기도 하다.

저녁 식사를 하기 전, 우리 부부는 방현수 안내원과 함께 평양시내 산책을 나가기로 했다. 호텔을 나와 지하도를 지나니 평양역이 나온다. 역 옆에는 스낵집들이 늘어서 있고, 사람들은 지붕이 있는 길가나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 맥주를 마시고 있던 한 남성이 우리를 보더니 '조선맥주 한 잔 하시라요'라며 맥주병을 흔든다. 고맙다는 인사만 하고 지나쳤다. 그런데 남편은 그들과 어울려 한 잔 하고 싶었는지 자꾸 그 남성에게 눈길을 준다.

방현수 안내원은 "호텔 가서 드십시오"라며 길을 재촉한다. 메뉴판을 올려다 보니 자장면도 있다. 나 또한 동포들과 어울려 길거리 테이블에 앉아 자장면을 함께 먹으며 이야기 나누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방현수 안내원의 설명에 따르면 이 스낵집들은 재일동포가 운영하는 가게라고 한다.

평양역에서 듣고 싶은 '서울행... 발-차"

평양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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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앞은 여객들로 꽤 분주하다. 한쪽에는 군인들이 군용백을 가지런히 세워 놓고 앉아 있다. "훈련을 마치고 근무지를 배치받고 임지로 가는 병사들 같다"고 남편이 말한다. 내가 "어떻게 아느냐"고 물으니 남편은 "저 군용백들과 제복 모두 새것인 걸로 봐서 훈련을 마친 신병들 같아 보인다"고 한다. 자기도 신병 시절에 열차에서 내려 꼭 저런 모습으로 역 앞에 앉아 있었다고. 그리고 배가 무척 고팠다는 말도 잊지 않고 덧붙인다.

저 군인 아이들은 어디로 가게 될까. 휴전선으로? 아니면 방현수 안내원처럼 삼지연으로? 얼마나 부모님이 보고 싶을까, 또 부모들은 집 떠난 아들이 얼마나 걱정되고 보고 싶을까. 군인 무리 중에는 아주 어려 보이는 아이도 있다. 가슴이 찡한 게 눈물이 나오려 한다. 군인 아이들에게 눈길을 주려고 그쪽을 바라보며 일부러 천천히 걸었다. 군인들은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눈인사를 했다.

국가가 있으면 물론 군대가 있기 마련. 그러나 아직 우리나라에는 이산가족들이 살고 있다. 그런데 같은 피를 나눈 형제가 서로 총을 겨누고 있다. 어찌 우리는 이런 비극 중의 비극을 눈앞에 두고 살아가야만 하는 것인가.

언뜻 들여다본 평양역 내부는 어렸을 적에 봤던 서울역과 비슷해 보인다. 일제 치하 당시 만들어졌던 역을 그대로 쓰고 있는 것 같았다. 평양역을 보니 옛날 생각이 난다. 어린 나이였지만, 당시 나는 기차역은 언제나 외롭고 쓸쓸한 느낌이 묻어난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열차의 출발을 알리는 방송이 승강장에 달려 있는 스피커에서 흘러나올 때, 그 목소리가 처량하게 들려서였기 때문인 듯하다. 장내 방송이 끝나면 열차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평양역에 서 있으니, 마치 그런 장내 방송 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서울행... 발-차... 서울행... 발-차...'

이별의 순안공항... 이제 라진-선봉으로 갑니다

우리를 알아보고 반갑게 맞이해 준 외교단 회관의 바텐더와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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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관 클럽에서 마지막 저녁식사를 한다. 신기할 정도로 가는 곳마다 우리를 기억하는 이들을 만난다. 식당 여종업원들이 깜짝 놀라며 반가운 목소리와 북한 특유의 억양으로 인사를 건넨다.

"다시 뵙게 돼 반갑습네다."
"어떻게 기억하세요? 잊지 않아 줘서 고마워요."

"너무나도 재미나게 웃으시고, 다정히 말씀을 나누셨던 모습이 인상에 많이 남아서 가끔씩 저희들끼리 두 분의 이야기를 하곤 했습네다. 저기 수영장 창가에 앉지 않으셨습네까. 게다가 봄 축전 때 노래하시는 장면을 텔레비죤에서 봤지 않았갔습네까. 얼마나 반갑고 감동스럽던지..."

이곳에 오니 만룡 안내원과 리인덕 운전수 당원 아저씨가 더 보고 싶어진다. 그때 우리는 이곳 식당에서 그동안 한껏 쌓아온 정을 나누며 얼마나 가슴 아린 웃음을 나눴던가... 이 여종업원의 눈에는 내 웃음 뒤에 숨어 있던 슬픈 그림자를 보진 못했을 게다. 그 시절이 떠오르니 다시 가슴이 애잔하게 매어온다. 이제는 설경이와 방현수 안내원, 그리고 용성 운전수 아저씨의 얼굴이 미어지는 가슴에 짙은 그림자가 돼 드리워지고 있다.

이별의 시간은 어김없이 빨리 찾아온다. 엊그제 이곳 평양공항에 도착해 보고 싶었던 사람들을 만날 희망에 마음이 한껏 부풀었는데, 어느새 착잡한 심정이 돼 출국 수속을 하고 있다. 이젠 사랑하는 딸 설경이뿐만 아니라 듬뿍 정을 준 방현수 안내원까지 이곳 북녘땅에 두고 가야 하니 마음이 더 우울해지고 슬퍼진다.

"방 조카, 설경이를 잘 부탁해... 그리고 통일이 되면 '단고기' 어깨에 메고 이모 찾아 서울에 온다고 했지? 약속 꼭 지켜야 해."

일부러 뒤돌아보지 않고 출국수속대를 통과했다. 눈물이 보이지 않을 만큼의 거리를 걷고 나서야 뒤를 돌아봤다. 설경이와 방현수 안내원, 그리고 용성 아저씨가 두 손을 높이 흔들고 있다. 우리 일행이 비행기가 서 있는 바깥 문으로 나갈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두 손을 하염없이 흔들고 있다. 슬픔에 지쳐 흔드는 그들의 손이 아른아른거리며 희미하게 보인다.

우리는 베이징행 고려항공 비행기에 올랐다. 이제 옌지(연길)을 거쳐 함경북도 라진-선봉으로 가기 위해서다. 언제나 그렇듯 북한여행은 상당히 아름답다. 그러나 떠나는 순간, 그 순간은 형용할 수 없는 슬픔에 싸여 그렇게 괴로울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