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 26~끝]

2012. 10. 25. 16:26everyday photo

 

 

미국서 잘나가던 엔지니어, 북한서 15년 살고있다고?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 26] 드디어 닿은 라진-선봉

12.09.22 11:38l최종 업데이트 12.09.22 11:40l
저는 오래 전부터 음악을 공부하고,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오로지 음악에 관한 지식만을 가르쳐왔습니다. 지금은 평범한 주부이자 아이들의 엄마로 살고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과 함께 북한에 갔습니다. 호기심으로 떠난 여행이었지만, 저는 처음으로 우리 민족의 비극적 운명과 민족애를 느꼈습니다. 동시에 통일에 대한 염원이 생겼습니다. 2011년 10월 이후 지난 4월에 열흘 동안, 그리고 5월에는 3주 동안 라진-선봉을 비롯한 북한 전역을 여행했습니다. - 기자말

중국 국경을 넘어 다시 북한으로

 

다리를 건너며 버스 안에서 본 북한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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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에 도착한 우리는 미국으로 돌아가는 일행들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옌지(연길)로 가는 차이나항공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옌지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 아침 고속도로를 달려 북-중 국경지대로 향했다.

중국 측 출입국 사무소에서 출국 수속을 밟은 우리 부부는 북한에서 운영하는 버스로 두만강 다리를 건너 원정리 입국사무소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이미 북측 안내원이 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안내원의 도움을 받아 입국사무소에서 간단한 짐 검사를 받은 뒤 작은 승합차를 타고 라진-선봉으로 향했다.

평양과는 달리 남자 안내원 한 사람만이 운전기사와 함께 나와 있었다. 안내원의 이름은 문호영, 나이는 25세란다. 억양이 평양말과는 달랐다. 이곳이 함경북도니 함경도 사투리를 쓰고 있는 듯했다. 문호영 안내원은 자신이 평양에서 공부를 했기 때문에 평양말을 한다고는 했지만, 내 귀에는 뭔가 다른 억양이 뚜렷하게 들렸다. 물론 알아듣는 데는 무리가 없었지만. 오히려 한반도 끝자락에서 아무런 불편함 없이 우리말로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게만 느껴질 뿐이다.

우리가 라진-선봉을 '자유무역지대'라고 부르자 문호영 안내원은 "명칭이 바뀌어 '라선경제특구'가 됐다"며 정정해줬다. 이곳은 북한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입국 비자가 필요 없었다. 우리는 연길에 있는 크라훈(krahun.com)이라는 관광회사를 통해 이곳에 들어오게 됐는데, 미국서 의뢰할 때 간단한 자기소개서를 관광회사에 제출하는 것으로 서류 절차를 마쳤다. 아무리 자유무역지대라고 해도 그렇지 소위 '폐쇄적'이라고 알려진 북한에 비자도 없이 입국할 수 있다니... 조금은 놀라웠다. 혹시나 해서 한국 국적의 사람들도 들어올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한국 국적 소지자를 제외한 모든 나라 사람들이 출입 가능하다'고 한다. 그 점은 평양과 마찬가지였다.

라선(라진-선봉)으로 가는 도로는 비포장도로. 상태가 몹시 좋지 않아 우리를 태운 승합차는 느린 속도로 달릴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많은 것을 천천히 볼 수 있었다. 우리는 되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문호영 안내원은 약간 미안한 표정으로 "중국과 라선을 연결하는 포장도로를 중국 측에서 건설하고 있는데, 곧 한두 달 내로 완공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중국 측 차량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지나간다. 화물 트럭과 승용차들이다. 중국 관광객들은 개인 차량을 끌고 출입할 수 있다고 하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마치 북한과 중국이 한 나라가 돼 버린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세상에, 두만강이 이렇게 좁았구나

북에서 바라본 두만강. 강 건너가 중국이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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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안에서 목격한 주유소. 농민 뒤로 주유소가 보인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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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의 폭은 생각보다 아주 좁았다. 물론 폭이 넓고 깊게 보이는 곳도 있긴 했지만, 대부분 폭이 좁고 수심이 얕아 큰 개울 정도로 보이는 곳이 많다. '이래서 탈북자들이 강을 쉽게 건널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해봤다. 흘러간 옛 노랫말 "두만강 푸른 물에..."와는 판이하게 달라 보였다.

라선으로 가는 길에 비친 농촌의 모습은 북한의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적 윤택해 보였다. 이곳은 함경북도 오지니 농촌 사정이 몹시 안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이 빗나갔다. 심지어 길가에서 주유소까지 볼 수 있었다. '중국 관광객들을 위한 것일까'라는 생각도 해봤다. 창밖을 보고 있는데 문호영 안내원이 우리에게 말을 건다.

"곧 라진에 도착하면 구리스(크리스) 선생께서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어머, 부인하고 애들도 함께 나오나요?"
"글쎄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뭐... 그럴 수도 있지요. 애들도 라진 시내에 자주 나오니까요."

"에휴, 같이 좀 보면 좋겠는데..."
"애들이 안 나와도 나중에 집에 가면 보실 텐데요. 관광 일정표에 나와 있지 않습니까? '크라훈 관광회사'와 련계해 오시는 손님들은 구리스 선생 농장에 가서 체험학습인가 뭔가 하는 '로동'을 하루 동안 하게 돼 있습니다."
"알고 있어요. 그런데, 하루라도 더 빨리 보고 싶어서 그렇죠."

컴퓨터 만지던 그에게 염소를 키우라니

크라훈관광회사 홍보 동영상 중. 동영상은 라진에서 촬영됐다.
ⓒ krah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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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는 그의 미국 이름이다. 성은 김씨다. 이곳 사람들은 그를 '구리스 선생'이라고 부른단다. 내 사촌 여동생의 남편되는 사람이다. 이번에 우리가 이용한 크라훈 관광회사가 바로 내 사촌동생 부부가 운영하는 회사다. 이들은 15년이 넘는 세월 동안 라진-선봉에서 살고 있다. 내 사촌동생과 남편, 그리고 슬하에 있는 세 아이들은 모두 미국 시민권을 갖고 있는 재미동포들이다. 크리스의 원래 집은 샌프란시스코이며 그는 버클리대에서 컴퓨터 공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에는 실리콘 밸리의 한 벤처 기업에서 고액의 연봉을 받는 엔지니어로 일한 바 있었다.

지난 1995년, 당시 25세였던 크리스는 북한이 경제적으로 고통을 받는다는 뉴스를 듣고 뜻을 함께하는 미국인 친구와 함께 어려움에 처해 있는 북한동포들을 도울 수 있는 방도를 찾기 위해 평양을 방문했다. 두 사람은 북한을 돕고자 북한 관리들에게 자신들의 전공 분야인 컴퓨터 공학에 대해 몇 시간에 걸쳐 열심히 브리핑을 했다고 한다. 그 후 두 사람은 북한의 이곳저곳을 돌아본 후 평양에 돌아가 다시 북한 관리들과 모임을 가졌단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황당무계한 것이었다고.

"저... 구리스 선생의 뜻은 잘 리해하갔는데, 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고..."
"그런 것이 아니고 뭐가 필요하시단 말씀이신지요?"
"저... 혹시 염소를 좀 키워 보시지 않겠습네까?"
"염소를 키워요?"

"네, 구리스 선생, 염소 말입네다."
"아니, 우리는 컴퓨터 엔지니어들인데... 그리고 염소는 만져본 적도 없는데 염소를 키우라니요?"
"그러실 줄 알고 우리도 이 제안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습네다. 그런데 염소 키우는 일이라는 게 고저 배우면 금방 할 수 있는 일이라 제안해 보는 겁네다."


"아니, 지금 우리한테 염소 키우는 걸 배워서 하라는 말씀이세요?"
"네, 만일 하시갔다면 함경북도에 라선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 인민위원회와 련계해 드리겠습네다."
"저희는 호텔로 돌아가겠습니다."


염소 젖 짜던 크리스, 도로를 내고 전기를 들이다

신해리집 마당에서 작업을 하는 크리스
ⓒ 크리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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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로 돌아온 크리스와 미국인 친구는 한동안 망연자실해 앉아 있었다고 한다. 멍하니 서로 쳐다보다가 내린 결론은 '염소를 키우겠다'는 것. 북한의 이곳저곳을 둘러본 두 사람은 '그래, 지금 이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염소지 컴퓨터가 아냐'라는 생각이 들었단다.

미국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모든 것을 정리하고, 염소를 키워 젖을 짜기 위해 미국을 떠나 북한으로 갔다. 이렇게 크리스의 치열한 북한 생활이 시작됐다고 한다. 그들은 라진시내로부터 걸어서 두세 시간 정도에 있는 산기슭에 정착했다. 염소를 키우기 위해 길도 없고 전기도 없는 산골에서 엉성한 집을 지어놓고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겨울이 되면 살을 에는 듯한 추위에 옷이란 옷은 모두 껴입고 잤단다.

그들이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며 전전긍긍할 때 미국에서 미국인 '염소 전문 수의사'가 크리스의 동포애에 감동해 북한에 찾아왔고 지금까지 함께 살며 봉사하고 있다고 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뜻을 함께하고자 하는 미국인 몇 명이 라진-선봉에서 각자의 재능과 실력을 발휘하면서 살아가고 있단다.

그들이 처음 이곳에 자리를 잡고 함께 어울려 살아가려 하자 북한 동포들은 의심의 눈초리로 그들을 바라봤다고 한다. 왜냐면 북한 동포들 눈에는 어려움 없이 편하게 살던 사람들이 왜, 열악한 환경에 굳이 들어와 자신들을 희생하며 살려고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분명 무슨 사심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단다.

라진 정착 초창기에 크리스 부부는 길도 없고, 자동차도 없고, 전기도 없는 산골에 집을 짓고 살면서 '이곳에 가장 필요한 것은 전기·도로·운송수단이라고 생각해 도로를 건설했다. 또 버스를 들여다 운송사업을 폈고, 풍력 발전소를 설치해 전기도 들어오게 했다. 지금 이들이 사는 신해리는 아름답고 살기 좋은 어촌마을이 됐다. 뒤로는 산이요, 앞으로는 바다가 있는 마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아름다운 동네임이 분명하다.

"엄마, 우리 언제 NK로 돌아가?"... 충격이었다

신해리 마을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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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 부부는 북한동포들이 외부세계로부터의 일시적인 도움에 의존해 살아가는 걸 원치 않았다. 크리스 부부의 꿈은 일자리 창출을 통해 북한동포들이 삶의 질적 향상을 이루고, 북한동포들과 함께 힘을 모아 어려움을 이겨내는 것이었다.

우리가 이번에 이용한 크라훈관광회사 역시 그들의 꿈이 반영된 결과물이다. 라진-선봉을 담당하는 여행사들은 중국에도 많이 있다. 하지만 다른 여행사들은 주로 중국인 관광객을 모집해 들어 오는데, 크라훈관광회사의 고객은 대다수가 미국인, 유럽인, 그리고 해외동포들이라고 한다. 관광객 중에는 라진-선봉에 투자를 목적으로 들어오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3년 전, 이들 가족이 미국에 왔을 때 잠깐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만 해도 이들이 사는 마을은 '달나라보다 더 멀리 있는 나라'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간접적으로 전해 들었지만, 관심이 없었기에 이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왜 고생을 사서 하고 있는지 자세히 알 길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알려고 들지도 않았다.

자기들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세 아이들은 무슨 죄로 모든 것이 불편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교육을 받고 있는지... 같은 부모로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좋은 환경을 찾아 아이들을 데리고 가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구렁텅이 속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크리스 부부가 용납되지 않았다.

한 번은 크리스 부부와 아이들이 남캘리포니아에 있는 우리집에 왔을 때였다. 여섯살 막내 조카가 내 사촌동생에게 "엄마, 우리 언제 NK(North Korea)로 갈 거야?"라고 묻는 게 아닌가. 나는 속으로 '아이들이 북한에 가기 싫어서 저러는 모양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나의 큰 오산이었다. 아이들은 자연과 더불어 뛰어놀고, 순박하게 정을 나누며 살아가고 있는 북한의 이웃들이 그리웠던 것이다.

이번 4박 5일의 관광 일정에 크리스 가족이 사는 신해리 마을을 참관하고, 하루 동안 그곳에서 '북한생활 체험 학습'을 한다고 한다. 크리스 가족을 만날 수 있다니... 그동안 긴 여행에 지쳐있던 내 몸과 마음에 새로운 에너지가 솟구친다. 그저 꿈만 같다.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

저는 오래 전부터 음악을 공부하고,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오로지 음악에 관한 지식만을 가르쳐왔습니다. 지금은 평범한 주부이자 아이들의 엄마로 살고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과 함께 북한에 갔습니다. 호기심으로 떠난 여행이었지만, 저는 처음으로 우리 민족의 비극적 운명과 민족애를 느꼈습니다. 동시에 통일에 대한 염원이 생겼습니다. 2011년 10월 이후 지난 4월에 열흘 동안, 그리고 5월에는 3주 동안 라진-선봉을 비롯한 북한 전역을 여행했습니다. - 기자말

북한서 만난 친척 크리스... 통일된 줄 알았네

필자와 운전기사 아저씨(가운데), 그리고 문호영 안내원(오른쪽)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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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호텔에 짐을 풀고 저녁 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향했다. 그곳에 크리스가 오기로 돼 있단다. 식당에 도착하니 크리스가 혼자 기다리고 있었다. 남편과 나는 크리스의 손을 잡고 반가워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크리스! 크리스를 북한에서 만나다니... 잘 있었어? 애들하고 애들 엄마는?"
"집에 있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처형 오신다고 전부들 난리예요. 같이 오려고 했는데, 제가 오늘 인민위원회에 볼 일이 있어서 혼자 나왔어요."
"여기서 집이 멀어?"
"차로 한 30분 정도 거리랍니다. 모레 우리 농장에 오시기로 돼 있어요."

"알고 있어. 근데, 국경에서 여기까지 오는데 보니까, 여기 농촌이 다른 데보다 더 나아 보이던데?"
"아마 그럴 거예요. 여기가 중국하고 가까워 교역을 많이 하니까 아무래도 다른 데보다 생활 수준이 좀 높을 겁니다. 음식도 평양보다 더 나을지 몰라요. 한번 드셔 보세요. 처형, 저 이제 슬슬 가봐야겠어요. 여기서 안내원하고 저녁 식사 하시고 호텔로 가시면 됩니다. 모레 다시 만나요."

크리스는 집에 가기 전에 한 군데 더 볼 일이 있다며 작별인사를 한 뒤 식당을 나섰다. 북한에서 친척을 만나다니, 정말로 묘한 기분이었다. 마치 통일이 다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양에서는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다.

식사를 하면서 문호영 안내원은 조금 전에 못다 한 자기소개를 마저 한다. 그는 초등학교를 이곳에서 다녔으며, 동네에서 신동으로 불릴 만큼 공부를 잘했단다. 덕분에 그는 청진에 있는 중학교를 나왔고(라선에서 뽑혀서 갔다고 한다), 평양외국어대학을 졸업했다.

그는 전공이 영어였는데, 군대에 가면 외국어를 쓸 일이 없어 다 잊어 버릴 것 같아 군대는 가지 않았다고 한다. 남편이 "군대에 안 가도 되느냐"고 묻자 그는 "북한 군대는 지원제(모병제)를 따른다"고 답했다. 지난해 10월 평양에서 리만룡 안내원이 '북에서는 군대가 지원제'라고 하자 남편이 강한 의구심을 표했던 일이 생각났다(북한 군 복무제도가 지원제라는 언급에 대해 정부 관계자는 "6년 전부터 지원제가 됐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다"며 "지원제가 아니라 징집제를 계속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편집자말).

문호영 안내원은 "대학 졸업을 하고 나서 평양에 있는 직장에 다니게 될 줄 알았는데, 그렇지 못했다"며 "세상에 제 생각처럼 되는 게 아니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의 말을 듣고 있노라니 참 꾸밈이 없고, 생활력이 강하면서도 여성스럽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자 남편이 또 한마디 덧붙인다.

함께 한다면 '사슴'과 '승냥이'도 친해질 수 있다

낚시를 좋아하는 문호영 안내원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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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처럼 되는 세상이 어딨어, 이 사람아. 그리고 평양이나 여기나 그게 그거지... 나 같으면 차라리 여기 있겠다. 부모님 함께 계시지, 바다 가까워 낚시도 매일 할 수 있지... 얼마나 좋아."
"어, 선생님 낚시 좋아하세요? 저 낚시 아주 좋아하는데요, 여기 고기 정말 많습니다. 뭐 잘 잡질 않으니까 바다에 나가면 물 반 고기 반입니다. 생선을 좋아하신다면 라진에는 정말 드실 것이 많습니다. 나중에 해산물 상점도 가보시고 장마당에도 가보시면 아실 겁니다."

"뭐? 여기서 장마당에도 갈 수 있다고?"
"네, 여기는 경제특구라서 원하시는 곳은 다 가보실 수 있습니다. 비자도 없이 들어오셨잖습니까. 대신 장마당에서 사진만 찍지 않으시면 됩니다."
"아니, 구경은 시켜주면서 사진은 못 찍게 하는 건 또 뭐야. 차라리 구경을 시키지 말든가... 이런..."

"그거는요, 선생님. 사람들이 관광객으로 가장해 들어와서는 장마당의 이상한 곳만 찍어 왜곡된 동영상을 인터넷에 올려놔서 그렇습니다."
"그래? 사실은 나도 인터넷에서 그런 것 몇 개 봤지. 그런데 물건은 살 수 있나?"
"그럼요. 사시고 싶은 거 다 사실 수 있습니다."

식당 진열대의 살아있는 게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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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슴 아저씨'와 함께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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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당에 갈 수 있다는 말에 나도 귀가 솔깃했다. 식사는 평양보다 훨씬 좋았는데, 아무래도 재료가 싱싱하기 때문인 것 같다. 상에 올라온 것은 주로 해산물 요리였는데, 냉동하지 않은 재료를 사용했단다. 그러나 우리 부부가 제일 맛있게 먹은 건 두부부침이었다. 내가 두부가 너무 맛있다고 하자 문호영 안내원이 평생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를 한다.

"아, 역시 조선음식 맛을 잘 아시네요. 여기가 두부로 유명합니다."
"두부로 유명하다니요?"
"여기서는 바닷물로 두부를 만듭니다. 또 콩이 아주 고소합니다."

창피한 이야기지만, 두부를 바닷물로 만든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어 문호영 안내원에게 물어볼까 하다가 남편에게 '그것도 모르냐'고 핀잔을 들을까봐 가만히 있기로 했다. 라진의 '바닷물 두부'를 꼭 기억해야겠다.

우리가 이번 여행 때 타게 될 승합차의 운전기사 아저씨는 남편과 동갑이었다. 사슴 같이 선한 눈을 갖고 있다. 마음씨 또한 연하고 선하다. 그러면서도 책임감이 상당히 강한 분이다. 차를 회사 차고에 대놓기 전에는 맥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았다. 남편이 아무리 꾀어도 넘어가지 않았다.

운전기사 아저씨는 예전에 포병 군관으로 일했다고 했는데,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나는 운전기사 아저씨를 '사슴 아저씨'라고 불렀다. 그분이 '사슴'이라면 내 남편은 '승냥이' 정도일 게다. 그러나 두 사람은 동갑내기여서 그런지 여행 내내 아주 가깝게 지냈다. '승냥이' 같은 남편은 '사슴' 같은 운전기사 아저씨를 정말 다정하게 대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그랬다니... 충격과 배신감이 확

옛 일본군 사령부였다는 나진-선봉의 남산호텔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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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마친 우리는 호텔로 돌아왔다. 문호영 안내원은 우리가 체류할 호텔이 옛 일본 관동군 소속부대의 사령부 건물이었다고 일러준다. 한눈에 봐도 옛 일본식 관청 건물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몹시 오래돼 보인다. 내부를 보니, 사무실을 객실로 개조만 했을 뿐 옛 모습 그대로인 듯하다. "이 사령부 건물로 무수히 많은 항일 독립군들이 잡혀 와 모진 고문 속에 취조당하며 죽어갔다"고 문호영 안내원이 말해준다. 그런데, 문호영 안내원이 놀라운 이야기를 꺼낸다.

"그 일본의 관동군이라는 부대에 조선 사람들도 장교로 복무했습니다. 만주를 휘젓고 다니면서 독립군들을 잡으러 다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후일 남한의 장군들이 됐으며, 한 사람은 대통령까지 됐습니다."

믿기지 않는 이야기다. 나는 남편에게 물었다.

"여보, 그 대통령이 누구예요?"
"박정희 대통령."
"뭐요?"

"당신이 존경한다는 바로 그분 말이야."
"박정희 대통령이 관동군이라는 그 부대의 장교였다고요?"
"그래. 박 대통령이 실제로 독립군 토벌에 직접 참가했는지는 몰라도, 하여간 그 관동군의 장교였대."

"징병에 끌려간 것이겠지요."
"그랬으면 좋으련만... 뭐 일본에 충성한다는 혈서를 쓰고, 일본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했다더군. 바로 그 일본 육사, 만주군관학교 출신의 조선인 일본군 장교들이 나중에 대한민국 국군 창설의 주요 구성원들이 됐고..."
"만주군관학교는 무슨 학교예요?"
"아, 이 사람, 내가 옛날에 그렇게 얘기해도 듣지도 않더니... 이제 그만하고 방으로 갑시다."

옛 일본군 사령부였다는 나진-선봉의 남산호텔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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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충격과 배신감으로 얼굴이 화끈거린다. 나는 어려서 박정희 대통령을 존경했다. 또, 교실에 걸려 있는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우면서 자랐다. 학교에서 이 헌장을 제일 먼저 외워 상을 받기도 했고, 학생을 대표해서 연단에 올라가 자랑스럽게 암송도 했다. 그런 박정희 대통령이 '혈서를 써 가며 적국의 사관학교에 들어가 적군의 장교가 돼 부역을 한 사람'이었다니... 그리고 훗날 대통령이 됐다니...

마치 나치 독일에 부역한 프랑스 출신 독일군 장교가 전쟁이 끝난 뒤 프랑스에 돌아와 프랑스 대통령이 되는 것과 같지 않은가. 또, 유대계 출신의 독일 나치 장교가 이스라엘에 돌아가 이스라엘 대통령이 되는 격 아닌가.

상하이의 우리 임시정부와 독립군들, 그리고 삼지연에서 본 빨치산 소녀 조각상이 떠오른다. 이 분들에게 박정희 대통령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인물이었을까. 아마 일본군들보다 더 미웠을지도 모른다. 독립군에 들어가는 대신, 혈서를 써 가며 적국의 장교가 돼 부역을 한 것도 조선 청년 박정희의 '불가피한 선택'이었는지 묻고 싶다.

문득 젊어서 독립운동을 하시다 감옥에도 가셨던 내 외할아버지가 떠오른다. 개신교 목사셨던 할아버지께서는 후에 제헌국회에 들어가셨으며, 자유당 정권이 무너질 때까지 국회의원을 지내셨다. 박정희 같은 이가 독립 후 창설된 대한민국 국군의 장교가 될 수 있었던 것에 대해 외할아버지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진다.

5월인데 함경북도의 밤은 춥기만 하다. 호텔방 역시 냉기가 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이 방에서 고문을 당하며 취조를 받았던 독립군 병사의 비명이 들리는 듯하다. 고통스러운 고문과 취조를 조선인 출신의 일본군 장교로부터 당했다는 생각을 하니... 이제는 가슴이 아리다.

내일은 어디를 가 또 무슨 말을 들을는지 겁부터 덜컥 난다.

 

 

중국에 팔려가는 북한 땅, 속이 쓰립니다
해변가 좋은 자리는 벌써 중국인들이 다 차지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 28] 라진-선봉 시내, 직접 돌아보니...

12.09.29 21:24l최종 업데이트 12.09.29 21:24l
저는 오래 전부터 음악을 공부하고,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오로지 음악에 관한 지식만을 가르쳐왔습니다. 지금은 평범한 주부이자 아이들의 엄마로 살고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과 함께 북한에 갔습니다. 호기심으로 떠난 여행이었지만, 저는 처음으로 우리 민족의 비극적 운명과 민족애를 느꼈습니다. 동시에 통일에 대한 염원이 생겼습니다. 2011년 10월 이후 지난 4월에 열흘 동안, 그리고 5월에는 3주 동안 라진-선봉을 비롯한 북한 전역을 여행했습니다. - 기자말

'새마을 운동' 떠오르는 라진시내

라진시내 모습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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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식사를 한 후, 우리 일행은 라진-선봉시를 구경하기 위해 바깥으로 나왔다. 여기저기서 주민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길거리 청소를 하고 있다. 예전 우리나라의 '새마을 운동'을 연상시킨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열렸네"라는 노랫말을 따라 부르며 친구들과 학교 앞 거리를 청소하던 생각이 났다. 라진-선봉시내에 무슨 노랫말의 노래가 울려 퍼지는지는 잘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이들도 노랫소리에 맞춰 열심히 길을 쓸고 있다.

평양에 비하면 아주 작은 초라한 도시지만, 모든 주민들이 일심단결해 도시를 일으켜 보고자 최선을 다하는 의지가 어느 도시보다도 생동감있게 살아 움직이고 있다. 라진-선봉에 대한 내 첫인상은 이렇게 깊게 다가왔다.

운전기사 '사슴' 아저씨가 아무리 닦아도 빛이 안 날 것만 같은 오래된 자동차를 정성스레 닦고 계신다. 우리를 보더니 아무 말 없이 함박 미소로 반가움을 전한다. 무슨 말이 필요하랴. 아저씨의 표정에서 따뜻한 마음을 모조리 다 읽을 수 있는데...

문호영 안내원은 라진-선봉 이곳저곳을 돌아볼 것이라며 덧붙여 말한다. 다정다감한 목소리, 자상하고 예의 바른 얼굴로 말이다.

"두 분께서는 평양을 비롯해 우리 조국의 기념비적인 훌륭한 곳을 이미 많이 구경하셨으니, 라진-선봉에서는 우리 인민들이 전하는 사랑의 마음을 듬뿍 가지고 가시기 바랍니다."

평안도 사람들이 남성적이고 시원시원하다면, 이곳 함경도 사람들은 여성적이고 아주 싹싹하다. 억양도 다정다감하고 몸짓 또한 그렇다. 그러니 시내 곳곳을 다니면서 마주치는 사람들에게서 상쾌함이 느껴진다.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생활력이 강하다는 느낌도 받았다.

평양에 비해 라진-선봉에서는 주민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는 기회가 많다. 우선 도시가 작고, 식당들도 평양에 비해 규모가 작아 현지 주민들 바로 옆자리에서 눈인사와 간단한 대화도 해 가며 식사를 할 수 있다. 분위기가 무척 자유롭다. 주민들도 외국인에 대한 거부감이라든가 수줍음이 덜 하다. 물론 우리 부부가 우리말로 대화하니 같은 '조선사람'이라는 생각에 그럴지도 모르겠으나, 자유무역지대라는 말에 걸맞게 분명히 평양보다는 아주 개방적이다.

대륙으로 통하는 관문, 라진

아파트 건물 왼쪽으로 개인 주택들이 보인다. 개인 주택들의 마당에는 예외없이 채소를 재배하고 있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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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는 도로 공사와 건물 신축으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현대식 빌딩 건설 현장을 볼 수 있었는데, 호주계 은행 건물이란다. 중국 측에서 건설 중인, 중국과 나선을 연결하는 도로가 시내를 관통하는지 차가 지나다닐 수가 없어 먼 곳에 차를 세워 놓고 걸어가야 할 때도 있었다. 우리는 그 점이 무척이나 좋았다. 시내 곳곳을 걸어가며 주택가를 지나칠 때도 있고, 사람들과 마주치며 눈인사를 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마치 우리도 이곳의 주민인 것만 같은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이곳도 아파트가 주를 이루고 있지만 평양에 비해서는 개인 주택이 눈에 많이 띈다. 집집마다 마당에 채소를 기르고 있다. 이것이 설경이가 사리원 가는 차 속에서 이야기했던 텃밭이 아닌가 싶다. 운전기사 '사슴' 아저씨도 마당에 채소를 기르는데 그 재미가 이만저만이 아니란다. 아파트에 사는 친구들이 아주 부러워한다고.

시내를 조금 벗어나니 철도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러시아에서 라진항 부두까지 연결하는 철도란다. 러시아의 철길을 북한의 철길과 연결하는 작업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북한의 철길 폭이 러시아의 그것보다 좁아 기존에 있는 북한 철길 위에 넓은 철길을 겹쳐놓는 식으로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

이렇듯 중국과 러시아가 라진-선봉에 활발한 투자 활동을 펼치고 있다. 게다가 중국 관광객들이 자가용을 몰고 관광을 오니 시내에서 중국 번호판을 단 차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심지어는 러시아 번호판을 단 차도 눈에 띈다. 이 두 나라가 라진항 부두를 50년간 임대했다는 것 같다. 중국과 러시아에게는 라진항이 꽤나 중요한가 보다. 중국은 국경선이 바다로 연결돼 있지 않으니 아예 바다로 나갈 수 없고, 러시아의 항구들은 겨울에 얼어붙어 무용지물이니 말이다. 이 항구를 통해 두 나라는 동해로 진출할 수 있다.

일제치하 당시 이곳에는 일본의 해군기지가 있었다고 한다.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라는 생각이 든다. 일본에게 있어 라진항은 중국과 러시아에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 다시 말해 없어서는 안 될 항구였을 것이다. 일본으로부터 군수 물자와 군인들을 실어 날르고, 돌아오는 길에 만주에서 수탈한 농산물이나 천연 자원을 일본 본토로 수송하는... 그야말로 '대륙으로 통하는 관문'이었을 게다.

생각의 시추선이 한국에게 닿는다. 중국·러시아·일본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라진-선봉이 똑같은 중요성을 가지고 있을 터인데... 선조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황금같은 조국의 땅과 바다를 기껏 남의 나라에 세나 받고 임대해주다니... 우리 정부와 기업들은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라진의 골목길, 동포의 정이 느껴집니다

문호영 안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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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생각으로 우울해져 있는 내 마음을 문 안내원이 전환시켜줬다. 여자친구와 전화 통화를 하는 모양이다. 부드럽고, 다정한, 상대의 애간장을 녹이는 다정다감한 말투로 통화를 나누고 있다.

"여자 친구인가 봐요?"
"네, 곧 결혼할 사람입니다."
"여자 친구는 뭘 하시는 분이세요?"
"의사인데, 제가 보기에도 진정으로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의사란 말입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제 어머님께 효성이 대단합니다. 그 점이 제일로 제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집사람이 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으면 그것만큼 불행한 일이 없지요. 어머니께만 잘하면 저는 뭐래도 괜찮습니다."

젊은 사람이 참 효자다. 휴대전화에 있는 여자친구의 사진을 보니 예쁘고, 얌전하고, 성실하게 생겼다. '남남북녀'라더니 그 말이 맞는 모양이다. 북한에는 정말 예쁜 여성들이 많다. 평양에서 성형수술을, 그것도 쌍꺼풀 수술을 한 여성들을 보긴 했지만, 그들은 소수였다. 대개 천연 미인들이다. 게다가 하고 다니는 모습들이 성실하고 정숙해 보인다. 화장법만 약간 달리한다면 남한의 여성들과 비교했을 때, 영화배우라고 해도 믿을 정도다.

남편이 라진-선봉에 온 기념으로 신선한 해산물을 점심때 먹자고 제안한다. 마침 점심 식사를 할 식당 근처에 수산물 가게가 있어 그곳에 들러 몇 가지 해산물을 사 식당에 가서 요리해 먹기로 했다.

해산물 가게 앞으로 도로 공사가 크게 진행되고 있었기에 한참을 걸어서 가야만 하는데 괜찮겠냐고 문 안내원이 묻는다. 오히려 동네 구경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기꺼이 그러자고 했다.

이곳 동네 주민들로 보이는 사람들과 함께 골목길을 걸어 주택가로 접어드니 마치 우리도 이곳의 주민이 된 것마냥 이들의 마주하고 있는 일상에 하나가 됨을 느낀다. 예쁜 구두를 신고 비포장도로를 조심조심 걷는 아가씨도, 진흙탕에 빠지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피해 가며 걸어가는 여학생들도, 커다란 보따리를 이고 지고 마음이 급했는지 성큼성큼 걸어가는 아주머니도, '첨벙첨벙' 일부러 흙탕물을 튀기면서 신이 나 있는 장난꾸러기 아이들도... 모두 내가 살아온 지난 시절의 정겹고 익숙한 모습들이다.

집집마다 자그마한 텃밭에는 각종의 야채를 심어 놨다. 문 안내원의 집 앞마당에도 텃밭이 있는데, 어머니가 야채를 길러 장마당에 가져다 파신단다. 문 안내원이 어머님께 '이제는 아들이 편히 모실 테니 집에서 쉬시라'고 아무리 말려도 "집에서 쉬면 되레 몸에 병이 생기니까니 운동 삼아, 재미 삼아 장마당에 나가서 사람구경도 하고 얘기도 나누는 게 더 좋다'라고 하시며 매일 장마당에 나가신다고 한다.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며 정신없이 동네 구경을 하다 보니 어느새 해산물 가게 앞에 와 있다. 가게 안에서는 중국 사람들이 싱싱한 해산물을 고르고 있고, 옆에는 안내원으로 보이는 이가 통역을 하고 있다. 우리처럼 이들도 해산물로 점심 식사를 하려나 보다. 우르르 들이닥쳤던 중국 관광객들이 나가고 나니 해산물 가게 안에는 금세 적막감이 돈다. 우리 부부는 살아있는 대게와 해삼·멍게·소라 등을 샀다. 이곳에서 해산물을 파는 아가씨들이 먼저 말을 건넨다.

"오마야, 우리 말을 하시는 것을 보니 동포이신가 봅니다. 어디서 오셨나요?"
"미국에서 왔어요."
"주로 중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오는데, 우리 동포분들을 뵈니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겠습니다."
"해외동포들은 많이 오질 않는가 봐요?"
"재일동포들이 좀 오고, 가끔 재미동포들도 오기는 오는데 워낙 중국 관광객들이 많다 보니까... 맛있는 해산물 많이 많이 드시고 가십시오. 저희들이 최고로 좋은 것들로 골라 드리갔습니다."


세 아가씨가 "이것이 더 좋아 보이지 않네?" "아니, 그것은 어제 들어온 거야"라며 정성을 다해 해산물을 고른다. 조금 전 중국 사람들에게 할 말만 몇 마디 던졌던 아가씨들의 모습이 아니다.

동포라는 것. 이것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정이 솟아오른다. "함께 사진 찍자"고 하니 금세 머리를 다듬는다. 밝고 명랑한 우리네 젊은 딸들임이 분명하다. 이들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처져있던 내 마음에 힘이 솟는다. 남이든 북이든 젊은이들의 생기발랄하고 당당한 모습 속에서 남북의 미래가 밝게 잡히는 듯하다. 내 마음에 생기가 흐르니, 비릿하게 느껴졌던 해산물 냄새가 싱그럽고 달콤한 냄새로 바뀐다. 해산물 냄새에 입맛이 돋는다.

"다시 또 만나자"며 수차례 인사를 되풀이한 뒤 우리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자동차로 걸어왔다. 그새 되돌아오는 길이 익숙해진다. 문 안내원과 남편보다도 훨씬 더 앞장서서 씩씩하게 걸어왔다.

슬프도록 아름다웠던 동해, 이젠 다르게 느껴져

금방 잡아 올린 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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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기사 '사슴' 아저씨가 "모셔다 드리지 못해 얼마나 마음이 불편했는지 모릅니다. 험한 길, 잘 다녀오셨습니까. 신발은 괜찮습니까?"라며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우리를 맞는다. 이렇게 사랑스럽고 친절한 마음씨를 가지고 있는 북녘 동포들과 하루빨리 한 데 어우러져 잘살아갈 날을 또다시 소원하며 기도한다.

우리가 사온 싱싱한 해산물을 주방 아주머니께 드리니 삽시간에 뚝딱 다듬고 쪄서 상에 내놓는다.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돈다. 해산물 외에도 몇 가지 다른 요리를 주문했다. 이곳 식당의 자랑이라는 '가자미식해'와 '북어무침'은 밥 도둑이었다. 밥 한 공기가 금세 뚝딱 사라진다. '오리지날' 함경도 가자미식해라 그런지 괜스레 평양에서 먹었던 것보다 훨씬 맛있게 느껴진다.

지난해 처음 북한을 여행하면서 봤던 동해안은 슬프도록 아름다웠다. 그러나 지금 북한 동포들과 해산물을 나눠 먹으며 느끼는 풍요로운 동해안은 '기쁘도록 아름다운' 모습으로 내 머릿속에 남게 될 것이다.

남자들은 맥주을 마시며 이야기에 깊숙히 빠졌다. 왼쪽부터 관광회사 간부, 남편, 운전기사 '사슴' 아저씨, 문호영 안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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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가의 건어물 상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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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말없이 밥 한 공기를 해치우고 있는 사이, 남성들은 해산물을 안주 삼아 사람 사는 이야기, 경제 이야기, 그리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느라 정신이 없다. 오늘 안으로 이야기가 끝날 수 있을는지... 이럴 때 설경이라도 옆에 있으면 심심하지 않고 재미날 텐데... 설경이는 지금쯤 모자를 덮어쓴 채 내가 준 BB크림을 바르고 '모내기 전투'에 동원돼 나가 있겠지.

다음 행선지로 가는 차 안에서도 끝이 나지 않는 남성들의 수다는 마침내 해변가에 도착해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나서야 끝났다. 남성들이 낚싯대를 빌려 낚시를 하는 동안 나는 건어물 가게에 들렀다. 질 좋은 건어물들이 매우 탐스럽게 진열돼 있다. 마음 같아서는 모조리 다 사고 싶었으나 미국까지 먼 길을 가야 하기 때문에 몇 가지만 엄선해야 했다. 매일같이 많은 중국 관광객들이 들어와서 물건이 모자랄 지경이란다.

값싸고 질 좋은 수산물들은 거의 다 중국에서 수입해 가는 것 같다. 심지어는 해변가의 해산물 식당에도 중국 관광객들이 북적인다. 중국에서 하루면 닿을 수 있는 곳이니 아침에 들어와 값싸고 신선한 해산물을 잔뜩 즐기고, 해변가를 거닐다가 저녁이 되면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많단다. 남녘의 동포들은 한 나라임에도 자유롭게 와 볼 수 없는 곳인데, 중국인들은 마치 자기네 집 드나들 듯하니 속이 또 상한다.

엉성한 낚싯대로 물고기를 유인하니 물고기가 낚싯밥을 물지 않는다며 남편이 불평불만을 털어놓는다. "집에 있는 낚싯대를 들고 꼭 다시 라진-선봉에 낚시하러 올 것"이라고 문 안내원에게 호언장담을 한다. 단단히 벼른 모양새다. 문 안내원은 "선생님, 이 엉성한 낚싯대로 물고기를 잡아야 실력이 있는 겁니다. 제가 한 번 잡아볼 테니 잘 보십시오"라며 큰소리를 치며 낚싯대를 드리운다. 아무리 기다려도 낚싯대가 움직이지 않는다. 남편의 막말이 또 시작된다.

"이 사람아, 그 낚싯대로는 죽어도 못 잡아. 아무리 여기 고기가 많다고 해도 그렇지, 어디서 붕어 낚싯대로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으려고 해!"
"아닙니다, 선생님. 제가 어렸을 땐 나뭇가지 꺾어 실을 매달아도 잘 잡았습니다."
"이런... '나뭇가지'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빨리 가자."
"선생님, 10분만요."

남편이 웃으면서 "낚시 좋아하는 사람들은 목욕탕만 봐도 낚싯대를 드리운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30분을 줄 테니 잡아 봐"라고 한다. 그 사이에 본격적으로 낚시를 다시 하러 올 심산인지 문 안내원에게 여러 가지를 물어본다.

곡식만 충분하다면 참 풍요로운 곳이 될 텐데...

남편과 함게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문호영 안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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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로 낚시 여행을 오려고 하는데... 배는 빌릴 수 있나?"
"네. 전마선도 있고 작은 목선들도 있습니다."
"모터는 달려 있어?"
"작은 목선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모터는 필요 없습니다."

"이 사람아, 모터가 필요 없다니... 파도 속에서 노를 저으면서 바다낚시를 하란 말이야? 생각하는 거 하고는..."
"파도가 왜 있습니까. 노 젓고 바로 앞에 나가서 잡는데요. 해안가에서 100미터만 나가도 고기가 우글우글합니다."
"에이, 이런 '새빨간' 거짓말하고는... 하여간 낚시꾼 허풍은 남이나 북이나..."
"선생님 제가 좀 있다가 사람들이 재미삼아 고기 잡는 데로 모시고 갈 테니 가서 보세요."


우리는 걸어서 모래사장이 있는 곳으로 갔다. 수심이 얕은지 사람들이 그물을 갖고 10미터 정도 거리의 바다에 들어가 고기를 잡고 있다. 사람들은 금방 상당히 큰 숭어 여러 마리를 잡아 나온다. 문 안내원이 라진 앞바다에는 정말 고기가 많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바위 틈새에도 멍게 같아 보이는 것들과 조개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곡식만 충분하다면 참 살기 좋고, 풍요로운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점령당한 라진-선봉, 속이 상했습니다

라진의 아름다운 해변가에 자리잡고 있는 오성급 중국 카지노 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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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가를 거닐다 보니 저 멀리 궁전 같은 건물이 해변가를 끼고 멋지게 서 있다. 저게 뭐하는 건물이냐고 물어봤다. 문 안내원의 설명에 따르면 홍콩 사람이 지은 5성급 카지노 호텔로 중국 사람들이나 외국인들만이 들어갈 수 있단다. 저 카지노 호텔 때문에 수많은 중국인들이 재산을 탕진해 중국 당국에서 중국 사람들의 출입을 금지했던 적이 있다고 한다. 호텔 옆에는 마치 '영빈관' 같이 생긴 웅장한 기와집이 있다. 저 집은 또 뭐냐고 물어봤다. 문 안내원은 풀이 죽은 목소리로 "저 집은 중국 사람이 운영하는 전당포인데, 카지노에서 돈을 잃은 중국 관광객들이 이용합니다"라며 씁쓸한 표정을 짓는다. 문 안내원은 속이 상했는지 계속 말을 이어 간다.

"저것뿐만이 아닙니다. 해변가를 따라 좋은 자리들은 벌써 중국 사람들이 다 차지했습니다. 그래서 신 선생님 친지분이신 '구리스' 선생께서 어떻게 해서든 나쁜 비즈니스를 하려드는 중국 기업들을 막으려고 동분서주하고 계십니다. 그뿐 아니라 '구리스' 선생은 중국 사람들이 들여오려는 공해 산업을 막기 위해 인민위원회 등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애쓰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우리나라를 위하는 마음으로 기업에 투자할 외국인이나 해외동포들을 찾으러 다니시는 것 같습니다. 동포에 대한 사랑이 넘치는 분이시지요."

순간, 내 자신이 부끄러워짐과 동시에 우리 동생네 부부가 자랑스럽고 또 존경스럽다. 착잡한 마음을 안고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서 우리가 머무는 호텔 앞 식당에 갔다. 밥맛이 없어서 간단하게 국수나 먹으려고 차림표를 보니, 옥수수 국수가 있어 그것으로 주문했다.

또 차림표에는 잣죽이 있었는데 가격 단위가 모두 인민폐로 적혀 있다. 우리나라 돈으로 1000원도 안 되는 잣죽에 잣을 얼마나 많이 넣었는지 무척 고소해 금방 물릴 지경이었다. 별 기대하지 않고 주문한 옥수수 국수의 맛 역시 일품이었다. 국물맛도 일품이었지만, 적당히 쫄깃하면서도 구수한 면은 내 입맛을 매료시키고 말았다. 이날 이후로 우리 부부의 식사 메뉴에는 '동해 바닷물로 만든 두부'와 '함경도에서 나는 옥수수 국수'가 꼭 자리 잡게 됐다.

옥수수 국수 맛에 잠시 착잡해져 있던 마음을 추스르고 호텔로 돌아와 커피숍 안에 들어가 보니 반가운 사람이 와 있었다. 크리스가 미국에서 온 동포로 보이는 사람과 미국인으로 보이는 이들에게 뭔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다. 문 안내원이 말했던 것처럼 이런저런 일로 동분서주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크리스는 우리 부부를 발견하고는 반가워 어쩔 줄 몰라한다. 내 동생과 조카들이 우리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단다. 어서 가서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런데, 남성들의 이야기가 심상치 않다. 금방 끝날 것 같지 않아 나 먼저 방으로 돌아왔다. 예전, 어린 시절에 흔히 볼 수 있었던 추억의 '꽃무늬 밍크 담요'가 가지런히 전기장판 위에 놓여 있다. 따뜻하게 잠들기를 바라며 정성스레 가져다 놨을 이의 배려가 마음 깊게 느껴진다. 오늘 밤은 이 추억의 '밍크 담요'와 함께 포근하고 따스하게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없는 게 없는 북한 '장마당'... 입이 딱 벌어졌다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 29] 라진 장마당, 그리고 외국어중학교

12.10.05 14:57l최종 업데이트 12.10.25 15:05l
저는 오래 전부터 음악을 공부하고,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오로지 음악에 관한 지식만을 가르쳐왔습니다. 지금은 평범한 주부이자 아이들의 엄마로 살고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과 함께 북한에 갔습니다. 호기심으로 떠난 여행이었지만, 저는 처음으로 우리 민족의 비극적 운명과 민족애를 느꼈습니다. 동시에 통일에 대한 염원이 생겼습니다. 2011년 10월 이후 지난 4월에 열흘 동안, 그리고 5월에는 3주 동안 라진-선봉을 비롯한 북한 전역을 여행했습니다. - 기자말

첫날은 잠을 설쳤는데 어젯밤은 숙면을 취해서 그런지 아침을 맞는 기분이 아주 상쾌하다. 게다가 오늘 일정에는 '장마당' 구경이 들어가 있어 흥분된다. 평양에 있는 장마당들이 훨씬 크고 볼거리도 많다지만, 평양에서는 장마당 구경이 관광객들에게 허락되지 않는다. 그러니 라진-선봉에서의 장마당 구경이야말로 우리에게 있어서 특별한 경험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무척 기대된다.

호텔 로비에 내려가니 문호영 안내원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린다. 어제보다 한층 더 나긋나긋한 목소리다. 좋아서 입이 귀에 걸리는 걸 보니 틀림없이 여자친구와 통화를 하는 듯. 문 안내원은 우리를 보더니 서둘러 전화를 끊는다.

"여자 친구인 모양인데 왜 그렇게 빨리 끊어요... 더 얘기 나누지."
"일 없습니다. 어제저녁에 여자친구가 저희 어머니를 뵈러 제집에 갔었답니다. 그 얘기를 듣고 있었어요. 다 들었습니다."


"언제 결혼할 예정이에요?"
"당장에라도 하고 싶은데, 제가 곧 진급 시험을 쳐야 해서..."
"진급시험이라니요?"
"관광 안내원들도 단계별 승진을 위해 치르는 시험이 있는데, 공부가 준비되면 평양에 올라가 시험을 쳐야 돼요. 그리고 시험에 통과하면 한 급 올라가는 겁니다."


'시험과목은 무엇무엇이 있느냐'고 물어보니 외국어와 국사, 세계사 등이 있단다. 생각해보니 지난번 평양에 갔을 때 설경이도 시험공부를 한다며 영어로 돼 있는 잡지를 읽고 있었다. 아마 시험 준비를 했나 보다. 설경이는 여행사에 근무한 지 5년이 됐으니 아마 꽤 높은 급수의 시험을 준비하고 있지 않았나 싶다.

"시험 준비뿐만 아니라 여자친구도 전공할 과를 정하기 위해서 시험 준비를 해야 하는데, 둘 다 그 과정이 끝나면 식을 올리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문호영 안내원의 얼굴은 희망에 부풀어서 그런지 훤한 낯빛을 띠고 있다. 우리는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하며 장마당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남편이 묻는다.

국가도 신경 쓰지 않았던 장마당, 최근에 커졌다

라진시내 풍경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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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당이라는 것이 언제부터 생겼나?"
"장마당은 예전부터 있었습니다. 그런데 리용하는 사람도 별로 없고 그러니 규모도 아주 작았습니다. 인민들도 '충분히 배급 주는데 뭐가 더 필요하다고 장마당까지 가서 물건을 사느냐'며 장마당에 출입하는 사람들을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 또 국가에서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사회주의가 완전히 자리 잡으면 장마당은 저절로 없어질 테니까요.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최근에 규모가 커지게 된 겁니다."

"규모가 커졌다면, 동시에 배급이 그만큼 안 된다는 이야기 아닌가?"
"요즘은 기업소마다 스스로 해결해야지 예전처럼 국가가 무조건 다 챙겨주지 않습니다. 우리 회사도 이익금의 30%를 국가에 내고 나머지로 봉급 주고 농산품 등을 구입해 자체 배급하곤 합니다. 그러니 자연히 장마당을 리용할 수밖에 없지요. 그렇게 된 지 꽤 됐습니다."
"여기 장마당은 큰가?"
"글쎄요... 어느 정도를 크다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네요. 그저 하루에 이용객이 만 명
정도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는 깜짝 놀랐다. 여기 인구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는 없지만 하루 이용객이 1만 명이라면, 1주일에 7만 명이 이용한다는 것과 같다. 1주일에 장을 한 번만 본다고 가정하고, 한 가구당 식구를 네 명이라고 했을 때 라진의 장마당은 28만 명에게 생활필수품을 공급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순간, 나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인터넷에서 본 장마당의 대부분은 상인들이 양동이에 물건을 담아 길거리에 쭉 늘어앉아 팔고 있는 곳이었다. 심하게 말하면 빈민굴 같은 모습이었는데 하루에 1만 명을 수용한다니... 믿기지 않았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장마당으로 향했다. 문호영 안내원이 다시 한 번 주의를 준다. 하도 친절하게 이야기하길래 주의라기보다는 부탁에 가까웠다.

"저... 선생님, 그리고 여사님. 사진은... 좀 부탁드립니다. 저도 찍게 해드리고 싶은데..."
"그러면 카메라를 아예 놓고 갈까요?"
"에이, 그러실 것까지는 없습니다. 카메라를 메고 가셔도 되는데 사진만은 좀..."
"그럼요. 걱정 마세요, 안 찍을 테니까."
"아이고, 고맙습니다."


초라해 보이는 골목 시장... 이게 전부가 아니었네

우리를 태운 승합차가 장마당 입구인 듯한 곳에서 멈춰 섰다. 여기서부터는 자동차가 못 들어가게 돼 있단다. 장마당 입구는 내가 인터넷에서 본 것과 아주 흡사했다. 다만 규모가 훨씬 크고,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또, 물건이 담겨 있는 양동이는 인터넷에서 본 것보다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컸다. '어떻게 저걸 머리에 이고 나왔을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 그래도 그렇지 이 정도 규모의 장마당이 하루에 1만 명을 수용한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 같았다. 나는 문 안내원에게 물었다.

"이 시장을 하루에 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이용한단 말인가요?"
"네. 어떤 때는 만 명도 더 된다고 합니다."
"아니 어떻게 이런 골목에 만 명을 수용한단 말이에요?"

"아, 여기는 그저 입구입니다. 사실은 여기는 시장이 아니고 길거리입니다. 안으로 더 들어가면 실내와 실외로 구분돼 있는 시장이 나옵니다. 그곳에서 장사를 하려면 자릿세를 내야 해서 돈을 내기 싫은 사람들이 이곳 길거리에다가 물건을 진열해 놓고 파는 겁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내가 본 이 골목이 시장의 전부였다면 무척 가슴 아픈 일이 될 테니까.

입구서부터 북적북적한 것이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긴다. 장마당 입구 도로변을 따라 자리를 잡고 물건을 파는 사람들은 주로 할머니나 아줌마들이다. 그들은 문 안내원의 어머니처럼 집에서 소일거리로 만들었거나 재배한 야채·푸성귀·떡·감자나 고구마 삶은 것·각종 음식·생선류 등을 팔고 있다.

자세히 보니 물건을 팔기만 한다는 것보다는 서로 나눠 먹기도 하고, 사람 지나다니는 것을 구경하기도 한다. 그러다 간혹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건을 팔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다. 우리 부부가 지나가니 "하나 먹어보시오"라며 수줍게 떡을 건네기도. 어린 시절 엄마 따라 시장에 갔던 기억이 난다.

"문 안내원 어머님은 어디 계세요?"
"그러지 않아도 찾아보면서 걷고 있는데, 오늘은 안 나오신 것 같습니다. 매번 저 자리에 계셨는데 안 보이시는 걸 보니 말입니다."

문 안내원이 어머니가 늘 계시던 곳을 손으로 가리킨다. 도로변을 조금 지나가니 상점들이 죽 늘어서 있다. 벽지가게·타일가게·장판가게·목공소·철공소 등등. 주로 전문적인 물품을 다루고 있는 상점들이다. 그곳을 지나치니 또 다른 입구가 나온다. 장마당 입구인 것 같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한마디로 굉장하다. 예전 서울의 동대문 시장이나 남대문 시장 정도의 크기로 보인다. 물론 수준도 예전 한국의 시장들과 비슷해 보인다. 그래도 이 정도 시장이 북한에 있다니 정말 다행이다 싶다.

장마당은 실내와 실외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우리는 실내에 먼저 들어갔다. 모든 연령층의 옷가지를 비롯해 운동화·구두·갖가지 액세서리와 전기·전자 상품들, 그리고 화장품과 주방 도구·침구·귀금속·휴대전화 액세서리까지... 없는 게 없다. 입이 떡하고 벌어져 다물어지지 않는다. 장마당 안에 있는 제품 대부분은 중국산이다.

화장품 가게가 모여있는 코너를 둘러보며 지나가는데 한 아가씨가 애타게 우리 일행을 부른다. 무슨 일인가 하고 다가갔다.

"손님께서는 다른 곳에는 주름이 전혀 없는데 눈가에만 주름이 조금 있네요. 눈가 주름만 없으면 20대라고 해도 믿겠습니다. 오늘 아주 좋은 '주름 펴는 크림'이 들어왔는데 하나 구입하시라요."

장사 수완이 대단하다. 어떻게 내 약점을 단번에 짚었는지... 아가씨가 권하는 제품이 어떤 건지 보니 미국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아이크림이다. 뒤에 중국어가 적혀 있는 종이가 붙어있는 것으로 보아 중국을 통해 북한에 들어온 것 같다. 하나라도 사주고 싶은 마음에 "이 화장품은 미국 제품이네요... 저는 미국에서 왔거든요. 그러니 미국제품 말고 조선 화장품을 하나 보여 주시겠어요?"라고 했다. 그랬더니 "우리나라의 질 좋은 인삼을 넣어 만든 제품"이라며 북한 화장품을 보여준다. 나는 흔쾌히 그 제품을 샀다.

돈은 인민폐로 지불했다. 상인들에게 가격을 물어보면 아예 인민폐 단위로 말해준다. 화폐교환소가 있는데도 수많은 사람들이 인민폐를 주고받는다. 종종 북한 화폐로 거래하는 사람들도 보이긴 하지만. 그런데, 화장품을 사고 있는 동안에 문 안내원과 남편이 사라졌다. 어떻게 된 일인가 싶어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장마당에서 산 '붉은 별 모자'

장마당에서 산 '붉은 별 모자'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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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한 모자집 앞에서 주인아줌마와 한바탕 웃으며 모자를 사고 있다. 문 안내원은 휴대전화 액세서리를 파는 가게 앞에서 여자친구와 짝으로 달고 다닐 휴대전화 액세서리를 고르고 있다. 내가 옆에 다가간 것도 몰랐던 문 안내원은 판매원에게 여성들의 취향을 물어본다. 고르는 모습이 참 귀엽게 느껴지는 게 영락없이 우리네 젊은이들 같다.

남편은 붉은 별이 달려 있는 둥근 모자를 기념품으로 샀다. 지난해 평양 거리에서 처음 보고 놀랐던 바로 그 모자. 북한 말투를 흉내 내면서 모자를 써보는 남편의 모습이 우스운지 아주머니들이 소리 내 웃고 있다. 나도 가게에 들러 같은 모자를 샀다. 우리 부부는 외국 여행을 갈 때면 으레 그 나라 고유의 모자를 사곤 했다. 그 모자를 쓰게 되면 현지 사람들이 친근하게 다가와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곤 했다.

낯선 사람에게 호기심을 드러내는 것은 어느 나라 아주머니들이나 다 같은가 보다. '어디서 왔느냐' '자식은 몇이냐' '자식들 나이는 어떻게 되느냐' '부인 나이는 어느 정도인가' '직업은 뭔가' 등등. 질문이 끊이질 않는다. 우리는 '남쪽에서 태어난 미국 동포'라고 하니 아주머니들은 "멀리서 오신 귀한 우리 동포"라며 모자 가격을 깎아 주겠단다. "마음은 고맙지만 괜찮다"며 극구 사양한 뒤 우리는 그 자리를 뜰 수 있었다.

마음먹고 사진을 찍으려면 얼마든지 찍을 수 있는 기회는 많이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너무나도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문 안내원과의 약속을 지키기로 했다. 이런 곳에서 사진을 못 찍게 하다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음에는 정식으로 당국자들의 허락을 받아 꼭 장마당 사진을 찍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바깥으로 나와 실외 장터를 구경하기로 한다. 실외 장마당은 실내보다 더 크다. 각종 곡류를 비롯해 야채·나물·과일·견과류·생선·해산물·육류·향신료 등 갖가지 품목들이 즐비하게 모여있다. 나는 산에서 직접 캐온 나물들을 사고 싶었다. 향긋한 산나물 향기가 실외 장마당을 온통 뒤덮고 있다. 우리는 북한산 잣 두 봉지를 샀다. 하루 동안 이 장마당을 오가는 사람이 1만 명이라고 하니, 라진에 살고 있는 사람은 일주일에 한두 번씩은 다녀가지 않겠나 싶다.

평양에는 라진의 장마당보다 예닐곱 배나 더 큰 시장이 여러 개 있다고 한다. 장마당 경제가 북한 전역에 퍼져 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중국이 장마당의 공급자 역할을 하고 있는 듯하다. 대신 북한은 외화 확보를 위해 광물자원이나 수산물 등 1차 산업 품목들을 중국에 수출하는 것 같다. 남편은 "북한이 경제봉쇄로 인해 국제시장에 진출할 길이 없다는 것을 잘 아는 중국이 철광석 등의 천연자원을 헐값에 사고 있는 게 아닐까"라며 의문을 제기한다. 두 눈으로 살펴본 북한 장마당,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북한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나진에 있는 외국어 중학교. 학생들이 체육수업을 받고 있다. 학생들이 영어가 적혀 있는 모자를 쓰고 있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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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장마당에서 산 '모택동 모자'를 쓰고 다음 행선지인 외국어 중학교에 가기 위해 시장에서 걸어나왔다. 우리가 모자를 쓴 모습이 우스꽝스러운지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우리를 쳐다보며 웃는다. 그때마다 우리는 손을 흔들었다. 북한 동포들도 손을 흔들어 인사에 답한다. 이것이 북한동포들과 우리가 나눈 '간접 커뮤니케이션'이었다.

우리가 닿은 외국어 중학교는 우리나라의 외국어 고등학교와 같은 곳이다. 이곳 라진-선봉이 국제무역특구인 만큼 지역의 특성을 살려 외국어 교육에 박차를 가하고 있단다. 학교에 도착하니 운동장에서 학생들이 체육 수업을 받고 있었다. 언뜻 보니 학생들이 태권도 혹은 태권도 동작을 응용한 체조를 하고 있는 듯. 외국어 중학교에는 두 명의 덴마크인 부부, 두 명의 미국인 부부, 그리고 시애틀에서 왔다는 40대 재미동포 여성이 있었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 영어반 수업 참관을 위해 기다렸다. 그러자 교장 선생님이 오시더니 우리에게 정중하게 말을 건넨다.

나진에 있는 외국어 중학교 영어반 교실. 녹음기, 헤드폰 등이 준비돼 있었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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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신 발걸음을 해주셨는데, 오신 김에 우리 학생들과 영어로 대화를 나누시면 참으로 고맙겠습니다. 외국 사람들과 함께할 기회가 드물다 보니, 오늘 학생들이 여러분들과 영어회화 실습을 해보기를 희망합니다. 함께 수업에 동참해주시면 영광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 일행은 기꺼이 그러겠노라고 대답하며 곧바로 교실로 향한다.

교실 안에는 20여 명의 학생들이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우리와의 만남을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학생들에게 영어로 자기소개를 해보라고 한 뒤, 조를 짜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마련했다. 그들이 궁금해하는 점들을 우리에게 물어보면 우리가 대답해주고, 또 우리가 아이들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 또는 듣고 싶은 것을 질문하면 그들이 답하는 식으로 대화를 이끌었다.

나진에 있는 외국어 중학교 영어반 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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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의 영어 실력은 아직 많이 모자라 보였지만, 나름대로 또박또박 표현하는 모습에서 어린 학생들의 자신감과 당당함, 그리고 자신들의 앞날에 대한 목표와 열정이 대단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영어로 대화를 나누는 순간, 이곳이 북한이라는 것을 또 망각하게 되기도. 이 아이들이 성인이 돼 나라의 미래를 책임지게 될 때를 생각해본다. 분명 희망찬 미래가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아이들은 우리에게 영어 노래를 불러줬는데, 놀랍게도 one little, two little, three little Indians..."라고 시작하는 미국 노래를 불렀다. 나는 학생들에게 "나도 어렸을 적 영어 시간에 이 노래를 부르면서 영어를 배웠단다"라고 말해줬다.

나는 학생들에게 내가 지난 4월 평양에서 불렀던 북한 노래 한 곡을 영어로 번역해 불러줬다. 이를 듣고 있던 선생님 한 분이 우리에게 다가와 연필과 종이를 건넨다. 영어로 된 노랫말을 적어달란다.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하다. 북한에서 어린 학생들과 함께 수업을 할 수 있다니... 예상치 못한 귀중한 경험이었다.

언젠가 시간을 내 북한 학생들을 가르쳐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꼭 그렇게 하고 싶다. 평양이나 이곳의 음악학교를 알아봐야겠다. 북한의 농작물 개량을 위해 북한에 살다시피 하시는 '목화 할머니' 김필주 박사님께 여쭤봐야겠다. 그런데, 눈물이 나 수업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는지...

'무시무시한 배' 만경봉호

재일동포 북송선이었다는 만경봉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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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벗어나 라진항 부둣가로 향한다. 남편은 부두에 정박해 있는 배 한 척을 보더니 깜짝 놀라며 카메라를 들이댄다. 배에는 '만경봉호'라고 적혀 있다. 남편에게 물었다.

"저 배를 아세요?"
"그럼! 학교에서 무시무시한 배라고 배웠지."
"무시무시한 배라니요?"
"저 배가 북한과 일본의 니이카타항을 오가며 재일동포들을 강제 북송했다고 배웠어. 근데 저 배가 아직도 있네."

"강제 북송이라니요?"
"글쎄... 나도 잘은 몰라. 일본서 차별받고 살던 동포들이 저 배를 타고 북한으로 귀국했다지? 학교에서 선생님 말씀이 북한이 강제로 재일동포들을 싣고 북송했다는 거야."

"아니, 일본에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강제로 배에 실을 수가 있어요?"
"나도 몰라. 나중에 얘기해."


남편이 운전기사 '사슴' 아저씨에게 물었다.

"아니, 저 배가 어떻게 나진항에 정박해 있어요?"
"아, 네. 저 배가 중국 관광객을 싣고 금강산을 가기 때문에 여기 있습니다."

남편은 뭐가 그리도 신기한지 사진을 연식 찍는다. 아마 어려서 들은 것이 기억 속에서 잊히지 않는 모양이다.

대형스크린 켜지자 아이들이 모이고...

호텔 앞 공터. 텔레비전 스크린이 설치돼 있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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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앞 공터에서 아이들이 정면에 설치된 텔레비전 스크린을 주시하고 있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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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어두워지니 호텔 정면에 붙어있는 스크린에서 텔레비전이 방영된다. 호텔 앞 공터를 오가는 사람들이 이를 재미있게 지켜보고 있다.

호텔로 돌아온 우리는 커피숍에서 내일로 예정된, 내 사촌 여동생 부부와 조카들이 살고 있는 '신해리' 농장 방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공식적으로는 '북한생활 체험학습'이다. 문 안내원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며 내게 말을 건다.

"아니 '체험학습'인지 뭔지 하는 로동을 왜 일부러 하려고 하는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리해가 안됩니다."
"그것은 자기가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을 해 봄으로써 삶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려는 의도지."

"로동은 필요에 의해 하는 게지 인생을 리해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려면 차라리 '로력 동원'에 나가면 간단할 것을..."
"우리한테는 그런 기회가 없잖아."
"아니, 그냥 해본 말입니다. 그런데 내일 가시면 로동일을 하셔야 되는 것은 알고 계시죠? 쟁기로 밭도 갈고, 염소젖도 짜야 되고..."
"응. 알고 있어."
"아, 난 정말 리해가 안되네요. 오랜만에 가족을 만나면 재미있게 얘기하며 노는 거지, 로동을 왜... 참 리해를 할 수 없네요."


도저히 설명할 방법이 없다. 한창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중국팀 안내원이 종이 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신이 나서 들어와 우리 옆에 앉는다. 문 안내원이 '종이 가방 안에 든 게 뭐냐'고 묻자 중국팀 안내원이 기분 좋게 대답한다.

"내일 아침 행사 때 딸아이가 입을 건데, 아슬아슬하게 시간에 맞춰 도착했어. 청진에 출장 가는 사람에게 부탁했지. 그곳에 있는 전문 옷집에 주문한 거야. 조금 있다가 애 엄마가 가지러 올 거야."
"어디 좀 꺼내 보기요."

중국팀 안내원이 딸에게 행사 때 입히기 위해 특별히 청진에서 맞춰 왔다는 여군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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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팀 안내원은 옆구리에 끼고 있던 종이 가방 안에서 그야말로 깜찍하고 앙증맞은 여자 군복을 꺼낸다. 사랑스러운 딸이 입을 생각을 하는지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중국팀 안내원은 딸아이의 피아노 솜씨를 자랑하려고 휴대전화에 저장된 동영상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 아이, 피아노 신동이다. 방 조카의 딸은 무용, 이 중국팀 안내원의 딸은 피아노의 신동... 내 주위에는 왜 이리도 신동들이 많은지. 아빠들이 자랑할만하다. 자식을 생각하며 흐뭇해하는 모습에서 아버지의 깊고 은은한 사랑이 느껴진다. 참 보기 좋은 풍경이다. 덩달아 내 마음도 행복해진다.

오늘 밤에는 전기장판을 틀지 않아도 포근한 마음에 잠이 잘 올 것만 같다. 드디어 내일, 그토록 보고 싶은 사촌 동생네 가족을 만나러 신해리에 간다. 생각만 해도 심장이 두근두근. 기분이 좋아진다.

 

 

북 안내원에게 '아오지' 보내달라고 했더니...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 30-끝] 라진의 '에덴동산' 신해리와 두만강역

12.10.11 19:56l최종 업데이트 12.10.11 19:56l
저는 오래 전부터 음악을 공부하고,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오로지 음악에 관한 지식만을 가르쳐왔습니다. 지금은 평범한 주부이자 아이들의 엄마로 살고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과 함께 북한에 갔습니다. 호기심으로 떠난 여행이었지만, 저는 처음으로 우리 민족의 비극적 운명과 민족애를 느꼈습니다. 동시에 통일에 대한 염원이 생겼습니다. 2011년 10월 이후 지난 4월에 열흘 동안, 그리고 5월에는 3주 동안 라진-선봉을 비롯한 북한 전역을 여행했습니다. - 기자말

한시라도 더 빨리 사촌 동생네 집에 닿기 위해 서둘러 준비하고 아침 식사를 마쳤다. 문호영 안내원을 불러 사촌 동생네가 사는 신해리로 당장 가자고 재촉했다. 문 안내원은 알았다며 누군가를 전화로 부른다.

"김철 동지라는 분이 있는데 그분도 함께 가기로 했습니다. 구리스 선생 식구들과 아주 친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신해리에 간다는 말을 듣고 가는 길에 함께 가자고 해서요. 이곳 사람들은 모두 신 녀사님 사촌 동생 가족분들을 좋아합니다.

저도 관광 안내 일정 중 신해리 가는 것을 제일 좋아합니다. 경치도 좋고 또 손님들이 체험학습 '로동'을 하는 동안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 구경하는 것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어요. 그리고 구리스 선생 부인께서 만들어 주시는 서양 료리를 맛보는 것도 정말 좋고요.

언젠가는 감자로 '포테토샐라드샌드위치'라는 것을 만들어주셨는데, 감자로 그렇게 맛있는 양념빵을 만들 수 있다니 깜짝 놀랬드랬습니다. '아, 정말 감자로 별걸 다 만들 수 있구나' 했습니다. 근데 오늘은 서양 료리 안 하실 겁니다. 서양 손님들 올 때만 하시는데 선생님들은 조선 사람들이니 조선식으로 상을 차리실 겁니다."

손님들이 '로동'을 하는 동안 쉴 수도 있다며 자기도 빨리 신해리에 가고 싶다는 마음을 나타낸다. 우리의 일행 다섯 명은 소풍 가는 심정으로 신해리를 향해 산길로 들어섰다. 산길은 가까이 동해를 내려다보면서 비포장도로를 따라 운치 있게 펼쳐진다.

"신선놀음"이란 말에 북한주민 "얼마나 고생한지 아십니까"

사촌 동생 은영이네 가족이 살고 있는 신해리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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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좋네요. 이렇게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라 동생이 오래도록 여기서 살고 있나 봐요. 조카들도 미국에 오면 빨리 신해리 집으로 가자고 하고..."

남편은 한술 더 뜬다.

"나도 이런 곳이라면 살아보고 싶네. 매일 낚시하고 신선한 생선도 먹고... 뒷산에다 야채도 심고 산행도 즐기고... 신선놀음이 따로 없겠구만!"

김철이라는 분이 우리의 대화가 철딱서니가 없어 보였는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보고 있다가 한소리 한다.

"선생님, 이 산동네가 이렇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사촌 동생분 가족들이 얼마나 고생을 많이 하셔 가면서리 이렇게 해 놓은 건지 아시기나 합니까? 지금은 최근에 집도 멋있게 잘 지어 놓으시고 '체험학습 로동관광' 손님들을 위해 큰 강당 건물도 지으시고, 공장도 세우시고 했지만 그전에는 오랫동안 움집 같은 데서 사셨습니다.

또 도로가 다 뭡니까. 한 번 시내로 나오려면 몇 시간에 걸쳐 험한 산길을 내려와야 했습니다. 그나마 눈 오는 추운 겨울에는 꼼짝달싹도 못하고 말입니다. 전기가 들어오길 합니까, 물이 나오길 합니까. 도로를 내고, 버스들도 이곳으로 다니게 하고, 풍력발전소도 어렵사리 가동시켜서 전기도 들어오게 하고... 물론 전기사정은 아직도 여전히 부족하지만 말입니다. 보통 일이 아니었지요."

김철 선생은 계속해서 동생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간접적으로나마 나한테 전한다.

"또 식수며, 비닐하우스 야채재배며, 염소농장이며... 그것뿐인가요? 필수품 생산 공장도 운영하시면서 이곳 주민들을 잘살게 해 주시고... 참, 얼마 전에는 해삼 전복 양식장 공사까지 시작하셨습니다. 지금은 서로 들어와서 살려고 하는 마을이 됐단 말입니다."

김철 선생의 말 속에서 이 마을이 이렇게 살기 좋고 윤택한 마을이 되기까지는 뼈를 깎는 듯한 인고의 세월이 지나갔음을 느낄 수 있었다.

'에덴동산'에서 다시 만난 사촌 동생 부부

최근에 지었다는 신해리 사촌 동생 은영이네 집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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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만치 집이 보인다. 반가움과 동시에 안쓰러움이 교차해 눈물이 왈칵 솟구친다. 우리가 닿을 때를 학수고대했는지 세 명의 사랑스러운 조카들이 집으로 들어서는 산길 입구까지 나와 있다. 자동차를 보더니 두 손을 흔들면서 팔짝팔짝 뛴다. 내 마음도 조카들을 향해 성큼성큼 달려간다.

우리의 도착을 알았는지 사촌 동생네 부부도 뛰어나온다. 보기 좋고 아름다운 가족 상봉. 자동차에서 내린 우리 부부는 집으로 들어갈 새도 없이 한참을 자동차 앞에 서서 그간 쌓아뒀던 그리움을 풀어놓는다.

왼쪽부터, 신해리에 함께 사는 미국인 수의사 선생님, 조카 예솔 그리고 지성. 금세 뒷산에 가서 캐온 더덕을 다듬고 있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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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에 들어가니 음식 향기가 코를 찌른다. 동생이 우리를 위해 점심을 준비하고 있었나 보다. 나와 동생은 점심 준비를 마저 하면서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선량하게 생긴 한 미국인 아저씨가 집에 들어온다. 동생이 자기들과 함께 이곳 신해리에서 살고 있는 수의사라고 소개해준다. 이 수의사도 이곳에서 산 지 10여 년이 넘었단다. 자기네들과 신해리 정착 초창기부터 함께 동고동락하면서 봉사하며 살고 있단다. 평온하고 선한 얼굴 인상에서 이분이 걸어온 삶의 여정을 읽을 수 있었다.

수의사 선생님이 조카들을 부르러 왔단다. 귀한 손님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아이들과 함께 뒷산에 올라 더덕과 산나물을 캐오겠다고. 그는 "더덕, 산나물 맛이 일품"이라며 "꼭 먹어봐야 한다"고 신신당부한다. 조카들도 "더덕과 나물을 캐와서 이모한테 꼭 맛을 보여줄 거예요"라며 보물을 찾으러 떠나는 아이들마냥 각오를 단단히 하고 신바람 나게 집을 나선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아이들과 수의사 선생님이 신이 나서 들어온다. 멀리까지 갈 필요도 없이 뒷산 초입에서 크고 신선한 더덕과 나물들을 다 캐왔다고. 오자마자 숨도 안 돌리고 더덕을 다듬기 시작한다. 더덕 향기가 사방에 진동한다. 아무런 양념 없이 고추장에 찍어만 먹어도 그 맛이 어떨지 짐작이 된다. 군침이 입안을 가득 메운다.

커다란 문어 잡아온 북한 주민, 돈 건네자...

신해리 주민이 잡아온 문어 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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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이 마을 사람처럼 보이는 아저씨가 아직도 살아 움직이고 있는 커다란 문어를 들고 온다. 아이들이 반기며 안기는 것을 보니 친하게 지내는 이웃임이 틀림없다. 동생이 말을 건넨다.

"어머나, 지금 잡으신 문어인가 봐요. 와 크다. 그런데 왜 이걸 들고 오세요?"
"구리스 선생님 댁에 친척분이 오셨다는데... 이 문어, 반은 데쳐서 드시고 반은 회 쳐서 드십시오."
"이 귀한걸... 내다 파셔야 할 텐데..."

사촌 동생은 고맙고도 미안한 마음에 문어 값에 해당하는 돈을 들고 나온다. 아저씨에게 돈을 전하려 하자...

"아니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제가 구리스 선생님 댁에 문어를 드리고 돈을 받으라고요? 이러지 마시라요. 섭섭합니다."
"아저씨, 그러지 말고 받으세요."
"신해리에서 누가 구리스 선생님한테 돈을 받습니까, 큰일 나려고."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기는 훈훈한 모습. 덕분에 우리 일행은 신선하고 맛있는 북한산 동해 문어를 맛볼 수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조카들과 수의사 선생님이 캐온 산더덕과 나물들, 사촌 동생의 특기인 중국식 만두와 이 동네 사람들이 직접 재배한 유기농 야채들, 기가 막히게 맛이 좋은 김치까지... 북한 식당에서 먹은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북한 주민이 바다에서 직접 잡은 문어를 손님 대접으로 얻어먹었으니 내 생에 최고의 식사라고 할 만하다. 식사하는 내내 문어를 잡아온 그 아저씨의 모습이 떠나지 않는다. 그리고 몇 번이고 마음속으로 되새겼다.

'고마워요. 아저씨!'

북한에 전복·해삼 양식장을 짓겠답니다

문호영 안내원의 도움을 받아 소쟁기를 끄는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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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염소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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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 후에 우리는 사촌 동생네 집 주위를 구경하러 나간다. 크리스의 안내로 염소 농장과 비닐하우스를 둘러봤다. 그리고 산을 개간해서 밭을 일구고 있는 주민 아저씨 덕분에 '소쟁기'도 끌어봤다. 보기에는 쉬워 보여 큰소리치고 덤볐다가 아저씨가 일궈놓은 밭만 망쳐놓고 말았다.

염소 농장에 닿은 우리.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새끼 염소를 안아봤다. 이 염소가 자라 북한 아이들에게 젖을 먹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지금 내 품 안에 있는 이 새끼 염소가 동물이 아니라 천사처럼 느껴진다.

신축 중인 전복 해삼 양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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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촌 동생이 지금 공사 중인 '해삼·전복 양식장'을 구경시켜 준단다. 양식장은 산 밑에 있는데 바닷가에 접해 있었다. 덕분에 바닷가 옆에 있는 어촌 마을을 둘러볼 수 있었다. 마을에 있는 집들의 겉모습은 초라하고 누추해 보여 내 마음이 안쓰러워진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니 평온함과 여유로움이 엿보이기도. 사촌 동생은 "풍부한 수산물 덕분에 이곳 어촌 사람들은 바다에 고마워하면서 자족하는 마음으로 걱정 없이 살고 있다"고 귀띔해준다. 밝게 웃으면서 사촌 동생을 반기는 이 마을 주민들과 함께 서서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내 마음 역시 풍요로워진다.

이곳 신해리 사촌 동생네 집에 오니 흘러가던 시간조차 멈춰버린 것처럼 여유롭고 평온하다. 사촌 동생네 가족과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고 있는 북한 주민들의 얼굴도 햇살처럼 따스하다. 서로가 한마음이 돼 사랑을 나누며 살고 있는 모습은 불협화음 하나 없는 심포니 연주를 듣고 있는 듯 아름답다.

"미국에서 잘나갔다던데... 왜 여기서 고생합니까"

크리스(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이)가 우리에게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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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촌 동생네 집 거실에 앉아서 여유롭게 많은 이야기들을 나눴다. 사촌 동생네 부부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김철 선생이 의아한 표정으로 남편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선생님, 선생님 사촌 동생분은 미국에서도 좋은 교육을 받고, 유능한 컴퓨터 공학자로 대접도 잘 받고 직장도 훌륭했다고 들었는데, 왜 이곳에 오셔서 어려운 고생길을 마다치 않고 계시는지 모르겠단 말입니다. 늘 감사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어떻게 저럴 수 있는지 궁금해서리..."

"이해하기 힘드실 겁니다. 김 선생님도 저분이 기독교인인 것 아시지요?"
"네, 잘 압니다만, 그것이 어떻게 련계가 되는지, 그건 모르겠습니다."
"참 설명이 힘든 이야기인데... 기독교인들은 하늘에 신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 신이 인간을 창조했으니 우리 인간들은 그 신의 자식인 겁니다. 우리가 그 신의 자식이니 그 신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겠습니까. 그러니 신의 자식인 우리도 그 뜻을 따라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며 살아야 한다고 믿고, 행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인은 자신을 희생하며 남을 위해 살아가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는 거지요. 또한 자신들의 삶을 자신들이 좌지우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신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도 잘 모르긴 하지만 대충 그런 이야기입니다. 솔직히 나도 집사람이 교회에 나가니까 가끔 골프 약속 없을 때 할 수 없이 끌려가는 정도라서... 충분히 설명을 잘 못하겠네요."

"그리스도 교인들은 다 그렇게 삽니까?"
"천만의 말씀. 다른 사람 말 꺼낼 것도 없이 우선 우리 집사람 하는 것만 봐도..."

잘 나가다 이게 무슨 날벼락 같은 막말인가. 굳이 이런 식으로 질책하지 않아도 내가 살아온 오십 평생을 송두리째 내려놓고 반성하고 있던 참인데... 남편은 인정사정없이 내 상한 심정을 한층 더 도리질한다. 아마 골프나 치고 보트 타고 나가 낚시질이나 하며 살아온 자신의 인생을 반성해 보며 자기 몫까지 내게 빗대 꾸짖고 있는 것이겠지.

때로는 심각하게, 때로는 집이 떠나갈 듯이 웃으며, 때로는 눈물을 글썽이며... 이렇게 끊임없이 이야기보따리들을 풀다 보니 이곳을 떠나야 할 시간이 됐다. 따뜻한 마음을 안고 우리는 이별을 고했다. "우리, 내년 8월에 또 올게." 섭섭한 마음을 위로해가며 자동차에 올랐다. "이모, 가지 말고 우리랑 오래 오래 함께 있다가 가면 안 되요?"라고 조르며 사정하던 막내 조카 예솔이는 기어이 눈물을 쏟고 만다. 나 역시 마찬가지... 자동차가 산비탈을 돌아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사촌 동생네 가족들은 손을 흔든다.

우리는 이산가족도 아니며, 또 언제든지 이곳에 올 수 있다. 그러나 마치 남북정상회담을 하듯, 가물에 콩 나듯, 그것도 한 번 만나면 끝이 돼버리는 남과 북의 이산가족들의 심정은 어떨까. 그나마 상봉이라도 하신 분들은 다행이지만, 대다수의 이산가족들이 서로의 생사조차 모른 채 세상을 떠나고 있는 현실이 가슴을 아리게 한다.

'아오지'라는 말에 깜짝 놀란 남편

구석기 시대의 유물이 출토된 조개무덤이 발견된 웅기읍 굴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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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진-선봉에서의 4박 5일도 어느새 마무리되고 있다. 우리는 어느새 북-중 국경의 북한 측 출입국 사무소가 있는 원정리로 돌아가고 있다. 원정리로 가는 길에, 외국 관광객들에게는 별 의미가 없어서 관광 일정에 넣지 않는 곳이지만 우리 민족에게는 의미가 깊은 곳을 들를 예정이란다. 이순신 장군께서 여진족을 물리치셨다는 곳인데 그곳이 우리나라의 맨 끝이라는 설명이다. 북한의 마지막 기차역인 두만강역도 그곳에 있단다. 또 그곳에 가면 두만강이 동해로 흘러가는 모습, 그리고 중국과 러시아를 한눈에 볼 수 있다고 한다. 아, 우리는 지금 우리나라의 맨 끝으로 가는구나. 생각지도 않았던 일정이다. 북한여행이 끝나는 순간까지 내 가슴은 쿵쿵거린다.

올 때와는 다른 길을 탔다. 올 때는 원정리에서 라진으로 직접 들어왔다. 그런데 오늘은 두만강 하구로 먼저 가 국토의 맨 끝을 본 뒤, 두만강을 오른쪽으로 끼고 원정리로 간다고. 라진을 출발해 선봉을 지나는데 문호영 안내원이 이곳의 옛 이름이 웅기였다고 설명한다. 남편이 깜짝 놀라며 다시 물었다.

"이곳의 옛 이름이 뭐라고?"
"웅기라고 합니다."
"아, 여기가 바로 웅기였구나. 굴포리가 어디쯤인가?"
"아니, 어떻게 굴포리를 다 아십니까? 이제 곧 호수가 나오는데 그 근처가 굴포리입니다."

남편에게 물어보니 우리나라 구석기시대의 유물이 출토된 조개무덤이 있는 곳이 바로 웅기읍 굴포리란다. 선사시대에 관심이 많은 남편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언제부터 '선봉'으로 바뀌었나?"
"오래됐지요, '수령님'께서 살아 계실 때니까요. 한 30~40년 됐습니다. 지명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원래 이곳이 경흥군인데 지금은 은덕군으로 바뀌었고 또 군내의 웅기, 아오지 등 옛 이름들이 모두 새 이름으로 바뀌었습니다."

"지금 뭐라 그랬어? 아오지?"
"네. 바로 요 옆입니다. 아오지란 옛 이름을 아십니까?"
"잘 알지. 그곳에 탄광이 있다고 배웠지."
"남조선에서 학교 다니실 때 말씀이십니까?"
"응."
"남조선에서도 북조선 지리를 다 가르치는가 보지요?"
"그럼 물론이지. 근데, 문 안내원, 내년 8월에 우리가 여기 올 때, 아오지에 한번 가볼 수 없나?"

"가 보실 수는 있는데... 그곳에는 관광할 만한 곳이 없습니다. 그저 산업지역입니다."
"아니, 학교 때 배운 곳이라 어떤 곳인지 그냥 궁금해서..."
"그럼 다음에 오실 때 가보실 수 있도록 일정을 조직해 보겠습니다. 가 보셔야 그저 공장하고 탄광인데... 근데 참 이상합니다, 선생님. 외국서 오신 손님들은 '체험학습'이라 해서 로동을 일부러 하질 않나 아니면 선생님처럼 광산이나 공장을 관광하시겠다고 하질 않나... 혹시 선생님, 아오지에서 '체험학습 로동'해 보시려는 것은 아니지요? '체험학습 로동'은 구리스 선생 농장에서만 가능합니다."

"아오지에서 무슨 체험학습이야. 난 크리스네 집에서도 제대로 안 했잖아. 걱정하지마. 그런데, 아오지에는 꼭 가지 않아도 돼."
"하여간 원하시면 구리스 선생 크라훈 회사에 말씀하십시오."

아, 나의 조국이여!

우리나라 국토 끝 농촌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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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호숫가를 따라 국토의 가장자리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우리 국토 끝에는 호수가 많이 보인다. 이곳에 큰 호수가 세 개 있다고 하는데 우리는 '만포'라는 호수를 지나고 있다. 낚시하는 사람들도 드문드문 눈에 보인다.

좀 더 달려가니 주위에 있는 논의 흙 색깔이 시커먼 색이다. 이런 색의 논은 처음 본다. 멀리 논 한가운데 큰 탑이 보인다. 저게 뭐냐고 물으니 석유 시추를 하고 있단다. 학자들의 조사 결과 이곳에 석유가 매장돼 있을 가능성이 커 시추탑을 세우고 파고 있다는 설명이다. 생각해본다. '우리 한반도에서도 석유가 나올 수 있다면...'

우리나라 맨 끝 기차역인 두만강역. 사랑스러운 우리 아이들이 역 앞을 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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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거의 다 왔다고 한다. 오른쪽으로 '서번포'라고 불리는 호수가 있고 왼쪽으로 기차역이 보이는데 '두만강역'이라고 적혀 있다. 우리는 얼른 차를 세워 달라고 했다. 이곳이 우리 국토의 마지막 기차역이다. 아이들이 걸어간다. 아, 이 국토의 끝에도 우리말을 하고, 우리 음식을 먹고, <아리랑>을 부르는 우리 아이들이 살고 있구나. 얼른 뛰어가서 안고 싶은 마음이 솟구쳐 오른다.

우리나라, 중국, 그리고 러시아가 만나는 지점. 왼쪽 건물들이 있는 곳이 중국이고 그 아래 보이는 철교가 러시아와 북한을 잇는 철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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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 작은 동산에 오르니 두만강이 굽이쳐 동해로 흘러가고, 강 너머로 넓은 평원이 보인다. 동산 위에 이순신 장군 기념관이 있고, 그 옆에는 이순신 장군의 비석이 있다. 이 비석은 후손들이 여진족을 토벌한 장군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조선시대에 세운 것이란다. 우리는 이곳에서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중국-러시아 대륙을 바라본다.

왼쪽의 중국은 그야말로 간발의 차로 국경이 끊어져 바다가 없다. 그 바로 옆으로는 러시아와 북한을 잇는 철교가 놓여 있다. 이곳에 와 보니 왜 라진-선봉이 이들 나라에게 그리도 중요한지 실감할 수 있었다. 아, 천혜의 황금 같은 라진-선봉. 이곳이 바로 우리 민족이 대륙으로 뻗어 나갈 수 있는 관문임을 온몸으로 느낀다.

국경으로 가는 차 안에서 문호영 안내원이 우리에게 흐느끼며 <아리랑>을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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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두만강을 오른쪽에 끼고 국경 출입국사무소가 있는 원정리로 달려가고 있다. 차 안에서 문호영 안내원이 이별의 슬픔을 삼키며 울부짖듯 애절하게 <아리랑>을 부른다. 반대 방향으로 중국의 화물차들과 승용차들이 끊임없이 줄지어 오고 있다. 마음이 초조해진다. 외국인들은 분초를 다퉈 이곳에 몰려들고 있는데, 내 나라 한국은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눈가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한다. 운전기사 '사슴' 아저씨, 문호영 안내원의 눈가에도... 강을 건너는 버스 안에서 고개를 돌려 북한 땅을 바라본다. 내려서도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본다. 2011년 10월, 평양에서 시작된 '내 생애 가장 아름답고도 슬픈 여행'이 오늘 조국의 북쪽 끝에서 그 막을 내리려 한다.

내 마음에 드리워져 있던 두터운 차단의 장막을 조국의 최북단, 이곳에 흐르고 있는 두만강 물결에 훨훨 던져 동해로 흘려보내련다. 잠시 멈춰 있었던 찬란한 우리의 역사를 다시 함께 써 내려가길 간절히 기도하며 애통한 마음으로 불러 본다.

"아, 나의 조국이여!"

덧붙이는 글 | 이번 여행기를 마지막으로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 연재가 마무리됩니다. 그동안 신은미 시민기자의 연재 여행기를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북한은 어떤 나라냐'고 제게 물으신다면?

[연재를 마치며] 북녘 동포는 보듬어 안을 우리 형제

12.10.11 19:58l최종 업데이트 12.10.12 11:35l
2011년 10월,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에 이끌려 내키지 않는 북한에 첫발을 디딘 이후, 지난 5월까지 세 차례에 걸쳐 40일 동안 북한 전역을 여행했습니다. 다소 교만하고 냉소적인 마음가짐으로 떠난 첫 북한 여행은 저의 거짓 신앙과 삶을 되돌아보게 했습니다.

저는 경상북도 대구 태생으로 아주 보수적인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개신교 목사였던 외할아버지께서는 포항에 기반을 두고 있었으며 제헌국회를 시작으로 자유당 정권이 몰락할 때까지 국회의원을 직함을 달고 지냈던 보수 정치인이셨습니다. 아버지 또한 한국전쟁 당시 대대장으로 참전해 조국의 최북단까지 올라갔던 군인이셨습니다. 그 영향 때문인지 저 역시 지극히 보수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그나마 제가 남편을 따라 북한에 여행을 간 것도, '그들은 우리와 얼마나 다를까'라는 호기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세 차례에 걸친 북한 여행을 통해 '어쩌면 우리와 그렇게 똑같을까'라는 동질성을 깨닫게 됐습니다. 음식을 먹을 때나, 유적지를 참관할 때나, 인생의 희로애락을 이야기할 때나... 그 어떤 것도 제 삶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은 게 없었습니다. 또 동질성을 느끼면 느낄수록, 조국이 분단돼 있다는 생각에 슬픔은 배가됐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우리 민족의 비극적 운명을 체험하고, 민족애를 느꼈습니다. 이와 동시에 민족 통일에 대한 염원을 품게 됐습니다.

북한동포. 이들이야말로 분명 우리가 사랑하고 보듬어 안아야 할 우리 민족이요, 제 형제자매, 그리고 이웃이었습니다. 보잘것없고 편협하기 그지 없었던 내 마음의 빗장을 깨부수고 활짝 열어젖히니, 어두웠던 곳곳을 환히 비춰주는 따사로운 빗줄기가 마음속에 들어옴을 느끼게 됐습니다. 진작에 열어젖히지 못한, 미련하고 어리석었던 내 마음에는 아쉬움만이 가득했습니다.

북한 동포들과의 추억, 아직도 가슴이 뭉클해

원산 시민들. 얼굴 표정에 굳은 삶의 의지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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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글을 쓰기 시작한 동기는 북한 여행을 통해 생각 없이 살아온 지난날의 제 모습을 스스로 고백하고 반성하고자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후 저와 함께 마음을 나눴던 분들께서 <오마이뉴스>에 여행기를 연재하길 권했습니다.

사실 연재를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과연 사람들이 이러한 여행기에 관심이나 가져줄까'라는 의구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거의 매회 기사 조회 수가 수십만에 이르는 것을 보며, '아직도 우리 국민들이 민족이나 통일 문제에 관심을 많이 갖고 있구나'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동시에 남과 북이 사랑으로 하나된 '통일조국'을 상상해보는 기쁨도 누렸습니다. 매회 원고를 쓸 때마다 지나간 기억을 되살리며 미소를 짓기도 하고, 때로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여행 중 만난 따듯한 북한 동포들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제 가슴을 뭉클하게 합니다. 스치고 지나가는 사이에 비친 그들의 가난은 지금도 제 가슴을 아리게 합니다. 북한에 다녀온 후 사람들이 제게 '북한은 어떤 나라냐'고 물으면 저는 이렇게 대답하곤 합니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살고 있는 가난한 나라'라고.

'내 생애 가장 아름답고도 슬픈 여행'을 통해 뜨게 된 마음의 눈으로 내내 글을 써내려 갔습니다. 슬픔의 눈으로 대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됐을 때, 마음에서 진정한 사랑이 배어 나오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사랑으로 사람과 사물을 들여다보니, 그 어떤 것도 굴절되지 않고 어그러짐 없이 있는 그대로 보였습니다.

2013년, 다시 북한에 가려 합니다

을밀대를 넘어 개선문 광장으로 가는 길에 설경이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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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마음이 잘 전해지지 않아 독자들로부터 심한 비난의 댓글을 받았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는 오히려 '글을 연재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글쓰기를 그만두려고도 했습니다. 또한 실향민들과 이산가족분들로 부터 '죽기 전에 고향 땅 한 번만 밟아보면 소원이 없겠다'는 쪽지를 받았을 때는 그런 곳에 한가하게 여행이나 하고 돌아온 제 자신이 부끄러워졌습니다. 그분들께 미안한 감정을 넘어 죄스럽기까지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격려의 메시지를 보내주신 <오마이뉴스> 독자들을 생각했습니다. 독자들이 있었기에 다시금 힘을 얻어 계속 글을 쓸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오마이뉴스> 독자들이 이 연재 여행기의 출판을 권했습니다. 또 일본의 한 출판사를 비롯해 국내의 몇몇 출판사로부터 단행본 출간을 요청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네잎클로바 출판사로부터 장문의 출판 제의 메일을 받고 출판을 결심했습니다. 이 여행기를 읽고 단 한 사람이라도 민족의 앞날과 통일에 대해 관심을 더할 수 있기만을 간절히 소망합니다.

저는 2013년 또다시 북한 여행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가 지면을 허락한다면, 독자 여러분들께 북한 동포들의 살아있는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여행기가 연재되는 동안 수많은 분들께서 아름답고 애절한 댓글을 달아주셨고, 쪽지를 보내주셨습니다. 물론, 반대 성격의 댓글을 달아주신 분들도 많이 계셨지요. 그분들의 심정 역시 충분히 이해합니다. 다만, '곱고 아름다운 우리말로 해주셨으면 더 좋지 않았겠나'라는 생각입니다.

그동안 이 여행기의 연재를 다듬어준 <오마이뉴스> 편집부 기자들, 수십만 회씩 기사를 클릭해주신 <오마이뉴스> 독자 여러분들, 조국의 정보에 어두운 저에게 <오마이뉴스>를 알려주신 UCLA 교환학자 이병한 선생님, <평양에 두고 온 수술가방>의 저자이시며 제 '민족통일학'의 스승님이신 재미동포 의학자 오인동 박사님, 그리고 연재가 나가는 동안 많은 격려를 보내주신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님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끝으로 제게 북한 여행을 제안하고 마음의 눈을 함께 뜬 사랑하는 남편, 그리고 우리가 여행을 떠난 동안 집에서 혼자 지내야 했던 막내딸 수민이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2012년 10월, 캘리포니아에서, 신은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