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긴팔원숭이박사 김산하의 탐험
<9> 정글의 주민들
전자오락기 소리 내는 라투파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멧돼지
생선 냄새 맡고 온 사향고양이…
인도네시아 할리문 국립공원엔
61종의 포유류가 살고 있다 단풍도 눈도 없지만
변화무쌍하지 않은 열대 기후는
생장과 번식에만 집중하게 해
생물 다양성을 가능케 하는
동물의 지상낙원을 선사한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피부로 분명히 감지되는 수증기가 공기에 무겁게 걸려 있다. 초록색 잎마다 한 꺼풀 물이 입혀져 번들거리고, 젖어서 색이 짙어진 나무껍질은 사우나와 같은 향을 내뿜었다. 질척질척한 흙은 달콤한 초콜릿 무스처럼 부드럽게 발밑에서 허물어졌다. 그것도 모자라는지 아득한 천둥소리가 또 한 차례 비 소식을 알린다. 처음에는 너무 작아서 분간이 안 되었다가, 성난 군중의 함성처럼 조금씩 소리가 커지면서 저 멀리서부터 물의 커튼이 드리워진다. 언제나 처음에는 이게 무슨 소리인가 귀를 기울인다. 거센 바람이 나무를 쥐고 흔들면서 가지 사이를 비집고 지나가는 소리일까, 저 계곡 강물 소리가 가까워진 걸까. 아니다, 비다. 또 비다. 본격적으로 우기가 시작된 것이다.
이곳 사람들은 라틴어 표기법으로 된 인도네시아어(Bahasa Indonesia)상에서 ‘~ber’로 끝나는 달에 우기가 찾아온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기는 9월에서 12월 사이라는 말이 되는데, 집에 설치해놓은 장비로 강우량을 측정해본 결과 정확히 들어맞지는 않아도 얼추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가령 연초나 중반에 비가 상당히 내리는 경우도 있지만, 적어도 하늘에서 물을 쏟아붓는 양의 피크는 10월에서 12월 사이에 찾아온다. 간이 측량기로 간밤의 비의 양을 확인하는 이 행위에는 묘한 소소한 즐거움을 준다. 특히 아늑한 실내에 앉아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물살을 관조하노라면 바깥에서 저걸 맞고 있는 처지가 아니라는 안도감과 함께, 과연 내일 아침 물은 어디까지 차 있을까 궁금하게끔 만든다. “와, 이거 잘하면 아예 신기록이 나오겠는데!” 어쩌면 측량과 기록은 바로 이런 쾌감에 근거한 자기 충족적 행위인지도 모른다. 애초에 자를 들이대지 않았으면 궁금하지도 않았을 것이, 재기 시작하면서 어떤 수치에 대한 집착이 생기는 것이다. 어쨌든 그런 기록이 모이고 모여, 이 순간이 정녕 우기임을 객관적으로 선언해준다.
‘멍 때리는 의자’에 앉아 있는데 내가 버린 생선 찌꺼기를 먹으러 점박이 사향고양이가 나타났다. 그림 김산하 |
끝날 것 같지 않은 비의 장막에 갇혀 지내는 이 시절이 바로 고국의 계절이 가장 그리운 때이다. 열대의 장엄한 비가 결코 싫어서가 아니다. 또는 거침없는 태양열을 받아 증발산하는 수증기로 푹푹 찌는 이곳의 영원한 여름을 달가워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북반구와 남반구의 여러 기후대에서 지냈던 터라 그 어느 날씨에서도 고향의 맛을 찾는 행운을 누린 사람이다. 하지만 축축하거나 덥기만 한 세상을 제대로 경험하고 나면, 한국의 분명한 사계절과 환절기마다 찾아오는 그 기적적인 변화를 그리워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이곳에서 우기가 시작될 때면 고국에서는 싸한 공기와 청명한 하늘의 가을이 낙엽처럼 내려앉았겠지, 생각은 두둥실 바다를 건너 날아간다. 단풍과 은행잎으로 바스락거리는 거리를 걸으며 완전하게 순수한 맛의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쉰다. 건조하지만 부드러운 두 손을 따스하게 비비고, 머릿결 사이로 지나가는 찬바람을 음미하며 옷깃을 여민다. 구름 한 점 없는 높은 하늘로 마치 날아오를 것만 같은 들뜬 기분으로 떠나는 목적지 없는 외출. 아, 이 가을의 멋이란! 온종일 걸어놔도 마르지 않은 수건의 쾨쾨한 냄새를 맡으며, 나는 남몰래 이 궁상맞은 여행을 즐겨 떠났다. 어차피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해봤자 전혀 공감을 구할 수가 없는 얘기였다. 추위의 기준이 섭씨 20도부터인 이들에게 무슨 말을 하리오. 하지만 이들도 눈에 대해서는 무척 궁금해했다. 하얗게 내린 눈을 직접 밟고 만져봤다는 사실이 신기하게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옛날에는 그냥 손으로 퍼 먹기도 했단다.” “정말요? 와, 눈을 먹다니!” 지구별은 참으로 작은 것 같으면서도 또 한없이 넓다.
연중 따뜻하고 물이 넘치는 열대우림의 기후가 변화무쌍하지 않다는 측면에서 사람에게 다소 지루할지라도 동물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지상낙원이다. 달아오른 생명의 왕성한 혈기를 싸늘하게 식히는 차가운 겨울이 없다는 사실이 바로 이곳의 엄청난 생물다양성을 가능케 해준다. 피부가 바싹 마르고 조직이 갈라지는 건조함 없이 언제나 풍부한 물이 젖줄처럼 흐른다는 사실도 이 생명의 축제를 든든하게 후원해준다. 동식물들은 혹독한 날씨로 인한 체온 변화와 생체조직의 물리적 손상 등에 대한 방어책을 만드느라 소중한 자원을 할애하는 대신, 생장과 번식 그리고 자신들의 삶에 좀더 집중할 수 있는 것이다. 한곳에 많은 종류가 모여 있다는 것. 이 사실의 특별함을 진정으로 깨닫는 데에는 약간의 차분한 사색이 필요하다. 애초에 왜 생물이 여러 가지가 있어야 하는가? 생태계라는 게 굳이 있어야 한다고 가정하면 하나의 생산자, 하나의 소비자, 하나의 분해자만 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 좀 단순하지만 완전한 폐곡선으로 된 훌륭한 단선 회로도 얼마든지 있을 법해 보인다. 복잡한 먹이그물이 여기저기로 가지 치는 시스템은 뭔가 군더더기가 넘쳐나 보인다.
우리의 발길이 닿지 못한 어딘가의 먼 우주에 이런 별이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구라는 행성은 하나의 원초적인 생명체로부터 종이 무던히도 갈라지고 또 갈라져 나와, 지금의 찬란한 다양성의 스펙트럼을 과시하고 있다. 진화는 생물이 남과 다른 방식으로 변화하는 과정이다. 남이 안 먹는 먹이, 남이 못 사는 곳, 남과 전혀 다른 ‘팔자’로 점점 뻗어나가 그 모험이 성공하면 자연에 의해 선택된 종이 되고, 실패하면 피안의 세계 속으로 잊혀지게 된다. 한 가지 이상의 생물로 구성된 생태계는 정의상 이미 다양성의 개념을 내포한다. 그런데 환경의 조건이 생명이 생장하는 데 호의적일수록 생물은 더욱 다양해지는 경향이 있다. 빛과 물이 풍부하게 주어지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생물 발전소는 풀가동에 들어가고, 끊임없는 신제품 개발에 혈안이 된 공장처럼 쉴 새 없이 새 아이디어를 출시한다. 이른바 생물다양성 핵심지(Biodiversity Hotspot)가 바로 그 현장이다. 하염없이 내리는 비를 온몸으로 받고 있는 이 열대우림이 바로 그곳이다.
밀림에 있다 보면 얼굴이 더 하얘진다
나의 소중한 연구지인 인도네시아 할리문 국립공원도 어느 곳 못지않은 종 다양성을 자랑한다. 고도가 해발 500미터에서 2000미터 이상에 이르는 공원의 여러 층위별 서식지에서 244종의 조류, 79종의 양서파충류, 61종의 포유류, 그리고 258종의 난초가 발견된다. 지금은 멸종된 자바호랑이도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이곳에 생존해 있었다고 한다. 호랑이만큼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동물인 표범은 아직도 잘 살고 있다는 사실이 이곳의 생태계가 얼마나 건강한지를 보여준다. 밀림에 가보지 않은 이가 가장 흔히 오해하는 것 딱 두 가지 있다. 첫째는, 밀림에 있다 보면 얼굴이 까맣게 탈 것이라는 생각이다. 검게 그을리긴커녕 더 하얘져서 나오기도 한다. 식물들이 서로 햇빛경쟁 하느라 숲의 지붕이 촘촘히 덮이기 때문이다. 밀림의 속은 오히려 어두운 곳이다. 어쩌다 큰 나무 하나가 쓰러지면 그 틈으로 금색 빛이 쏟아지기도 하지만, 보통은 숲의 수관부(canopy)에서 다 차지하고서 남은 빛의 조각들이 바닥에 여기저기 흩어지는 정도이다. 둘째 오해는, 밀림에 들어서는 순간 온갖 동물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올 것이라는 생각이다. 운이 억세게 좋은 날엔 그런 인상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보통은 조용히 걷고, 긴 시간을 투자하면서 차분히 기다려야지만 야생동물과 만나는 상복을 거머쥘 수가 있다. 수많은 종이 모여 살지만, 동시에 그 안에 수도 없이 많은 먹고 먹히는 관계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나무 뒤에 누가 있을지 걱정 안 하고 유유히 다니던 녀석들은 자연선택에 의해 일찍이 제거되었다.
긴팔원숭이는 내가 연구 대상으로 삼는 종이기 때문에 예외적인 날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숲에서 만날 수 있다. 이미 각 그룹의 영역과 이동통로 그리고 특별히 선호하는 나무를 모두 꿰고 있는 덕이다. 가만히 꼼짝 않고 숨어 있으면 찾을 도리가 없지만, 이들도 먹고살아야 하기 때문에 움직여야 하고, 그 기호를 놓칠 우리가 아니다. 긴팔원숭이를 제외하고 가장 자주 보는 동물은 다른 영장류이다. 이 숲에는 은색 털의 수릴리(Surili)와 검은색 털의 루퉁(Lutung)이라는 두 종의 랑구르원숭이가 산다. 이 원숭이들은 긴팔원숭이와 마찬가지로 나무 위에서 살기 때문에 우리의 탐색에 혼돈을 일으키는 존재들이다. 나뭇가지에서 움직임이 보여 반가운 마음에 쫓아갔다가 볼일이 없는 원숭이라는 걸 깨닫고 실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얼쩡거리지 말고 어서 저리 가!” 손사래를 치지만 정작 이 녀석들은 자신들이 목표물이라는 착각에 빠져 요란스럽게 도망을 친다. 팔로 나뭇가지를 휘감으면서 전진하는 긴팔원숭이의 부드러운 동작과는 달리, 한곳에서 다른 곳으로 점프를 하는 식으로 이동하는 이들의 움직임은 부산스럽기 짝이 없다. 게다가 하나같이 걱정스러운 표정의 얼굴을 하고 있어 꼴사납게 줄행랑치는 모습이 그리도 해학적이다.
정글의 동물 주민들은 제각각의 개성대로 존재감을 과시한다. 라투파라는 이름의 거대 다람쥐는 말 그대로 세계에서 가장 큰 다람쥐이다. 몸길이가 약 50㎝, 꼬리까지 합하면 1미터도 넘는 놈도 있다. 가장 기가 막힌 건 이들이 내는 소리이다.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누군가가 전자오락기를 숲으로 들고 들어왔다고 생각했다. 꼬마들이 좋아하는 레이저 광선총의 발사음과 너무나도 흡사한 소리가 동물의 입에서, 그것도 다람쥐의 입에서 나올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형태 자체가 남다른 것이 특징인 종도 있다. 한번은 나의 수석 연구보조원인 아리스와 숲을 탐험하다가 희한한 녀석을 발견하였다. 자신이 발각됐다는 사실에 황급히 나뭇잎 속으로 파고 들어가자, 찾다 못해 답답해진 아리스는 나무를 서너 차례 쥐어흔들었다. 그러자 나무 꼭대기로부터 어떤 동물이 허공에 몸을 던지더니 사지를 활짝 뻗었다. 앞발과 뒷발의 사이를 잇는 핑크빛 살의 막이 활짝 펼쳐졌다. 나는 것은 아니고 기류를 타는 활공 방식으로 움직이려는 것이다. 바로 콜루고(colugo)라는 동물이다. 우리가 잘 아는 날다람쥐와 비슷한 특성을 갖고 있지만, 포유동물(포유강)에서 단 두 종만으로 구성된 데르몹테라(Dermoptera)목 소속의 희귀종이다. 등과 머리가 완전히 나무의 껍질을 닮아 가만히 있으면 분간이 불가능하다. 보호색으로 말할 것 같으면 숲개구리도 둘째가라면 서럽다. 워낙 낙엽을 빼닮아서, 어쩌다 발견하면 내가 보았다는 그 사실 자체가 신기할 정도이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관찰하다 눈앞에 놓아주는 순간, 어디로 갔는지 보이질 않는다. 그 외에도 후다닥 수풀 사이를 널뛰는 이구아나, 형형색색의 열대조류, 그리고 온갖 곤충과 애벌레들을 어느 길모퉁이에서 마주칠 줄 모르는 것이 바로 밀림 탐험의 묘미이자 멋이다.
집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계속되는 탐험
하루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나무 위를 보며 긴팔원숭이의 낌새를 탐색하고 있었다. 부스럭거리는 작은 소리 하나면 조용한 숲에서 동물을 추적하기에 충분하기에 나는 온 신경을 귀에 집중시키며 한 발짝씩 조심스럽게 내딛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엄청난 소리가 수풀을 찢듯이 터져 나왔다. 과장 하나도 보태지 않고, 나는 그 순간 누군가가 큰 트럭을 몰고 밀림에 쳐들어왔다고 확신했다. 있을 법한 일이 아니었지만, 믿을 수 없는 굉음을 듣는 순간 내 뇌는 그 소리에 맞는 적법한 대상을 연결 지었던 것이다. 그런데 웬일인가? 거대한 멧돼지 한 마리가 숲의 어둠으로부터 전속력으로 달려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우리가 만든 통로를 버젓이 이용하며 마을 방향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볼일일까?
고된 일과가 모두 끝난 노곤한 어느 날 밤. 난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마당의 내 자리에 앉아 캄캄한 어둠 속을 바라보았다. 하는 일 없이 여기에 앉아 있길 좋아한다 하여 내 연구보조원이 ‘멍 때리는 의자’라 이름 붙여준 곳이다. 저녁식사로 하고 남은 생선 찌꺼기를 연못 옆에다 버리고, 난 아껴둔 위스키 병에서 딱 한 잔을 따랐다. 찌르르 울리는 풀벌레 소리가 피곤한 팔다리 근육으로 스며드는 것만 같았다. 아직 잠들기엔 이르지만 이제 남은 할 일이라곤 잠밖에 없는 이 시간은, 나에게 하루를 차분히 돌아보며 오늘의 탐험이 가져다준 환희를 조용히 마시는 삶의 여백이다. 슬픈 빛의 백열등 옆엔 날벌레가 삼삼오오 모이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게코도마뱀들이 맑은 눈알을 굴렸다.
검은 그림자 하나가 난간 밑으로 미끄러지듯 나타났다. 잠시 킁킁 냄새를 맡더니 이상 없음을 확인한 듯, 점점 내 앞으로 다가왔다. 생선으로 가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숨을 죽였다. 어둠의 적막함만이 이따금 속삭이는 침묵 속에서, 그림자는 한 발짝씩 조심스레 전진했다. 마침내 달빛이 무대를 밝혔다. 점박이 사향고양이였다. 생선 비린내가 내 채취를 압도했는지, 녀석은 나의 존재를 까마득히 모른 채 내 앞에 앉아 오도독 소리를 냈다. 그러다 갑자기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이건 무슨 냄새지? 내 앞 1미터까지 와서야 비로소 깨달았는지, 그제야 냅다 줄달음을 쳤다. 사향고양이가 완전히 모습을 감춘 후에도 난 꼼짝하지 않았다. 때로는 집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탐험은 계속된다. 보이진 않지만 느낄 수 있는 어둠 속 생명의 드라마를 시청하며 난 천천히 잔을 비웠다. 모두들 잘 자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