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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오래 전부터 음악을 공부하고,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오로지 음악에 관한 지식만을 가르쳐왔습니다. 지금은 평범한 주부이자 아이들의 엄마로 살고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과 함께 북한에 갔습니다. 호기심으로 떠난 여행이었지만, 저는 처음으로 우리 민족의 비극적 운명과 민족애를 느꼈습니다. 동시에 통일에 대한 염원이 생겼습니다. 2011년 10월 이후 지난 4월에 열흘 동안, 그리고 5월에는 3주 동안 나진·선봉을 비롯한 북한 전역을 여행했습니다. - 기자말
김일성 광장의 가장 중앙에 있는 '인민대학습당'은 말 그대로 인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학습당이다. 한국으로 치자면 '평생교육원' 혹은 '국립도서관'의 역할을 하는 곳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건물의 웅장함과 규모가 드넓은 김일성 광장을 압도하고 있을 뿐 아니라 주변 건물들을 품어 살피고 있는 듯하다.
평양 한가운데 있는 건 바로 인민대학습당
일반적으로 세계 나라들을 여행 다녀보면 중요한 광장이나 도시 중심이 되는 곳에는 정부기관이나 궁전, 기념관 등 그 나라를 대표하는 상징물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평양 중심에는 '인민대학습당'이라는 도서관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웠다. 전통 양식 건물의 우아하고 중후한 겉모습 못지않게 건물 안에도 대리석 기둥과 장식들로 웅장함을 더하고 있다.
해설원을 기다리기 위해 잠시 휴게실에 들어가니 '조선국제여행사'에서 온 다른 관광팀들도 해설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 한 해설원이 여러 관광객이 모이면 한꺼번에 설명해주려는 듯하다. 한 팀이 더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휴게실 안에서 다른 팀 담당 안내원들과 인사를 나눴다.
설경이의 친구이자 안내원인 다른 팀 여성 안내원을 보더니 남편이 깜짝 놀란다. 남편이 북한에 오기 전 조사하면서 봤던, '북한 여자 얼짱'으로 유명한 바로 그 여성이란다. 다시 보니 그 아가씨임이 분명했다. 우리는 그녀에게 다가가 "아가씨가 인터넷에서 북한을 대표하는 미녀 중 한 사람"이라고 말해줬더니 몸 둘 바를 몰라하며 부끄러워한다. 설경이가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 내 친구라니 나도 영광입네다"라고 한다.
여성들끼리 서로의 만남을 기념하며 사진을 찍으니 남성들도 "오늘의 만남을 훗날 다시 만날 날을 약속하는 징표로 삼자"며 사진을 찍는다. 남편의 손을 꼭 잡고 사진을 찍는 남자 안내원들의 모습이 참 다정하다. 휴게실 안의 훈훈한 기운은 무슨 이유인지 모를 슬픔이 가득한 내 마음에 아롱진다.
해설원이 인민대학습당의 이곳저곳을 데리고 다니며 구경시켜준다. 도서관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곳에는 여러 분야를 망라하는 책들이 있었다. 학생들로 보이는 사람들과 직장인들, 그리고 연세가 들어 보이는 사람들은 각기 자기의 관심 분야에 맞는 정보도 찾고 책도 보고 있었다. 컴퓨터로 정보를 찾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보였는데,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인터넷은 아니고 북한 안에서만 이용할 수 있는 '인트라넷'으로 정보들을 교환하고 있었다.
평양의 영어 열풍... 의외네
이곳에서 제일 인상적인 곳은 영어 학습방이었다. 여러 방에서 외국어를 가르치고 있는데 수많은 방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이곳 북한에서도 '영어 열풍'이 대단하다고 한다. 빈자리 없이 꽉꽉 차 있는 영어 교실들이 이를 증명해주고 있었다. 지난번 원산에서 우리에게 "헬로, 헬로"라고 하던 어린 아이들, 모란봉 공원에서 맥주를 권하며 "유 프롬 아메리카? 아이 노우 잉그리쉬"라던 소풍 나온 아저씨, 영어가 쓰여 있는 옷을 입고 영어가 쓰여 있는 가방을 메고 가던 아이들, 모두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영어에 거부감이 없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영어를 가르치는 북한 강사도 영국식 영어가 아닌 미국식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말하자면, 'water'를 '워터'라고 발음하지 않고 '워러'라고 하는 식이다. 놀라울 뿐이다.
영어 학습방을 나와 열람실로 가봤다. 두 여성이 한 테이블에서 공부하고 있어 호기심에 다가가 봤더니 이들도 사전을 옆에 두고 영어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를 보더니 영어로 "어디서 왔냐"고 묻는다. 남편과 나는 우리말로 대답할까 망설이다 그들이 영어를 연습해 보고 싶어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영어로 "미국에서 왔지만 우리말을 할 줄 안다"고 대답했다. 우리말을 할 줄 안다고 했으니 더 이상 영어로 묻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그 학생은 계속 영어로 질문한다. 실습을 해보려는 노력과 열정이 대단하다.
원산에서 설경이가 '북한에서 영어를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가르친다'고 한 말이 생각이 나서 물어봤다.
"왜 여기서는 영어를 그렇게 어려서부터 가르치지?"
"외국어는 일찍 습득해야 한다는 것이 학자들의 주장입네다. 또 지금은 세계를 향해 눈을 떠야 합네다. 그러니 인민들이 국제어인 영어 그리고 다른 외국어들을 잘 해야 하지 않겠습네까?"
"아파트를 6개월 만에? '새빨간 거짓말' 하지마요"
참관을 마치고 맨 위층에 있는 기념품 가게로 가 'SEE YOU IN PYONGYANG'이라고 적혀 있는 티셔츠를 샀다. 위에서 내려다 보니 김일성 광장과 대동강, 그리고 주체사상탑이 한 눈에 들어온다.
사방에서 신축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설경이 말에 따르면 고층 아파트를 짓고 있는데 2012년 4월에 맞춰 완공할 예정이란다. 지금이 2011년 10월이니, 도저히 그때까지 완공될 것 같지가 않아 보인다. 남편이 아니나 달라 또 한마디 한다.
"뭐? 이 많은 아파트 건물들이 내년 4월까지 완공될 예정이라고? 새빨간 거짓말하지마. 그때까지 다 완공되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남편은 속마음을 거르지 않고 드러낸다. 나도 믿기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저렇게까지 기분 상하게 말할 필요가 어디 있겠나 싶어 남편 옆구리를 툭툭 쳐댔다. 그러자 설경이가 웃으며 큰소리친다.
"선생님! 제 말을 확인해 보시기 위해서라도 내년 4월에 다시 오셔야겠습네다. 아파트가 다 완공돼 있어도 손가락에 장은 안 지지게 할 테니까 꼭 다시 오십시오."
그나저나 남편은 왜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말을 듣기도 민망하게 많이 쓰는지 싶어 조그마한 소리로 귓가에 대고 주의를 줬다.
"여보, 지금 여기가 어딘데 '새빨간'이란 말을 그렇게 해요. 지난번 군대 얘기 나왔을 때도 그 말을 쓰더니... 제발 말끝마다 '새빨간'이란 말 좀 하지 마세요."
그랬더니 남편이 한 술 더 뜬다.
"가만있어 봐. 여기서도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표현을 하나? 남쪽에서는 많이 쓰거든."
"여기서도 씁네다. 하하."(만룡 안내원)
우리는 서로 쳐다보면서 그 단어의 출처가 어디인지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화는 그쯤에서 끝냈다(사실 지금도 궁금하긴 하다. 언제부터 그 말을 썼으며 왜 생겼는지 말이다).
평화로운 대동강변
평양의 많은 기념비적인 대형 건축물들이 모두 30~40년 전에 지어진 건물들이라고 한다. 내가 어렸을 때 학교에서 북한은 헐벗고 가난한 나라라고 배웠는데 그 옛날에 어떻게 이런 대형 건축물들을 짓는 게 가능했는지 의문이 일었다.
우리는 인민대학습당을 나와 김일성 광장으로 내려가 대동강변을 산책했다. 낚시 나오신 할아버님, 산책 나온 사람들, 보트를 타며 데이트를 즐기는 젊은 남녀들... 여느 도시와 다름없는 평화로운 모습이다.
북한 부모들의 교육열... '여기도 똑같구나'
우리 일행의 다음 방문지는 '학생소년궁전'. '인민대학습당'이 어른들을 위한 학습장이라면 '학생소년궁전'은 아이들의 방과 후 특기 개발을 위한 교육기관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이곳에서는 어른 해설원 대신 청색 교복에 빨간 스카프를 목에 두른, 얼굴이 하얀 여학생이 우리를 거수경례로 맞았다. 오른손을 펴 머리 위로 올리는 경례인데, 공항에 도착한 귀빈에게 화환을 증정한 후 그런 식의 경례를 하는 것을 텔레비전에서 본 기억이 났다. 수줍음을 많이 탈 것 같은 모습과는 달리 씩씩하고 분명한 말소리로 이곳에 대한 설명을 시작한다.
우리가 처음 간 곳은 아코디언반. 이후 우리는 바이올린, 첼로, 기타, 가야금, 피아노, 서예, 자수, 미술, 무용반을 차례대로 참관했다. 관광객들이 들어서면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능숙하게 보여줬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대강당으로 이동해 아이들의 공연을 봤다. 그 모습이 얼마나 깜찍하고 사랑스러운지...
어느새 목이 메여온다. 앞으로 남과 북의 이 아리따운 아이들에게 어른들의 실책으로 인한 쓰라린 아픔과 슬픔은 절대 물려줘서는 안 되리라. 밝은 희망의 빛으로 행복의 열매만을 주렁주렁 물려줄 수 있길 간절히 소망한다.
밖에 나와 보니 엄마 손을 잡고 이곳으로 향하고 있는 아이가 보인다. 엄마의 발걸음이 어지간히 급하다. 아이는 엄마 손에 끌려오듯 뛰어온다. 아마 수업 시간에 늦어서인가 보다. 지금은 다 커 버렸지만 수시로 허둥지둥 아이들을 데리고 이리 저리로 다니던 예전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향수에 젖는다. 이곳도 아이들 교육이라면 극성스러울 수밖에 없는, '사람 사는 곳이구나' 생각하니 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김일성 주석의 생가, 만경대에 가다
안내원들이 '만경대'를 간다고 하길래 나는 "그곳이 무엇을 하는 곳이냐"고 남편에게 물었다. 이름만으로는 전망대 정도쯤 되리라 생각했으나, 김일성 주석의 생가가 있는 곳이라고 한다.
'금수산 궁전'을 먼저 방문한 터라 생가 주위도 엄청나게 웅장하고 화려하게 꾸며 놨을 것이라 생각하며 그 규모를 상상해봤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초라한 초가가 하나 있었다. 주변은 깨끗하게 정돈해 놓은 공원 같았다.
사립문에 들어가 보니 예전 김일성 주석의 조부모와 부모가 쓰던 농기구들이 있다. 그리고 방안에는 초라해 보이는 가재도구가 있다. 벽 위쪽에 걸려 있는 흑백 가족사진들을 보니 남한의 평범한 옛 농가와 별다를 게 없었다. 싼값에 구입한, 찌그러진 장독이 마당에 놓여 있다. 가난했던 그 시절, 고달픈 삶이 느껴진다.
해설원에 따르면 김일성 주석이 북한의 최고 지도자가 된 후 사람들이 김 주석의 조부모에게 '이제는 좀 더 좋은 곳으로 이사 갈 것'을 종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김 주석의 조부모는 '그러면 그럴수록 손자의 뜻을 잘 받들어 더 근면하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답했단다. 해설원은 김 주석의 조부모가 '운명할 때까지 이곳에서 모든 사람들의 본이 돼 부지런하게 일하시며 사셨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지금 시대에 사는 우리 모두에게도 좋은 교훈이 되는, 존경할만한 어른들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천방지축 남편... 드디어 여기서 대가를 치르는구나
생가에서 나와 언덕에 오르니 사방이 한눈에 펼쳐진다. 해설원이 언덕 아래에 있는 건물들을 가리키며 '만경대 혁명학원'이라고 설명해준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남편이 큰 소리로 묻는다.
"아, 그 희생된 '남파 공작원'들의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 그 학교 맞지요?"
그러자 갑자기 다른 관광팀을 인솔하고 있던 한 여성 안내원이 남편의 말을 듣고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는 게 아닌가. 나는 순간 너무 당황하고 긴장됐다. 아무리 나같이 정치를 모르는 사람도 이런 장소에서 '남파 공작원'이라는 말은 쓰지 않는다. 더구나 여기가 어떤 곳인데... '남편의 천방지축 같은 말이 드디어 그 대가를 치르는구나'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우리 해설원은 기가 막혀서인지, 아니면 어이가 없어서인지 어찌할 줄 모르며 헛웃음을 지었다. 이내 해설원이 남편을 잠시 쳐다보더니...
"선생님, '남파 공작원'이라니요? '혁, 명, 열, 사'. 아시갔어요? '혁, 명, 열, 사'."
순간 아차 싶은지 남편이 겸연쩍어하며 멍하니 해설원만 바라본다. 옆에서 설경이도 웃으면서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우리는 언덕 위 쉼터에서 그동안 다녀온 곳들, 남편의 '막말' 때문에 발생한 일화들을 이야기했다. 이곳 해설원, 그리고 우리 안내원들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때로는 박장대소하며 수다를 떨었다.
다음날은 마지막 일정이 잡혀 있는 날이다. 왜 이리 빨리 시간이 흘러가는지... 곧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김일성 광장의 가장 중앙에 있는 '인민대학습당'은 말 그대로 인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학습당이다. 한국으로 치자면 '평생교육원' 혹은 '국립도서관'의 역할을 하는 곳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건물의 웅장함과 규모가 드넓은 김일성 광장을 압도하고 있을 뿐 아니라 주변 건물들을 품어 살피고 있는 듯하다.
평양 한가운데 있는 건 바로 인민대학습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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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민대학습당 | |
ⓒ 신은미 |
일반적으로 세계 나라들을 여행 다녀보면 중요한 광장이나 도시 중심이 되는 곳에는 정부기관이나 궁전, 기념관 등 그 나라를 대표하는 상징물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평양 중심에는 '인민대학습당'이라는 도서관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웠다. 전통 양식 건물의 우아하고 중후한 겉모습 못지않게 건물 안에도 대리석 기둥과 장식들로 웅장함을 더하고 있다.
해설원을 기다리기 위해 잠시 휴게실에 들어가니 '조선국제여행사'에서 온 다른 관광팀들도 해설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 한 해설원이 여러 관광객이 모이면 한꺼번에 설명해주려는 듯하다. 한 팀이 더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휴게실 안에서 다른 팀 담당 안내원들과 인사를 나눴다.
설경이의 친구이자 안내원인 다른 팀 여성 안내원을 보더니 남편이 깜짝 놀란다. 남편이 북한에 오기 전 조사하면서 봤던, '북한 여자 얼짱'으로 유명한 바로 그 여성이란다. 다시 보니 그 아가씨임이 분명했다. 우리는 그녀에게 다가가 "아가씨가 인터넷에서 북한을 대표하는 미녀 중 한 사람"이라고 말해줬더니 몸 둘 바를 몰라하며 부끄러워한다. 설경이가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 내 친구라니 나도 영광입네다"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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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운데가 인터넷상의 '북한 얼짱' 그리고 오른쪽은 설경이. | |
ⓒ 신은미 |
여성들끼리 서로의 만남을 기념하며 사진을 찍으니 남성들도 "오늘의 만남을 훗날 다시 만날 날을 약속하는 징표로 삼자"며 사진을 찍는다. 남편의 손을 꼭 잡고 사진을 찍는 남자 안내원들의 모습이 참 다정하다. 휴게실 안의 훈훈한 기운은 무슨 이유인지 모를 슬픔이 가득한 내 마음에 아롱진다.
해설원이 인민대학습당의 이곳저곳을 데리고 다니며 구경시켜준다. 도서관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곳에는 여러 분야를 망라하는 책들이 있었다. 학생들로 보이는 사람들과 직장인들, 그리고 연세가 들어 보이는 사람들은 각기 자기의 관심 분야에 맞는 정보도 찾고 책도 보고 있었다. 컴퓨터로 정보를 찾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보였는데,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인터넷은 아니고 북한 안에서만 이용할 수 있는 '인트라넷'으로 정보들을 교환하고 있었다.
평양의 영어 열풍... 의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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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민대학습당 영어교실. | |
ⓒ 신은미 |
이곳에서 제일 인상적인 곳은 영어 학습방이었다. 여러 방에서 외국어를 가르치고 있는데 수많은 방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이곳 북한에서도 '영어 열풍'이 대단하다고 한다. 빈자리 없이 꽉꽉 차 있는 영어 교실들이 이를 증명해주고 있었다. 지난번 원산에서 우리에게 "헬로, 헬로"라고 하던 어린 아이들, 모란봉 공원에서 맥주를 권하며 "유 프롬 아메리카? 아이 노우 잉그리쉬"라던 소풍 나온 아저씨, 영어가 쓰여 있는 옷을 입고 영어가 쓰여 있는 가방을 메고 가던 아이들, 모두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영어에 거부감이 없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영어를 가르치는 북한 강사도 영국식 영어가 아닌 미국식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말하자면, 'water'를 '워터'라고 발음하지 않고 '워러'라고 하는 식이다. 놀라울 뿐이다.
영어 학습방을 나와 열람실로 가봤다. 두 여성이 한 테이블에서 공부하고 있어 호기심에 다가가 봤더니 이들도 사전을 옆에 두고 영어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를 보더니 영어로 "어디서 왔냐"고 묻는다. 남편과 나는 우리말로 대답할까 망설이다 그들이 영어를 연습해 보고 싶어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영어로 "미국에서 왔지만 우리말을 할 줄 안다"고 대답했다. 우리말을 할 줄 안다고 했으니 더 이상 영어로 묻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그 학생은 계속 영어로 질문한다. 실습을 해보려는 노력과 열정이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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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민대학습당 열람실에서 사전을 펴 놓고 영어공부를 하는 북한주민들. | |
ⓒ 신은미 |
원산에서 설경이가 '북한에서 영어를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가르친다'고 한 말이 생각이 나서 물어봤다.
"왜 여기서는 영어를 그렇게 어려서부터 가르치지?"
"외국어는 일찍 습득해야 한다는 것이 학자들의 주장입네다. 또 지금은 세계를 향해 눈을 떠야 합네다. 그러니 인민들이 국제어인 영어 그리고 다른 외국어들을 잘 해야 하지 않겠습네까?"
"아파트를 6개월 만에? '새빨간 거짓말' 하지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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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민대학습당 옥상에서 해설원과 함께. 왼쪽으로 아파트 건설현장이 보인다. | |
ⓒ 신은미 |
참관을 마치고 맨 위층에 있는 기념품 가게로 가 'SEE YOU IN PYONGYANG'이라고 적혀 있는 티셔츠를 샀다. 위에서 내려다 보니 김일성 광장과 대동강, 그리고 주체사상탑이 한 눈에 들어온다.
사방에서 신축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설경이 말에 따르면 고층 아파트를 짓고 있는데 2012년 4월에 맞춰 완공할 예정이란다. 지금이 2011년 10월이니, 도저히 그때까지 완공될 것 같지가 않아 보인다. 남편이 아니나 달라 또 한마디 한다.
"뭐? 이 많은 아파트 건물들이 내년 4월까지 완공될 예정이라고? 새빨간 거짓말하지마. 그때까지 다 완공되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남편은 속마음을 거르지 않고 드러낸다. 나도 믿기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저렇게까지 기분 상하게 말할 필요가 어디 있겠나 싶어 남편 옆구리를 툭툭 쳐댔다. 그러자 설경이가 웃으며 큰소리친다.
"선생님! 제 말을 확인해 보시기 위해서라도 내년 4월에 다시 오셔야겠습네다. 아파트가 다 완공돼 있어도 손가락에 장은 안 지지게 할 테니까 꼭 다시 오십시오."
그나저나 남편은 왜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말을 듣기도 민망하게 많이 쓰는지 싶어 조그마한 소리로 귓가에 대고 주의를 줬다.
"여보, 지금 여기가 어딘데 '새빨간'이란 말을 그렇게 해요. 지난번 군대 얘기 나왔을 때도 그 말을 쓰더니... 제발 말끝마다 '새빨간'이란 말 좀 하지 마세요."
그랬더니 남편이 한 술 더 뜬다.
"가만있어 봐. 여기서도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표현을 하나? 남쪽에서는 많이 쓰거든."
"여기서도 씁네다. 하하."(만룡 안내원)
우리는 서로 쳐다보면서 그 단어의 출처가 어디인지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화는 그쯤에서 끝냈다(사실 지금도 궁금하긴 하다. 언제부터 그 말을 썼으며 왜 생겼는지 말이다).
평화로운 대동강변
▲ 대동강변 풍경 대동강변. 강 건너 아파트 건설현장이 보이기도 하고 옥류관이 보이기도 한다. 또한, 대동강변에서 데이트를 즐기는 남녀의 모습, 낚시를 즐기는 노인의 모습도 보인다. |
ⓒ 신은미 |
우리는 인민대학습당을 나와 김일성 광장으로 내려가 대동강변을 산책했다. 낚시 나오신 할아버님, 산책 나온 사람들, 보트를 타며 데이트를 즐기는 젊은 남녀들... 여느 도시와 다름없는 평화로운 모습이다.
북한 부모들의 교육열... '여기도 똑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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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의 학생소년궁전. | |
ⓒ 신은미 |
우리 일행의 다음 방문지는 '학생소년궁전'. '인민대학습당'이 어른들을 위한 학습장이라면 '학생소년궁전'은 아이들의 방과 후 특기 개발을 위한 교육기관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이곳에서는 어른 해설원 대신 청색 교복에 빨간 스카프를 목에 두른, 얼굴이 하얀 여학생이 우리를 거수경례로 맞았다. 오른손을 펴 머리 위로 올리는 경례인데, 공항에 도착한 귀빈에게 화환을 증정한 후 그런 식의 경례를 하는 것을 텔레비전에서 본 기억이 났다. 수줍음을 많이 탈 것 같은 모습과는 달리 씩씩하고 분명한 말소리로 이곳에 대한 설명을 시작한다.
우리가 처음 간 곳은 아코디언반. 이후 우리는 바이올린, 첼로, 기타, 가야금, 피아노, 서예, 자수, 미술, 무용반을 차례대로 참관했다. 관광객들이 들어서면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능숙하게 보여줬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대강당으로 이동해 아이들의 공연을 봤다. 그 모습이 얼마나 깜찍하고 사랑스러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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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생소년궁전 서예반 풍경 | |
ⓒ 신은미 |
▲ 공연하는 학생소년궁전 아이들 공연에 임하는 학생들의 모습이 사랑스럽다. |
ⓒ 신은미 |
밖에 나와 보니 엄마 손을 잡고 이곳으로 향하고 있는 아이가 보인다. 엄마의 발걸음이 어지간히 급하다. 아이는 엄마 손에 끌려오듯 뛰어온다. 아마 수업 시간에 늦어서인가 보다. 지금은 다 커 버렸지만 수시로 허둥지둥 아이들을 데리고 이리 저리로 다니던 예전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향수에 젖는다. 이곳도 아이들 교육이라면 극성스러울 수밖에 없는, '사람 사는 곳이구나' 생각하니 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김일성 주석의 생가, 만경대에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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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일성 주석의 생가 '만경대'. | |
ⓒ 신은미 |
안내원들이 '만경대'를 간다고 하길래 나는 "그곳이 무엇을 하는 곳이냐"고 남편에게 물었다. 이름만으로는 전망대 정도쯤 되리라 생각했으나, 김일성 주석의 생가가 있는 곳이라고 한다.
'금수산 궁전'을 먼저 방문한 터라 생가 주위도 엄청나게 웅장하고 화려하게 꾸며 놨을 것이라 생각하며 그 규모를 상상해봤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초라한 초가가 하나 있었다. 주변은 깨끗하게 정돈해 놓은 공원 같았다.
사립문에 들어가 보니 예전 김일성 주석의 조부모와 부모가 쓰던 농기구들이 있다. 그리고 방안에는 초라해 보이는 가재도구가 있다. 벽 위쪽에 걸려 있는 흑백 가족사진들을 보니 남한의 평범한 옛 농가와 별다를 게 없었다. 싼값에 구입한, 찌그러진 장독이 마당에 놓여 있다. 가난했던 그 시절, 고달픈 삶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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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경대에서. 방 안 흑백사진이 눈에 띈다 | |
ⓒ 신은미 |
해설원에 따르면 김일성 주석이 북한의 최고 지도자가 된 후 사람들이 김 주석의 조부모에게 '이제는 좀 더 좋은 곳으로 이사 갈 것'을 종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김 주석의 조부모는 '그러면 그럴수록 손자의 뜻을 잘 받들어 더 근면하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답했단다. 해설원은 김 주석의 조부모가 '운명할 때까지 이곳에서 모든 사람들의 본이 돼 부지런하게 일하시며 사셨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지금 시대에 사는 우리 모두에게도 좋은 교훈이 되는, 존경할만한 어른들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천방지축 남편... 드디어 여기서 대가를 치르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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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경대' 참관을 마치고. | |
ⓒ 신은미 |
생가에서 나와 언덕에 오르니 사방이 한눈에 펼쳐진다. 해설원이 언덕 아래에 있는 건물들을 가리키며 '만경대 혁명학원'이라고 설명해준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남편이 큰 소리로 묻는다.
"아, 그 희생된 '남파 공작원'들의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 그 학교 맞지요?"
그러자 갑자기 다른 관광팀을 인솔하고 있던 한 여성 안내원이 남편의 말을 듣고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는 게 아닌가. 나는 순간 너무 당황하고 긴장됐다. 아무리 나같이 정치를 모르는 사람도 이런 장소에서 '남파 공작원'이라는 말은 쓰지 않는다. 더구나 여기가 어떤 곳인데... '남편의 천방지축 같은 말이 드디어 그 대가를 치르는구나'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우리 해설원은 기가 막혀서인지, 아니면 어이가 없어서인지 어찌할 줄 모르며 헛웃음을 지었다. 이내 해설원이 남편을 잠시 쳐다보더니...
"선생님, '남파 공작원'이라니요? '혁, 명, 열, 사'. 아시갔어요? '혁, 명, 열, 사'."
순간 아차 싶은지 남편이 겸연쩍어하며 멍하니 해설원만 바라본다. 옆에서 설경이도 웃으면서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우리는 언덕 위 쉼터에서 그동안 다녀온 곳들, 남편의 '막말' 때문에 발생한 일화들을 이야기했다. 이곳 해설원, 그리고 우리 안내원들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때로는 박장대소하며 수다를 떨었다.
다음날은 마지막 일정이 잡혀 있는 날이다. 왜 이리 빨리 시간이 흘러가는지... 곧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북에서 본 판문점 태극기... 이런 비극 또 없다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⑭] 판문점과 개성, 그리고 이별
12.07.21 17:18
최종 업데이트 12.07.27 13:56저는 오래 전부터 음악을 공부하고,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오로지 음악에 관한 지식만을 가르쳐왔습니다. 지금은 평범한 주부이자 아이들의 엄마로 살고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과 함께 북한에 갔습니다. 호기심으로 떠난 여행이었지만, 저는 처음으로 우리 민족의 비극적 운명과 민족애를 느꼈습니다. 동시에 통일에 대한 염원이 생겼습니다. 2011년 10월 이후 지난 4월에 열흘 동안, 그리고 5월에는 3주 동안 나진·선봉을 비롯한 북한 전역을 여행했습니다. - 기자말
북한에서의 마지막 일정이다. 분단의 비극을 몸으로 느낄 수 있는 판문점에 간단다. 서울에 살았을 시절에도 관심이 없어 가본 적 없는 이곳을 평양에서 가게 되다니! 생각만 해도 가슴 쓰라린 긴장감이 느껴진다.
판문점으로 가는 길은 조용하고 평온하다. "바로 우리가 달리고 있는 이 도로를 통해 노무현 대통령께서 평양에 오셨다"고 만룡 안내원이 설명한다. 남편이 말했다. "김정일 위원장께서도 서울에 한번 오셨으면 좋겠는데"라고. 그러자 만룡 안내원이 "남조선에 우리 동포들만 살고 있다면 문제 될 것이 없겠지만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니까 우리 인민들로서는 경호상 안심할 수가 없습네다"라고 대답한다.
'평산'이라고 적혀있는 표지판이 나온다. 내 본관은 평산인데 막상 이정표를 보니 기분이 묘하다. 얼마 더 지나니 해주가 어디 있는지 알려주는 표지판이 나온다. 남편은 북한과 아무 관계가 없지만, 본관이 황해도 해주다.
우리는 궁금증이 발동해 일행들의 본관을 물어봤다. 리만룡 안내원은 전주 이씨, 리인덕 운전기사 아저씨는 경주 이씨, 그리고 설경이는 김해 김씨란다. 남편과 내 본관은 모두 북한에 있는데, 이들의 본관은 모두 남한에 있다. 서로 쳐다보며 묘한 웃음을 짓는다.
서울까지 70km... 가슴이 아픕니다
남쪽 방향을 향하고 있는 우리 차량이 '서울 70km'라고 적혀있는 이정표를 지나친다. '서울'이라는 글자에 반가움과 친숙함이 마음의 눈물이 돼 울컥 솟구친다. 내 가슴이 비통함으로 마구 조여온다.
지금 나는 서로가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최전방, 최전선을 구경하러 가고 있다. 누가 누구의 적이며 왜 무찔러야 하는 대상이 됐는지 내 머릿속은 백지가 돼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남편과 나는 딸 같은 설경이와 만룡 안내원, 그리고 착하디착한 운전수 당원 아저씨와 함께 '적군'의 차량을 타고 휴전협정지로 가고 있다는 사실만이 인지되고 있을 뿐이다.
주변 경비가 삼엄한 것을 보니 판문점에 다 온 것 같다. 우리보다 앞서 외국 관광객들이 도착해 있었다. 우리 부부에게 판문점을 안내해 줄 군인 아저씨가 다가온다. 내가 북한에서 본 군인 아저씨 중에서는 제일 군인다워 보였다. 키도 크고, 말소리도 씩씩하다. 앞으로 둘러볼 판문점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한다. 지휘봉으로 안내도를 짚는데, 목소리에 힘이 실려있다. 판문점 입구서부터는 이 군인 아저씨가 우리 차에 탑승해 함께 비무장지대로 가게 된다고 했다.
커다란 철문이 열린다. 출발을 알리는 다른 군인의 손 신호에 차량이 움직인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차량이 멈춘다. 걸어서 들어가야 한단다. 우리 일행은 걸어서 정전협정이 맺어졌다는 건물에 닿았다. 그 건물 안에는 그 시절의 사진들과 협정 때 사용됐던 책상, 의자, 문서 자료 등이 보관돼 있었다.
예고 없이 전쟁날 수도 있다니...
이 방면으로 아무런 지식도 없고 관심도 없었던 나는 여러 가지가 의문과 의혹이 피어올랐다. 남북의 정전 협정에 왜 남한의 태극기 대신 유엔기와 인공기만 있는지 말이다. 아무리 유엔군이 우리나라를 도와줬다고는 했지만, 판문점에서 태극기를 볼 수 없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중공군도 북한을 도와 참전했는데 오성홍기는 없지 않은가.
이래서 한반도 문제가 '남북 간의 문제'가 아니라 '북미 간의 문제'라고 하는 것일까. 내 무지를 통탄한다. 아무리 음악을 전공해 박사 학위까지 받았다고 해도 우리 근대사조차 모르는 나. '무식의 극치'라는 말 외에는 달리 할 말이 없다. 이러고도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니...
'우리나라는 휴전하고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예고 없이 전쟁이 재발할 수 있다'는 말을 수 없이 들었던 게 생각났다. 그런데 이 정전협정이 남북 간의 협정이 아니라 북미 간의 협정이었다면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한반도가 또다시 전쟁의 회오리 속에 빨려 들어갈 수도 있다는 얘기 아닌가!
나라 잃은 설움마냥 왠지 모를 분함과 비참함이 내 마음을 짓누른다. 복잡하고 착잡한 심경으로 북쪽의 '판문각'에 올랐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곳에 남한의 '자유의 집'이 보인다. 가슴이 미어와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다. 이산가족이 돼 한평생을 살아온 남쪽과 북쪽의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어떤 심정을 느꼈을지... 그들의 슬픔까지 내 마음에 들어와 더 착잡해진다.
눈앞 내려다보이는 곳에 마치 '땅따먹기' 놀이라도 하듯 줄을 그어 놓고, 제 땅에 들어오지 말라고 삼엄한 보초를 서고 있다. 그어 놓은 줄 너머 우리 아들들이 각기 다른 제복을 입고 경비를 서고 있다. 어처구니가 없다. 남녘에 보이는 한 건물에는 태극기가 펄럭인다. 내 마음은 지척에 계신, 보고 싶은 우리 엄마에게 달려간다.
다시는 오고 싶지 않은 곳이다.
통일의 싹, 개성공단을 지나다
판문점을 떠나기 전, 기념품 가게에 들렀다. 가게 책임자의 어투에 다시 한 번 깜짝 놀랐다. 귀에 익숙한, 서울에서도 흔히 들을 수 있는 경기도 억양이었다.
놋쇠로 만든 수저를 집어 들었다. 점원이 수저를 받아들고 계산대로 가져간다. 값을 치르고 나니 점원은 놋수저를 쇼핑백에 담으려 한다. 나는 필요 없다며 포장도 하지 않은 채 핸드백 속에 집어넣었다. 이를 본 기념품 가게의 나이가 지긋한 여성 책임자가 귀에 익숙한 말씨로 하는 말, "에이고, 종이 하나라도 아끼게 해 주려고..." 놀랐다. 어찌 그리 내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는지.
개성시로 들어오는 길목에 고려의 역사를 연 왕건의 릉과 지금은 고려시대의 유물을 전시해놓은 박물관이 돼버린, 고려시대 학문의 요람이었던 성균관을 방문했다. 또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묘도 들렀다. 모든 것이 내가 듣고 배운 것이라 다 알고 있는 우리의 역사를 또다시 해설원에게 들으려니... 판문점에서 목격했던 비극적인 장면과 어우러져 비애가 가슴에 깊게 다가온다.
수채화처럼 맑고 깨끗한 산수를 배경으로 하는 유적지는 가는 곳마다 한산하고 적막하다. 비극의 역사를 살고 있는 자손들의 슬픔을 함께 느끼고 있는 것처럼 쓸쓸한 공기가 차가운 서리가 돼 내 마음을 슬프게 한다.
고려말 충신 정몽주가 암살됐다는 선죽교 바로 앞 식당에서 정갈하게 차려진 점심을 먹었다. 개성식 식단이란다. 오막조막한 그릇에 얌전하게 담겨진 반찬들이 마치 소꿉놀이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지금은 보기 힘들어진 놋그릇과 놋수저를 보니 제사상이 떠오른다. 준비한 사람의 정성이 가득 담긴 밥상이었다.
"조선 사람은 김치찌개 먹어야 속이 풀립네다"
옆에 앉아 있던 설경이가 뭔가 망설이는 듯하더니 종업원 아가씨를 조용히 부른다.
"혹시 돼지고기 김치찌개를 주문해도 되겠습네까? 집 떠난 지 오래 되다보니 엄마가 만들어주시던 김치찌개 생각이 간절해서 말입네다."
"물론 됩니다. 뭐니뭐니해도 조선 사람은 토장국(된장국)이나 김치찌개를 먹어야 속이 확 풀리지요. 금방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종업원 아가씨가 황급히 주방으로 달려간다. '김치찌개'라는 말에 나도 군침이 돈다. 눈치를 챈 설경이가 "김치찌개 드실 배를 조금 남겨 두세요"라며 애교섞인 미소를 짓는다.
식사를 하는 사람은 우리 일행뿐인데 여러 사람이 나와 우리 식사를 도와주고 있다. 한 종업원의 말씨에도 경기도 억양이 살짝 배어 있다. 친근하고 듣기 좋아 계속 말을 시켰더니 우리 의도를 알아채기라도 한 듯 기꺼이 대화에 응한다.
정겨운 사람들과의 친근한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개성시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는 공원에 올랐다. 공원 한쪽에 어린아이들이 모여서 선생님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있다. 너무 사랑스러워 그곳에서 잠깐 쉬어 가자고 했다. 같이 사진을 찍고 싶어서다.
방해를 하지 않으려고 살짝 다가갔다. 하지만, 설명을 하고 계시던 선생님이 우리의 '무단 침입'을 반가이 맞아준다. 아이들에게 손님이 오셨으니 인사하란다. 아이들이 일제히 우리를 향해 큰 소리로 인사한다. 같이 사진을 찍자고 했더니 함께 온 학부형들이 먼저 카메라를 가져와 우리의 모습을 찍기 바쁘다.
아이들은 무슨 공연이라도 하러 왔나 보다. 여자아이들은 옅은 화장을 했다. 내 아이를 예쁘게 보이게끔 신경을 많이 쓴 엄마들의 솜씨임이 분명하다. 떠날 때, 우리 차량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든다. 북한 어디를 가나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장례식장을 빠져나오는 사람처럼 판문점과 개성을 벗어나는 내 마음은 너무 슬프고 어두웠다. 차량은 평양으로 향하고 있다. 바깥 경치도 풀이 죽어 보이는 듯하다. 설경이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왼쪽으로 저 멀리 보이는 곳이 개성 공단입네다."
그 소리가 마치 캄캄한 방에 한 줄기 빛을 비추듯 내 마음에 소망의 빛줄기가 돼 스며든다. 저 개성공단이 통일의 씨앗이 돼 이 땅에 평화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어 주길 바란다.
평양에서의 마지막 밤
어느새 평양에서의 마지막 밤이다. 벌써 내일 아침에 치러야 할 작별의 순간이 내 마음을 무겁게 한다. 엊그제 환영 만찬을 한 것 같은데, 오늘 환송 만찬을 '외교관 클럽'에서 연다고 하니 내 감정의 흐름 만큼이나 시간도 빨리 흐른 듯하다. 한창 외부수리를 하고 있는 식당의 어수선한 바깥 분위기가 꼭 내 마음처럼 느껴진다.
식당 안에 들어가니 서양식 분위기가 느껴졌다. 마치 서울의 한 레스토랑처럼 말이다. 우리 자리는 실내수영장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창가 옆 테이블. 꽤 많은 외국인들이 식사를 하고 있다. 식당 이름이 '외교관 클럽'이니 아마 외교관들이지 않나 싶다.
바깥이 캄캄해 몰라봤는데, 실내로 들어와서 보니 만룡 안내원이 번들 번들 한 옷감의 셔츠를 입고 잔뜩 멋을 내고 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설경이가 한마디 했다.
"만룡 동무, 오늘 의상이 그게 뭡네까. 꼭, 마술사처럼."
"이래뵈도 최고급 공단으로 만든 거야. 왜 기래?"
"흥, 공단도 공단 나름이지. 요 앞에 나가 마술 묘기나 하면 딱..."
결국 남편과 나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한바탕 웃었다. 조금 촌스러워 보이긴 했다. 주변 사람들이 다 쳐다본다. 이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지난 열흘간의 추억들을 하나하나 떠올린다. 추억을 짚다 보니 배를 움켜쥐고 웃느라 식사 시간 내내 허리를 펴지 못했다. 나는 이 순간을 기억하면서 가끔 미소를 지을 것이다.
공항 가는 길... 누구도 말이 없었습니다
다음날, 공항으로 가는 길이 온통 회색빛이다. 처음 이곳에 닿았을 때 봤던 회색빛과는 다른 회색빛이다. 정든 사람들을 두고 가야 하니 슬픔이 눈앞을 가려 세상이 다 회색으로 느껴진다. 이미 텅 비어버린 내 호기심 보따리에 앞으로 무엇을 채워야 할지 마음이 착잡하다.
애초에 별로 내키지 않았던 북한여행. 나는 '과연 북한사람들은 우리와 얼마나 다를까'라는 호기심으로 여행길에 올랐다. 그런 호기심마저 없었더라면 아마 시작조차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나는, 이질감은커녕 '이들은 어쩌면 이렇게 우리와 똑같을까'라는 동질감을 안고 이곳을 떠나고 있다. 어느 것 하나 내 삶과 직접 연결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음식을 먹을 때도, 유적지를 방문할 때도, 인생의 희로애락을 나눌 때도... 곱씹다 보니 슬픔이 배가된다.
여행하면서 비춰진 북녘 동포들의 가난함, 동시에 그들에게서 품어 나오는 아름다운 인간성과 동포애가 한데 어우러져 내 가슴에 파고든다.
공항으로 가는 내내 그 누구도 말이 없다. 아무 말이나 빵빵 터트리는 남편도 말이 없다. 자동차 달리는 소리만이 온몸에 진동으로 와 닿는다. 그 누구라도 작별의 말을 꺼내면 슬픔이 울컥 폭발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그때 남편이 애써 입을 연다.
"설경아, 다음에 오면 네 남편될 사람과 꼭 함께 만나자."
설경이는 말없이 미소지으며 눈물을 글썽인 채 얼굴을 돌린다.
숨 막히는 슬픔을 모면하기 위해 우리는 말 없는 포옹으로 마음을 전하고 재빨리 출국 심사대를 통과했다. 세 사람은 저 멀리서 떠나지 않고 손을 흔들고 있다. 달나라보다도 더 생소했던 저편에는 우리의 딸과 건실하고 다정다감한 옆집 애기 아빠, 그리고 순박한 동네 아저씨가 다시 만날 날을 희망하고 있다. 우리 부부도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아가며 손을 흔든다.
"또 올게."
이 말밖에는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었다. 기약이 없는 이별이라는 것을...
북한 입국 때 맡겨놓은 휴대전화를 찾고 자리에 앉았다. 창밖, 활주로에 덩그러니 서 있는 고려항공 비행기를 쳐다보니 왠지 모를 연민이 솟구친다. 슬픈 마음을 누를 길이 없다. 남편도 계속 눈물을 글썽인다.
'독립' 외치던 한 핏줄 선열들은 무슨 말을 할까
북경으로 향하는 비행기가 적막함을 가득 안고 구름 속을 배회한다. 내 마음 역시 잘못 달아놓은 연줄처럼 머리 위 허공을 이리저리 배회한다.
분단이 고질적인 운명이 돼 속수무책으로 흘러온 '무감각의 지난 세월'! 수많은 이산가족들의 한 맺힌 슬픔이 시퍼런 멍 망울이 돼버린 채, 꺼져가는 무심한 숯덩이처럼 우리 역사의 한편에 놓여 있다. 우리의 자손들은 내 형제가, 내 자매가, 내 이웃이, 내 민족이 누구인지, 누구였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맹렬하게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면서 말이다.
우리는 얼마나 비극적인 운명을 후손들에게 남겨주게 될 것인가. 어리석은 우리 세대의 그릇된 판단과 이기적인 아집으로 많은 것들을 잃어버린 채, 한 많은 세상을 살면서 말이다.
지난 시절,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채 '대한 독립'을 피 흘리며 외치던 우리 선열들은 지금의 배부른 졸장부인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보내고 있을까. 용광로처럼 뜨거워진 내 마음은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에 이내 차가운 얼음덩이처럼 서늘해진다.
우리의 크나큰 편견과 오만함이 훗날 사랑하는 후손들에게 굴욕의 역사가 돼 갚지 못할 부채가 되지는 않을까. '희망이 없다'고 외치는 우리 자녀들에게 최소한 우리가 저질러 놓은 조국 분단의 빚만이라도 해결해 놓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남과 북의 곪을 대로 곪아버린 염증을 터트리고, 푹 패인 상처를 꿰매 건강하고 싱그러운 새살이 돋아나도록 소망의 묘약을 다시 한 번 발라야 한다. 분열과 미움이 화합과 사랑으로 어우러져 새 소망과 새 빛을 발휘하는 통일 조국의 가슴 벅찬 청사진을 생각 없이 살아온 내 삶의 부끄러운 반성문과 함께 조심스레 그려 본다.
나는 진정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며 살았을까. 내 이웃은, 내 형제는, 내 민족은 다름 아닌 바로 설경이고, 만룡 안내원이며, 리인덕 운전기사 아저씨인 것을... 먼 길을 돌고 돌아서야 만날 수 있었던 사랑하는 이들, 가장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가장 먼 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들이 바로 내 그리운 반쪽 나라, 내 민족, 내 선한 이웃이었다. 회개하는 심정으로 창밖 하늘을 바라본다.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도 슬픈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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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70km를 알리는 이정표 | |
ⓒ 신은미 |
북한에서의 마지막 일정이다. 분단의 비극을 몸으로 느낄 수 있는 판문점에 간단다. 서울에 살았을 시절에도 관심이 없어 가본 적 없는 이곳을 평양에서 가게 되다니! 생각만 해도 가슴 쓰라린 긴장감이 느껴진다.
판문점으로 가는 길은 조용하고 평온하다. "바로 우리가 달리고 있는 이 도로를 통해 노무현 대통령께서 평양에 오셨다"고 만룡 안내원이 설명한다. 남편이 말했다. "김정일 위원장께서도 서울에 한번 오셨으면 좋겠는데"라고. 그러자 만룡 안내원이 "남조선에 우리 동포들만 살고 있다면 문제 될 것이 없겠지만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니까 우리 인민들로서는 경호상 안심할 수가 없습네다"라고 대답한다.
'평산'이라고 적혀있는 표지판이 나온다. 내 본관은 평산인데 막상 이정표를 보니 기분이 묘하다. 얼마 더 지나니 해주가 어디 있는지 알려주는 표지판이 나온다. 남편은 북한과 아무 관계가 없지만, 본관이 황해도 해주다.
우리는 궁금증이 발동해 일행들의 본관을 물어봤다. 리만룡 안내원은 전주 이씨, 리인덕 운전기사 아저씨는 경주 이씨, 그리고 설경이는 김해 김씨란다. 남편과 내 본관은 모두 북한에 있는데, 이들의 본관은 모두 남한에 있다. 서로 쳐다보며 묘한 웃음을 짓는다.
서울까지 70km... 가슴이 아픕니다
남쪽 방향을 향하고 있는 우리 차량이 '서울 70km'라고 적혀있는 이정표를 지나친다. '서울'이라는 글자에 반가움과 친숙함이 마음의 눈물이 돼 울컥 솟구친다. 내 가슴이 비통함으로 마구 조여온다.
지금 나는 서로가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최전방, 최전선을 구경하러 가고 있다. 누가 누구의 적이며 왜 무찔러야 하는 대상이 됐는지 내 머릿속은 백지가 돼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남편과 나는 딸 같은 설경이와 만룡 안내원, 그리고 착하디착한 운전수 당원 아저씨와 함께 '적군'의 차량을 타고 휴전협정지로 가고 있다는 사실만이 인지되고 있을 뿐이다.
주변 경비가 삼엄한 것을 보니 판문점에 다 온 것 같다. 우리보다 앞서 외국 관광객들이 도착해 있었다. 우리 부부에게 판문점을 안내해 줄 군인 아저씨가 다가온다. 내가 북한에서 본 군인 아저씨 중에서는 제일 군인다워 보였다. 키도 크고, 말소리도 씩씩하다. 앞으로 둘러볼 판문점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한다. 지휘봉으로 안내도를 짚는데, 목소리에 힘이 실려있다. 판문점 입구서부터는 이 군인 아저씨가 우리 차에 탑승해 함께 비무장지대로 가게 된다고 했다.
커다란 철문이 열린다. 출발을 알리는 다른 군인의 손 신호에 차량이 움직인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차량이 멈춘다. 걸어서 들어가야 한단다. 우리 일행은 걸어서 정전협정이 맺어졌다는 건물에 닿았다. 그 건물 안에는 그 시절의 사진들과 협정 때 사용됐던 책상, 의자, 문서 자료 등이 보관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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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녘에서 바라본 판문점... '자유의 집'이 손에 잡힐 듯 | |
ⓒ 신은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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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문점의 북한 병사들. | |
ⓒ 신은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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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전협정 조인장에 있는 유엔기와 문서. | |
ⓒ 신은미 |
예고 없이 전쟁날 수도 있다니...
이 방면으로 아무런 지식도 없고 관심도 없었던 나는 여러 가지가 의문과 의혹이 피어올랐다. 남북의 정전 협정에 왜 남한의 태극기 대신 유엔기와 인공기만 있는지 말이다. 아무리 유엔군이 우리나라를 도와줬다고는 했지만, 판문점에서 태극기를 볼 수 없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중공군도 북한을 도와 참전했는데 오성홍기는 없지 않은가.
이래서 한반도 문제가 '남북 간의 문제'가 아니라 '북미 간의 문제'라고 하는 것일까. 내 무지를 통탄한다. 아무리 음악을 전공해 박사 학위까지 받았다고 해도 우리 근대사조차 모르는 나. '무식의 극치'라는 말 외에는 달리 할 말이 없다. 이러고도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니...
'우리나라는 휴전하고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예고 없이 전쟁이 재발할 수 있다'는 말을 수 없이 들었던 게 생각났다. 그런데 이 정전협정이 남북 간의 협정이 아니라 북미 간의 협정이었다면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한반도가 또다시 전쟁의 회오리 속에 빨려 들어갈 수도 있다는 얘기 아닌가!
나라 잃은 설움마냥 왠지 모를 분함과 비참함이 내 마음을 짓누른다. 복잡하고 착잡한 심경으로 북쪽의 '판문각'에 올랐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곳에 남한의 '자유의 집'이 보인다. 가슴이 미어와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다. 이산가족이 돼 한평생을 살아온 남쪽과 북쪽의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어떤 심정을 느꼈을지... 그들의 슬픔까지 내 마음에 들어와 더 착잡해진다.
눈앞 내려다보이는 곳에 마치 '땅따먹기' 놀이라도 하듯 줄을 그어 놓고, 제 땅에 들어오지 말라고 삼엄한 보초를 서고 있다. 그어 놓은 줄 너머 우리 아들들이 각기 다른 제복을 입고 경비를 서고 있다. 어처구니가 없다. 남녘에 보이는 한 건물에는 태극기가 펄럭인다. 내 마음은 지척에 계신, 보고 싶은 우리 엄마에게 달려간다.
다시는 오고 싶지 않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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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건릉에서 | |
ⓒ 신은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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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당앞에 있는 선죽교 | |
ⓒ 신은미 |
통일의 싹, 개성공단을 지나다
판문점을 떠나기 전, 기념품 가게에 들렀다. 가게 책임자의 어투에 다시 한 번 깜짝 놀랐다. 귀에 익숙한, 서울에서도 흔히 들을 수 있는 경기도 억양이었다.
놋쇠로 만든 수저를 집어 들었다. 점원이 수저를 받아들고 계산대로 가져간다. 값을 치르고 나니 점원은 놋수저를 쇼핑백에 담으려 한다. 나는 필요 없다며 포장도 하지 않은 채 핸드백 속에 집어넣었다. 이를 본 기념품 가게의 나이가 지긋한 여성 책임자가 귀에 익숙한 말씨로 하는 말, "에이고, 종이 하나라도 아끼게 해 주려고..." 놀랐다. 어찌 그리 내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는지.
개성시로 들어오는 길목에 고려의 역사를 연 왕건의 릉과 지금은 고려시대의 유물을 전시해놓은 박물관이 돼버린, 고려시대 학문의 요람이었던 성균관을 방문했다. 또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묘도 들렀다. 모든 것이 내가 듣고 배운 것이라 다 알고 있는 우리의 역사를 또다시 해설원에게 들으려니... 판문점에서 목격했던 비극적인 장면과 어우러져 비애가 가슴에 깊게 다가온다.
수채화처럼 맑고 깨끗한 산수를 배경으로 하는 유적지는 가는 곳마다 한산하고 적막하다. 비극의 역사를 살고 있는 자손들의 슬픔을 함께 느끼고 있는 것처럼 쓸쓸한 공기가 차가운 서리가 돼 내 마음을 슬프게 한다.
고려말 충신 정몽주가 암살됐다는 선죽교 바로 앞 식당에서 정갈하게 차려진 점심을 먹었다. 개성식 식단이란다. 오막조막한 그릇에 얌전하게 담겨진 반찬들이 마치 소꿉놀이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지금은 보기 힘들어진 놋그릇과 놋수저를 보니 제사상이 떠오른다. 준비한 사람의 정성이 가득 담긴 밥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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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성식 식단 | |
ⓒ 신은미 |
"조선 사람은 김치찌개 먹어야 속이 풀립네다"
옆에 앉아 있던 설경이가 뭔가 망설이는 듯하더니 종업원 아가씨를 조용히 부른다.
"혹시 돼지고기 김치찌개를 주문해도 되겠습네까? 집 떠난 지 오래 되다보니 엄마가 만들어주시던 김치찌개 생각이 간절해서 말입네다."
"물론 됩니다. 뭐니뭐니해도 조선 사람은 토장국(된장국)이나 김치찌개를 먹어야 속이 확 풀리지요. 금방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종업원 아가씨가 황급히 주방으로 달려간다. '김치찌개'라는 말에 나도 군침이 돈다. 눈치를 챈 설경이가 "김치찌개 드실 배를 조금 남겨 두세요"라며 애교섞인 미소를 짓는다.
식사를 하는 사람은 우리 일행뿐인데 여러 사람이 나와 우리 식사를 도와주고 있다. 한 종업원의 말씨에도 경기도 억양이 살짝 배어 있다. 친근하고 듣기 좋아 계속 말을 시켰더니 우리 의도를 알아채기라도 한 듯 기꺼이 대화에 응한다.
정겨운 사람들과의 친근한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개성시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는 공원에 올랐다. 공원 한쪽에 어린아이들이 모여서 선생님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있다. 너무 사랑스러워 그곳에서 잠깐 쉬어 가자고 했다. 같이 사진을 찍고 싶어서다.
방해를 하지 않으려고 살짝 다가갔다. 하지만, 설명을 하고 계시던 선생님이 우리의 '무단 침입'을 반가이 맞아준다. 아이들에게 손님이 오셨으니 인사하란다. 아이들이 일제히 우리를 향해 큰 소리로 인사한다. 같이 사진을 찍자고 했더니 함께 온 학부형들이 먼저 카메라를 가져와 우리의 모습을 찍기 바쁘다.
아이들은 무슨 공연이라도 하러 왔나 보다. 여자아이들은 옅은 화장을 했다. 내 아이를 예쁘게 보이게끔 신경을 많이 쓴 엄마들의 솜씨임이 분명하다. 떠날 때, 우리 차량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든다. 북한 어디를 가나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장례식장을 빠져나오는 사람처럼 판문점과 개성을 벗어나는 내 마음은 너무 슬프고 어두웠다. 차량은 평양으로 향하고 있다. 바깥 경치도 풀이 죽어 보이는 듯하다. 설경이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왼쪽으로 저 멀리 보이는 곳이 개성 공단입네다."
그 소리가 마치 캄캄한 방에 한 줄기 빛을 비추듯 내 마음에 소망의 빛줄기가 돼 스며든다. 저 개성공단이 통일의 씨앗이 돼 이 땅에 평화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어 주길 바란다.
평양에서의 마지막 밤
어느새 평양에서의 마지막 밤이다. 벌써 내일 아침에 치러야 할 작별의 순간이 내 마음을 무겁게 한다. 엊그제 환영 만찬을 한 것 같은데, 오늘 환송 만찬을 '외교관 클럽'에서 연다고 하니 내 감정의 흐름 만큼이나 시간도 빨리 흐른 듯하다. 한창 외부수리를 하고 있는 식당의 어수선한 바깥 분위기가 꼭 내 마음처럼 느껴진다.
식당 안에 들어가니 서양식 분위기가 느껴졌다. 마치 서울의 한 레스토랑처럼 말이다. 우리 자리는 실내수영장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창가 옆 테이블. 꽤 많은 외국인들이 식사를 하고 있다. 식당 이름이 '외교관 클럽'이니 아마 외교관들이지 않나 싶다.
바깥이 캄캄해 몰라봤는데, 실내로 들어와서 보니 만룡 안내원이 번들 번들 한 옷감의 셔츠를 입고 잔뜩 멋을 내고 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설경이가 한마디 했다.
"만룡 동무, 오늘 의상이 그게 뭡네까. 꼭, 마술사처럼."
"이래뵈도 최고급 공단으로 만든 거야. 왜 기래?"
"흥, 공단도 공단 나름이지. 요 앞에 나가 마술 묘기나 하면 딱..."
결국 남편과 나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한바탕 웃었다. 조금 촌스러워 보이긴 했다. 주변 사람들이 다 쳐다본다. 이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지난 열흘간의 추억들을 하나하나 떠올린다. 추억을 짚다 보니 배를 움켜쥐고 웃느라 식사 시간 내내 허리를 펴지 못했다. 나는 이 순간을 기억하면서 가끔 미소를 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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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성시 기와집 동네 | |
ⓒ 신은미 |
공항 가는 길... 누구도 말이 없었습니다
다음날, 공항으로 가는 길이 온통 회색빛이다. 처음 이곳에 닿았을 때 봤던 회색빛과는 다른 회색빛이다. 정든 사람들을 두고 가야 하니 슬픔이 눈앞을 가려 세상이 다 회색으로 느껴진다. 이미 텅 비어버린 내 호기심 보따리에 앞으로 무엇을 채워야 할지 마음이 착잡하다.
애초에 별로 내키지 않았던 북한여행. 나는 '과연 북한사람들은 우리와 얼마나 다를까'라는 호기심으로 여행길에 올랐다. 그런 호기심마저 없었더라면 아마 시작조차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나는, 이질감은커녕 '이들은 어쩌면 이렇게 우리와 똑같을까'라는 동질감을 안고 이곳을 떠나고 있다. 어느 것 하나 내 삶과 직접 연결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음식을 먹을 때도, 유적지를 방문할 때도, 인생의 희로애락을 나눌 때도... 곱씹다 보니 슬픔이 배가된다.
여행하면서 비춰진 북녘 동포들의 가난함, 동시에 그들에게서 품어 나오는 아름다운 인간성과 동포애가 한데 어우러져 내 가슴에 파고든다.
공항으로 가는 내내 그 누구도 말이 없다. 아무 말이나 빵빵 터트리는 남편도 말이 없다. 자동차 달리는 소리만이 온몸에 진동으로 와 닿는다. 그 누구라도 작별의 말을 꺼내면 슬픔이 울컥 폭발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그때 남편이 애써 입을 연다.
"설경아, 다음에 오면 네 남편될 사람과 꼭 함께 만나자."
설경이는 말없이 미소지으며 눈물을 글썽인 채 얼굴을 돌린다.
숨 막히는 슬픔을 모면하기 위해 우리는 말 없는 포옹으로 마음을 전하고 재빨리 출국 심사대를 통과했다. 세 사람은 저 멀리서 떠나지 않고 손을 흔들고 있다. 달나라보다도 더 생소했던 저편에는 우리의 딸과 건실하고 다정다감한 옆집 애기 아빠, 그리고 순박한 동네 아저씨가 다시 만날 날을 희망하고 있다. 우리 부부도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아가며 손을 흔든다.
"또 올게."
이 말밖에는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었다. 기약이 없는 이별이라는 것을...
북한 입국 때 맡겨놓은 휴대전화를 찾고 자리에 앉았다. 창밖, 활주로에 덩그러니 서 있는 고려항공 비행기를 쳐다보니 왠지 모를 연민이 솟구친다. 슬픈 마음을 누를 길이 없다. 남편도 계속 눈물을 글썽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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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의 고려항공기 | |
ⓒ 신은미 |
'독립' 외치던 한 핏줄 선열들은 무슨 말을 할까
북경으로 향하는 비행기가 적막함을 가득 안고 구름 속을 배회한다. 내 마음 역시 잘못 달아놓은 연줄처럼 머리 위 허공을 이리저리 배회한다.
분단이 고질적인 운명이 돼 속수무책으로 흘러온 '무감각의 지난 세월'! 수많은 이산가족들의 한 맺힌 슬픔이 시퍼런 멍 망울이 돼버린 채, 꺼져가는 무심한 숯덩이처럼 우리 역사의 한편에 놓여 있다. 우리의 자손들은 내 형제가, 내 자매가, 내 이웃이, 내 민족이 누구인지, 누구였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맹렬하게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면서 말이다.
우리는 얼마나 비극적인 운명을 후손들에게 남겨주게 될 것인가. 어리석은 우리 세대의 그릇된 판단과 이기적인 아집으로 많은 것들을 잃어버린 채, 한 많은 세상을 살면서 말이다.
지난 시절,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채 '대한 독립'을 피 흘리며 외치던 우리 선열들은 지금의 배부른 졸장부인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보내고 있을까. 용광로처럼 뜨거워진 내 마음은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에 이내 차가운 얼음덩이처럼 서늘해진다.
우리의 크나큰 편견과 오만함이 훗날 사랑하는 후손들에게 굴욕의 역사가 돼 갚지 못할 부채가 되지는 않을까. '희망이 없다'고 외치는 우리 자녀들에게 최소한 우리가 저질러 놓은 조국 분단의 빚만이라도 해결해 놓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남과 북의 곪을 대로 곪아버린 염증을 터트리고, 푹 패인 상처를 꿰매 건강하고 싱그러운 새살이 돋아나도록 소망의 묘약을 다시 한 번 발라야 한다. 분열과 미움이 화합과 사랑으로 어우러져 새 소망과 새 빛을 발휘하는 통일 조국의 가슴 벅찬 청사진을 생각 없이 살아온 내 삶의 부끄러운 반성문과 함께 조심스레 그려 본다.
나는 진정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며 살았을까. 내 이웃은, 내 형제는, 내 민족은 다름 아닌 바로 설경이고, 만룡 안내원이며, 리인덕 운전기사 아저씨인 것을... 먼 길을 돌고 돌아서야 만날 수 있었던 사랑하는 이들, 가장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가장 먼 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들이 바로 내 그리운 반쪽 나라, 내 민족, 내 선한 이웃이었다. 회개하는 심정으로 창밖 하늘을 바라본다.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도 슬픈 여행이었다.
'도깨비 사는 나라' 북한... 다시 가기로 했습니다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15] 미국에 돌아왔지만, 그리웠습니다
12.07.28 21:39
최종 업데이트 12.07.28 21:39저는 오래 전부터 음악을 공부하고,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오로지 음악에 관한 지식만을 가르쳐왔습니다. 지금은 평범한 주부이자 아이들의 엄마로 살고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과 함께 북한에 갔습니다. 호기심으로 떠난 여행이었지만, 저는 처음으로 우리 민족의 비극적 운명과 민족애를 느꼈습니다. 동시에 통일에 대한 염원이 생겼습니다. 2011년 10월 이후 지난 4월에 열흘 동안, 그리고 5월에는 3주 동안 나진·선봉을 비롯한 북한 전역을 여행했습니다. - 기자말
우리 민족의 비극적인 운명! 반쪽 몸으로 성한 몸인 것처럼 견뎌온 지난 세월이 비참하고 또 비참해 눈물이 난다. 지척에 서로의 반쪽을 두고서 왜, 무엇이 무서워 모질게 외면하며 살아왔던가. 북녘 동포를 등지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온전한 몸을 이루기 위해 우리의 남과 북, 한민족이 서로 보듬어 안아야 한다'는 생각을 내내 한다.
서울서부터 우리를 마중 나온 남편 친구와 보낸 북경에서의 하루도, 미국 땅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도 말할 수 없는 상실감과 침울함만이 나를 누르고 있었다. 남편 역시 한숨으로 마음을 대신하고 있다.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는 다른 많은 나라도 여행이나 텔레비전을 통해 접해봤으나 이토록 마음을 비통하게 한 여행은 난생처음이다. 서로 잘못을 따지기 이전에 형제의 아픔을 사랑으로 감싸 안아야 한다는 생각만이 내 마음에 가득했다. 남과 북, 우리는 같이 이마를 맞대고 서로의 고통을 덜어 나아갈 길을 모색해야 하는 것 아닐까. 이런 생각들이 가슴을 가득 채워 심장이 터질 것만 같이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여행서 돌아와 보낸 며칠. 이 시간은 마치 무의미한 영상필름을 보는 것처럼 스르르 지나갔다. 여전히 남편은 별다른 말이 없다. '그저 밥맛이 없다'며 거의 식사를 하지 못하고 있음이 지금의 심정을 대변해주고 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집 안 청소를 했다. 침울함이 지배하는 내 마음도 깨끗이 청소하고 싶어서... 깨끗한 빈자리를 소망과 희망으로 가득 채울 생각으로.
여행을 하고 돌아온 뒤 무슨 일이 있어도 여행 가방을 먼저 정리하고, 빨랫감을 다 빨아 해치우고 나서야 잠이 오는 나였지만, 이번 여행은 달랐다. 여행 후유증을 이기지 못했던 것일까. 나는 몇 날 며칠을 방치해놨던, 슬픈 모습을 하고 있는 여행 가방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갈 때와는 달리 헐렁해져 있는 가방 때문인지, 북한에 두고 온 것만 같은 내 호기심 보따리 때문인지 내 마음도 허전하다. 가방 속을 정리하자니, 그곳에서의 추억들이 하나 둘씩 떠오른다. 열흘이라는 시간은 그동안 수십 년을 방치해뒀던 민족애에 불을 지폈다. 마른 장작더미와 같았던 내 마음은 이내 활활 타올랐다. 애잔한 미소가 뜨거운 입김이 돼 내 눈동자를 붉게 물들인다. 내 마음속 '호기심'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는 '사명감'이 차지했다.
북한 사람들의 미소에 친구들은 '충격'
전혀 연락도 닿지 않는 '무서운 나라'에 간 우리를 두고 하루하루 눈덩이처럼 쌓여가는 궁금증을 주체하지 못하게 돼 버린 가족·친구·친지 그리고 지인들이 우리 부부의 소식을 기다리다 못해 빗발치게 전화를 해댄다. 외국인 친구들도 예외가 아니다. 특히 미국인 친구들은 더 큰 관심을 보이며 '우리도 북한 여행을 하고 싶다'며 이야기를 듣겠다고 난리다.
우리는 여러 팀으로 그룹을 나눠 사람들을 초대해 그곳에서 찍어온 천여 장의 사진들을 보여줬다. 사람들은 마치 비밀리에 촬영된 첩보영화 시사회에 참석하는 사람들 마냥 흥분에 들떠 한걸음에 달려왔다.
그들은 우리 부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이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내가 처음 느꼈던 심정을 이들도 똑같이 느끼고 있을 것이라 생각됐다. 아마 자신들이 마음에 품고 있었던 모습과 실상들이 확연히 달라서 배신감도 실망도 클 것이다. 아마 그들은 우리 부부의 말이나 사진 속에서 그들 머릿속에 고정관념으로 자리 잡고 있는 '실체'를 확인해보고 싶었을지 모른다. 나 역시 북한에 다녀오기 전에는 그랬으니까.
그러나 사진 속 활짝 웃고 있는 사람, 다정히 손잡고 걸어가는 연인들, 가족들... 우리와 하등 다를 바 없는 일상의 순간들. 이런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보던 그들은 북한을 '우리와 똑같은 한 세기를 공유하고 있는 이웃 나라', 그리고 북한 사람들을 '우리 선조들이 물려준 아름다운 금수강산의 또 다른 반쪽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내 민족'이라고 느끼며 충격을 받는 듯했다.
도깨비가 사는 북한? 정말 그럴까요
내가 자라던 시절의 반공 교육에 의하면, 북한 사람들은 사람 모습을 하고 있는 '도깨비 악당'들이었다. 그들은 슬픔도 기쁨도 사랑도 연민도 인정도 웃음도 모르는, 그저 빨간 깃발 아래 총부리 겨누며 행진하는 무서운 로봇들이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치는 어린 소년을 무참히 죽일 것만 같았던 '짐승'같은 존재였다.
어린 시절 학교 교과서에서 본 북한은 사람들이 일하고 있는 논이든 공장이든 어디서든지 무서운 인민군들이 총대를 메고 감시하며 서 있는 곳, 자식이 부모를 신고해 자식이 보는 앞에서 부모를 꽁꽁 묶어 잡아가는 곳이었다. 때문에 미술시간에 북한 사람들을 그릴 때면 나도 그들의 얼굴을 도깨비같이 그렸으며, 얼굴에는 어김없이 빨간 색깔을 덧칠했다.
예전 한국에서 받은 반공 교육에 많은 영향을 받은 세대인 내 친구들. 그들은 북한에 대해 갖고 있는 선입견이 있었다. 때문에 눈앞에 펼쳐지는 우리 부부의 여행 사진을 접하는 그들이 놀라는 것은 당연했다.
오래 전 여성들로 구성된 북한 응원단이 한국에 왔을 때 한국 기자가 한 응원단원에게 다가가서 인터뷰하는 장면을 텔레비전을 통해 본 적이 있다. 당시 기자가 "북한에서도 연예를 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응원단원은 기자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더니 대꾸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당시 나도 호기심을 품고 북한 여성의 대답을 기다리다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 여성 응원단원이 왜 그 기자를 단박에 외면했는지 백번 이해하고도 남는다.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니 이해할 수는 있지만, 당시 기자는 비합리적인 반공 교육이 초래하는 부작용이나 역효과 또한 고려해야 하지 않았을까.
북한 여행사진을 보던 한 어르신이 한쪽에서 눈물을 닦으신다. 그분의 고향은 북녘땅. 그동안 꽉 닫아뒀던 '묵은지병'을 따듯 마음의 병뚜껑을 여니 슬픔과 그리움이 복받쳐 흐르셨나 보다.
그동안 무관심했던 민족의 비극이 내 피부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내가 우리 민족의 통일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과연 무엇일까. 힘없고 무능한 내 자신이 너무 속상해서 나 역시 흔들어진 샴페인처럼 눈물을 쏟는다.
미국인 친구들은 미소 짓고 있는 북한사람들의 사진에 놀라워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북한 사람이 웃고 있는 사진을 처음 본다'고 한다.
그렇다. 미국 언론에 비친 북한의 모습 또한 왜곡돼 있기는 매한가지다. 패션 감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옷을 입고 걸어가는 시민들, 텅 빈 평양 거리, 인상 쓰고 있는 군인들, 호전적으로 비치는 군대의 행진... 이것이 서구의 관점에서 바라본 북한이다.
한국의 경우, 남북 대치라는 특수한 상황에 놓여 있다고 하지만, 미국은 왜 북한을 그런 식으로 왜곡하는지 모르겠다. 일부 전문가의 말에 의하면 미국의 군산복합 시스템이 계속 유지되기 위해서는 미국에 위협이 되는 '대상'이 필요하며 북한이 그 중 하나라고 한다. 엄청난 군사력을 갖고 있는 미국이, 북한 국방비의 몇백 배에 달하는 돈을 국방비로 쓰고 있는 미국이 북한을 '위협을 가할지 모르는 대상'으로 간주하고 있다니... 솔직히 잘 이해가 안 된다.
한국인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미국 친구들도 자신들이 갖고 있던 고정관념을 깨는 사진을 보니 북한을 여행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커진 것 같았다.
'다시 가자'... 다시 밟고 싶은 우리 땅
슬라이드 쇼를 하는 동안 9명의 한국 친구들(모두 미국시민권자)과 7명의 미국 친구들이 '북한 여행을 함께 다시 하자'며 간절히 청했다. 나 또한 지난번 여행 때 북한의 동포들과 나눴던 따뜻한 인간적인 교분을 잊을 수가 없어 다시 갈 날을 그리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전쟁기념관의 여성군관 해설원이 추천한 '민족의 기상이 깃들어 있다'는 백두산을, 남의 나라인 중국 땅을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땅을 밟고 가 보리라'는 깊은 바람도 마음에 있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빨리 여행 이야기가 다시 나오고, 다시 북한으로 떠날 채비를 하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2011년 12월 중순부터 우리는 친구들과 함께 두 번째의 북한 여행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여러 번의 논의와 조정 끝에 어렵사리 2012년 5월 8일부터 5월 19일까지 11박 12일의 일정이 잡혔다.
그러던 중 김정일 위원장 사망이라는 뜻밖의 소식을 접하게 됐다. 텔레비전에서는 매시간 특집으로 이 뉴스를 온종일 내보냈다. 통곡하는 북한 주민들을 가리키며 '진짜가 아닌 가식'이라는 등의 해설을 붙이며 장례식 장면도 보여줬다.
극소수이긴 하나 일부 미국 전문가가 텔레비전에 나와 '북한 사람들의 통곡이 진심 어린 행동일 수 있다'는 견해를 펼치기도 했다. 어떤 미국 방송에서는 정치학자들과의 좌담을 통해 마치 한반도에서 전쟁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2012년 1월 10일께가 되니 9명의 한국 친구들 중 4명이 이런 어수선한 상황에서는 북한에 갈 수 없겠다며 두려운 심정을 전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나머지 사람들이 열심히 여행계획을 짜고 있는데 또 하나의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북한이 인공위성을 발사한다는 것이었다. 이 뉴스가 나오자 또 다른 3명의 한국 친구들이 여행을 포기하겠다고 했다. 7명의 미국 친구들은 모두 '계획에 변화는 없다'며 혹시 '우리 부부도 가지 않겠다고 하면 어쩌나' 노심초사해 매일 우리를 떠보려 전화를 걸었다.
오히려 그들은 북한에 그런 일이 일어나면 일어날수록 '호기심에 더 흥분이 된다'며 마치 모험을 떠나는 사람들처럼 들떴다. 이들은 '왜 한국 친구들이 여행을 취소하는지 알 수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기야 이 미국 친구들은 단 한 번도 자신의 땅에서 지척에 철조망을 쳐 놓고 총부리를 겨누며, 언제든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긴장감과 불안감 속에 살아본 적이 없으니... 게다가 나보다 힘센 사람들의 도움까지 받아가며 전전긍긍 살아본 적이 없으니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게 당연할 것이다.
이런저런 일로 인해 남은 사람들은 한국인 부부 한 쌍과 미국인 친구 7명, 그리고 우리 부부를 포함해 모두 11명이 됐다.
어느새 내 마음은 이산가족이 돼 평양에 두고 온 딸, 설경이와 사랑을 듬뿍 주고 싶은 리만룡 안내원, 리인덕 운전기사 당원 아저씨, 그리고 스쳐 지나간 정겨운 북녘 동포들을 향해 날개치듯 달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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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굽 높은 신발을 신은 멋쟁이 북한 여학생 | |
ⓒ 신은미 |
우리 민족의 비극적인 운명! 반쪽 몸으로 성한 몸인 것처럼 견뎌온 지난 세월이 비참하고 또 비참해 눈물이 난다. 지척에 서로의 반쪽을 두고서 왜, 무엇이 무서워 모질게 외면하며 살아왔던가. 북녘 동포를 등지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온전한 몸을 이루기 위해 우리의 남과 북, 한민족이 서로 보듬어 안아야 한다'는 생각을 내내 한다.
서울서부터 우리를 마중 나온 남편 친구와 보낸 북경에서의 하루도, 미국 땅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도 말할 수 없는 상실감과 침울함만이 나를 누르고 있었다. 남편 역시 한숨으로 마음을 대신하고 있다.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는 다른 많은 나라도 여행이나 텔레비전을 통해 접해봤으나 이토록 마음을 비통하게 한 여행은 난생처음이다. 서로 잘못을 따지기 이전에 형제의 아픔을 사랑으로 감싸 안아야 한다는 생각만이 내 마음에 가득했다. 남과 북, 우리는 같이 이마를 맞대고 서로의 고통을 덜어 나아갈 길을 모색해야 하는 것 아닐까. 이런 생각들이 가슴을 가득 채워 심장이 터질 것만 같이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여행서 돌아와 보낸 며칠. 이 시간은 마치 무의미한 영상필름을 보는 것처럼 스르르 지나갔다. 여전히 남편은 별다른 말이 없다. '그저 밥맛이 없다'며 거의 식사를 하지 못하고 있음이 지금의 심정을 대변해주고 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집 안 청소를 했다. 침울함이 지배하는 내 마음도 깨끗이 청소하고 싶어서... 깨끗한 빈자리를 소망과 희망으로 가득 채울 생각으로.
여행을 하고 돌아온 뒤 무슨 일이 있어도 여행 가방을 먼저 정리하고, 빨랫감을 다 빨아 해치우고 나서야 잠이 오는 나였지만, 이번 여행은 달랐다. 여행 후유증을 이기지 못했던 것일까. 나는 몇 날 며칠을 방치해놨던, 슬픈 모습을 하고 있는 여행 가방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갈 때와는 달리 헐렁해져 있는 가방 때문인지, 북한에 두고 온 것만 같은 내 호기심 보따리 때문인지 내 마음도 허전하다. 가방 속을 정리하자니, 그곳에서의 추억들이 하나 둘씩 떠오른다. 열흘이라는 시간은 그동안 수십 년을 방치해뒀던 민족애에 불을 지폈다. 마른 장작더미와 같았던 내 마음은 이내 활활 타올랐다. 애잔한 미소가 뜨거운 입김이 돼 내 눈동자를 붉게 물들인다. 내 마음속 '호기심'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는 '사명감'이 차지했다.
북한 사람들의 미소에 친구들은 '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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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갓 결혼한 북한의 신혼 부부와 친구들 | |
ⓒ 신은미 |
전혀 연락도 닿지 않는 '무서운 나라'에 간 우리를 두고 하루하루 눈덩이처럼 쌓여가는 궁금증을 주체하지 못하게 돼 버린 가족·친구·친지 그리고 지인들이 우리 부부의 소식을 기다리다 못해 빗발치게 전화를 해댄다. 외국인 친구들도 예외가 아니다. 특히 미국인 친구들은 더 큰 관심을 보이며 '우리도 북한 여행을 하고 싶다'며 이야기를 듣겠다고 난리다.
우리는 여러 팀으로 그룹을 나눠 사람들을 초대해 그곳에서 찍어온 천여 장의 사진들을 보여줬다. 사람들은 마치 비밀리에 촬영된 첩보영화 시사회에 참석하는 사람들 마냥 흥분에 들떠 한걸음에 달려왔다.
그들은 우리 부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이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내가 처음 느꼈던 심정을 이들도 똑같이 느끼고 있을 것이라 생각됐다. 아마 자신들이 마음에 품고 있었던 모습과 실상들이 확연히 달라서 배신감도 실망도 클 것이다. 아마 그들은 우리 부부의 말이나 사진 속에서 그들 머릿속에 고정관념으로 자리 잡고 있는 '실체'를 확인해보고 싶었을지 모른다. 나 역시 북한에 다녀오기 전에는 그랬으니까.
그러나 사진 속 활짝 웃고 있는 사람, 다정히 손잡고 걸어가는 연인들, 가족들... 우리와 하등 다를 바 없는 일상의 순간들. 이런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보던 그들은 북한을 '우리와 똑같은 한 세기를 공유하고 있는 이웃 나라', 그리고 북한 사람들을 '우리 선조들이 물려준 아름다운 금수강산의 또 다른 반쪽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내 민족'이라고 느끼며 충격을 받는 듯했다.
도깨비가 사는 북한? 정말 그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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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난기 많은 얼굴의 북한 소녀 | |
ⓒ 신은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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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의 출퇴근 버스 | |
ⓒ 신은미 |
내가 자라던 시절의 반공 교육에 의하면, 북한 사람들은 사람 모습을 하고 있는 '도깨비 악당'들이었다. 그들은 슬픔도 기쁨도 사랑도 연민도 인정도 웃음도 모르는, 그저 빨간 깃발 아래 총부리 겨누며 행진하는 무서운 로봇들이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치는 어린 소년을 무참히 죽일 것만 같았던 '짐승'같은 존재였다.
어린 시절 학교 교과서에서 본 북한은 사람들이 일하고 있는 논이든 공장이든 어디서든지 무서운 인민군들이 총대를 메고 감시하며 서 있는 곳, 자식이 부모를 신고해 자식이 보는 앞에서 부모를 꽁꽁 묶어 잡아가는 곳이었다. 때문에 미술시간에 북한 사람들을 그릴 때면 나도 그들의 얼굴을 도깨비같이 그렸으며, 얼굴에는 어김없이 빨간 색깔을 덧칠했다.
예전 한국에서 받은 반공 교육에 많은 영향을 받은 세대인 내 친구들. 그들은 북한에 대해 갖고 있는 선입견이 있었다. 때문에 눈앞에 펼쳐지는 우리 부부의 여행 사진을 접하는 그들이 놀라는 것은 당연했다.
오래 전 여성들로 구성된 북한 응원단이 한국에 왔을 때 한국 기자가 한 응원단원에게 다가가서 인터뷰하는 장면을 텔레비전을 통해 본 적이 있다. 당시 기자가 "북한에서도 연예를 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응원단원은 기자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더니 대꾸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당시 나도 호기심을 품고 북한 여성의 대답을 기다리다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 여성 응원단원이 왜 그 기자를 단박에 외면했는지 백번 이해하고도 남는다.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니 이해할 수는 있지만, 당시 기자는 비합리적인 반공 교육이 초래하는 부작용이나 역효과 또한 고려해야 하지 않았을까.
북한 여행사진을 보던 한 어르신이 한쪽에서 눈물을 닦으신다. 그분의 고향은 북녘땅. 그동안 꽉 닫아뒀던 '묵은지병'을 따듯 마음의 병뚜껑을 여니 슬픔과 그리움이 복받쳐 흐르셨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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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소곳이 인사를 하는 북한의 여학생 | |
ⓒ 신은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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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이트 하는 북한의 남녀 | |
ⓒ 신은미 |
그동안 무관심했던 민족의 비극이 내 피부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내가 우리 민족의 통일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과연 무엇일까. 힘없고 무능한 내 자신이 너무 속상해서 나 역시 흔들어진 샴페인처럼 눈물을 쏟는다.
미국인 친구들은 미소 짓고 있는 북한사람들의 사진에 놀라워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북한 사람이 웃고 있는 사진을 처음 본다'고 한다.
그렇다. 미국 언론에 비친 북한의 모습 또한 왜곡돼 있기는 매한가지다. 패션 감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옷을 입고 걸어가는 시민들, 텅 빈 평양 거리, 인상 쓰고 있는 군인들, 호전적으로 비치는 군대의 행진... 이것이 서구의 관점에서 바라본 북한이다.
한국의 경우, 남북 대치라는 특수한 상황에 놓여 있다고 하지만, 미국은 왜 북한을 그런 식으로 왜곡하는지 모르겠다. 일부 전문가의 말에 의하면 미국의 군산복합 시스템이 계속 유지되기 위해서는 미국에 위협이 되는 '대상'이 필요하며 북한이 그 중 하나라고 한다. 엄청난 군사력을 갖고 있는 미국이, 북한 국방비의 몇백 배에 달하는 돈을 국방비로 쓰고 있는 미국이 북한을 '위협을 가할지 모르는 대상'으로 간주하고 있다니... 솔직히 잘 이해가 안 된다.
한국인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미국 친구들도 자신들이 갖고 있던 고정관념을 깨는 사진을 보니 북한을 여행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커진 것 같았다.
'다시 가자'... 다시 밟고 싶은 우리 땅
슬라이드 쇼를 하는 동안 9명의 한국 친구들(모두 미국시민권자)과 7명의 미국 친구들이 '북한 여행을 함께 다시 하자'며 간절히 청했다. 나 또한 지난번 여행 때 북한의 동포들과 나눴던 따뜻한 인간적인 교분을 잊을 수가 없어 다시 갈 날을 그리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전쟁기념관의 여성군관 해설원이 추천한 '민족의 기상이 깃들어 있다'는 백두산을, 남의 나라인 중국 땅을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땅을 밟고 가 보리라'는 깊은 바람도 마음에 있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빨리 여행 이야기가 다시 나오고, 다시 북한으로 떠날 채비를 하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2011년 12월 중순부터 우리는 친구들과 함께 두 번째의 북한 여행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여러 번의 논의와 조정 끝에 어렵사리 2012년 5월 8일부터 5월 19일까지 11박 12일의 일정이 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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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조선중앙TV가 지난 2011년 12월 17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열차에서 현지지도 중 과로로 사망했다고 보도한 가운데, 12월 19일 오후 서울 영등포역 대합실에서 시민들이 TV 모니터를 통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 뉴스를 지켜보고 있다. | |
ⓒ 유성호 |
그러던 중 김정일 위원장 사망이라는 뜻밖의 소식을 접하게 됐다. 텔레비전에서는 매시간 특집으로 이 뉴스를 온종일 내보냈다. 통곡하는 북한 주민들을 가리키며 '진짜가 아닌 가식'이라는 등의 해설을 붙이며 장례식 장면도 보여줬다.
극소수이긴 하나 일부 미국 전문가가 텔레비전에 나와 '북한 사람들의 통곡이 진심 어린 행동일 수 있다'는 견해를 펼치기도 했다. 어떤 미국 방송에서는 정치학자들과의 좌담을 통해 마치 한반도에서 전쟁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2012년 1월 10일께가 되니 9명의 한국 친구들 중 4명이 이런 어수선한 상황에서는 북한에 갈 수 없겠다며 두려운 심정을 전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나머지 사람들이 열심히 여행계획을 짜고 있는데 또 하나의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북한이 인공위성을 발사한다는 것이었다. 이 뉴스가 나오자 또 다른 3명의 한국 친구들이 여행을 포기하겠다고 했다. 7명의 미국 친구들은 모두 '계획에 변화는 없다'며 혹시 '우리 부부도 가지 않겠다고 하면 어쩌나' 노심초사해 매일 우리를 떠보려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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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경이와 함께한 즐거웠던 한 때 | |
ⓒ 신은미 |
오히려 그들은 북한에 그런 일이 일어나면 일어날수록 '호기심에 더 흥분이 된다'며 마치 모험을 떠나는 사람들처럼 들떴다. 이들은 '왜 한국 친구들이 여행을 취소하는지 알 수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기야 이 미국 친구들은 단 한 번도 자신의 땅에서 지척에 철조망을 쳐 놓고 총부리를 겨누며, 언제든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긴장감과 불안감 속에 살아본 적이 없으니... 게다가 나보다 힘센 사람들의 도움까지 받아가며 전전긍긍 살아본 적이 없으니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게 당연할 것이다.
이런저런 일로 인해 남은 사람들은 한국인 부부 한 쌍과 미국인 친구 7명, 그리고 우리 부부를 포함해 모두 11명이 됐다.
어느새 내 마음은 이산가족이 돼 평양에 두고 온 딸, 설경이와 사랑을 듬뿍 주고 싶은 리만룡 안내원, 리인덕 운전기사 당원 아저씨, 그리고 스쳐 지나간 정겨운 북녘 동포들을 향해 날개치듯 달려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