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_퍼옴] 권력의 종말

2015. 3. 10. 11:29Book



[책과 삶]인구·이동·의식의 ‘혁명’… 권력이 점점 쇠퇴하고 있다
황경상 기자 yellowpig@kyunghyang.com
▲ 권력의 종말…모이제스 나임 지음·김병순 옮김 | 책읽는수요일 | 528쪽 | 2만2000원



저자를 만난 ‘권력자’들은 하나같이 하소연을 늘어놨다. 페르난두 엔히크 카르도주 전 브라질 대통령은 “사람들은 내가 매우 강력한 힘을 가졌다고 생각하는데, 그 권력이 얼마나 제한돼 있는지 알까”라고 말한다. 요슈카 피셔 전 독일 외무장관은 “정부 청사의 화려한 건축 양식은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의 권력이 실제로 얼마나 한계가 있는지 모르게 실체를 가린다”고 말한다.

해마다 스위스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서 세계에서 영향력이 크다는 기업인, 정치인, 언론인, 과학자, 종교인, 문화인들을 만났지만 마찬가지였다. 그들 역시 보유한 권력의 한계를 점점 더 크게 실감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흔히 권력이 북반구에서 남반구로, 서양에서 동양으로, 전통적 거대 기업에서 벤처기업으로 이동하고 있다고들 말한다. 저자는 이를 넘어 권력 자체가 “쇠퇴하고 있다”고 단언한다. 권력을 잡아도 예전만큼 많은 것을 얻긴 힘들다. 권력을 얻기 수월해졌지만 잃는 것은 더 쉬워졌다. 미국 대통령이나 중국 국가주석, 교황 같은 존재들은 여전히 막강한 권력을 누리지만 전임자만은 못하다.

저자는 세 가지 ‘혁명’이 권력 쇠퇴를 불러왔다고 분석한다. 우선 ‘양적 증가’다. 21세기에 들어 최초로 전 세계의 빈곤인구가 줄기 시작했다. ‘글로벌 중산층’ 인구는 2012년 20억명에 이르렀다. 저자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고 더 풍족한 삶을 살 때 그들을 철저히 관리·통제하는 것은 더욱 힘들어진다”고 말한다.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낸 즈비그뉴 브레진스키가 “오늘날에는 백만명의 사람들을 통제하는 것보다 그들을 죽이는 것이 훨씬 쉽다”고 말할 정도다. 둘째는 ‘이동 혁명’이다. 전 세계 이민자 수는 지난 20년 동안 37% 증가했다. 사람뿐 아니라 상품과 자본, 정보와 아이디어의 이동이 값싼 비용으로 쉽고 빨리 이뤄진다. 권력이 손아귀에 쥐려고 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모래처럼 빠져나간다. 셋째는 ‘의식 혁명’이다. 시민들의 눈높이가 과거와 달라졌다. 권위에 문제를 제기하고 권력에 도전하기 시작한다. 미국인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연방대법원의 지지도는 1986년 70%에서 2012년 40%로 떨어졌다. 미국, 유럽, 일본에서 의회·정당·법원의 신뢰도는 점점 추락 중이다.

저자는 ‘아랍의 봄’을 추동한 힘도 인터넷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가 아니라고 본다. 이집트와 리비아의 시민봉기 기간, 관련 트윗을 날린 이용자의 75%는 아랍 이외 지역 사람들이었다. 외려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지역 청년들의 인구통계학적 특성이다. 과거 어느 때보다 신체가 건강하고 교육을 많이 받은 이들이 혁명의 결정적 동력이었다는 것이다.

이제는 어떤 나라도 다른 나라를 완전히 좌지우지할 수 없는 ‘포스트 헤게모니 시대’다. 겉으로 미국에 종속돼 보이는 나라도 고분고분하지만은 않다. 1800~1849년 사이에는 병력·무기가 약한 쪽이 전쟁에서 이긴 비율은 12%였지만 1950~1998년 사이에는 55%로 늘었다. 알카에다는 겨우 50만달러로 9·11 테러를 벌였지만, 미국이 이에 대응해 쓴 돈은 3조3000억달러다. 1977년 89개이던 독재국가는 2011년 22개로 줄었다. 세계 절반이 민주주의 국가에 산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거대 정당들은 헤게모니를 잃고 있다. 유럽 17개국을 조사해보니 정권의 실각시기는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빅 스리’ 등 몇몇 소수 기업이 독점하던 시장도 판도가 달라졌다. 뉴욕타임스는 구글뿐 아니라 허핑턴포스트 같은 신생 매체에까지 위협을 받는다. 전통적으로 가톨릭이 강세를 보였던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신흥 개신교 종파들이 빠르게 신도들을 흡수 중이다.

전통적 기득권 세력이 권력을 잃는 상황은 일정 정도까지는 긍정적 효과를 불러온다. 하지만 권력의 쇠퇴는 국경을 넘나들며 활동하는 수많은 범죄자와 테러리스트들에게는 기회다. 지나친 견제와 균형은 정치가 이렇게도 저렇게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다. 최소한의 결정만 내리면서 단기적 성과에만 집착하는 정치가 ‘무능’ 판정을 받는 사이 극단적 주장을 펼치는 과격파들이 지지도를 잠식한다. 국제적으로도 유럽 경제위기나 지구 온난화 같은 문제에 신속한 대응은 난망하다.
저자는 ‘거대함을 압도하는 미시권력’을 갖게 된 시민들이 일상 속에서 정치에 더 관심을 가지고, 극단적 세력을 가려낼 안목을 키워야 한다고 말한다. 시민들의 풀뿌리 운동에 의한 정치개혁이 이뤄진다는 전제하에서 “우리를 다스리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권력을 주어야 한다”고도 말한다. 책은 페이스북 최고경영자 마크 저커버그가 추천하면서 유명세를 탔다. 내용은 유명세만큼 신선하진 않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이미 2006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올해의 인물로 표지에 ‘평범한 당신(you)’을 실었지만, 적어도 지금까지는 세상이 혁명적으로 바뀐 것처럼 느껴지지는 않는다.

부와 권력의 세습은 더 노골화되고 있고, 아직 권력의 헛기침만으로도 몸살에 걸리는 시민들은 무력감을 호소한다. ‘권력’의 하소연이 왠지 엄살처럼 들리는 이유다. 저자가 세계은행 상임이사와 ‘포린 폴리시’ 편집장을 지냈으며, 우고 차베스 전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비판해 오는 등 미국 주류의 시각과 가깝다는 점도 염두에 둬야 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