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당이 변해야 한다(2)] 사랑없는 정의는 의미가 없다

2015. 12. 9. 02:07파놉틱 정치 읽기


김화영 고려대 명예교수의 인터뷰 내용(『김화영의 번역수첩』이란 신간에 대한 인터뷰인 것 같다) 중, 참 좋은 이야기가 눈에 들어왔다.


“정의를 구현하려는 노력이 너무 오래 가면 그 정의의 근원이었던 사랑이 메말라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카뮈에게는 그 두 개의 균형이 중요했습니다. 정의는 사랑과 함께 구현해야지, 사랑 없는 정의는 의미가 없다는 거지요. 지식인은 그 두 가지의 위태로운 균형 속에서 일생 동안 회의하는 자입니다. ‘너 죽고 나 죽자’는 니힐리스트가 아니라 ‘너도 살고 나도 살자’는 균형, 그 줄타기야말로 예술가의 운명입니다. 카뮈를 전공해서 좋다고 생각하는 건 그 긍정적인 세계입니다.”


‘정의(正義)’는 국어사전에 “<철학> 개인 간의 올바른 도리, 또는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공정한 도리”라고 나와 있다. 서로의 몫을 인정하는 것, 그것을 위한 공정한 룰을 지키는 것이다. 이것이 지켜지지 않으면 불공정사회이고 우리는 분노하거나 좌절한다. 그런데 이렇게 분노하고 싸워서 얻는 것이 개인의 몫이고 공정한 룰 정도라면 무엇을 위해 분노하겠는가. 우리가 정의로워야 한다는 것은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랑이 없는 정의는 본성을 잊어버린 ‘제도만능주의’로 귀착된다. 동아시아는 인(仁)-의(義)-예(禮)-지(智)로 인을 으뜸으로 삼았다. 공자에게 인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인은 애(愛)라고 답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인이다. 그러고 나서야 의도 예도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가장 말단이니 말이다. 동아시아에서 머리 좋은 것은 말석이다. 희한하게도 그런 동아시아 사람들의 아이큐가 전 세계적으로 가장 높다.


사랑과 정의에 대해 진보와 야권에서 되새겨봐야 할 것 같다. 사람을 사랑하는 정치를 하지 못하니, 매번 극단적 싸움으로 치닫고 매번 제도를 밥 먹듯이 바꾸게 된다. 제도란 것도 본질적으로 사람을 사람답게 살도록 하기 위함이고 그 바탕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 있다. 어질고 어질어야 한다. 그래야 사람이다. 


조용호의 나마스테!] “카뮈로부터 찬미 배워… 인생은 찬미하며 살기에도 짧아”

“사람들이 날 번역가라고 할 때가 제일 싫었습니다. 뭔가 숨기고 싶은 걸 들킨 심정이랄까, 번역 뒤에 숨어서 내 글을 쓰지 못하는 사람 취급을 받는 느낌이었습니다. 아마 시인이 못 돼서 그랬을 겁니다. 번역이라는 알리바이로 늘 딴짓을 하고 있었던 거지요. 돌이켜보니 번역가이기도 하네요.”

40여년 동안 프랑스 문학을 100종 넘게 번역해 역자 후기만을 모아 ‘김화영의 번역수첩’(문학동네)까지 펴낸 이의 말치고는 의외다. 김화영(74·고려대 명예교수)은 장 그르니에, 르 클레지오, 파트릭 모디아노 같은 대가들의 작품을 국내에 처음 소개하며 프랑스 문학의 충실한 전달자로 독자는 물론 작가들의 시야를 확장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해온 인물이다. 그가 이번에 펴낸 ‘번역수첩’은 그동안 냈던 번역서들의 역자 후기들만 선별해 모은 책이다. 역자 후기만으로 두툼한 책 한 권을 낸다는 것 자체가 그만한 종수가 확보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할뿐더러 드문 일이다. 사실 그의 말마따나 김화영은 엑상프로방스의 태양을 품에 안고 돌아온 이래 감각적이고 탐미적 문장을 ‘쓰는’ 사람이요, 여전히 한국 문학 최전선에 서 있는 비평가의 이미지가 돋보이는 문인이다. 눈 내리는 날 광화문에서 그를 만났다. 



“우리가 자랄 때 문학 속에는 감상주의가 있었습니다. 너무 가난해 반항 대신 감상에 빠져 들 수밖에 없는데 바로 그 감상이 문학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카뮈의 세계에는 흐릿한 안개 같은 건 없어요. 놀랍게도 ‘이방인’에는 밤이 없고 낮밖에 없습니다. 프로방스의 햇빛 속으로 갔더니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시체를 화장하는 것처럼 태워버려요. 답을 주는 게 아니라 문제를 없애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이 큰 충격이었습니다.”

김화영은 프랑스 정부 국비 장학금을 받아 1969년 엑상프로방스로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5년 만에 알베르 카뮈(1913~1960)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해 펴낸 첫 산문집이 ‘행복의 충격’이다. 4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절판 한 번 되지 않은 스테디셀러로 각광받았다. 카뮈는 그의 열렬한 찬미 대상이다.

“정의를 구현하려는 노력이 너무 오래 가면 그 정의의 근원이었던 사랑이 메말라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카뮈에게는 그 두 개의 균형이 중요했습니다. 정의는 사랑과 함께 구현해야지, 사랑 없는 정의는 의미가 없다는 거지요. 지식인은 그 두 가지의 위태로운 균형 속에서 일생 동안 회의하는 자입니다. ‘너 죽고 나 죽자’는 니힐리스트가 아니라 ‘너도 살고 나도 살자’는 균형, 그 줄타기야말로 예술가의 운명입니다. 카뮈를 전공해서 좋다고 생각하는 건 그 긍정적인 세계입니다.”

그러고 보니 김화영은 늘 에너지가 넘치고 환한 편이다. 프로방스의 태양과 카뮈의 긍정적 세계관 덕일지는 모르되 그의 성장기를 들어보면 이미 타고난 조건이었던 것 같다. 경북 영주 산골에서 초등학교만 마치고 홀로 서울로 유학해 다시 프랑스로 떠나기까지 김화영은 ‘시인’의 삶을 살았다. 경기중학교 2학년 때부터 보름마다 발행되는 학교 신문 ‘순간 경기’ 기자로 미당 서정주를 만난 이래 내내 그의 사랑을 받았다. 미당은 그에게 책을 사인해 줄 때면 ‘김화영 시우(詩友)’라고 적곤 했다. 김광섭 이헌구 등이 주축인 전국문화단체연합회 백일장에 경기중학교 대표로 나가 장원을 받았다. 그 상을 받았던 1957년 10월 9일이야말로 “내 인생의 기점”이라고 말한다. 그는 그날 이후 언어와 문학에 들린 삶을 살아왔다. 서울대 불문과 재학 시절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작 없는 가작으로 ‘육성’이라는 시편이 뽑혔고, 이어령 선생이 주관하던 잡지인 ‘세대’의 이상문학상 1회 수상자로 선정됐다. 바야흐로 시인의 운명이었지만 그 당시 최고의 직장인 은행원으로 취직해 3년 동안 일하다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 이후 ‘신학문’을 연마하다 보니 ‘시적 고요함’이 사라져버렸다. 그는 “시라는 것은 마음의 빈 터가 많은 사람이 쓰는 것”이라며 “시는 일시적 감흥으로 쓰는 게 아니라 전 존재를 투여해 끊임없이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이 쓰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지 않았다면 은행을 다니며 계속 시를 썼을지 모르겠다고 부연했다. 프랑스에서 돌아와 고려대 불문과 교수로 자리를 잡은 이래 카뮈 전공자인 그는 자연스레 소설 쪽으로 기울었다. 

40여년간 번역한 작품들의 후기만을 모아 책을 펴낸 문학비평가 김화영. 그는 “가끔 너무 힘든 순간이 찾아올 때면, 자신이 위대한 작곡가의 곡을 해석하는 일종의 연주자라고 자위해보기도 하고, 위대한 작품을 정독하는 가장 유별난 방식이 번역이라고 변명도 해본다”고 서문에 썼다. 
서상배 선임기자
“엄밀하게 말하면 시와 소설이 형식은 다르지만 근원적인 지점은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 독자들이 알고 있는 소설은 대부분 19세기 발자크나 톨스토이의 소설 양식입니다. 소설은 어마어마하게 식욕이 왕성한 장르입니다. 시도 빨아먹고, 산문도, 삐라도, 모든 언어를 다 빨아먹고 큰 놈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은 시정의 더럽고 아름답고 냄새나는 그런 모든 걸 담아내는 흥미진진한 산문인 거지요.”

그는 동인문학상 종신심사위원으로 한달에 최소 5권 이상 노소 작가들의 소설을 정독하는 노동을 지속하고 있다. 그는 ‘즐거운 노동’이긴 하지만 등장인물들을 일일이 메모해가며 읽어도 이해가 쉽지 않은 ‘괜히 어려운’ 젊은 작가의 작품을 대할 때면 난감하다고 했다. 프랑스는 한국처럼 세대에 따라 문학의 간극이 크지는 않지만 압축성장을 한 한국의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나는 이미 과거의 문학에 깊숙이 빠져 습관이 된 사람이니까 여기에 적응하느라 노력을 많이 하지만 우리 세대가 쓴 글도 앞 세대 입장에서 충격이었을 것”이라면서 “사실 내가 지금 이 세대였다면 더 재미있는 일을 많이 벌였을지도 모른다”고 덧붙였다. 그에게 유난히 어두운 터널을 지나가는 한국문학의 희망에 대해 물었다.

“내가 왜 그렇게 난감한 소설들에도 희망을 버리지 않느냐면 한국은 너무 보수적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사고가 게을러요. 그러니까 젊은이들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해요. 그들이 역부족이더라도 그 태도 자체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 편한 것에 길들여져 있어요. 문학은, 예술은, 사실 불편하게 하려고 있는 거지요.”

김화영은 “한 작가가 어떻게 등단해 변화했는지 다 꿰뚫게 된다”면서 “한국 문단이 살아있는 내 몸을 지나가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고 말했다. 한국문학 현장의 오래된 현역이다. 시는 이제 포기했을까. 미당이 살아 있을 때 만날 때마다 시집을 내라고 말했지만 ‘추억’만으로 어떻게 시집을 내느냐고 얼버무렸다고 했다. 그는 앞으로 시를 쓰지 않겠다고 잘라 말하진 않았지만 다른 누구보다도 자신에게 평가받는 게 무섭다고 했다. 언제쯤 스스로 찬미할까.

“문학을 하면 대선배들의 작품이 너무 좋아서 찬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즘은 선배들 작품을 좋아하지 않고 무조건 쓰는 것 같아요. 누구를 좋아하든 찬미하는 사람이 없다면 문학을 왜 합니까? 나는 ‘문학공화국’에서 카뮈로부터 ‘찬미’를 배웠습니다. 인생은 찬미하면서 살기에도 짧습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