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2. 9. 12:22ㆍ파놉틱 정치 읽기
영국 노동당의 코빈(Jeremy Bernard Corbyn) 열풍, 미국 민주당의 샌더스(Bernie Sanders) 열풍 등 진보적 가치를 주장하는 누군가가 선전하면, 한국의 진보진영은 거의 ‘팬덤(fandom) 현상’이 발생한다. 코빈의 열풍도 따지고 보면 영국 보수당 집권 하의 노동당 내부의 반란이었으며, 미국 민주당의 샌더스 열풍도 정당에 기반하지 않은 인물에 대한 새로운 바람이고, 캐나다의 경우는 진보적 열풍이라고 부르기에는 자유당이라는 일정한 경계선이 있다는 점에서 많은 고민을 던져준다. 이러한 흐름이 한국 정치와 유권자에게 어떤 충격을 주는 것인지 모르겠다. 불평등과 불공정이라는 전 세계적 격차사회의 구조화 속에서 새로운 사회, 공정하고 좀 더 평등한 사회를 갈망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터져 나오고 있고, 이러한 대중의 이해와 요구에 정치권이 제대로 반응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영국과 미국의 흐름은 의미를 갖는다. 20세기 말, 미국과 영국은 ‘제3의 길’을 통해 유권자의 변화에 반응했고, ‘클린턴과 블레어 체제’를 만들었다. 미국은 부시 8년 이후 담대한 변화를 들고 나온 오바마의 리더십으로 8년의 민주당 시대를 열었다. 유권자의 변화와 함께 그 변화를 온몸으로 받아 안고 개혁했을 때, 새로운 시대의 모습은 현실이 된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외부의 진보 열풍(?)은 내부 진보진영의 생존을 위한 객관적 자료가 되는 것으로 중단된다.
미국의 샌더스가 클린턴에 위협을 가한 것은 새로운 흐름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그 이면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뜯어볼 필요가 있다. 지금 현재 시점 여론조사에서 샌더스와 클린턴의 경쟁도 뜨겁지만, 민주당 후보와 공화당 후보 간의 양자대결구도의 조사결과도 뜨겁다. 샌더스와 클린턴(Hillary Rodham Clinton)은 트럼프에게 우세하지만, 클린턴은 크루즈(Cruz)와 박빙이고 루비오(Rubio)에 뒤지는 결과도 나오고, 샌더스는 크루즈에게는 이기지만 루비오와는 동률인 결과도 나온다. 이런 결과에도 불구하고 루비오는 토론회에서 그의 능력의 한계를 드러냈다. 경선 레이스는 이렇게 복잡해서 간명하게 설명하기 어렵다.
전체 미국 유권자의 시각에서 미 대선을 볼 필요가 있다. 3년 전 쯤인 것 같은데, 미국 민주당 주류 분석가들은 앞으로 미국은 민주당이 다수유권자 연대 구축을 통해 장기적으로 집권할 수 있을 것이라는 다양한 근거를 제시했다. 그리고 그런 경향성이 높아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당시 일단의 소장 조사전문가 집단에서는 이런 민주당 주류 분석가들의 입장에 대해 심각하게 문제제기했다. 주류 분석가들이 분석한 경향성에는 동의하지만 다양한 함정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말이다. 그 구체적인 내용을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핵심은 오바마에게 지지를 보냈던 유색인종과 중도 무당파 층의 투표 행태에 대한 심층 분석을 그 근거로 하고 있다. 유색인종과 중도 무당파 층이 핵심지지층화 되는 것에 상당한 문제점들이 발견된다는 것이었다. 민주당 주류 분석가들 중에 일부도 만약 공화당에서 온건 보수주의자가 등장한다면 상황은 변할 수 있다는 경고를 던지기도 했다.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샌더스의 열풍에도 불구하고 미국 유권자의 민주당과 공화당 후보를 바라보는 시각은 여전히 일방적 우위에 있지 않다는 점이다. 태평양 건너 미국 대선 레이스를 보고 있는 우리들도 이 문제에 대해 다시금 고민을 할 필요가 있다. 민주당의 핵심 인물인 클린턴이 이런 위기를 겪게 된 것이, 클린턴 개인의 문제인지 아니면 민주당이 직면한 구조적 문제인지? 미국 유권자들의 흐름은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 왜 여전히 중도 유권자층의 문제에 집중하는지? 샌더스 열풍이 ‘진보적 아젠다’에 대한 동의인지 지칠대로 지친 삶의 비참함에 대한 분노인지?
현재 한국의 정치를 보면서 느끼는 단상은 그렇다. 분열주의자니 사실상 보수주의자니 하면서 규정짓기보다는, 낡은 것들과는 차별하겠다거나 선민처럼 중간에서 심판자가 되려는, 그런 두 진영의 ‘낡은 논쟁’을 중단하고 삶을 고단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곳에서 혁신의 동력과 더 넓은 통합의 지혜를 얻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그래도 쉽지 않다. 오늘의 문제도 풀지 못하면서, 정권교체를 운운하는 것이 진보와 정치권의 특권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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