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최옥례할머니] 재래시장이 싸고 물건도 좋다든디

2010. 3. 4. 13:02eunpyeong

 

 

 

“재래시장이 싸고 물건도 좋다든디”

인적 끊긴 녹번시장 지키며 김밥 마는 최옥례 할머니

 
윤효순
 
 
동장군이 잠시 주춤하던 1일, 녹번시장을 찾았다. 유리문을 열고 시장 안으로 들어서면 보이는 것은 희미한 빛 속에 문을 닫은 ‘장터’ 모습이다. 가운데 늘어선 좌판들은 거의 폐점 상태이고 양쪽 가장자리에 늘어선 점포들도 대부분 문을 닫았다. 옷 수선집 몇 개, 해장국집 한두 개가 문을 열어 간신히 여기가 시장임을 알리고 있을 뿐, 오가는 사람을 거의 볼 수 없다. 최옥례 할머니(76세)를 만난 곳은 그 한가운데이다. 한 평 반 좁은 공간에서 김밥을 파는 할머니는 전기난로를 하나 켜놓고 오롯이 앉아 있었다. 이마에 새겨진 물결무늬 주름마다 웬만한 아침 드라마 뺨치는 사연을 담은 할머니는 좀처럼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 그래도 한마디 묻고 어렴풋한 기억을 더듬어 한마디 답하는 동안 할머니 삶의 편린들을 주워 담을 수 있었다.
 

 

 

▲ 녹번시장에서 김밥을 파는 최옥례 할머니. 정확한 햇수는 기억하지 못하나, 추산해 보면 20년이 넘는다.     ©윤효순
대형마트에 손님 뺏기고 인적 뜸해져, 하루 5천 원이면 괜찮은 벌이

녹번시장에 자리를 잡은 지 18년째가 되었다는 할머니. 그러나 너무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정확치가 않다. 할머니는 가물거리는 기억을 더듬더니 50대 초반에 김밥을 말기 시작했다 한다. 할머니가 올해 76세이니 손을 꼽아볼 것도 없이 20년은 넘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하지만 할머니는 20년은 넘지 않았다며 대충 18년쯤 되었다고 추산한다. “처음 왔을 때는 이 뒤쪽이 다 하꼬방이었어.”라는 할머니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그 ‘때’가 대체 언제쯤인지 더욱 짐작하기 어려워진다. 기억의 어느 부분이 잘못되었든 오랜 세월이 지났음은 분명하다.

그 세월 동안 녹번시장은 번화했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처음엔 장사 잘됐어. 이마트 생기고 장사가 안 됐지. 여기 시장 다 열고 있었어.” 할머니 추억 속의 시장은 활기가 넘친다. 한창 장사가 잘 될 때는 하루 종일 바쁘게 손을 놀렸다. 따로 주문을 받아 김밥을 말아 주다 보면 한밤중이 될 때도 있었다 한다. 그런데 주변이 개발되고 대형마트가 들어서고 하면서 재래시장을 찾는 손님이 줄어들었다. 이제는 어디를 가든 김밥집이 흔해서 주문을 하는 사람도 없고, 시장이 생기를 잃어가면서 단골들도 뜸해졌다. 경기가 나빠지면서 그나마 있던 단골들도 다 떨어져나갔다. 3년쯤 전부터 장사가 더 어려워지더니 작년부터는 더 힘들다고 털어놓는다. “하루 1~2만 원씩은 벌었는데, 지금은 많이 벌면 오천 원, 십 원 한 장 못 만져볼 때도 있어. 그래도 집에 있는 거보다 나으니 나오지.” 할머니뿐만 아니라 주변의 점포들이 다 그런 모습이다. 주변의 다른 김밥집들도 세 낼 돈을 벌어들이지 못한다. 그나마 할머니는 세를 따로 내지 않는다. 하루 육백 원씩 상가 관리비를 내기는 하지만, 한 평 반짜리 ‘점포’는 돈을 주고 산 자리여서 세를 낼 필요가 없다.
 
▲ 1966년 조성된 녹번시장은 대형마트에 손님을 빼앗기고 대부분의 점포가 문을 닫았다.     © 윤효순

남의 집 일 전전하다 사위 목숨 값으로 마련한 시장 ‘점포’

이 ‘자리’를 산 데는 사연이 있다. 구례 출신인 할머니는 스무 살에 결혼했다. 농사를 많이 지어 친정은 잘살았지만 농토가 없던 시집은 가난했다. 면에서 싼값으로 제공하는 겉보리를 사다가 끓여먹던 할머니는 친정 생각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며 고개를 돌린다. 가난보다 견디기 힘들었던 건 남편의 가출이었다. 할머니는 남편 가출 후 아들을 남겨두고 어린 딸 하나를 데리고 상경한다. 당시 국민학교를 갓 나온 어린 딸과 서울에 온 할머니는 남의 집 일을 하러 다녔다. “파출부 같은 거지. 딸도 넘의 집 애 봐주러 다니고.”

나중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아들이 상경해 일을 하면서 할머니네는 조금 형편이 나아졌다. 고생만 하던 딸도 결혼을 하고 딸 둘을 두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불행이 찾아왔다. “사우가 헌차를 사서 장사 댕기다가 사고가 나서……” 할머니는 또다시 먼데를 쳐다본다. 중고차로 장사를 다니던 사위가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은 것이다. 딸이 32살 때 일이다. “서초동에서 일 마치고, 성수대교, 거기를 왜 갔는지. 죽을 운명이었는가 봐.” 평소 다니지 않던 길로 갔다가 사위는 사고를 당했다. 그런데 상대가 D그룹 사람이었다. D그룹의 입김이 작용했는지 유족은 보상 한 푼 못 받았다. 손에 쥔 것은 생명보험금 2천만 원이 전부였다. 그 돈이 지금 할머니가 장사하고 있는 좌판 ‘점포’의 자본금이다. 딸이 이 ‘점포’ 자리를 샀고, 할머니는 그때부터 김밥을 말았다. 혼자 두 아이를 키우는 딸을 돕기 위해 살림을 합친 것도 그때다. 당시 두세 살 아기였던 외손녀들이 지금은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 배고플까 걱정하며 손크게 김밥을 마는 할머니.     ©윤효순

TV에서는 재래시장이 좋다 하지만…… 재개발 되면 장사 접을 것

할머니는 이마트 부근에 있는 딸네 집에서 녹번시장까지 걸어서 출퇴근을 한다. 잇달아 생기는 대형 마트와 불황 때문에 단골손님도 발길이 끊겼지만, 그래도 할머니는 여전히 썰렁한 시장에서 손님을 기다린다. 할머니에게는 단골손님이 친구이고 같은 시장 안에 있는 상인들이 이웃이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안 보여 궁금했던 단골손님이 다리가 불편해 걸음을 잘 못 걷게 됐다는 얘기를 전하며 안타까워하고, 꼬마 아이 편에 누군가 보내온 전기난로를 받아들고는 “이사 가려는가, 자꾸 뭘 보내네.” 하며 또 먼데로 시선을 돌린다.

녹번시장은 이제 시장이라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장사하는 집이 거의 없다. 이날 ‘첫 손님’은 응암동에서 60년을 살았다는 77세 할머니로, 은평구청 자리가 질척거리는 허허벌판에 주변이 모두 미나리꽝이던 시절도 알고 있는, 그야말로 산 역사이다. 시장 인근 응암2구역에 산다는 할머니 말에 자연스레 재개발 이야기가 나온다. 이 손님은 “45평이면 25평 아파트에 몇 억 갖고 들어가야 한다잖어.”라며 손사래를 친다. 좋은 집이 아니어도 평생을 몸 누이며 지내온 보금자리가 어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배어난다. 위치가 위치이다 보니 녹번시장도 재개발에 휩쓸릴 거라는 소문이 있는지 최옥례 할머니도 “24층 아파트 짓는다나? 아유 어찌 될랑가 몰러.” 하며 걱정이다. 최 할머니가 재개발에 기대하는 것은 그저 한 평 반짜리 ‘점포’에 대한 보상 정도이다. 이제는 일할 기력이 모자란다는 할머니는 재개발이 되면 일을 그만두고 쉬겠다 한다. 그래도 재래시장이 사라져가는 건 안타깝다. “아래께 테레비 보니께 재래시장이 싸고 물건도 좋다든디…….” 할머니에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은평구에서는 녹번시장 재개발 계획이 없다 한다. 1966년에 조성되어 45세가 된 녹번시장이 좀 더 할머니와 함께 나이를 먹어갈 수 있을 터이다.


 

▲ 이날 첫 손님은 은평에서 60년을 산 역사의 산 증인이다.     © 윤효순
할머니는 어렵게 살아온 만큼 남의 배고픔을 보아 넘기지 못한다. 오후 4시가 넘어 처음으로 김밥 한 줄을 팔았건만, 김밥을 주문하자 밥을 두툼하게 깔고 속도 듬뿍 얹는다. 보통 김밥 두 배는 되는 김밥을 말아 주고서도 돈 받기를 미안해한다. 그러고는 할머니는 쌀을 씻는다. “내일 쌀 씻어 놔야지.” 손님이 몇 명이나 올지, 아니 오는 사람이 있을지조차 알 수 없는 ‘시장’에서 할머니는 쌀을 씻고, 내일 아침이면 또 찬 공기를 마시며 출근길에 나설 것이다.
 
기사입력: 2010/02/05 [14:33]  최종편집: ⓒ 은평시민신문 Copyrights ⓒ epnews.net 이 기사의 저작권은 은평시민신문에 있습니다. 무단 전재와 상업 목적의 재배포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