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위의 서울진격작전(1907~8년)

2023. 3. 17. 21:04파놉틱 정치 읽기

허위의 서울진격작전(1907~8년)
1907년 일제는 대한국 국군을 강제로 해산했다. 이 군인들은 기존의 의병과 결합하여 일제와 전쟁을 전개하는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1907년 11월 하순 각 지역의 의병장들에게 양주(현재의 구리시)로 집결하자는 통문이 돌았다. 각지의 의병과 해산 군인이 양주에 모였는데, 약 1만여명에 달했다. 이렇게 결성된 것이 ‘원수부13도창의대진소’였고, 창의대장은 이인영이었다. 그러나 실제 전투를 총지휘한 것은 참모장 허위였다. 서울 동대문의 왕산로가 허위의 호인 왕산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그 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① 각 도의 의병을 집결시켜 전력으로 서울로 진공, 일본군을 격멸하고 통감부를 점령하여 일본 세력을 척결한다. ② 동대문을 최초의 공격 목표로 선정한다. ③ 동대문 공격 일자는 1908년 2월 2일(음 1.1.)로 예정한다. ④ 동대문 밖 30리 지점(수택리[水澤里]: 양주군 구리면)에 공격 준비 지점을 설정하여 각 부대의 병력을 집결시킨다. ⑤ 공격 개시 전에 서울 성 안에 공작원을 투입하여, 의병 부대의 공격과 동시에 내응하도록 한다.
허위는 사령장 김규식을 성안에 공작원으로 투입했다. 의군이 서울로 진격하면 궁 내의 내응세력을 도모하여 협공을 전개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창의대장 이인영은 부친의 부음을 듣고 군무 일체를 군사장 허위에게 위임하고 문경으로 내려갔다. 1908년 1월 허위는 선발대를 지휘하며 동대문으로 진격전을 전개하려고 했으나, 이를 미리 탐지한 일본군은 의병부대가 집결하기 전에 허위의 선발대에 선제공격을 가했다. 허위부대는 동대문 밖 망우리 일대에서 단독으로 왜병과 장시간 교전했다. 양주에서 서울로 진공하던 다른 부대들도 양주 근처에서 일본부대와 전투를 전개했으며, 양주·포천·판교·지곡·과천·파주·장단 등지에서 일본군과 전투했다. 서울근교에서 일본군부대 및 자위단과 전투에 말려든 나머지 의병부대들은 서울 진격을 감행할 수 없었고, 허위 부대를 지원할 수 없었다.
2018년 4월 21일, 허위는 이강년‧이인영‧유인석‧박정빈 등과의 연명으로 전국 13도 의병의 재궐기를 호소하는 통문을 발송했다. 5월에는 박노천‧이기학 등을 서울에 보내어 태황제의 복위, 외교권의 반환, 통감부의 폐지 등 30개 항목의 요구 조건을 제시했다. 즉, 서울진격작전의 준비를 차근차근 진행했던 것이다. 그러나 2018년 6월 11일 일본 헌병대의 기습을 받아 체포됨으로써 제2차 서울진격작전도 실현하지 못했다. 1908년 9월 18일 사형이 선거되고, 발표일인 오늘 10월 21일(1908년) 교수형을 받고 순국했다.
이렇듯, 허위와 같은 항일투사는 목숨을 걸고 일제와 맞섰고, 그 항일투쟁은 중단되지 않았다. 준비가 안되고 세계의 변화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국권을 상실하고 고통받았던 것이 아니라, 포악한 일제에 맞서 끝까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웠고, 나라를 잃은 후에도 절대 체념하지 않고 다시 또 일어나 싸워서 마침내 해방을 만든 것이다.
사진은 전봉준 고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