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식을 팔지언정 양심까지 파느냐. 인품부터 정상화해라”(야당 측 이사진), “나는 빼라고 지시하지 않았다”(고영주 이사장).
지난 8일 서울 여의도 방송문화진흥회(방문진) 회의장에선 고성이 오갔다. 8월27일 고영주 신임 방문진 이사장이 첫 회의를 주재하면서 한 발언 내용 일부가 회의록에서 빠져 있었던 것이다. 고 이사장은 당시 회의에서 “광우병 파동이라든지, 국가정보원이 KAL기를 폭파했다든지 방송이 대한민국 안전이나 체제를 위협할 정도로 나간다면 그런 방송(
교학사 역사교과서 논란이 뜨겁던 2013년, 방문진의 한 관계자는 “고영주 감사가 회의 시작할 때쯤 갑자기 ‘한국 교과서가 더 왜곡돼 있다. 일본 교과서는 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하더라”고 전했다. 다른 관계자도 “곁에 있던 일부 여당 측 이사는 ‘이제 역사교과서는 정치학자와 경제학자가 집필해야 한다’고 거들었다”고 덧붙였다. 당시 여당 측 이사들에게 발언 내용을 물었지만 “금시초문이다” “잘 모르겠다”고 했다. 방문진 이사회는 내달 5일 고영주 이사장 해임결의안을 상정한다.
박근혜 정부가 한국 사회를 이념의 늪에 빠뜨렸다.
국정교과서가 추진되고 있다. 박정희 시대의 개발독재 향수인 양 새마을운동 깃발이 다시 나부낀다. 야당 대표를 공산주의자라 비판하고 노조와 전교조 등 진보세력의 기반을 무너뜨리고 있다.
이념전쟁을 주도하는 세력은 정부 핵심 인사들이다. 공직자들의 보수편향적 발언이 넘쳐나고 박근혜 대통령은 임기 내내 극우 인사들을 내각에 중용하고 있다.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박근혜 정부의 국가비전은 박정희 체제 복원이다. 이를 위해 반공과 국가주의, 개발독재 이데올로기를 동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근혜 정부 인사들의 이념적 편향성을 충성 경쟁으로 보는 주장도 나온다. 김종욱 동국대 연구교수는 “임기중반을 넘어서도 안정적 리더십을 보이는 박 대통령 지지율과 박 대통령의 사적인 욕망이 결합되면서 관료들의 충성 경쟁도 커지는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2016년 총선과 2017년 대선을 앞두고 보수진영의 지지층 결집을 위한 행보라는 측면도 있다. 최근 여론조사 결과는 여야 지지층 결집 현상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보수진영에서도 박근혜 정부의 이념전쟁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는 “집권 1년 만에 국정의 모든 동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지지층 유지 전략만 찾게 됐다. 이념 프레임이 강화될수록 국정이라는 개념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은 “박 대통령의 권위적 리더십이 국가주의적 세계관과 만나면서 시대와 충돌하고 있다. 대통령과 나라 모두 불행해진다”고 걱정했다.
한국 사회는 지금 역주행 중이다. 박근혜 정부 들어 구시대 악령들이 되살아나고 있다. 유신, 극우, 독재, 국정화…. 정부 고위 공직자들이 앞장서서 ‘이념전쟁’을 주도한다.
■역사를 거꾸로 되돌리는 보수
# 뿌리 깊은 박정희의 그늘
박근혜 정부 고위 공직자들의 발언 속에는 ‘박정희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그들이 끌어들인 과거는 박정희시대(체제)다. 국가가 모든 권력을 틀어쥔 ‘국가독재’에 힘을 싣고 있다. 국정교과서가 대표적이다. 보수반공적인 사회동원체제를 쥐고 개발독재의 불씨를 지피려 한다. 제2의 새마을운동이 다시 마을까지 스며들 분위기다. 노동권 착취가 노동개혁을 대신한다. 쉬운 해고, 임금피크제로 ‘박정희시대의 경제성장’을 꿈꾼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는 이 같은 현상을 ‘독재의 복수’라고 해석했다. 이 교수는 “독재의 경험이 중립화되면서 마치 또 하나의 가치처럼 인식되는 현상”이라고 말했다. 보수진영의 박정희 전 대통령 재평가 움직임이 단적인 사례다.박근혜 정부 인사들의 잇단 ‘망언’ 배경엔 박정희시대의 물적 기반만 깔려 있는 게 아니다. 박근혜 정부의 인적 기반 역시 유신(박정희시대)과 무관치 않다. 2000년대 중반 자유시장경제를 주장한 뉴라이트 세력이 등장하면서 반공 보수인 올드라이트도 부활했다. 이들은 이명박 정부의 파워엘리트로 등장했고 방송 장악, 교육현장 통제 등을 통해 보수우익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조직적 토대를 구축했다. 보수우익의 핵심 이데올로기는 ‘자학적 역사관 극복’이다.
신진욱 중앙대 교수는 “같은 보수우익이라도 이명박 정부보다 박근혜 정부의 이념전이 도드라진다. 현 정부 핵심이 유신세력이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박근혜 정부 들어 유난히 교육과 역사 부문에서 이념전이 강고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박정희시대를 마냥 그리워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박정희 연구’ 전문가인 전재호 서강대 교수는 “박 전 대통령은 이순신 장군을 성웅화하는 등 친일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 주축인 뉴라이트 세력은 일제강점기를 근대화와 자본주의 기틀을 구축한 시기로 본다”고 비교했다. 박 전 대통령 체제는 3선 개헌 이전까진 관료제가 작동했다. 쿠데타 세력과 권력을 분점했고 각 행정부서들이 권한을 갖고 있었다. 반면에 박근혜 정부는 정권 초반부터 모든 권력이 대통령 1인에게 집중됐다.
# 위험한 소신과 충성경쟁의 결합
‘충성경쟁’. 박근혜 정부 인사들의 이념전을 떠받치는 단면이다. 이들의 충성은 공동체에 대한 충성이 아닌 보신을 위한 충성이다. 보수우익 진영에서 박 대통령이 차지하는 비중 때문이다. 이들에게 박 대통령이 무너지는 것은 기존 보수 대통령의 실패와는 차원이 다르다.
이승원 성균관대 겸임교수는 “박근혜 정부의 실패는 반공주의와 개발독재라는 이념의 원류가 허구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라며 “보수적 기반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충성경쟁)을 다할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이런 차원에서 “이명박 정부는 이익집단이었지만 박근혜 정부는 (보수우익의) 생존집단”(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이라 할 만하다.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사건에 반북 안보 이데올로기로 맞불을 놓았다. 노무현 정부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유출 및 서해 북방한계선(NLL)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박 대통령의 견고한 지지율은 이들의 충성경쟁을 부추긴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 정국에서 박 대통령 지지도는 상승추세다. 국정원 댓글사건과 비선라인 권력암투, 세월호 참사, 메르스 파동 등 심각한 국정위기 속에서도 박 대통령 지지율은 40%대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김종욱 동국대 연구교수는 “대통령의 사적인 욕망(박정희 역사 회복)을 파악한 관료들의 충성경쟁”이라고 규정했다.
박 대통령의 권위적 리더십도 문제다. 소통하고 조정하는 리더십이 아닌 ‘불감’ 리더십은 임기 내내 독선을 낳고 있다. 김 교수는 “박근혜 정부는 대통령의 독선적 리더십에 기대 자신들의 이익과 이념을 투사하는 정권”이라고 말했다.
이들의 역사적 특성도 무시할 수 없다. 박 대통령 주변엔 보수우익적 관점을 유지해온 인사들이 대부분이다. 박 대통령이 누구를 중용하든 친일사관과 반북 메커니즘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이런 분위기라면 합리적 인사가 정부 요직에 발탁되더라도 경쟁에서 도태될 가능성이 높다.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 중용은 시사점이 적지 않다. 많은 전문가들은 당시 김 전 실장의 등장을 두고 “박근혜 정부는 박 대통령을 정점으로 한 30년 만의 보수대연합”이라는 데 공감대를 이뤘다. 70대 위주의 관료집단과 군, 검찰은 보수대연합의 주축세력이다.
# 지지층 결집, 그리고 갈등 덮기
박근혜 정부 인사들의 이념전은 향후 정치일정과 무관치 않다. 2016년 총선, 2017년 대선, 2018년 지방선거를 염두에 둔 행보에 가깝다. 우선 지지층 결집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이념적 극단 현상을 만들고 지지층을 최대한 동원하려는 전략이다. 이념적 대립은 중도층의 정치혐오를 확산시킨다.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말이 시사하듯 지지층 동원 전략은 상대적으로 여권이 유리하다. 일부 여론조사에서 실제 드러나고 있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가 지난 12~14일 전국 19세 이상 유권자 1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정당지지도 조사에서 여야 지지층 결집이 이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새누리당은 43.0%로 전주 대비 1.3%포인트 상승했고, 새정치민주연합은 2.0%포인트 상승한 27.7%였다.
여권 지지층 결집 전략은 야권을 위축시키는 효과로 이어진다. 신진욱 교수는 “현재 경제문제, 노동개혁, 정치개혁 등 모든 개혁이슈를 이념전이 빨아들이고 있다. 박근혜 정부가 미래지향적 의제를 선도하는 공간이 생기게 된다”고 지적했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갈등을 덮으려는 의도라 할 수 있다. 박근혜 정부는 주요 현안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친재벌·반서민 경제, 미국과 중국의 늪에 빠진 외교, ‘만인의 투쟁’이 된 교육, 노동개악이 된 노동개혁에다 정치권도 공천 갈등이 본격화하는 정국이다. 여야 정쟁만으론 갈등을 덮을 수 없는 상황이다. 이때 이념전은 유효한 수단이다. 이승원 교수는 “반탁운동 이후 반공주의가 득세하기 시작한 것처럼 이념전의 승자는 늘 보수우익이었다. 정책 제시보다 이념전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구심력 강한 박근혜 정부 보수
박근혜 정부의 보수우익적 성격은 과거와 차별화되는 특징이 있다. 한국 반공보수의 주류다.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반공과 냉전적 가치를 강조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한국적 민주주의 개념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고 분석했다. 한국적 민주주의는 국가주의를 말한다.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획일화를 좇는 게 국가에 이롭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시장과 기업 중심의 보수다.
보수의 주류인 만큼 ‘가용 자원’도 많고 ‘가용 범위’도 넓다. 종북(빨갱이 낙인)담론만 해도 수시로 국내정치에 악용한다. 박근혜 정부의 이념전은 진영 대결을 넘어서 전 국민적 대결로 범위를 넓힌다. 이승원 교수는 “이명박 정부 때 천안함 침몰이나 연평해전 사건은 곧바로 친북과 반북을 요구하지만 교과서 국정화는 국정화 찬반에 대한 대답이 우선이지 친북이냐 반북이냐는 나중 문제”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반공보수의 적자라는 위상을 갖고 있다. 기존 보수정권에 견줘 구심력이 강하다. 자신의 이념과 지지층의 이해관계에 부합시키는 방식으로 개혁을 진행한다. 김윤철 교수는 “보수반공 체제를 구축하는 데 장애가 되는 세력을 쳐내는 방식으로 정권을 운영한다”고 말했다. 강자를 때리기보다 강자의 주변에서 특권을 누린 세력을 주로 타깃으로 삼는다. 정부개혁보다는 공무원연금 개혁을, 재벌개혁보다는 노동개혁을 우선 내걸었다.
하지만 ‘박근혜 신화’는 성공을 장담하긴 이르다. 조현연 한국정치연구회 연구위원은 “박근혜 정부의 보수는 민주주의 속에서 국가주의라는 변형적 흐름을 선택했다. 이 자체가 퇴행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역사를 거꾸로 되돌리는 보수
# 뿌리 깊은 박정희의 그늘
박근혜 정부 고위 공직자들의 발언 속에는 ‘박정희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그들이 끌어들인 과거는 박정희시대(체제)다. 국가가 모든 권력을 틀어쥔 ‘국가독재’에 힘을 싣고 있다. 국정교과서가 대표적이다. 보수반공적인 사회동원체제를 쥐고 개발독재의 불씨를 지피려 한다. 제2의 새마을운동이 다시 마을까지 스며들 분위기다. 노동권 착취가 노동개혁을 대신한다. 쉬운 해고, 임금피크제로 ‘박정희시대의 경제성장’을 꿈꾼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는 이 같은 현상을 ‘독재의 복수’라고 해석했다. 이 교수는 “독재의 경험이 중립화되면서 마치 또 하나의 가치처럼 인식되는 현상”이라고 말했다. 보수진영의 박정희 전 대통령 재평가 움직임이 단적인 사례다.박근혜 정부 인사들의 잇단 ‘망언’ 배경엔 박정희시대의 물적 기반만 깔려 있는 게 아니다. 박근혜 정부의 인적 기반 역시 유신(박정희시대)과 무관치 않다. 2000년대 중반 자유시장경제를 주장한 뉴라이트 세력이 등장하면서 반공 보수인 올드라이트도 부활했다. 이들은 이명박 정부의 파워엘리트로 등장했고 방송 장악, 교육현장 통제 등을 통해 보수우익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조직적 토대를 구축했다. 보수우익의 핵심 이데올로기는 ‘자학적 역사관 극복’이다.
신진욱 중앙대 교수는 “같은 보수우익이라도 이명박 정부보다 박근혜 정부의 이념전이 도드라진다. 현 정부 핵심이 유신세력이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박근혜 정부 들어 유난히 교육과 역사 부문에서 이념전이 강고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박정희시대를 마냥 그리워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박정희 연구’ 전문가인 전재호 서강대 교수는 “박 전 대통령은 이순신 장군을 성웅화하는 등 친일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 주축인 뉴라이트 세력은 일제강점기를 근대화와 자본주의 기틀을 구축한 시기로 본다”고 비교했다. 박 전 대통령 체제는 3선 개헌 이전까진 관료제가 작동했다. 쿠데타 세력과 권력을 분점했고 각 행정부서들이 권한을 갖고 있었다. 반면에 박근혜 정부는 정권 초반부터 모든 권력이 대통령 1인에게 집중됐다.
# 위험한 소신과 충성경쟁의 결합
‘충성경쟁’. 박근혜 정부 인사들의 이념전을 떠받치는 단면이다. 이들의 충성은 공동체에 대한 충성이 아닌 보신을 위한 충성이다. 보수우익 진영에서 박 대통령이 차지하는 비중 때문이다. 이들에게 박 대통령이 무너지는 것은 기존 보수 대통령의 실패와는 차원이 다르다.
이승원 성균관대 겸임교수는 “박근혜 정부의 실패는 반공주의와 개발독재라는 이념의 원류가 허구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라며 “보수적 기반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충성경쟁)을 다할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이런 차원에서 “이명박 정부는 이익집단이었지만 박근혜 정부는 (보수우익의) 생존집단”(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이라 할 만하다.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사건에 반북 안보 이데올로기로 맞불을 놓았다. 노무현 정부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유출 및 서해 북방한계선(NLL)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박 대통령의 견고한 지지율은 이들의 충성경쟁을 부추긴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 정국에서 박 대통령 지지도는 상승추세다. 국정원 댓글사건과 비선라인 권력암투, 세월호 참사, 메르스 파동 등 심각한 국정위기 속에서도 박 대통령 지지율은 40%대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김종욱 동국대 연구교수는 “대통령의 사적인 욕망(박정희 역사 회복)을 파악한 관료들의 충성경쟁”이라고 규정했다.
박 대통령의 권위적 리더십도 문제다. 소통하고 조정하는 리더십이 아닌 ‘불감’ 리더십은 임기 내내 독선을 낳고 있다. 김 교수는 “박근혜 정부는 대통령의 독선적 리더십에 기대 자신들의 이익과 이념을 투사하는 정권”이라고 말했다.
이들의 역사적 특성도 무시할 수 없다. 박 대통령 주변엔 보수우익적 관점을 유지해온 인사들이 대부분이다. 박 대통령이 누구를 중용하든 친일사관과 반북 메커니즘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이런 분위기라면 합리적 인사가 정부 요직에 발탁되더라도 경쟁에서 도태될 가능성이 높다.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 중용은 시사점이 적지 않다. 많은 전문가들은 당시 김 전 실장의 등장을 두고 “박근혜 정부는 박 대통령을 정점으로 한 30년 만의 보수대연합”이라는 데 공감대를 이뤘다. 70대 위주의 관료집단과 군, 검찰은 보수대연합의 주축세력이다.
# 지지층 결집, 그리고 갈등 덮기
박근혜 정부 인사들의 이념전은 향후 정치일정과 무관치 않다. 2016년 총선, 2017년 대선, 2018년 지방선거를 염두에 둔 행보에 가깝다. 우선 지지층 결집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이념적 극단 현상을 만들고 지지층을 최대한 동원하려는 전략이다. 이념적 대립은 중도층의 정치혐오를 확산시킨다.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말이 시사하듯 지지층 동원 전략은 상대적으로 여권이 유리하다. 일부 여론조사에서 실제 드러나고 있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가 지난 12~14일 전국 19세 이상 유권자 1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정당지지도 조사에서 여야 지지층 결집이 이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새누리당은 43.0%로 전주 대비 1.3%포인트 상승했고, 새정치민주연합은 2.0%포인트 상승한 27.7%였다.
여권 지지층 결집 전략은 야권을 위축시키는 효과로 이어진다. 신진욱 교수는 “현재 경제문제, 노동개혁, 정치개혁 등 모든 개혁이슈를 이념전이 빨아들이고 있다. 박근혜 정부가 미래지향적 의제를 선도하는 공간이 생기게 된다”고 지적했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갈등을 덮으려는 의도라 할 수 있다. 박근혜 정부는 주요 현안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친재벌·반서민 경제, 미국과 중국의 늪에 빠진 외교, ‘만인의 투쟁’이 된 교육, 노동개악이 된 노동개혁에다 정치권도 공천 갈등이 본격화하는 정국이다. 여야 정쟁만으론 갈등을 덮을 수 없는 상황이다. 이때 이념전은 유효한 수단이다. 이승원 교수는 “반탁운동 이후 반공주의가 득세하기 시작한 것처럼 이념전의 승자는 늘 보수우익이었다. 정책 제시보다 이념전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구심력 강한 박근혜 정부 보수
박근혜 정부의 보수우익적 성격은 과거와 차별화되는 특징이 있다. 한국 반공보수의 주류다.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반공과 냉전적 가치를 강조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한국적 민주주의 개념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고 분석했다. 한국적 민주주의는 국가주의를 말한다.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획일화를 좇는 게 국가에 이롭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시장과 기업 중심의 보수다.
보수의 주류인 만큼 ‘가용 자원’도 많고 ‘가용 범위’도 넓다. 종북(빨갱이 낙인)담론만 해도 수시로 국내정치에 악용한다. 박근혜 정부의 이념전은 진영 대결을 넘어서 전 국민적 대결로 범위를 넓힌다. 이승원 교수는 “이명박 정부 때 천안함 침몰이나 연평해전 사건은 곧바로 친북과 반북을 요구하지만 교과서 국정화는 국정화 찬반에 대한 대답이 우선이지 친북이냐 반북이냐는 나중 문제”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반공보수의 적자라는 위상을 갖고 있다. 기존 보수정권에 견줘 구심력이 강하다. 자신의 이념과 지지층의 이해관계에 부합시키는 방식으로 개혁을 진행한다. 김윤철 교수는 “보수반공 체제를 구축하는 데 장애가 되는 세력을 쳐내는 방식으로 정권을 운영한다”고 말했다. 강자를 때리기보다 강자의 주변에서 특권을 누린 세력을 주로 타깃으로 삼는다. 정부개혁보다는 공무원연금 개혁을, 재벌개혁보다는 노동개혁을 우선 내걸었다.
하지만 ‘박근혜 신화’는 성공을 장담하긴 이르다. 조현연 한국정치연구회 연구위원은 “박근혜 정부의 보수는 민주주의 속에서 국가주의라는 변형적 흐름을 선택했다. 이 자체가 퇴행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