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7. 30. 11:54ㆍsensitivity
토마 피케티의 『자본과 이데올로기』 중에서 나오는 내용...‘브라만 좌파’, 피케티는 선거 좌파는 노동자의 정당에서 고학력자들의 정당이 되었고, 그들의 이름을 ‘브라만 좌파’라고 부르자고 제안한다. 또한 피케티는 이들의 이데올로기를 ‘공화주의적 엘리트주의(élitisme républicain)’라고 규정한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보다 새로운 고학력 특권계급과 그들의 자녀들에게 더 관심을 갖는다는 가설을 제시한다. 그들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것은 “세습특권과 무관한, 기회의 평등과 능력에 근거하고 공익에 복무하는 정당한 엘리트주의”라는 자기 확신이며, 좌파정당은 이 새로운 ‘브라만 좌파’의 최상의 변호인이자 보증인이 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현대 유럽 사민주의 정당의 문제점을 지적한 내용이다. 소제목이 “‘브라만 좌파’와 사회정의‧교육정의라는 문제”라는 부분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생각나는 단어는 ‘강남좌파’ ‘감성좌파’ 같은 것들이다. 다수의 삶에 대한 공감과 실천보다는 자신의 이데올로기가 더 중요하며(삶에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땀과 노력의 경험보다는 평론과 지식 자랑이 더 중요하며(그렇다고 대단히 열심히 공부하는 것도 아니다), 자신의 이익을 침해하는 것들과는 격렬하게 싸우고(매우 무서울 정도로 전선을 확실히 긋는다), 사회정의를 외치지만 자신의 허물에 대해서는 능력과 지위의 방패로 감춘다.
어쩌면 신자유주의경제시대가 낳은 선거좌파의 동시대적 추세일까? 꼰대로 불리는 이들이 젊은 시절, 대학생이라는 미안함으로 노동자와 연대했고, 평등하고 자유로운 새로운 세상에서 우리 모두의 공동체를 위해 투쟁했다. 그런데 그렇게 흘러간 20년의 ‘세월 옷’이 너무 화려하게 변한 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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